|
선생은 일제의 총칼에 의해 국권이 이미 침탈된 국내에서 사방에 주둔하고 있는 적들의 총구를 순간순간 감지하며 8년 동안 의병활동을 하였다. 의롭고 청렴하였으며, 담대하고 기민한 그 활동으로 민중은 감동을 받고, 적들은 당혹한 얼굴로 몸서리를 쳤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토의 곳곳에서 의병들이 기를 꽂은 창을 들고 일어섰으나 선생은 그 창들이 모두 꺾인 시간에도 마지막까지 불굴의 항전을 계속하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순국의 길로 걸어갔다.
채응언(蔡應彦, 1883~1915.11.4) 선생은 이름이나 생몰연대조차 불분명한 편이다. 선생의 이름은 당시 신문에 ‘채응원(蔡應元)’·‘채응경(蔡應慶)’, 다른 자료에서는 ‘채도석(蔡道錫)’ 등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신문의 경우에는 잘못 알려지거나 오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후자인 ‘채도석’은 그렇게 불려진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판결문」과 선생이 남긴 격문에 의하면 ‘채응언’이라는 이름이 정확하다고 하겠다. 이름뿐만 아니라 생몰시기도 잘못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선생이 언제 태어났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1915년 체포된 직후에 보도된 《매일신보》에는 32세로 적혀 있거나, 33세로 적혀 있기도 하다. 33세는 한국식, 32세는 일본식 연령 계산법으로 이해되므로, 선생은 1883년에 출생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제 선생의 출생지를 정리해보아야 할 것 같다. 판결문에 따르면 선생의 주소는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능중면(陵中面) 고익리(高益里)로 되어 있다. 선생이 체포된 지역 역시 성천군이었으므로 이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생의 출생지는 기록마다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예컨대 함남 안변군 영풍사(永豊社)·함남 고원군 산곡면(山谷面)·강원도 통천군 자산(慈山)·평남 순천군(順川郡)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짐작컨대 선생이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지역이 출생지로 잘못 알려지지 않았나 한다. 선생은 평남 성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황해도 곡산군 미야골로 이사했다고 한다.
그러면 선생이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는 무엇을 했을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선생은 해산군인 출신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반면에 일제 군경 자료에서는 ‘파락호(破落戶)의 두목으로서 도박(賭博)을 전업’했다든가, ‘농가에서 태어나 협객(俠客)으로 도처를 배회’했다거나 또는 ‘원래 농부(農夫)’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매일신보》 1914년 12월 2일자 「적괴채응언」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은 일제에 의해 편파적이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위의 내용 중에 기운이 남보다 건장하고 위인이 총명한데다 항상 의협한 기운이 있는 일을 하였다는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선생이 성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곡산으로 이사하여 화전농사를 지었다는 점을 이러한 점과 함께 고려한다면 선생을 “협객적 농민(俠客的 農民)”으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 선생의 활동을 추론한다면 평남 성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한 선생은 건장하고 용기 있는 가난한 농민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향리에서 생활고에 찌든 그와 비슷한 처지의 빈농들의 이해를 대변하다가 고향을 등지게 되었으며 황해도 곡산으로 이주하여 화전농을 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나마 선생은 실의와 좌절의 나날을 보냈을 것이나, 빈농의 처지를 마냥 비관하지만 않고 불의를 좌시하지 않은 ‘협객적 농민’으로 성장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로써 보건대, 선생이 해산군인 출신이라는 주장은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체포된 직후에 보도된 신문기사 중 ‘조선보병대 군조’출신이라는 내용에 근거하여 ‘육군 보병 부교(副校)’로 알려지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으나, 선생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선 군대의 정교(正校)’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요컨대 선생은 의병에 투신하기 전 비록 생활고에 허덕이는 빈농출신이었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농민들이 지주들로부터 가혹하게 수탈당하면 그것을 해결해주는 등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협객적 농민’이었다고 판단된다.
