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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비화] 국보제107호, 백자철사포도문호
글 : 제이풍수사
글 작성일 : 2023. 3. 17.
백자철사포도문항아리 : 17세기 후반, 궁중 요에서 만들어진 걸작으로 철사의 포도덩굴이 그지없이 멋지고 알맞게 자리잡았다. 일제 때에 시미즈가 소장하던 물건으로, 권명근을 거져 장택상에게 옮아갔고, 장규서의 노력으로 1천 5백만 환에 이화 여대에 들어가 현재에 이른다.
국보 제107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1.죽음을 부른, 백자철사포도문호
백자철사포도문호(白磁鐵砂葡萄文壺, 국보 제107호), 이 백자항아리는 높이가 53.8센티미터로 당당한 크기며, 17세기 후반에 궁중의 요(窯)에서 만들어진 걸작 중의 걸작이다. 알맞게 솟은 입에 어깨는 둥글고 풍요로우며 허리 아래로는 힘차면서도 대담하게 좁아져 아랫도리의 맵시가 한층 돋보인다. 또 철사(鐵砂)의 포도 덩굴은 멋지게 뻗었고, 넓적한 포도 잎 사이로는 붉은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다. 포도 덩굴이 뻗어 나간 자취부터 순리에 따랐고, 그림이 차지한 공간도 더 없이 적절하다. 마치 풍만한 여인의 가슴에 잘 익은 포도와 덩굴을 그린 듯, 순백의 순결히 살아 숨쉬는 듯하다. 그림을 그린 필체 또한 능숙한데, 알맞은 불 온도에 초벌구이를 해서 선비의 고절한 문기(文氣)가 절절 흐른다.
2.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점지하던가
시미즈 고지(淸水幸次), 그는 일제 때에 조선철도(주)의 전무로 근무했던 일본인으로 한국의 도자기를 무척이나 좋아해 상당수의 백자와 청자를 애장한 인물이다. 비록 수량은 적었지만 하나같이 격이 높은 것들이었다. 그런 그에게 마치 부인의 속살마냥 천하의 지인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백자가 있었으니, 바로 백자철화 포도문항아리였다.
그는 1916년부터 이 항아리를 은밀하게 소장하였고, 만약 전시회나 경매장에 출품했다면 틀림없이 당시 최고의 명예인 보물 지정은 너끈히 받았을 물건이다. 그러나 행여 부정이라도 탈까 봐 혼자서만 감상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러나 1945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그는 졸지에 패전국의 포로가 되고, 남한에는 곧바로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그 역시 모든 재산을 고스란히 남겨 둔 채 빈 몸으로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군정령에 의해 보따리의 크기를 제한받자(륙색 한 개), 이 항아리 역시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자 시미즈는 마치 사랑하는 자식을 사지(死地)에 내버려두고 가는 사람처럼 항아리를 만지고 또 만지며 한지로 겹겹이 포장했다. 나중에는 둥그런 종이 뭉텅이처럼 보였다. 어쩌다가 백자를 내버려두고 가는 슬픔이 그 동안 누렸던 영화만큼이나 혹독하게 밀려와 목까지 잠겼다. 시미즈는 부인을 바라보며 애원조로 말했다.
“생각한 것이 있소. 우리 물건을 다 주고 이것만은 잘 간수해 달라고 부탁합시다. 세상이 변해 다시 올 수 있으면 그 때….”
부인 역시 굵은 눈물을 거침없이 떨어뜨리며 앞으로 살길을 걱정하였다.
“김 상말인가요?”
“그래요. 그 사람은 오랫동안 우리 집안 일을 돌봐 주고 또 순진하니 부탁을 들어줄 것이오.”
“흑, 흑. 여보!”
다음 날, 종이 뭉텅이가 된 백자항아리를 가운데 두고 시미즈는 김씨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김 상, 정말 부탁해요. 이 물건만큼은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꼭 소중히 보관해 주시오. 예?”
그토록 거만하고 당당해 보이던 주인이 눈물까지 뿌리는 통에 김씨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시미즈는 그렇게 일본으로 돌아갔고, 또 다시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이 두고 간 일급의 명품들이 심심찮게 시중에 나돌아 골동계는 화창한 붐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권명근(權明根)의 골동품 가게만은 늘 파리만 날아다녔다. 다른 사람이 한 건의 거래로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괜스레 울화통이 터졌다. 한 번도 번듯한 물건을 잡아 보지 못한 그였다. 자기에게만 운이 비껴 간다고 생각했다. 이 날도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다 지쳐 일찍이 가게 문을 닫고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두 젊은이가 가게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섰다.
“저, 이만큼 큰 항아리도 사요?”
