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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묵상글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이어가는? 또는 증거 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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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이어가는? 또는 증거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이번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에는 궤변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순교 성인들처럼 꼭 순교해야 하나?
배교한다고 해도 하느님을 배신하는 것은 아닐 수 있지 않은가?
박해상황이 되어 또는 북한에 살게 되어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믿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하면 굳이 믿겠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
겉으로는 안 믿겠다고 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않는가?
입으로 안 믿는다고 해도 내가 하느님을 믿으면 되지
굳이 믿는다고 하여 죽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인들 가운데 대표 성인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가문을 보면
아버지 형제 가운데 아버지 정약종과 가족은 모두 순교하였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를 선택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고 유배 가 정말로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지금에 와서 정약용이 천주교를 완전히 떠난 것인가, 하느님을 믿지 않은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가운데 우리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옹호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그리고 입으로 배교했다고 하느님을 버린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고,
사실 많은 신자가 순교하지 않고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간 것은
입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신앙을 증거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 배교 후 교회를 파괴까지 한 완전한 배교자를 빼놓고,
나머지는 두 부류 곧 신앙을 ‘이어온 신자’와 ‘증거 한 신자’ 두 부류이며,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인들은 그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증거 한 분들이고,
대표 성인인 정하상 바오로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적극적인 분이셨습니다.
정하상 바오로는 6세 때 아버지 정약종과 형 정철상이 먼저 순교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척들까지
그의 가족이 천주교를 버리도록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라고 달레의 한국 천주교 교회사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것을 개인의 불행을 넘어 가족의 불행이라고 생각했으면 배교했을 텐데
정하상 바오로와 가족들은 그것을 가문의 영광이요 영광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그랬기에 그는 20대 젊은 나이에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어 대단한 활약을 펼칩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 그는 1825년 조선의 독립적인 교구 설립을 요청하는
편지를 교황청에 보내어 1831년 마침내 조선 교구가 설립되게 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모셔 오기 위해 2,000km의 북경 길을 여러 차례 왕복하였고,
그래서 조선 교구 2대 주교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과 샤스땅 신부를 영입했습니다.
그의 업적 중에 ‘상재상서’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이 어쩌면 한국교회 최초의 교리서 또는 신학 저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 천주교가 어떤 교인지 보유론과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역설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앵베르 주교는 신학 교육을 속성으로 시키고 사제품을 주려고 했으나
1939년 기해박해로 그가 순교하게 되어 그는 한국교회의 첫 신학생이 된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그것은 김대건, 최양업, 유방제의 신학생 선발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정하상 바오로와 적극적으로 하느님과 신앙을 증거 한 순교 성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 돌아봅니다.
근근이 이어가는 신앙인지,
적극적으로 증거 하는 신앙인지,
하느님으로 행복하고 그 행복을 전하는 신앙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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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순교한 이들 중에 11명의 성직자와 92명의 평신도, 모두 103 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고, 그 외에도 약 1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성인품에 오르지 않은 모든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개혁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며, <제2독서>는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랑의 대헌장”을 들려줍니다.
이는 순교의 본질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교부 테리툴리아누스가 말한대로,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조들이 걸은 이 “순교”의 길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오늘 <복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순교와 희생의 삶이 일회적이 아닌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교는 매일의 삶 속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사건이요, 또한 “참된 삶은 긴 순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와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의 녹색순교로 죽음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는 것은 죽음에로 부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주님!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도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고통과 함께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가운데 계시는 당신을 통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사랑의 십자가를 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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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상 행복을 갈망하라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1요한4,10-12).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고 그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걸맞은 은총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죽음을 감당하고서라도 주님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로 왔고 또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상에서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하는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순교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천상행복이라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게 하였습니다.
1독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3,9).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았으며 은총과 자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몸소 증거 하였습니다.“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마음입니다. 우리 각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는 239년 전 초기에는 ‘사교’, 곧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단정되었고 이 사교를 뿌리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우리 선조들은 천상의 기쁨을 생각하며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며 지냈습니다. 옛말에도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요로운 수확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지혜3,1-5).는 말씀이 바로 그들을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며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교인이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옥리들이 불젖가락으로 벌건 숯불을 집어 올려 그의 입에 갖다 대는데 유대철이 입을 크게 벌리자 깜짝 놀라 숯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감옥생활 안에서도 너무도 당당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자 감옥을 지키는 포졸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그 감옥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웃으며 살고, 나는 돈까지 받으며 바깥에서 편히 있는데도 불평이 가득하다. 그러니 옥 속에 있는 그들이 죄인인지 옥 바깥에 있는 내가 죄인인지 모르겠다.”
