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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53년전쯤 인 1968년도는 1.21사태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68.04.01), 12월엔
국민윤리와 정신적 기반을 확고히 한다는 취지하에
393자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고 우리는 그 때 중3 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69$이었고,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967~1971)을 달성하느라고, 전국민이 매진할 때
우린 일반고교를 갈 것인가 실업계고교를 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한 때 신도림역은 승차시 다음 번 차를 타야 하고
신도림역에 내릴 땐 한 구역 지나서 내려야 할 만큼 복잡했으나,
대성연탄이 이전하고, 驛舍(역사)가 초현대식으로 건설되는 바람에
“환승 지옥철역”이라는 달갑잖은 타이틀을 이별하게 되었다.
’인천‘이라는 특이한 글체는 인천광역시소유 지적재산권 이고,
오늘 우린 서부경남의 시골 중학교 동기가
10년만에 인천에서 만난다고 해서,
차질이 없도록 서울소재 동기에게 아래 메모를 주고 받았다.
“ 신도림역에선 평일 동인천(특급)행이
10:33출발,10:57출발행이 있고(33분소요).
4번 Track에서 동인천행 10:57출발 전철
[2번째칸끝(2-4)~3번째칸앞(3-1)]을 승차함.
동인천역에선 4번출구 동인천驛 북광장에서
11시30분경 KIm사장과 조우함.”
신혼초 장모가 서울에 올라 오실 때, 이런 메모를 가지고
젊은이한테 보여 줬더니 장모님 왈
이런 약도면 "서울 김서방집도 찾겠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니, 세월이 무상하다.
동인천 역광장에 나타난 金사장 소유 기아SUV차량이다.
初老의 6학년 학생 3명을 태우고, 번잡한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을 들러
월미공원에서 바닷바람을 쐬고, 다시 동인천역광장으로 오는 일정이었는데,
金사장은 개인택시 운전사처럼 운전실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뒷칸에 돗자리, 수박, 토마토, 커피, 음료수, 과일 등 많은 준비를 하여,
글쓰는 사람의 성질이 깔끔해서 인지, 아니면
오래간 만에 만나는 어려운 中高校 동기라서 그런지 Fullset 준비 상태였다.
.
동인천역 북광장은 소규모의 주차시설에다,
안쪽 Line에는 택시 스탠드가 있고,
바깥 Line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등 광역시다운 넓은 규모였다.
인천 China Town에서 제일 오래된 共和春의 Menu판 및 주문장이다.
공화춘은 오늘처럼 조용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좌석이 비(Empty)기를 기다리는 줄도 없었고, 주차도 건물 1층에 바로 할 수 있었다.
3층 Table과 병풍이 있는 좌석으로 안내받아 무더운 날씨에 다행이었다.
차량운전 때문에 술은 생략하였다.
짜장면과 탕수육, 울면 ,기스면만 주로 아는 우리는,
프렌즈 코스(Friends Course)요리도 있더라만,
주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종목선정은 나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All(全部)과 福(Happy)단어가 포함된 전가목을 주문하였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전가복(全家福)은 각종 해산물과 버섯을 넣어서 만든
중국 음식으로. 전가복의 명칭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1) 바다 속 온갖 진귀한 해물을 다 넣어 만든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 요리라는 뜻이 있고,
2) 이름 그대로 온 가족이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 요리,
온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요리라는 뜻이 있다.
'전가복'이라는 말은 '가족 사진'이라는 뜻도 담겨 있어
일반적으로는 후자의 뜻으로 이해한다고 한다.
↑ 한다사 중학교 연혁중 일부
오늘 모임의 주인공인 金DG 박사와 , 鄭UC 박사의 중학교 모교를 검색해 보았다.
경남하동 良甫(양보)중학교는 1955.8월 개교하여 학생수 감소로 2016.2월말 폐교하고
(폐교당시 전체 남녀학생수 32명), 인근의 횡천, 북천중과 통폐합하여
韓多沙(한다사)중학교로 改名되어 현재 기숙형 거점중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 중학교 동기모임겸 향우회를 가지려 하는,
鄭UC, 金DG, 그리고 까무짭짭했던 미남자 鄭SH 박사가
이 조그만한 중학교 출신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현재 양보면에 있는 韓多沙(한다사)중학교는 오늘날에도
지방신문에 학생수 감소 이야기가 기사화되고 있다고 한다.