두 청년이 두 팔을 활짝 펴서 큰 원을 그려 보였다. 권명근은 어떤 직감에 금세 소름이 끼치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 대어(大魚)다.
“사지요. 물건은 어디 있어요?”
“기다리세요. 우리가 다시 가서 가져올게요.”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그 청년은 시미즈가 물건을 맡긴 김씨의 아들이요, 다른 청년은 그의 매부였다.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한 그 놈은 방탕한 기질에 도박까지 즐겼다. 자연히 돈이 떨어지자 아버지를 졸라댔다. 김씨 또한 그런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 때 눈에 띈 것이 다락에 수북이 쌓인 도자기였다. 몰래 한두 점 파니, 신기하게도 큰돈이 생겼다. 돈이 생기자 그 놈은 이제 기생 외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안 김씨는 시미즈가 신신 부탁한 항아리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며 못을 박았다.
시미즈가 남긴 도자기는 일 년이 채 못 가 그 놈들이 술과 계집을 사는데 모두 탕진되고, 이제는 절대로 손대지 말라던 백자 항아리만 남았다. 얼마 후 리어카가 가게 앞으로 들이닥쳤다. 권명근은 숨이 막혔다. 진짜다! 상자를 가게 안으로 옮긴 뒤 끈을 풀고 항아리를 꺼냈다. 커다란 종이 뭉치였다. 백지가 겹겹이 발라 있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의 윤곽만 보고도 권명근은 숨이 막히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이거 어디서 난 것이요?”
혹시 장물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겁이 덜컥 났다. 젊은이의 차림새로 보아 아직 거물급 골동품을 다루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저씨, 걱정 말아요. 이거 우리 집에 있던 거여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대답이다. 말에 자신이 차 있자, 권명근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혹시 도자기에 흠이라도 날까 봐 정성을 다해 한지를 한 올 한 올 뜯어냈다.
“아저씨, 이 물건은 왜놈이 우리 집에 놔두고 간 것이니 전혀 걱정하지 말아요.”
“왜놈이! 누구요?”
“왜 철도국에 근무했던 시미즈라는 작자지요.”
아!
권명근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몇 번인가 낯선 청년이 물건을 야금야금 물어다 판다는 소문이 골동계에 돌았다. 모두 격이 높은 일급품이어서 골동상들이 군침을 흘린다는 것이다. 면도칼로 두껍게 바른 한지를 한 장 한 장 오려 내었다. 감이 잡히자 흥분으로 손까지 떨렸다. 마치 하늘에서 금덩이가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땀을 뻘뻘 흘려 가며 백지를 짜개고 벗겨 낸 뒤에 마치 어린 아이 목욕시키듯 정성껏 물로 닦아 냈다. 그러자 그 속에는 아직 얘기도 들어보지 못한 천하의 명품이 마치 수줍은 색시 마냥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요? 대단하죠?”
아…!
꿈이 아닌가 살을 꼬집고 눈을 비벼 봐도 버젓이 생시였다. 의심할 여지도 없는 눈이 부시도록 하얀 진품이었다. 귀신에 홀린 듯이 권씨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자, 두 놈은 즉시 대단한 물건으로 알아차리고 의기가 양양했다. 그러자 권명근도 재빨리 장삿속으로 돌아와 냉정을 되찾았다.
“그래, 얼마에 팔겠소?”
“오만 원이요.”
한 청년이 힘껏 불렀다. 당시 7칸짜리 기와집이 대략 2만 원정도 했다. 기와집 두 채가 약간 넘는 돈이었다. 그래도 이건 돈벼락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몇 십 만원에 내 놓아도 누구를 골라잡을지 모르는 물건이었다.
“무슨 소리요? 지금은 왜놈들이 내놓은 도자기들이 지천이요. 2만 원이면 많이 주는 것이요.”
“무슨 소리를? 이보다 못한 것도 2만 원을 넘게 받았소.”
한 놈이 전에 판 도자기를 빗대어 대들었다.
“모르시는 말씀. 도자기는 모양이 희귀해야 비싸지. 이런 항아리는 많아요. 자 보세요.”
두 청년은 찔끔했다. 가게 안을 둘러보니 비슷하게 생긴 항아리가 여럿 있었다. 권명근은 예리하게 두 청년을 농락했다.
“어떡하겠소? 정히 못 믿겠다면 다른 데로 가 보시고.”
“아니오. 팔겠어요. 5천 원만 더 줘요?”
고민이 아니라 흥분을 진정시키려고 한참 뜸을 드린 권명근이 입을 열었다.
“좋수다!”
