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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성문(矗石門)
진주성(晋州城.사적 제118호.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진주성))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출처:문화재청)
진주성도(晉州城圖.보물 제1600호.대구 달서구 달구벌대로 1095, 행소박물관 (신당동,계명대학교성서캠퍼스))
19세기 경상도 진주성의 전경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10폭 병풍이다. 재질은 지본담채이며, 전체적으로 가필된 부분이 거의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규모의 화면 위에 진주내성과 외성, 해자 등 진주성의 중요한 장면들을 부감법을 이용하여 부각시켰고, 이외 진주성 바깥에는 주요한 관아, 향교, 전답경치 등을 기록하였다.
중요한 건물에는 전각 마다 정성스런 해서체로 명칭을 일일이 기록하여 제작 당시 진주의 상황을 세밀하게 담고 있다. 역사성과 기록성, 회화성을 종합적으로 강조한 회화식 지도로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19세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판단되며, 진주성을 기록한 작품 중에서도 기록성과 회화성을 겸비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촉석루(矗石樓.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남강 변 벼랑 위에 있는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장원루라고도 한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로 사용하였고, 평상시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현재의 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한 것으로 앞면 5칸·옆면 4칸이다.(출처:문화재청)
진주에서 지어진 최초의 시
寄尙州牧伯崔學士滋 金之岱
去歲江樓餞我行 今年公亦到黃堂 曾爲管記顔如玉 復作오頭빈未霜
洛邑溪山雖洞府 晉陽風月亦仙鄕 兩州歸路閒何許 一村離懷久已傷
欲把琴書尋舊要 況看廉幕報新凉 嗟公虛負中秋約 更約重陽飮菊香
작년에 진주로 떠나는 나를 전송해 주더니, 금년엔 당신도 태수가 되었구려… 상주의 계산도 신선의 고을이지만, 진양의 풍월도 선향이네, 두 고을 사이는 거리가 멀어서,… 추석에 만나자는 약속은 어겼으니, 다시 중양에나 만나 국화주 마시기를 약속하세
김지대 (金之岱, 1190-1266)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시호는 영헌(英憲), 봉호는 오산군(鰲山君)이다. 1190년(명종20)에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아들인 대안군 김은열의 7세손이자 시중(侍中) 김여흥(金余興)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중룡(仲龍)이었으며 풍채가 훌륭하고 시(詩)와 문장에 뛰어났다고 고려사에 적혀 있다. 그는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고려의 8대시인이자 다도(茶道)로서도 명성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조 명종때의 학자 이인로는 그의 '파한집'에서 진양에 대해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는 영남에 제일'이라 하여 진양을 찬미했다.
공북문(拱北門)
북장대(北將臺.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경남 진주시 남성동 167번지)
장대는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대를 가리킨다.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이 장대는 진주성 서북쪽의 높은 언덕에 있으며, 이곳은 서쪽과 북쪽 일대를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요충지대이다.
이곳은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서, 낭떠러지 밑의 성밖은 물론 성안과 외성에 주둔한 병사까지도 지휘할 수 있었다. 현판의 이름도 이와 연관하여 진남루, 혹은 공북루라 하였다.
북장대는 임진왜란 때 손상된 것을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새롭게 고쳐 지은 건물이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군사 건물 중에서 조선 중기에 속하는 다락집형으로 후대에 세워진 군사건물의 모범이 되고있다.(출처:문화재청)
북장대에서 동쪽 아래 쪽에 있는 문
용다리(동성동 212-1번지(삼성화재) 부근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어 있는 예전의 돌다리) 흔적
서장대(西將臺.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경남 진주시 남성동 214-4번지)
장대는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대를 가리킨다.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이 장대는 진주성 서문에 속하는 곳이다.
『여지도서』에 보면 회룡루로 나오며, 규모는 작으나 진주성의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서상필씨가 새롭게 고쳐지은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목조 기와집이다. (출처:문화재청)
서장대에서 본 남강 풍경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장군상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경남 진주시 남성동 73-11번지)
조선시대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의 정문이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사를 지내던 남이흥이 내성의 동쪽문을 고쳐 세우고 옆에 대변루(待變樓)를 새로 지었는데, 이것이 망미루의 본래 건물이다. 후에 영남포정사라고 하였으며, 경상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망미루(望美樓)’라는 현판은 수원 유수를 지낸 서영보가 쓴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경남 진주시 본성동 499-7번지)
촉석광장 안의 정충단에 서 있는 비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충절을 다한 이들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과 비몸을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으며, 그 위로 머릿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머릿돌이 유난히 커서 전체가 사다리꼴로 보인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이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그 밑면에 꽃을 조각하여 이채롭게 장식하였다.