순교자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보면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갔습니다. 100여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가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박해가 심할수록 믿음도 커갔고, 형제애는 더 깊어졌습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자유를 줍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239년 전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성당도 가까이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을 갖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타협도 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기보다는 세상을 선택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크게 구별이 없습니다.‘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주님의 모습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보여 지지 않으니 어떻게 믿는 이들이 늘어나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24).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덜어내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를 버려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마련됩니다. 자기중심의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들이 십자가 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하느님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은총과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지혜3,9).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들이 물려주신 신앙을 땀의 순교로 지켜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분명히 ‘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하면서 주님을 과감히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 제가 한마디 하면 ‘그래도 사랑하여라’ 하고 답하십시오.
그가 원수 같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기만 하면 상처 받는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말을 함부로 한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너무 이기적이고 안보면 편하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보면 정말 밥맛이 떨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하십시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날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일상의 삶의 온전한 봉헌을 통해 땀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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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현지인들이 즐겨 찾지만 관광객들은 쉽게 가지 못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잘 모르기도 하지만, 여행 중에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LA에 신문 홍보와 모임 때문에 10번 넘게 왔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에 다녀왔습니다. 1922년에 개장한 야외 음악당입니다. “할리우드 볼에서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로스앤젤레스를 경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LA 시민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공연장이라고 합니다. 공연은 8시에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관객들은 5시 쯤 미리 도착해서 준비해온 음식을 먹으며 공연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저와 같이 간 분들도 6시 쯤 도착해서 김밥과 과일을 먹으면서 공연을 기다렸습니다. 그날 공연의 주제는 ‘Beethoven at the Bowl’이었습니다. 베토벤에게 영감을 준 영웅은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나폴레옹’과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고 끝없는 형벌을 겪어야 하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였다고 합니다. 지휘자는 ‘영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영웅이란 특별한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 일 수 있습니다. 영웅이란 시대를 변화시킨 사람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준 사람입니다.” 지휘자의 설명을 듣고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감상했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은 열정과 땀으로 한국의 초대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분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함으로써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신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서울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를 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이분들이 한국교회의 영웅들입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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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선조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많은 ‘성어’들이 있습니다. 그 중이 이런 사자성어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我是他非(아시타비)
‘나는 옳고 남은 틀리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꼬집고 계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오늘 주님의 가르침에는 우리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내 모습에는 그리고 나와 관련된 사람들에 관해서는 관대한 우리 모습 말입니다. 또한 내가 아니거나 내 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배척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를 준비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세례를 받아 그 하늘나라를 맑은 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눈을 가리고 요한을 비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가 오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 오셨습니다. 우리의 손을 잡고 함께 하늘나라로 들어가실 분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 눈을 가리고 그 하늘나라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
눈을 뜨고 바라보십시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하신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기쁨과 희망이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찬미하십시오. 오늘 준비된 것이 인내와 침묵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을 사용해 음미하십시오.
내가 아닌 주님께서 마련하신 선물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넓적한 면 요리
각 나라에는 여러 가지 특이한 음식이 있습니다.
히모카와 우동은 넓적한 면을 소스에 찍어 먹는 방식의 일본식 우동입니다. 면이 넓은 것이 특징입니다.
중국에도 이런 넓은 면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넓적 당면’이 많이 알려졌지만 넓적한 밀가루 면도 있습니다.
이런 면들의 특징은 우선 특이한 생김입니다. 일반적인 면과 달리 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물론 그 호기심은 바로 식욕과 연결됩니다.
가끔 식욕이 없거나 색다른 먹거리가 필요하다면
맛의 변화도 좋지만
생김의 변화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가끔은 무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넓적한 면 요리처럼 맛은 그대로 두고 생김을 바꿔보세요.
우리의 하루가 다른 맛을 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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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요즘에 ‘가나안 신자’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젖과 꿀을 흐르는 가나안 땅을 떠올리며 열심히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했습니다.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저를 보며 웃으면서 ‘가나안’을 거꾸로 말해 보라고 하십니다.