선생이 태어나 활동하던 무렵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10세를 전후한 시기이긴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었으며, 한반도를 둘러싸고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이 날이 갈수록 노골화하자, 선생은 의병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 같다. 특히 을사조약 및 정미조약이 늑결되자, 매국대신에 대한 분노가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난신적자가 횡행하여 권세를 희롱하므로 송병준(宋秉畯)·이완용(李完用)과 같은 7적(賊)·5귀(鬼)의 살점은 2천만 동포가 모두 씹어 먹고 싶어 한다’며 격문에서 격정적으로 토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의병을 일으킬만한 학문적 성망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선생은 다른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활동하기로 한 것 같다.
그러면 선생이 의병에 투신한 시기는 언제일까. 아마도 1907년 중반을 전후한 시기로 짐작된다. 체포된 직후의 신문기사에 ‘군대해산이 된 후 폭도의 틈에 들어간 점’이나, ‘채는 명치 40년(1907)경 폭도의 거괴 김태묵(金泰黙)의 부하가 되어 이래 강원, 함남, 황해, 평남 각도를 횡행’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와는 달리 「판결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위의 인용문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선생이 1907년 음력 7월경 의병에 투신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선생이 최초로 가담한 의병부대를 누가 이끌었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태묵 의병부대일 수도 있고, 혹은 서태순 의병부대나 전병무 의병부대일 수도 있다. 특히 「판결문」에는 선생이 투신한 내용이 전혀 다르게 서술되어 있어서 당황스럽다. 여기서는 일단 「판결문」에 의거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서태순 또는 전병무와 관련된 내용이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서태순 혹은 전병무로 지칭되는 의병부대의 부하로 투신하였으나, 선생이 속한 의병장이 황해도 곡산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 중 전사하고 말았다.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의병은 대체로 유생들이 일으켰는데, 그들은 군사상의 지식은 없으나 적개심만은 왕성하였다고 한다. 서태순 역시 그러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서태순은 유인석으로부터 받은 군율(軍律, 이른바 의병변수규칙) 등 제반 서류를 받아 활동하였는데, 그러한 문서들은 서태순의 순국 이후 의병장을 승계한 선생에게 인계되었다.
그리고 전병무의 권유로 의병에 가담하여 처음에는 잡역을 맡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모장(召募將)을 맡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선생이 가담한 의병부대에서 어떠한 임무를 수행했는지를 알려준다. 즉, 선생은 처음에는 가난한 농민의 한사람으로 인식되었으나 곧바로 능력을 인정받아 포수 등을 모집하는 소모장의 직책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의병장이 교전 중 전사하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선생은 유인석 계열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처음에는 잡역으로 활동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소모장으로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이 격문에서 유인석의 거의를 특별히 언급하고 재판과정에서도 유인석의 거의를 높이 평가한 점은 그러한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선생 역시 유인석의 의병봉기를 적극 지지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김태묵은 김진묵(金溱黙)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데, 김진묵은 왕회종(王會鍾)과 더불어 의병장 허위(許蔿)를 경기도 삭녕(朔寧)으로 초빙하여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했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일제측 기록에도 자주 나오는데, 그는 주로 경기 북부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의병장이었으므로, 선생과도 일정한 관련 속에서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선생이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언제였는지 궁금하다. 이 점 역시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그저 유추하는데 지나지 않지만 1908년 봄을 전후한 시기에 독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생이 남긴 거의 유일한 격문이 그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이 자료는 ‘대한보국창의장(大韓輔國倡義將)’으로 시작하여 ‘진동본진분파대장 채응언 인(鎭東本陣分派大將 蔡應彦 印)’으로 끝나 있다. 이 글에서 ‘대한보국창의장’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불분명하다. 선생 자신은 ‘진동본진분파대장’을 표방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보국창의장’은 선생이 투신한 서태순 의병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선생이 서태순 의병장을 계승하였으므로 자신이 서태순 의병장이 작성한 격문을 다소 수정하여 선생의 이름으로 발표하되 앞부분에는 서태순 의병장의 직함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판결문에는 의병장 유인석이 서태순에게 전달한 군율이 있었다. 그러한 군율 15개조가 이 격문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다. 그것을 번역하여 실으면 아래와 같다.
위와 같은 군율은 의병이 지켜야 할 원칙을 정하여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의병부대의 기강을 세우는데 1차적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을 것이다.