시절이 하 秀常하여 세 금융인이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여
양보면의 꽃순이를 찾는다 든지 혹은 찬란했던 생활기록표를 찾으려면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머리가 뻐근해 진다.
하여튼 2016.3월 전체 7학급으로 개교한 한다사중학교는
2021. 5월 현재, 학생수 73명뿐이라니, 탄소중립과 Green Country정책으로
학교이름이 계속 유지되고 동창생들이 만났을 때,
공통분모인 지역이름이 모든 Story의 중심이 되길 바란다.
이 학동들 중에 1972년도에 PKQ를 졸업한 금융인처럼 인재가 또 나온다면
하동읍내에 플랑카드와 축하이벤트가 1년간정도는 펼쳐 지겠지요.
그리고, 플랑카드 아래에는 대선배 金 DG, 鄭 SH, 鄭 UC 이름이 적혀 있겠지요.
PKQ가 당감동이 아닌 부전동에 있을 때,
'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천하의 일을 이룬다 '는 뜻의 '開物成務(개물성무)'를
상속받은 부산개성중학교는 부암역 3~5시방향 언덕에
대형건축물 1동, 운동장 2개, 校舍(교실) 64개, 콘섹트(공작실용) 2개,
야트막한 금련산 1개, 물탱크 1식, 대형 수도전 등
입학할 당시에 전국최고의 시설이라고 했다.
우리가 중 3학년 때인 ’68.03.12일 240명 규모의 1회 신입생을 받아들인
개성종합고등학교(오늘날 부산진고등학교의 전신)를 기존 시설내에 수용했으므로
시설은 규모에 있어 시쳇말로 끝내주었다.
위 사진은 부산진고등학교의 학교연혁 일부발췌임.
누군가는 또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1969년 1월 졸업식을 마친 우리는
따스 했던 윗운동장으로 나와 시멘트보도가 있는 서쪽도로를 지나
북쪽 교문으로 학부형들과 졸업생들이 함께 걸어 내려왔다.
학교건물은 평지보다 다소 높은 곳에 위치하여 평소에도 늘 추운 느낌이었다.
그 추운 날씨에 졸업식사를 하신 최 두순 교장 선생님은
매서운 추위를 마다않고 ‘사람이 되자’ 돌비석(현재 개성고소유) 옆에 홀로 서서
일일이 환송하고 있었다. 그 날 졸업사는 대충 이러 했다.
" 오늘을 지나면 내일부터 여러분은 더 힘든 세파에 시달릴 것이다. .
세상일이 힘들거든 너의 엄마의 품안으로 돌아가라.
엄마의 품안(子宮)처럼 安穩한 곳은 없다. 너의 모교도 그러할 것이다.
힘들더라도 이곳에서 배운 것을 잊지말라 "
지금 유추해석해 보면, 학교에서 배운 지식대로,
언제나 기본(Fundmental)을 생각하며 정진하라는 취지였고
오늘날까지 사소한 이 Fact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추운 날씨에 다른 학사일정도 많을텐데 하필 졸업식날 제자들을
1~2명씩 직접 배웅하는 老선생님의 志順(지순)한 모습이
조그만 가슴을 후벼팠기 때문이다 .
오늘날 개성중학교는 동의대학교입구에 가야고교 바로 옆에 있다.
부산 개성중학교나 하동의 양보중학교나 우리가 재학할 때 보다
대중의 호감도, 진학률, 인기도가 떨어짐은 사실이다.
후배가 선배보다 나아야 함이 즐거움(靑出於藍) 이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 사회인가 보다..
옛말에 "복무쌍지(福無雙至) 화불단행(禍不單行) "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제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멈춤없는 전진이 요망된다.
