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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다해 11월30일 월요일 [(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수도회] 곧바로 버리고 따르는 거룩한 모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로마 10,9-18
† 복음 마태오 4,18-22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다. 갈릴래아의 벳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다(마태 4,18 참조). 안드레아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다
(요한 1,40-42 참조). 그는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 오늘의 묵상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등, 첫 제자들의 직업이 어부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그물질하는
어부들을 보시고 당신 제자로 삼으셨는데, 아마도 어부들이라면
제자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파악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어부는 물고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잡습니다. 뭍으로 돌아오면 다시 그물을 손질하여 다음번
고기잡이를 준비합니다. 이렇게 물고기를 잡아 본 이들이기에 “사람
낚는 어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힘써 배를 젓고 그물을 치듯, 사도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하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했습니다. 백 명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 가운데 몇 명이 그 복음을
받아들였을까요? 빈 그물을 거두는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음날 어부들이 푸른 바다로 다시 나가서 그물을 던지듯이 사도들도
다시 나갔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부의 경험이 그들에게 많은 용기를
주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절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생업인 그물질을
포기한 채 그분을 따랐을 뿐 아니라, 여러 상황에서 여러 사람을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 인도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하였고, 그때마다
예수님께서 적절하게 당신 뜻을 계시하시도록 기회를 마련해 드렸는데,
오늘 우리가 다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넓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려 애쓰는 어부들처럼, 사람 낚는 어부였던 사도들을 본받아 다른
이들과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인지 아니면 세상의 것인지
2015년 다해 11월30일 월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0,9-18
복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8-22
사람들은 종종 건배사를 외치고 잔을 부딪친 후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그 많은 건배사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 힘들다.”
그러면 이 건배사를 거꾸로 말해 응답하면서 잔을 부딪치는 것입니다.
‘내 힘들다’라는 건배사를 거꾸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다들 힘내!’가 됩니다. 그래서 저 역시 종종 건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그럼 제가 말한 건배사를 거꾸로 대답해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말하면서 “내 힘들다!”라고 크게 외치지요.
힘들다는 말이 뒤집으면 힘내라는 말이 됩니다. 어쩌면 스스로가 느끼는
고통과 시련들도 이렇게 뒤집어 생각하면 정반대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바꾸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머물면서 힘들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과감한 결단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결단을
내려서 바꾸려고 시도한다면 바뀔 가능성이 생기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문다면 바뀔 가능성은 전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단의 순간은 인생을 바꾸고 역사를 바꾼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사람은 인생도 또 역사도 바꿀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그들 모두 갈릴래아 어부들이었습니다.
당시의 갈릴래아 어부들은 대부분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따라서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배와 아버지를 뒤로 하고
주님을 따랐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 안에서 참 진리의 길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우리가 과연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속된 욕망을 끊으면 많은 것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부를 가지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일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의 부를 경멸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세상의
부를 주님보다 윗자리에 두는 삶을 경멸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지금 당장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주님인지 아니면
세상의 것인지를.....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서로 도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에우리피데스).
성 안드레아 사도.
책임지는 사회
종종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식당에 가게 되면, 신발장 앞에 ‘신발 분실
시에 책임지지 않습니다.’는 식의 문구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발을 잊어 버렸을 때 어떻게 될까요? 경고장의 말처럼 가게 주인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일까요?
우리나라 상법에는 그렇지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손님의 동의 없이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방적인 경고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님이 신발을 잊어 버렸을 때 배상을 해줘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책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신발을 가지고
들어가도록 하던가, 아니면 열쇠가 있는 신발장을 비치하는 것 등의
적극적인 방법 등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왜 ‘신발 분실 시에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경고 문구를 굳이 써 놓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경고 문구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질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떤 가게에서는 다른 가게와는 다르게 이런 글을
신발장 앞에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신발 분실 시, 책임지겠습니다.’
손님의 편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서 사람들이 더 많이 이 가게를
찾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거짓말까지
더하면서 책임 없음을 분명히 하려고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책임지려는
사람이 더욱 더 신뢰를 받는 세상이 아닐까요? 즉, 이제는 책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각종 핑계와 거짓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 있게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발 분실 시 책임을 지겠다는 문구.