선생은 의병부대를 재편하면서 격문을 통해 원수를 갚아 3천리 강토를 회복하자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도탄에 빠진 인민을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동포들이 함께 창의하는 나라가 되자고 호소하였다. 다시 말해 보국구민(輔國救民)을 표방한 정예의 의병부대로 거듭날 것임을 천명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선생은 ‘결코 무단히 인명 재산을 탈취할 리가 없고 악의악식(惡衣惡食)을 달게 여기고 부하와 침식을 함께 하며 간 곳마다 털끝만치도 범한 바가 없었다.’고 자부하였다. 그런 때문인지 선생의 의병부대에는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판결문」에 ‘각처의 인사들로부터 군자금을 스스로 원하고 기부할 것을 간청하는 것이므로, 일일이 조사하여 수령하고 관계없는 것은 군자로 충당하고 온당치 않은 재물은 사절하나, 불의의 재산을 가진 자에게 가서 청구하여 빈민에게 널리 나누어 주고, 피고는 일푼 일리도 착복한 사실이 없다는 것은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바’라고 밝힌 점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군자금은 기부를 받기도 하고, 악질부호의 재산을 징발하여 사용한 경우도 있었으며, 징발한 군수품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준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선생 역시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는데, 1915년 7월 5일 평남 성천군 영천면(靈泉面) 처인리(處仁里)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던 중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그 밖에도 이들은 마을주민들로부터 짚신이나 음식 등을 제공받기도 하였다.
그러면 선생의 의병부대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선생이 3-4백명을 거느린 것으로 알려진 바 있으며, 이들이 황해도에서 이진룡(李鎭龍)·한정만(韓貞萬)·김정환(金貞煥)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할 때에는 약 5백명의 군세를 이룬 것으로 파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체로는 최대 100명 내외의 규모였으며, 평상시에는 50명 내외였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선생의 부하로 알려진 인물들은 그리 많지 않다. 판결문과 일제측 기록에 나타난 것을 정리해보면 전상모(全相模, 혹은 金相模)·김언세(金彦世)·박용집(朴龍執)·김복록(金福錄)·권윤필(權潤弼)·권순필(權順弼)·김광섭(金光燮)·조병화(趙秉化)·박초시(朴初試)·김총각(金總角)·박향원(朴享元 혹은 朴亨元)·강석필(姜錫弼)·임병린(林炳麟)·안광조(安光祚) 등 약 15명 정도가 해당된다. 이들은 대부분 포수이거나 가난한 청장년 농민층으로서 대부분 선생이 의병활동을 벌이던 지역의 주민들이었다. 그리고 선생이 자신의 직함에 '분파대장(分派大將)'이라 표방하였듯이 의병 규모가 확대되면 부대를 나누는 소수정예주의를 지향했던 것 같다. 이는 유격전술의 운용에 적당한 규모를 유지할 목적과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는 데에도 적은 규모로 활동하는 것이 보다 유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활동이 워낙 민첩했기 때문에 일제는 ‘은현출몰이 지극히 교묘하여 수비대 및 헌병의 엄밀한 수색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토로한 바 있으며,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투입한 비용이 10만원을 상회하였다고 한다. 선생을 비롯한 황해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1911년 9월 하순부터 한달 이상 보병 제2사단을 투입하여 주도면밀한 진압작전을 펼쳤음에도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이들이 소수정예의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선생의 의병부대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들은 반일투쟁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이들은 일제를 몰아내고, 의병의 무장을 강화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활동지역 내의 일제 군경기관을 공격하였다. 예를 들면 1908년에는 황해도 안평순사주재소(安平巡査駐在所) 공격을 시작으로 수안헌병파견소(遂安憲兵派遣所)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1910년 4월 28일 함남 안변군 영풍사 마전동순사주재소(馬轉洞巡査駐在所)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를 총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으며, 전주(電柱) 23본을 절단하는 등 일제의 통신시설 파괴에도 앞장섰다. 6월 13일 황해도 선암헌병분견소(仙岩憲兵分遣所)를 기습하여 일본인 헌병과 헌병보조원을 사살하고 30년식 보병총 13정, 탄환 5800발을 노획하였다. 이어 6월 22일에는 강원도 남산역·고산역 헌병분견소의 연합토벌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일제 헌병대는 2,500발의 탄약을 소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헌병보조원 2명과 일본인 헌병 1명이 피살되는 등 참패하였다.
