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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백자(經史百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제자(諸子) 백가(百家)의 서(書)라는 뜻으로, 많은 책을 이르는 말이다.
經 : 글 경
史 : 사기 사
百 : 일백 백
子 : 아들 자
이 성어는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보인다. 유종원의 인격과 학문과 청렴한 자세를 소개하면서 출입경사백자(出入經史百子)라고 했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제자(諸子) 백가(百家) 서(書)를 넘나들었다. 많은 책을 보았다는 뜻이다.
묘지명(墓誌銘)이란 고인의 덕을 칭찬하여 돌에 새겨서 관과 함께 묻는 문장이다.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은 유종원(柳宗元)의 유언에 따라 한유(韓愈)가 쓴 것으로, 조상의 일로부터, 그의 아버지의 공적, 그리고 유종원에 대한 경력과 성격과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당나라 성당(盛唐)의 문인 정치가인 한유(韓愈)가 그의 절친한 문우인 유종원(柳宗元)의 사망에 임해 지은 글로 자후(子厚)는 유종원의 자(字)이다. 유종원은 한유보다 5살 아래의 후배였으나 고문(古文)운동에 의기투합하여 이를 발전시키는데 힘을 합쳐 일한 지기(知己)였다.
한유가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있던 817년, 헌종(憲宗)의 불골(佛骨; 부처의 유골, 사리) 봉안을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미움을 받아 광동성 조주(潮州) 자사(刺史)로 좌천되어 가게 되어 이듬해 봄 임지에 도착했는데 그 도중에 유종원의 부음(訃音; 죽었다는 기별)을 듣게 되었다.
유종원은 이미 오래 전에 한유에게 자신이 먼저 죽으면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한 바 있었으므로 이에 따라 이 글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유종원 가문에 대한 내역을 소개하였다.
子厚 諱宗元.
자후 휘종원.
자후의 이름은 종원이다.
七世祖慶 爲拓跋魏侍中 封濟陰公.
칠세조경 위탁발위시중 봉제음공.
7대 선조 경(慶)은 탁발위시중으로 제음공에 봉해지셨었다.
曾伯祖奭 爲唐宰相 與褚遂良韓瑗 俱得罪武后 死高宗朝.
증백조석 위당재상 여저수량한원 구득죄무후 사고종조.
증백조이신 석(奭)은 당나라 재상을 지냈으나 저수량, 한원과 함께 측천무후에게 죄를 입고 고종 때 세상을 떠나셨다.
皇考諱鎭 以事母 棄太常博士 求爲縣令江南 其後以不能媚權貴 失御史.
황고휘진 이사모 기태상박사 구위현령강남 기후이불능미권귀 실어사.
부친 진(鎭)은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태상박사 직을 버리고 강남으로 가 현령이 되기를 청하였으며, 그 후에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다가 어사직을 잃으셨다.
權貴人死 乃復拜侍御史 號爲剛直 所與游 皆當 世名人.
권귀인사 내복배시어사 호위강직 소여유 개당 세명인.
그 권세가가 죽은 후에야 다시 어사로 부임 받았는데 강직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사귀는 사람들도 모두 당시의 유명 인사였다.
다음은 유종원의 인격과 학문과 청렴한 자세를 소개하였다. 여기에 경사백자(經史百子)라는 성어가 보인다.
子厚少精敏 無不通達.
자후소정민 무불통달.
자후는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해서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逮其父時 雖少年 已自成人 能取進士第 嶄然見頭角 衆謂 柳氏有子矣.
체기부시 수소년 이자성인 능취진사제 참연현두각 중위 유씨유자의.
부친의 생존시에 비록 소년이었으나 이미 성인이 되어 진사과에 급제함으로써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뭇사람들이 유씨(柳氏)씨 집안에 자식다운 자식이 있다고 했다.
其後以博學宏詞 授集賢殿正字.
기후이박학굉사 수집현전정자.
그 후, 박학굉사과에 합격, 집현전 정자를 지냈다.
儁傑廉悍 議論證據今古 出入經史百子.
준걸렴한 의논증거금고 출입경사백자.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고 청렴 용맹하였으며, 의논할 때에는 고금의 전적에 근거하여 경서와 사서, 제자백가서를 넘나들었다.