◈ [수도회] 곧바로 버리고 따르는 거룩한 모험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다해 11월30일 월요일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마태 4,18-22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20)
곧바로 버리고 따르는 거룩한 모험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요한 1,41) 사도 안드레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의 어부로서(마태 4,18)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직접 깨우치고 체험하여 열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의 승천 후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러시아 남부에서
발칸반도를 거쳐 희랍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에케오 총독에게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X자로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부르심, 제자직, 복음선포에 대해 돌아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림 받는 이들의 처지가 어떤지를 묻지 않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대이며 사랑의 초대입니다. 따라서 매순간
부르심을 받는 우리는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사랑으로 부르시기에 응답해야 함을 깨달아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 받은 이들의 응답의 자세는 제자직의 길을
보여줍니다. 호수에 어망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 그물을
손질하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곧바로”(4,19. 21)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들은 그 어떠한
계산도 하지 않고 부르시는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따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마티아 사도 축일의 복음 말씀을
알아듣고는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며 즉시
복음선포에 나섰습니다.
갈릴래아의 어부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해오던 기존의
삶의 방식의 방편들인 그물과 배, 그리고 인간적으로 가장 깊은 애정의
뿌리인 아버지마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완전하고 철저한
버림은 자신을 절대 가난의 상태로 내몰고 보호막이 없는 광야에
내던지는 엄청난 모험입니다. 그런 선택과 응답은 완전히 비워진 그
자리에 모든 선이요,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채워지리라는 믿음이
있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모험이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제자들은 때로는 넘어지고,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지만 ‘버리고
떠남’을 계속합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응답하였듯이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체험한 하느님 나라의 진리와 선과 사랑을 열정적으로
선포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었을
뿐 아니라 복음 선포를 통해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수도축성을 받고 주님께 삶을 봉헌한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매순간 모든 것을 통해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에 ‘곧바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이 버렸던
그물과 배, 아버지는 모든 애착과 소유와 무의식의 습관, 고정된 사고의
틀을 말해줍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매여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자유와 해방을 간절히 원한다면 과감히 버리고 주님을
향해 떠나는 모험을 해야겠지요.
오늘도 곧바로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거룩한 모험을 통해 행복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멋진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다해 11월30일 월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8-22)
어제는 고기를 낚았지만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인
따름을 통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하느님 자녀인 본래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믿음으로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쫓기에 부르심의 가치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쫓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따를수 없습니다.
자기최면에 빠져 사는 우리들을 깨우기위해 우리들을 친히 부르십니다.
부르심은 아름다운 삶을 일깨워주는 엄청난 은총의 사건입니다.
부르심은 우리의 따름을 통해 구체화되며
삶의 방식또한 바뀌는 결단의 여정입니다.
모호한 결단이 아니라 내부를 바꾸는 분명한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평생을 걸쳐 그분만을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따름의 시간과 믿음의 시간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처음과 끝을 한결같게 합니다.