두 청년은 얼굴이 금세 환해져 서로를 바라보며 히히덕거렸다. 마음은 벌써 기생집으로 달려가고 있던 모양이다.
“내일 다시 오시오. 거금이라 돈을 마련하려면 시간이 걸려요.”
권명근은 그날 밤 부랴부랴 돈을 끌어 모아 다음 날 6천 원을 주고, 살던 기와집까지 팔아 잔금을 치렀다. 자기는 단칸 월세방으로 옮아 앉았다. 하지만 마음은 하늘로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점지해 준다고 했던가?
3.희망만큼이나 질긴 집념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킨 뒤, 권명근은 백자항아리를 어디에다 팔까를 생각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 중에 보물이며 금방이라도 국보로 지정될 것만 같았다. 팔아 없앴던 기와집은 문제가 아니었다. 금방 수십만 원이 생겨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가게도 넓힐 수 있었다. 한 점 가지고 승부를 거는 것이 이 세계이다. 사람에게는 일생을 두고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는데, 자기에게는 한꺼번에 겹쳐서 온 것만 같았다.
“아, 누구에게 팔지?”
가게문은 아예 걸어 잠근 채, 며칠을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장고 끝에 악수’라고 그는 일생을 두고 가장 가혹한 곳을 찾아내고 말았다.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때 생각난 사람이 ‘메다마’였다. ‘눈깔’이란 별명을 가진 한영호(韓永鎬)은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 1893~1969)의 심복 거간으로 그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장택상, 당시는 아직 대한민국이 수립(1948년)되기 전으로 그는 수도경찰청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었다. 일제 때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서화, 골동을 즐겨 수집하더니 세상이 바뀌자 정치가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래, 큰 물건은 거물에게 팔아야 제격이지.”
권명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회를 잘 이용하면 당당한 빽도 생기고 또 골동계의 우두머리까지 노려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자 이 천하의 백자 항아리는 한영호를 통해 곧 삼륜차에 실려 경찰청장실로 들어갔다. 뒤따라 간 권명근은 큼직한 책상 너머로 거만스럽게 앉아 있는 장택상에게 허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청장님?”
“어서 오시오. 좋은 물건을 입수했네요.”
항아리를 바라보는 장택상의 눈동자는 황홀감에 싸여 완전히 초점을 잃고 있었다. 자기가 소장하던 백자들과도 견주어 보았다. 그러나 도대체 비교가 되지 않는 희대의 거물이었다.
“그래, 얼마면?”
“한 이십만 원은….”
“허, 알겠소. 집에 가서 기다리시오. 곧 돈을 보내리다.”
대답은 더없이 시원했고, 오히려 깊은 감사의 빛까지 역력했다. 권명근은 휘파람을 불었다. 다가올 장미빛 인생을 생각하면 마치 구름 위를 걸어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언제 돈이 올까 하며 애간장을 태우는데, 갑자기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권명근은 이유도 모른 채 종로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 새끼야, 빨리 불지 못해?”
형사의 거친 손이 권명근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무슨 일이요? 나는 정당하게 돈을 주고 샀단 말이요.”
억장이 무너지듯 분하고 억울해 악을 썼다. 그 때 옆에는 항아리를 판 두 청년이 심하게 구타를 당한 채 엎드려 있었다. 권명근은 기겁을 했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물건은 저 청년의 집에…. 윽!”
발길질에 뺨에서 불이 나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억울해서 비명을 지르다가 자기도 모르게 기절했다. 희미하게 눈을 뜨니, 도대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감방 안은 흡사 먼 시간대로 유배당한 듯 머리까지 윙 하니 울려왔다.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억울해서 죽을 수는 없었다. 그 휘황찬란한 꿈을 두고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는가? 아니다. 뭔가 오해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기를 쓰고 생각에 잠겼던 그는 마침내 소리를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경솔했다. 어찌 떳떳치 못한 물건을 경찰청장의 코앞에 밀어 넣은 뒤 ‘날 잡아 잡수시오.’라고 했던가. 다른 골동상도 얼마든지 많은데 일을 당하고 보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동안 물건을 맡았던 김씨도 수차례 경찰서로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았다.
“김씨, 물건을 도둑 맞아서 얼마나 마음이 아파요?”
“예? 무슨 말씀을? 저는 시미즈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
“무슨 말이요. 당신의 물건을 놈들이 훔쳐다가 술 처먹었지 않아요?”
“그게, 그 놈은 바로 제 자식과 사위 놈입니다.”
“예? 뭐라고요. 그러면 김씨도 한 패로 간주되어 현행법상 도적으로….”.
“아이고, 선생님. 살려주세요.”