踔厲風發 率常屈其座人 名聲大振 一時皆慕與之交.
탁려풍발 솔상굴기좌인 명성대진 일시개모여지교.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롭고 기세 있게 의논하여 그곳에 있는 자들을 굴복시켜 명성이 떨치자 모두 그를 존경하여 교제하기를 원했다.
諸公要人 爭欲令出我門下 交口薦譽之.
제공요인 쟁욕령출아문하 교구천예지
여러 공직의 요인들이 앞다투어 사귀고자 하며 칭찬하고 추천하였다.
다음은 유종원의 벼슬 과정을 소개했다.
貞元十九年 由藍田尉拜監察御史.
정원십구년 유남전위배감찰어사.
정원 19년(803년), 그는 남전현의 위(尉)에서 감찰어사로 임명되었다.
順宗卽位 拜禮部員郞 遇用事者得罪 例出 爲刺史.
순종즉위 배예부원랑 우용사자득죄 예출 위자사.
순종(順宗)이 즉위하자 예부원외랑이 되었으나 권력자를 만나 죄를 얻어 전례에 따라 자사로 좌천되었다.
未至 又例貶永州司馬.
미지 우례폄영주사마.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또 좌천되어 영주사마가 되었다.
居閑 益自刻苦 務記覽 爲詞章 汎濫停蓄 爲 深博無涯사 而自肆於山水間.
거한 익자각고 무기람 위사장 범람정축 위 심박무애사 이자사어산수간.
한가(閑暇)하자 각고의 노력을 더해, 보고 적기에 힘썼으며 문장과 시를 지으면 물이 넘쳐흐르듯 하고, 깊고 넓어 끝이 없었고 스스로 산수간(山水間)을 즐겼다.
다음은 유종원의 유주자사의 행적을 소개하였다.
元和中 嘗例召至京師 又偕出爲刺史 而子厚得柳州 歎曰 是豈不足爲政邪?
원화중 상례소지경사 우해출위자사 이자후득류주 탄왈 시기불족위정사?
원화 연간에 전례에 따라 서울로 불려 돌아왔으나 또 좌천되어 유주자사로 가게 되자 탄식하며 말하길 “어찌 바로 잡지 못하겠는가?”
因其土俗 爲設敎禁 州人順賴.
인기토속 위설교금 주인순뢰.
그곳의 토속, 습관에 맞게 가르치고 금하자 고울 사람들이 순종하고 의지했다.
其俗以男女質錢 約不時贖 子本相侔 則沒爲奴婢.
기속이남녀질전 약불시속 자본상모 즉몰위노비.
그곳 관습에 의하면 돈을 빌려줄 때에 채무자의 자녀들을 인질로 삼아 약속대로 갚지 못하여 원리금이 같아지면 자식을 빼앗아 노비로 삼았다.
子厚與說方計 悉令贖歸 其尤賓力不能者 令書其傭 足相當 則使歸其質.
자후여설방계 실령속귀 기우빈력불능자 영서기용 족상당 즉사귀기질.
이에 자후가 방법을 꾀하여 자녀들이 돌아오도록 하였으니 가난하여 능력이 없는 자는 품삯으로 고용케 하였고, 품삯과 빌린 돈이 같아지면 전당잡은 자녀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觀察使下其法於他州 比一歲 免而歸者且千人.
관찰사하기법어타주 비일세 면이귀자차천인.
관찰사께서 이 방법을 다른 고을에서도 시행한 바 1년이 되자 노비의 신분을 벗고 집으로 간 사람이 거의 천 명이나 되었다.
衡湘以南 爲進士者 皆以子厚爲師.
형상이남 위진사자 개이자후위사.
형주와 상주 이남에서 진사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은 모두 자후를 스승으로 섬겼다.
其經承子厚口講指畵 爲文詞者 悉有 法度可觀.
기경승자후구강지화 위문사자 실유 법도가관.
그들은 자후가 입으로 설명하고 그림을 통해 가르치는 것을 마치 경전인듯이 받들어서 문장을 지었다.
다음은 유종원의 유주자사의 행적을 소개하였다.
其召至京師 而復爲刺史也 中山劉夢得禹錫 亦在遣中 當詣播州.
기소지경사 이복위자사야 중산류몽득우석 역재견중 당예파주.