일제에 강점된 후에도 선생의 의병부대의 항일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1910년 9월에 강원도 이천군 광북수비대를 공격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거두었다. 「판결문」에서 선생은 일제가 병합을 했기 때문에 의병투쟁을 그치지 아니하고 더욱 진력하여 국권을 회복할 생각이었음을 피력하고 있다. 한편, 선생은 항일투쟁을 전개할 때 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인근에서 활동중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작전하였다. 선생은 대체로 진동창의장(鎭東倡義將)을 자칭한 강두필(姜斗弼)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일제의 강점 후에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일투쟁에 불굴의 투지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선생의 의병활동은 반일투쟁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병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군자금이나 군수품 조달에 노력하였다. 또한, 일제와 내통한 자나 밀고한 세력인 일진회원을 처단하거나 밀고한 주민들의 가옥에 방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에 속한 의병을 불문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의병들도 가차없이 처벌하였다. 「판결문」에서 그러한 활동에 대하여 선생은 국가대사를 그르치지 않고 후환을 없애기 위한 것이며, 사사로운 원한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활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주목된다.
위의 인용문에 보이듯이, 선생의 의병부대는 평남 양덕군 화촌면의 어느 사립학교를 방문하였다. 이들은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군사훈련을 관람시키고, 자신들은 학생들의 체조를 구경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라 하겠다. 당시 계몽운동가들은 전국에 걸쳐 신식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추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특히 평안도 지역의 계몽운동가들이 교육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교련과 체조를 강조하였다. 이는,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의병운동가들과 입장이 달라 서로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의병부대는 신식학교의 학생들에게 의병의 군사훈련을 보여주고, 자신들은 학생들의 체조를 관람한 것이다. 의병계열은 계몽운동에서 추진하는 신식교육을, 계몽계열은 의병의 군사교육을 서로 인정해준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지만, 가장 강력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선생의 의병부대와 가장 대표적인 계몽운동을 추진하는 평안도의 교육운동세력과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와 같이 선생의 의병부대는 계몽운동 계열에서 추진하는 신교육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자신들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하고 우리 동포를 구하기 위해 의병투쟁에 나섰음을 강조하면서 주민들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보국구민적(輔國救民的) 의병에 나섰음을 학생들에게 적극 홍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선생의 의병부대의 활동지역을 알아보고자 한다. 선생의 의병부대와 관련된 판결문이나 일제측 자료를 토대로 이들의 주된 활동지역을 정리해보면 강원도 이천, 함남 안변, 평남 성천, 황해도 곡산 등지였다. 그 가운데 이들의 근거지는 주로 황해도 곡산군의 백년산(百年山) 일대를 이용하였다. 이들이 평남·강원·황해·함경도 등 도계(道界)를 넘나들며 활동한 배경은 아마도 군대와 경찰의 관할구역을 활용하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무기로 무장한 후 소규모의 정예 의병으로 구성된 이들이 도계를 넘나들며 게릴라전술을 구사하였기 때문에 일제 군경은 이들을 진압하는데 애로사항이 적지 않았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1910년 이후에도 매년에 2-3회 정도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하였다. 또한 이들은 1913년 6월에는 황해도 곡산군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헌병과 보조원을 처단하고 총과 탄약을 노획하였으며, 1914년에도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평원읍내에 나타났다. 이와 같이 선생은 황해·강원·함남·평남지역의 접경지대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일제 역시 군경의 진압작전뿐만 아니라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선생을 체포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일제 측은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1914년 11월 12일자로 일제 경찰이 밝힌 바에 의하면 선생을 체포하여 경찰서에 인계하면 현상금 280원 전액을 지급하며, 선생의 소재처를 알려주거나 체포에 공을 세운 자에게도 공로의 크고 작음에 따라 현상금을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현상금을 내건지 반년이 지났지만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15년 7월 5일 선생은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평남 성천군 영천면 처인리의 부호를 찾아갔다가 성천분대 요파출장소(了坡出張所) 일본인 헌병 전중롱웅(田中瀧雄)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일본 헌병과 사투를 벌이다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된 것이다. 당시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1914년 9월부터 평양헌병대 중좌 대교(大橋) 헌병대장의 직속으로 1개 수색반을 헌병상등병 1명, 보조원 4명으로 편성하여 5개의 수색반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과는 거의 없는데다 예산의 부족으로 1915년 4월에는 1개 수색반을 헌병 상등병 1명, 보조원 2명으로 축소 편성하여 3개 반을 운용하는 중이었다. 이들을 선생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성천군 요파·귀인·곡창 등 세출장소에 배속시키는 한편, 현상금도 내걸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으로부터 군자금을 요청 받은 부호는 자신의 급박한 상황을 동네 주민에게 알렸고, 그 주민이 헌병출장소에 밀고함으로써 헌병대 수색반이 즉시 출동하여 선생을 체포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생은 유인석 계열의 의병부대에 잡역으로 출발하여 소모장을 거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지휘하는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결국 선생은 집요한 일제의 추적으로 1907년 음력 7월부터 1915년 7월 5일까지 만 8년 동안의 의병활동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아마도 선생이 가장 오랜 기간 투쟁한 의병장 중의 1인이 아닐까 한다.