미리 짜 놓은 각본이었다. 김씨를 백자 항아리의 주인으로 간주하고, 그 아들이 저지른 거래는 원인 무효화시키려는 술책을 꾸몄다. 김씨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도 없어 살려 달라고만 애원했다.
“제발, 선생님. 어떻게 가족 모두가 징역을 갈 수 있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그럼, 내가 청장님을 만나 보게 해 줄 테니 직접 만나서 사정해 보시오.”
“예, 예. 알겠습니다. 은혜는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널찍한 집무실, 벌벌 떠는 김씨를 바라보던 장택상이 말했다.
“그럼 진짜 주인은 당신이니까, 당신이 나에게 백자항아리를 파는 것으로 하면 어때요.”
“예, 예.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김씨는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청장실을 물러 나왔다.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불러서 급히 다가갔다. 지장을 찍으라는 것이다. 물건을 양도한다는 증서였다. 지장을 찍자, 흰 봉투가 김씨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 온 김씨는 깜짝 놀랐다. 아들과 사위 놈이 벌써 돌아 와 잔뜩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었다. 방문을 잠그고 봉투를 연 김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금 5만 원이 들어 있었다. 권명근에게서 받은 돈이 2만 5천 원, 김씨가 받은 돈이 5만 원. 도합 7만 5천 원을 횡재한 것이다. 또 모든 거래는 합법적이라 전혀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억울한 것은 권명근이었다.
“그럼, 이 종이에 항아리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
“못해요. 나는 못해요.”
권명근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고개를 흔들어 댔다. 하지만 이십 여 일을 버틴 그가 결국은 포기 각서를 써 주고 풀려났다. 그 후로 권명근은 시름시름 앓더니, 나온 지 섣달도 채 못 되어 목매 달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권명근의 죽음을 부른 비운의 백자항아리는 합법적인 거래로 장택상의 소장으로 들어갔다. 세상은 그의 절대적 권력에 위압당해 누구 하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 후 절대적 위세를 떨치던 장택상도 마치 권명근의 원혼(寃魂)에 얽히기라도 하듯 국무총리로 앉아 있다가 몇 달이 못 가서 후루이찌 사건으로 물러났다. 그 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환도한 그는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해 평생 동지였던 이승만과 겨루었다. 그러나 낙선하고 말았다. 선거에서 패배하자, 사정이 매우 어려워졌다. 예나 지금이나 선거를 치르려면 돈을 쏟아 부어야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965년 장택상은 이 청자항아리를 팔려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내로라하는 골동 수집가가 장사동에 있던 그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행운은 장규서에게 돌아갔다.
장규서(蔣奎緖). 그는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을 도와 이대박물관의 전신인 필승각(必勝閣)을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처음부터 김활란과 인연을 맺어 고미술품을 수집하는 책임자로 활약했다.
“창랑 선생, 이 명품은 개인이 소장하기는 어려운 물건입니다. 이번 이화여대에서 박물관을 설립하면서 전시할 작품을 찾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학생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장규서가 이화여대에 백자항아리를 넘겨 달라고 애원했다.
“그래요! 하긴 나도 형편이 좋지 못합니다.”
장택상의 얼굴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가격은 김 박사와 협의하여 서운하게 대하지는 않겠습니다. 창랑 선생의 따님도 이화여대 학생이 될지 압니까?”
허물어지는 장택상의 의지를 잡아채고 장규서가 노련한 일침을 가했다. 그대로 적중했다. 결국 백자항아리는 박물관 기증을 전제로 필승각으로 넘어갔다. 일금 1천 5백만 환.
이 거금은 당시 고미술품 한 점의 값으로 유래가 없는 큰돈으로 일류 수장가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액수였다. 이화여대 신입생 1학기 등록금이 1만5천 원대였으니 학생 1천 명의 등록금이 들어간 셈이다. 현재 이 백자항아리의 추정 가격은 150억 원 이상을 보고 있다. 시미즈의 애환과 권명근의 한이 배인 이 천하의 명품은 그렇게 하여 이화여대박물관으로 들어갔고,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7호로 지정되어 이 민족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 후 장택상은 말년을 조용히 보냈는데, 젊었을 때에 누렸던 권력과 영화는 송두리째 날아가고 아끼던 고미술품까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전한다.
백자철화포도문호 : 조선 후기, 높이 30.8, 국보 제93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항아리는 작은 크기면서도 당당하다. 어깨에서 허리 부분에 걸쳐 능숙한 필치로 포도 덩굴을 그려 넣었다. 이화 여대의 백자철사포도문항아리와 더불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이다.
국보 제93호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참고: ①「월간 문화재」․이영섭․‘문화재계 비화’.②「한국 고미술」미술저널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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