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회) 온라인 수요니까야 읽기(맛지마 니까야 제2권 다섯 번째) ☸ 10월 12일 오후 2시 ☸ zep – 메타버스 수요니까야읽기 https://zep.us/play/8Ldo18 으로 접속하여 모인 법우님들과 함께 ❂ 빠알리 예불 독송 ❂ 맛지마 니까야2 제4장 긴 쌍 품
지난 주에 「삿짜까 긴 경」 (M36)은 긴 경이어서 해설을 미리 읽었고, 당일엔 삿짜까 긴 경을 다함께 읽고, 주해도 살펴보니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번뇌의 제거가 깨달음과 미혹의 기준이 된다!
「삿짜까 긴 경」 (M36) 해설 중에서
본경도 웨살리 큰 숲의 중각강당에서 삿짜까와 나누신 대화인데, 본서 제1권 「성스러운 구함 경」 (M26) 처럼 본경은 부처님의 성도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본경과 「성스러운 구함 경」 (M26)이 둘 다 세존의 성도 전후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만 「성스러운 구함 경」 (M26)에는 세존이 깨달음을 실현하시는 구체적인 과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성스러운 구함 경」 (M26)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증득하신 후에 전법에 대한 사유를 하시고 그래서 바리나시로 가셔서 오비구를 교화하는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반면에 본경은 부처님의 성도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본경에서 부처님의 고행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부분과(§§20~30) 특히 부처님께서 고행을 버리고 수행을 통한 행복을 인정하는 진지한 사유를 하시는 대목은(§§31~33) 우리가 관심 있게 봐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세존께서는 네 가지 善을 체득하시고(§§34~37) 이를 바탕으로 숙명통과 천안통을 증득하시고 누진통을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하시는데(§§38~44) 본경에 이 과정이 자세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본경은 부처님의 성도과정을 바르게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경의 주목적은 이러한 부처님의 성도과정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본경은 부처님께서 수행하실 때에 어떤 괴로운 느낌[苦受]도 세존의 마음을 제압하지 못했고(§20 이하) 아울러 어떤 즐거운 느낌[樂受]도 세존의 마음을 제압하지 못했음을 밝히기 위해서(§34 이하) 설하신 경이다. 그리고 본경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또 하나는 부처님께서도 낮잠이나 잠을 주무시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부처님의 성도과정은 본경 §13 이하에서 설명되고 있는데 이것은 M26의 §13 이하와 같다. 그리하여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 회중에서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를 체득했지만 궁극이 아니라고 버리고 떠나시는 것은 M26의 §§15~16과 같다. 그리고 본경 §§16~29는 부처님이 행하신 극심한 고행을 묘사하고 있다. 다시 §30 이하에서는 고행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길이 아님에 사무치시고 어릴 때 농경제 때 체험한 초선을 떠올리시고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라고 생각하셨다.(§31) 그래서 이것을 초선으로 하여 발판을 만들어서 (§34) 제2ㆍ3ㆍ4선을 증득하시고(§35~37) 초경에 숙명통을(§38~39), 이경에 천안통을(§40~41), 삼경에 누진통을 체득하셔서(§42~43) 마침내 깨달은 분이 되셨다.(§44) 물론 이처럼 고행을 하실때에도(§§16~29), 네 가지 선과 삼명을 체득하실 때에도 (§§34~44), 각각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이 세존의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본경의 주된 목적이다. 다시 삿짜까가 질문을 드리자(§45) “나는 여름의 마지막 달에 탁발에서 돌아와서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서 깔고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마음챙기고 잘 알아차리면서[正念ㆍ正知] 잠을 잤던 것을 기억한다.”(§46)고 말씀하신다. 삿짜까가 그러면 그것은 미혹에 빠져 머무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자(§46) “번뇌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혹한 사람이 되고”(§47) “번뇌를 제거했기 때문에 미혹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47)고 말씀하시면서 잠을 자는 것과 미혹에 빠져 머무는 것은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142회) 온라인 수요니까야 읽기(맛지마 니까야 제2권 여섯 번째) ☸ 10월 19일 오후 2시 ☸ zep – 메타버스 수요니까야읽기 https://zep.us/play/8Ldo18 으로 접속하여 모인 법우님들과 함께 ❂ 빠알리 예불 독송 ❂ 맛지마 니까야2 제4장 긴 쌍 품
「갈애 멸진의 짧은 경」은 길이가 짧아서 경을 읽고 주해를 살펴보고, 해설을 읽은 뒤에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갈애 멸진의 긴 경」 (M38)의 주해와 해설을 미리 읽었습니다. 모든 법들은 집착할 만 것이 못 된다 라고 배운다. 이것을 배우면 모든 법들을 완전히 안다. 완전히 알고서는 모든 법들을 철저히 안다.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
「갈애 멸진의 짧은 경」 (M37) 해설
본경은 신화적인 표현이 가득한 경이다. 인도 혹은 인도 종교를 표현하는 말로 흔히들 만신전(萬神殿)이라는 말을 쓴다. 인도는 말 그대로 수 만의 신들이 존재하는 종교의 나라라는 표현이다. 베다 문헌에서부터 시작해서 『마하바라따』와 『뿌라나』 문헌들을 거치면서 인도 신들의 수는 더욱더 많아지고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런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불교도 당연히 신화적 표현을 즐겨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디가 니까야』 제2권의 「대전기경」 (D14)과 제3권의 「전륜성왕 사자후경」 (D26), 「대회경」 (D20), 「아따나띠야 경」 (D32) 등 『디가 니까야』에도 적지 않은 경에 대해 신화적인 표현이 가득하다. 본경에도 삭까(인드라, 제석천)가 등장하고 목갈라나 존자가 신통으로 삭까의 거주처인 삼십삼천의 에까뿐다리까 정원을 방문하는 등 신화적인 서술이 많다. 그러면서 신화적 표현과 신통력으로 불교수행자들의 정신적인 힘을 드러내는 경이기도 하다. 역자가 신화적인 표현을 썼다고 해서 신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초기불전에서 신들의 존재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며, 본서 제3권 「상가라와 경」 (M100) §42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계신다. 본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사와티의 동쪽 원림의 녹자모 강당에 계실 때 신들의 왕 삭까가 와서 갈애의 멸진에 대해서 질문을 드린 뒤(§2) 세존의 말씀을 듣고(§3) 기뻐하며 물러가자(§4) 신통제일인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정말 삭까가 세존의 말씀을 알아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즉시에 삼십삼천의 에까뿐다리까 정원에 나타났다.(§§5~6) 신들이 천상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것을 본(§§7~10) 목갈라나 존자는 삭까를 위시한 신들이 너무 방일하게 지낸다고 생각하여(§11) 신통을 부렸는데 그의 발끝으로 신들이 머무는 웨자얀따 궁전이 흔들리게 하고 요동치게 했다.(§11) 그러자 신들의 왕 웻사완나 대왕과 삼십삼천의 신들은 경이로움과 놀라움이 가득하였다.(§11) 그리하여 목갈라나 존자는 삭까가 세존으로부터 들은 갈애의 멸진에 대한 말씀을 삭까로부타 다시 들은 뒤(§12) 녹자모 강당으로 되돌아 와서는(§13) 세존으로부터도 같은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고 하면서 경은 마무리된다.(§15) 이처럼 본경은 마하목갈라나 존자를 빌어서 갈애를 멸진하여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불교 교단의 출가자들의 정신적인 힘이 천상에서 유유자적하는 신들과 신들의 왕인 인드라(삭까)보다 뛰어남을 신화적인 표현으로 드러내는 경이라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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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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