경성으로 부름 받았다가 다시 유주자사로 갈 때, 중산사람 유우석(몽득)도 좌천되어 파주(播州)자사로 가야만 했다.
子厚泣曰 播州 非人所居 而夢得親在堂 吾不忍夢得之窮 無辭以白其大人.
자후읍왈 파주 비인소거 이몽득친재당 오불인몽득지궁 무사이백기대인.
且萬無母子俱往理 請於朝 將拜疏 願以柳易播 雖重得罪 死不恨.
차만무모자구왕리 청어조 장배소 원이류역파 수중득죄 사불한.
자후는 눈물을 흘리며, “파주는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닌데, 몽득은 노모마저 계시지 아니한가. 나는 차마 몽득의 궁(窮)함을 볼 수 없으며, 그 노모께 아뢸 말이 없음을 차마 볼 수 없다. 또 모자가 함께 갈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 내 조정에 청하여 유주자사와 파주자사를 서로 바뀔 것을 원하여 비록 이것으로 중하게 죄를 얻어 죽는다 해도 원망하지 않으리라.”하였다.
遇有以夢得事白上者 夢得於是改刺連州.
우유이몽득사백상자 몽득어시개자연주.
마침 유우석의 사정을 황상께 아뢴 사람이 있어 다행히 몽득은 연주(連州)자사로 바뀌어 파견되었다.
다음은 참된 우정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嗚呼! 士窮乃見節義.
오호! 사궁내견절의.
아아! 사람이란 곤궁할 때 비로소 진정한 절의가 나타나는 법이다.
今夫平居里巷相慕悅 酒食游戱相徵逐 詡詡强笑語 以相取下.
금부평거리항상모열 주식유희상징축 후후강소어 이상취하.
평상시에는 서로 아껴주며 주연이나 오락에 서로 부르고 불려가며 농담도 하고 사양도 하면서 지낸다.
握手出肺肝相示 指天曰涕泣 誓生死不相背負 眞若可信.
악수출폐간상시 지천왈체읍 서생사불상배부 진약가신.
그러다가 때로는 서로 손을 맞잡고 간과 쓸개를 서로 꺼내 보이면서[간담상조] 하늘을 가리켜 결코 죽어도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하여 참으로 믿을 것처럼 한다.
一旦臨小利害 僅如毛髮比 反眼若不相識.
일단임소리해 근여모발비 반안약불상식.
그러나 하루아침에 터럭만큼의 이해관계에라도 얽히면 마치 서로 모르는 듯 눈을 부라리며 반목하는 것이 보통이다.
落陷穽不一引手救 反擠之 又下石焉者 皆是也.
낙함정불일인수구 반제지 우하석언자 개시야.
함정에 빠져도 그 사람을 구해 주기는 커녕 도리어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 또 심지어 돌까지 던지는데 거의가 다 이러하다[낙정하석].
此宜禽獸夷狄所不忍爲 而其人自視以爲得計.
차의금수이적소불인위 이기인자시이위득계.
이는 짐승들이나 오랑캐들도 차마 하지 못하는 바이나 그들 스스로는 이를 똑똑한 계책이라고 여긴다.
聞子厚之風 亦可以 少媿矣.
문자후지풍 역가이 소괴의.
그러다가 자후의 풍격에 관해 듣는다면 조금은 부끄러워 할 것이다.
다음은 유종원의 몸가짐을 소개했다.
子厚前時年 勇於爲人 不自貴重顧藉 爲功業可立就 故坐廢退.
자후전시년 용어위인 불자귀중고자 위공업가립취 고좌폐퇴.
자후는 젊었을 때 남을 위해 용감했고, 자신을 중히 여기지 않아야 일이 이루어진다고 여기다가 죄를 입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旣退 又無相 知有氣力得位者推挽 故卒死於窮裔 材不爲世用 道不行於時也.
기퇴 우무상 지유기력득위자추만 고졸사어궁예 재불위세용 도불행어시야.
쫓겨난 후, 그를 알아 줄 사람도 없었고 권세가의 천거나 당겨줌도 없어 궁벽한 변경에서 마침내 돌아 갔으니 아까운 인재가 쓰임을 받지 못했고 올바른 도(道)가 통하지 않았다.