‘안나가 신자’라는 것입니다. 냉담 교우, 쉬는 교우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가나안 신자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기 힘들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당이 재미없어서 또 신앙이 와 닿지 않아서, 성직자나 수도자에 대한 불만, 교우들과의 마찰로 인해서….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이유로 많은 이가 ‘가나안 신자’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본당은 교적 대비 주일 미사 참석률이 25% 이상입니다. 전국 평균보다도 또 인천교구 내에서도 주일 미사 참석률이 꽤 높은 편이라고 이야기 듣습니다. 하지만 슬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그마치 70% 이상이 주일 미사에 나가지 않으면서 ‘가나안 신자’로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성당 나갈 이유가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또 사람만을 바라봅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25%의 열심한 교우들의 영향이 ‘가나안 신자’들에게 조금씩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 당신만을 바라보는 열정을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얻게 됩니다. 이를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를 철저하게 지키셨던 분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주님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나라에서 믿지 못하게 했으며,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만을 바라보았기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이겨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어 가장 커다란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 순교자들을 바라보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가나안 신자’의 길이 아닌 순교자들의 삶을 우리도 쫓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순간의 기쁨이 아닌 영원한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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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패배자는 자신의 패배를 조건 탓으로 돌린다. 나는 조건을 믿지 않는다. 이기는 사람은 바라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을 때 바라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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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순교적 삶-
오늘 9월20일은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을 이루는 한국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모든 세계 가톨릭 교회가 한국 순교자들을 기리며 의무기념 미사를 봉헌하는 참 영광스런 거룩한 날입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전, 1791년 신해박해로 시작하여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여년 동안 일만여명이 순교한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먹먹해져 말을 잊게 됩니다. 순교자들 말고도 그 이후 근현대사를 보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지요! 이제는 제발 피를 흘리지 않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새삼 축복받은 순교자들의 한국 가톨릭 교회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순교자들이 지켜주는 나라인데 현재 아무리 위기라 해도 대한민국은 영원할 것이며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 내용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요즘 면담성사차 제 집무실에 들리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 사랑, 나라 사랑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르게 하는 애국가 1절입니다. 바로 여기서 영감받은 만세육창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날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를 바라보며 만세육창으로 시작하면 마음이 새롭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9월 순교자 성월, 마침 오늘로써 단식 21일째를 맞이하는 이재명 정치지도자가 자꾸 눈에 어른 거리며 밟힙니다. 주님의 보호하심을 간절히 청하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오늘 강론 제목인데 답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만세육창하는 마음으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순교적 삶을 살면 됩니다. 방금 부른 입당성가 287장은 늘 들어도 가슴 뛰는 감동을 선물하며 새삼 우리의 순교적 삶을 새롭게 합니다. 꼭 시간을 내어 5절까지 오늘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최민순 신부 작사, 이문근 신부 작곡의 성가로 곡도 가사도 정말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우선 1절만 나눕니다.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에 짙어갈 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이시여”
한국순교자들을 대표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1821년에 태어나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니 만25세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그 지혜와 용기, 기개와 신앙은 만인의 귀감이 됩니다. 더욱 감격적인 소식은 순교 177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9월16일, 바티칸 베드로 대성전에 설치된 성 김대건 신부 성상 축복식이 거행됐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경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한국 9월18일자 모든 신문 일간지 1면에 자리잡고 있는 축복식 장면 사진의 성 김대건 성상을 보면서 새삼 성 김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명실공히 한국은 물론 한반도 평화의 수호성인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자랑스런 순교자들처럼 살면 됩니다. 꼭 피흘려서 순교가 아니라 영적전쟁 치열한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나하나 주님의 용감한 전사로 순교적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면 되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지혜서의 다음 말씀이 이런 우리를 격려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백절불굴百折不屈, 신앙의 용사로 만듭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늘 들어도 감동이요 우리를 격동激動케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입니까?...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사제서품후 만34년, 매해 순교대축일 강론 때마다 한번도 빠짐없이 꼭 인용했던 윗 성서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주님의 이런 한결같은 사랑이 자발적 사랑, 자발적 기쁨으로 순교적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이 가르쳐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없이 적용되는 구원의 법칙은 단 하나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왜들 그렇게 방황하고 죄도 병도 많습니까? 길을, 빛을, 희망을, 꿈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궁극의 길이자 빛이요, 희망이자 꿈인 주님을 찾고 따를 때 비로소 영육의 건강이요 제대로의 온전한 삶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복음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한결같은 순교적 삶을 살게 합니다. 끝으로 늘 고백해도 는 새로운 제 자작 좌우명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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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이 되어주어요>
처음부터
벗은 없지요
함께함으로써
벗이 되어주고
함께하기에
벗이지요
벗이니
함께하는 거고요
기쁜 이와
함께 기뻐하며
벗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슬픈 이와
함께 슬퍼하며
벗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걷는 이와
함께 걸으며
벗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멈춘 이와
함께 멈추어
벗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나는 너의
벗이 되어주고
너는 나의
벗이 되어주고
하나 둘
모두 서로에게
벗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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