선생은 체포될 당시 전중(田中) 헌병에게 ‘매우 애를 썼구나’라고 말하는 등 대담하게 행동하였다. 평남 성천에 일시 구금되었던 선생은 7월 8일 평양헌병대 본부로 이송되었다. 당시의 상황이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인용문에 보이듯이 평양 헌병대로 이송되자 시민들의 관심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격투과정에서 얼굴에 상처가 생겼지만 담대하고 용기 있는 인물로서 이미 죽음을 초월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선생은 7월 9일 오후까지 음식을 거부하다가 이튿날 음료만 마셨는데, 일제는 신속하게 신문(訊問)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그 후 단식을 푼 선생은 하루에 2회 식사를 하며 일제의 조사를 받았으나 동료에 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선생은 일제의 조사를 받던 초기에는 비협조적이었으나 7월 중순부터 약간 누그러진 듯하다. 헌병대의 조사를 받은 후 그에 관한 서류는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고, 선생 역시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선생의 부하였던 임병린(林炳麟) 역시 조사를 마치고 24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보내졌다. 한편, 선생이 은닉하고 있던 무기는 총 21정, 칼 3자루, 차는 칼 11자루, 탄환 498발 등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선생의 의병활동에 연루되어 14명이 피체되었는데, 이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로는 총 17정, 탄약 130발, 기타 수백 점이나 되었다. 이는 선생의 의병부대가 상당한 무장력을 갖추고 반일투쟁에 나섰음을 의미한다.
선생과 연루자 9명에 대한 공판이 8월 28일부터 진행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는데, 선생은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며, 재판과정에서 선생은 매우 명석하고 자신만만하게 답변하였다. 선생은 자신을 의적(義賊)처럼 표현하였는데, 재판을 참관한 일인과 한국인을 합하여 5백명이 넘었다고 한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선생은 곧 공소하였다. 선생은 재판과정에서 살인·강도죄를 적용 받는 것에 불복하였으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을 기도하였다. 9월 초순 선생은 간수가 없는 틈을 타 자신의 옷을 찢어 새끼줄을 꼬아 감방 대들보에 목을 매려다가 간수에게 발견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선생에 대한 재판이 9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열렸는데, 이때도 방청자가 매우 많았다. 선생은 시종일관 살인·강도죄를 적용하는 점에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평양복심법원 역시 선생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형을 확정하였다. 선생은 다시 상고하여 강도·살인죄명으로 교수대에서 죽기는 싫으므로 의적의 명분으로 사형에 처해달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10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결정이 내려지자 선생은 11월 4일 오후 2시 평양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매일신보》 1915년 11월 6일자 「교수대상(絞首臺上)의 채응언(蔡應彦)」에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전해준다.
이와 같이 선생은 사형을 당하기 직전까지도 태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으며, 일제가 적용한 강도·살인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일제의 사법권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제의 지배정책을 거부한 것이라 하겠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채응언 [蔡應彦] - 가장 긴 의병 활동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