부르심이 믿음의 시작이라면 따름은 믿음없이는
따를 수 없는 우리의 모든 순간들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시간을 나누게하는 부르심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진심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을 통해 우리를 깨우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다해 11월30일 월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마태 4,18)
우리는 베드로 사도를 으뜸 사도로 존경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동생 안드레아에게는 그러한 존경을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안드레아는 형 베드로보다 더 구도적인 사람이고
적극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예수님을 형에게 소개함으로써
오늘의 베드로 사도를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안드레아야말로 구도자이고 선교사이고
겸덕을 갖춘 참 사도요 제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수도자인 저는 베드로 사도보다
안드레아 사도가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올해는 좋은 것을 더 열심히 추구하고 그렇게 찾은 보화를
가까운 이웃들에게 소개시켜주고 나누어주면서
남이 나보다 더 잘 되는 것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안드레아 사도같은 멋진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성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서울]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2015년 다해 11월30일 월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 4,18-22
동창 신부님 중에 ‘안드레아’ 세례명을 가진 친구가 있습니다. 언제나
활달하고, 긍정적인 친구입니다. 어려운 일을 쉽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친구는 공소에서 본당이 된 성당의 초대 신부가 되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처음에 하는 것들은 힘들고 어렵기 마련입니다. 비교하거나,
전에 했던 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주 멋지게 시골 성당에서
3년을 지냈습니다. 하느님의 뜻인지 모르겠지만 친구는 그 뒤로도
새로이 분가되는 성당의 초대신부를 많이 하였습니다. 지금도 성당
신축을 하는 곳에서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동창 신부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리며,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저는 새롭게 신축된 성당의 후임 신부로 가곤 했습니다. 약간의 부채가
있지만 아름다운 성당이 있고, 몸을 기댈 사제관이 있는 곳에서 사목을
하였습니다. 밑그림은 잘 그리지 못하지만 밑그림 위에 채색을 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성전은
세워졌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성전을 세우자고 말 하곤
하였습니다. 아마 제게 성당 신축이라는 일이 주어졌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부족한 저를 아시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맡겨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제서품을 받게 될 부제님들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부제님들은 각자
관심 있는 사목분야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해외선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어학공부를 좀 더 하기를 권했습니다. 청소년 사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청소년 지도자 자격증을 딸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권했습니다. 문화사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먼저
숙지하도록 권했습니다. 문화라는 틀에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콘텐츠가
있으면 좋기 때문입니다. 도시빈민 사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직접
봉사하고, 활동하라고 권했습니다. 현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노인사목에 관심 있는 분들은 고령화 사회에 대한 연구를 하면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부제님들을 보셨다면 아주 흡족했을 것
같습니다. 준비된 사목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아니라, 신학교라는 못자리에서 신학, 영성,
철학을 공부한 신학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사목의 일선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될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준비한
사목의 그물을 힘차게 던지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교구장이신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의 축일입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지내기 때문에 매일 교구장님을 뵐 수 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교구청 회의를 통해서 뵙게 됩니다. 교구장님은 지칠 줄
모르는 탱크와 같은 체력을 지니셨습니다. 사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열정을 지니셨습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끝까지 들어주시는 따뜻함을
지니셨습니다. 교구의 모든 일들은 국장 신부들에게 위임하시고,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축일을 맞이하시는
교구장님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따른다면 그곳이 바로 ‘꽃자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다면 그곳이 바로 ‘가시방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서울대교구라는 꽃자리를 더욱 빛내시는 교구장님의 축일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느님과 만날 준비하는 신자들
2015년 다해 11월30일 월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사람 낚는 말, 재미있게 들립니다. 젊었을 때 많이 듣던 말이니까요.
여자 낚는 게 외출목적이라며 군에서 외출 준비철저를 강요했었지요.
제대 후엔 여자들도 남자들과 미팅이라며 서로 낚는 일들 많았지요.
민물낚시를 한 때 열심히 하면서 사람 낚는 구절이 수시 생각났고요.
제자들은 낚시보다 그물을 갈릴리호수 아닌 세상에 던진 것 맞습니다.
신자들은 그 그물에 걸려 하느님과 만날 준비수업을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오 4,19~20)”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따름으로써 얻게 되리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다해 11월30일 월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 4,18-22
따름으로서 얻게 되리라.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익숙해진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주하지 않고 도전할 때 새로운 것을 얻게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마음과 행동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8).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를 얻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따라 오너라” 하십니다. 따르고 안 따르고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에게는 새 삶이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그물이나 배, 아니면 가족? 일지라도 단호하게 버리고
주님 안에 머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것으로 넘치도록 채워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따라야겠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따름으로써 더 좋은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일상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끊임없이
대립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따라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도 하고 세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버릴 것은 확실히 버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청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아가 형에게 자기가 만난 주님을 알렸듯이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무엇보다도
행실로써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으로서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답니다.
예수님이 크신 분 이셨듯이 우리 모두가 큰 사람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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