비문은 아래쪽이 닳아서 그 부분만 판독하기가 힘들 뿐 대체로 양호하며, 『조선금석총람』에 그 기록이 실려있다. 주로 진주성에서 싸우다 숨진 이들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그들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특히 3장사(三壯士)라 일컫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을 그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정충단은 이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2년(1686)에 마련한 제단으로, 비도 이때 함께 건립되었다. 비문은 이민서가 글을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만중이 썼다. 비의 옆에는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전공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호)가 함께 서 있다. (출처:문화재청)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록해 놓은 비로, 일명 ‘진주전성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불리우며, 현재 진주성내에 비각을 마련하여 모시고 있다.
김시민(1554∼1592)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비문에는 1천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하나, 다른 기록에는 3,800여명의 병력이 왜군 2만여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되어 있다.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길목이 되던 이곳을 지킴으로써 왜적의 호남진출을 막아내어, 불리했던 당시의 상황을 뒤집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비는 받침대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조선시대 석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광해군 11년(1619) 7월에 비를 세웠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1987년에는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해주기 위해, 비의 뒷편에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을 건립해 놓았다.(출처:문화재청)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의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년(1593년)에 순국하신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1987년에 국란극복의 표상으로 건립하였다.
진주성 비석군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1번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인 제홍록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제말(?∼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웅천 ·김해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고, 성주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제홍록은 숙부와 더불어 전공을 세웠으며, 이순신 휘하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하였다.
비의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은 등부분에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튀어나온 눈을 강조하여 토속적인 느낌이 든다. 머릿돌에는 서로 엉킨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맞대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있게 조각되어 있다. 그 밑면에는 국화무늬를 장식하여 마무리하고 있다. 비문에는 제말장군과 제홍록의 공적을 적어 놓았다.
정조 16년(1792) 이조판서 서유린에게 글을 짓게 하여 비를 세웠다. 일제시대 때 일본관헌에 의해 비각이 헐리어 방치되었다가 1961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비각도 새로 지었다.(출처:문화재청)
고려충절신 증 시랑 하공진 사적비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하공진은 자신을 볼모로 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 하공진의 이와 같은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1969년에 하공진의 후손이 건립하였다.
하공진(河拱辰, ? ~1011년)은 고려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이고, 진주 하씨(河氏)의 시조이다.
청계서원
삼일독립운동 기념비
의기사(義妓祠.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의기사는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경종 2년(1722)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출처: 문화재청)
논개의 영정
현재의 논개의 영정은 2008년 5월 새로 봉안된 것이다. 1960년 의기사가 중건된 후 봉안되어 왔던 기존의 논개의 영정은 복식과 머리 모양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논란이 있어, 진주시와 논개의 고향 지자체인 장수군은 공모를 통해 영정 전문작가에게 새로운 영정를 의뢰했고, 2008년 1월 국가표준 영정 제79호로 지정 받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정 속 논개는 열 손가락에 열개의 가락지를 끼고 오늘의 우리를 맞는다. 조선시대 전통 영정기법으로 제작된 새 영정은 비단 바탕에 천연 채색된 전신 입상으로, 거사를 결심한 그녀의 의로운 기세가 역력하다. 충남대 윤여환 교수의 작품이며, 정본은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어우당 유몽인이 야담 :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흩어지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매무새를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앞에 서 있었는데, 아래는 깊은 강물로 바로 떨어지는 데였다. 수많은 왜적들이 보고 좋아라 했지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씩씩하게 다가왔다. 논개가 웃음 지으며 맞이하니 왜장이 꾀이면서 끌어내려 하자 논개가 마침내 왜장을 끌어안고 바로 강물로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義 妓 祠 感 吟
의기사의 느낌을 읊음(義妓祠感吟)
(의기사에 걸린 산홍의 시는 논개의 사당을 참배하고 난 뒤 읊은 시)
千 秋 汾 晉 義
雙 廟 又 高 樓
羞 生 無 事 日
笳 鼓 汗 漫 遊
本州妓 山紅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진주 기녀 산홍 : 모습과 예능을 갖추어 빼어났다. 이지용(李址鎔)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으로 삼고자 하니 산홍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五賊)의 우두머리라 합니다. 내가 비록 비천한 기녀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사람일진대 무엇 때문에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이지용이 크게 성이 나 몽둥이질을 했다.