진주지점에 근무할 때, 단신부임이라
金DG 지점장한테 입은 은혜가 적다고 할 수 없다.
덕분에 진주의 이름있는 음식은 거의 시식해 보았다.
진주중앙식당의 육회비빔밥, 아구찜 수육, 천황식당의 숯불갈비,
헛제삿밥, 진주냉면, 진주비빔밥, 신안동 앞뜰의 민물매운탕집,
귀신이 나와서 회피했다는 가옥을 인수하여 성업중인 산마루의 추어탕집,
그리고 진주중앙시장 부근 농협지점옆 실비횟집 등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대원사 계곡의 “하늘아래 첫 집”이라는 간판을 지나,
지리산 치밭목산장을 답사한 것도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유평리(油坪里)는 아주 먼 옛날에 기름이 나왔다는 것도,
단성의 성철스님 생가(겁외사)와 지리산 참숯골찜질방의 후끈함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동기회에 얼굴을 숨기고 있지만 진주의 숨은 재력가 이기에
서울 나그네가 객지에서 버릇없이 신세를 많이 졌다.
계절이 바뀔때 마다 좋은 글귀를 보내주는 金열주 박사의 글씨체 처럼 힘찬 글씨다.
북한산 대남문 인근에 야호샘이 있었고,
부부동반으로 '90년대 초반부터 500회쯤 산길을 같이 걸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야호샘이 군부대 군인들이 이용(?)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발길을 끊게 된 산애호가이고, 최근 바보 할아버지가 되는 바람에
삶의 활력을 찾고 있는 이토회 Member이다.
공화춘이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요리말고는 대부분 6,000원~9,000원 가격이다.
하동출신의 유명인사에게는 공화춘이 개발한 공화짜장면을 주문하였고,
나는 전번에 시식한 바도 있고 하여 일반짜장면을 선택했다.
오늘 짜장면 값은 진주 초전동의 숨은 알부자가
" Full-service Rule "을 지킨다고 해서 또 신세를 지게 됐다.
We had good foods with coffeies in famous restaurant of Incheon.
자유공원을 답사한 날이 " 6.25 "의 하루 전날 이었다.
멀리서 맥아더 동상이 월미도 지역을 바라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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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미국에 있는 한국전쟁 추모공원을 답사한 적이 있다.
우의를 입고 있는 것은 그 때가 후덥지근한 장마철이었고
공원의 벽에는 "Freedom is not Free"문구가 새겨져 있다.
월미공원(1)
월미공원(2).
월미공원은 과거 군부대였던 지역을 2001년 인천시에서 매입 후 조성한 공원임.
월미공원(3)
월미도의 남쪽 잔디밭에 오기전,
우리는 가지고 간 돗자리를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다.
그러나 월미공원이 조성된이후 바다와의 감상거리도 줄어들어,
해변도로 둘레길을 가다가 한적한 곳을 택해 돗자리를 펴고 힐링했다.
나이가 들면 노화현상으로 냄새맡는 기능도 떨어진다는 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바닷가인데 "짠내""짠바람"을 느낄 수 없었다.
金사장 평생 여자친구가 준비해준 수박과 과일 및 커피를 꺼내어 마시면서,
정년퇴직까지 지탱해준 우리의 건강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며,
수직적 정의(보수)와 수평적 정의(진보)가 교차하는 가운데,
운 좋게 줄을 잘 서서 동료들보다 직급타이틀이 높았던 Case도 있지만,
동기회와 집안에선 별로 였다는 등 타인의 인생을 몰래 감상하기도 했다.
손자들이 재롱을 부릴 때마다 우리는 노화한다.
합리적판단과 재롱사이에서 이성이 마비된다.
시간가는 줄 모르기 땜에 그렇다.
이 세상에 올 땐 형님보다 뒤에 왔지만,
저 세상으로 갈 땐 동생앞에 갈 수도 있다.
Corona-19 Pandemic때문 만남이 줄어졌지만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우린 만날수 있음에 희망을 가지자.
z
첫댓글 ㅎ~옛 기억이 생생히 살아있군요
굿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