이지용은 1905년 을사5적 중의 한 사람으로 세도가 하늘을 찌르는 내부대신이었다. 진주에 온 그가 산홍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내놓고 첩이 되어달라고 매달리자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楓川渡口水猶香
풍천나루 강물은 아직도 향기로우니
濯我鬚眉拜義娘
머리와 수염을 깨끗이 씻고 의로운 논개에게 절하노라
惠質何由能殺敵
아름다운 성품으로 어떻게 적장을 죽였던가?
藁砧己自使編行
죽음을 각오한 채 거룩한 뜻을 단행했네
長溪父老誇鄕産
장계의 연로자들은 고향 사람이라 자랑스러워하고
矗石丹靑祭國殤
촉석루에서는 단청하고 순국함을 제사지낸다
追想穆陵人物盛
화려한 왕조 돌아보면 인물이 많다 하지만
千秋妓籍一輝光
기생이었어도 오랜 세월 그 이름 한결같이 빛나리
-매천 황현의 시-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선생 :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남 광양(光陽) 출생. 시문에 능하여 1885년(고종 22)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 향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융희 4)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진주 의암(晋州 義巖.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경남 진주시 논개길 16 (본성동))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이다.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현창하기 위해 영남사람들이 의암이라고 명명하였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1599∼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남쪽에는 한몽삼(韓夢參: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의 바닥 넓이는 3.65m×3.3m이다. 옆의 암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는 글이 새겨져 있다.(출처:문화재청)
진주의암사적비(晉州義巖事蹟碑.시도유형문화재 제353호 (진주시).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8 )
의암사적비는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 논개의 순국정신을 한층 더 흠모케 하고 있다. 이 비의 비문에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 자료)
비의 크기는 가로 60㎝, 세로 145㎝, 두께 15㎝이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양쪽에 풍판을 달았다. 비각에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남덕하의 글씨로 된 현판이 걸려 있다.(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비문에는 설화문학의 대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여 정리하고, 논개를 기리는 정식의 시가 함께 새겨져 있다.
어우당 유몽인이 야담에 이르기를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흩어지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매무새를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앞에 서 있었는데, 아래는 깊은 강물로 바로 떨어지는 데였다. 수많은 왜적들이 보고 좋아라 했지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씩씩하게 다가왔다. 논개가 웃음 지으며 맞이하니 왜장이 꾀이면서 끌어내려 하자 논개가 마침내 왜장을 끌어안고 바로 강물로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에 관기로 왜적을 만나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논개 하나에 그친 것이 아니지만 그 이름을 많이 잃어 버렸다. 죽음을 집에 돌아가듯이 보고 왜적에게 더럽히지 않으려 했으니 어찌 거룩한 임금의 백성들이 아니겠으며, 끝내 나라를 배반하지도 도적을 따르지도 않았으니 ‘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애달픈 일이로다” 하였다.
정식은 의암이라는 글씨를 쓴 정대융의 종손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獨肖其岩 特立其女
외로이 가파른 저 의암 그 바위 위에 우뚝이 선 저 논개여!
女非斯岩 焉得死所
저 여인인들 저 바위가 아니더면 죽은 곳을 그 어디에서 찾았으랴
岩非斯女 焉得義聲
저 바위인들 저 여인이 아니었던들 무엇으로 의롭다 이름 하였으리오
一江高岩 萬古芳心
남강 속에 외로운 의암이여! 만고에 꽃다운 논개의 이름이여!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호국사(護國寺.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진주성 안)
고려시대에 창건된 호국사의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이다. 고려시대 말기에 침입하는 왜구를 물리치고,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창건된 이 절은 임진왜란 때는 승병의 근거지였다.
숙종 임금은 1593년에 있었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나라를 지키는 절이라는 뜻의 ‘호국사(護國寺)’라는 이름을 내려 재건토록 했다.
근년 진주성을 정화할 때 일주문 터가 발견되어 새로 일주문을 건립했다.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이룩된 것이다. 진주성 내에 있는 사찰 호국사는 진주성 서장대 부근에 있으며, 사당 충렬사와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호국사는 전통사찰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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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주성 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