使子厚在臺省時 自持其身 已能如司馬刺史時 亦自不斥.
사자후재대성시 자지기신 이능여사마자사시 역자불척.
만약 자후가 상서성에 있을 때에 자신의 몸가짐을 사마나 자사로 있을 때처럼 하였다면 배척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斥時有人力能擧之 且必復用不窮.
척시유인력능거지 차필복용불궁.
추방당한 때에도 능력 있는 자가 추천하였다면 등용되어 궁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然子厚斥不久 窮不極 雖有出於人 其文學辭章 必不能自力以致 必傳於後如今 無疑也.
연자후척불구 궁불극 수유출어인 기문학사장 필불능자력이치 필전어후여금 무의야.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자후가 추방당한 것이 길지 아니하고 또 그 어려움이 극에 달하지 않았다면, 비록 학문과 문장이 뛰어 났어도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지금처럼 후세에 전해질 정도로 될 수 없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雖使子厚得所願 爲將相於一時 以彼易此 孰得孰失 必有能辨之者.
수사자후득소원 위장상어일시 이피역차 숙득숙실 필유능변지자.
만약 자후가 소원을 이루어 한 시대의 장수와 재상이 되었다면, 한 때의 장수와 재상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과 후세에 문장이 전해지도록 하는 것을 바꾼다면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릴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다음은 유종원의 가족관계와 귀장(歸葬) 과정을 소개했다.
子厚以元和十四年 十一月八日卒 年四十七.
자후이원화십사년 십일월팔일졸 년사십칠.
자후는 원화 14년(819년) 11월 8일에 별세했는데 그 연세가 마흔 일곱이었다.
以十五年七月十日 歸葬萬年先人墓側.
이십오년칠월십일 귀장만년선인묘측.
원화 15년(820년) 7월 10일 선인(先人)의 묘 옆에 귀장(歸葬)되었다.
子厚有子男二人 長曰周六 始四歲 季曰周七 子厚卒乃生 女子二人 皆幼.
자후유자남이인 장왈주륙 시사세 계왈주칠 자후졸내생 여자이인 개유.
자후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큰 아들 주육은 겨우 네 살이고 작은 아들 주칠은 자후 별세 후 태어났고, 딸 둘은 모두 나이가 어리다.
其得歸葬也 費皆出觀察使河東裴君行立.
기득귀장야 비개출관찰사하동배군행립.
귀장(歸葬)비용은 하동관찰사인 배행립께서 내셨다.
行立有節槪 重然諾 與子厚結交 子厚亦爲之盡 竟賴其力.
행립유절개 중연낙 여자후결교 자후역위지진 경뢰기력.
행립께서는 지조가 있어 승낙을 신중히 하는 분으로 이분과 자후는 친분관계가 두터워 자후 또한 그를 위해 온힘을 다하니 돌아가신 후에 그의 도움을 받았다.
葬子厚於萬年之墓者 舅弟盧遵 遵.
장자후어만년지묘자 구제노준 준.
자후를 만년현 선조묘지에 장례를 치른 사람은 외사촌동생인 노준이다.
涿人 性謹愼 學問不厭
탁인 성근신 학문불염.
이분은 탁주출신으로 성격이 신중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自子厚之斥 遵從而家焉 逮其死不去.
자자후지척 준종이가언 체기사불거.
자후가 좌천된 이후에도 줄곧 함께 살면서 죽을 때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다.
旣往葬子厚 又將經紀其家 庶幾有始終者.
기왕장자후 우장경기기가 서기유시종자.
자후를 안장한 후에도 그를 대신하여 집안을 다스렸으니,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銘曰 是惟子厚之室 旣固旣安 以利其嗣人.
명왈 시유자후지실 기고기안 이리기사인.
묘비명에 말한다. “여기가 자후의 집이다. 견고하고 안전하니 그의 후손들에게 이로움이 있으리라”
이 묘지명은 한유(韓愈)가 원주자사(袁州刺史)로 재임하던 당 헌종 15년(820년)에, 벗 유종원의 귀장(歸葬)에 지은 것이다. 고인의 덕을 칭송하여 돌에 새겨 관에 묻거나 관 앞에 세우는 것으로, 출생에서 조상의 일과 공적, 그리고 망인의 경력과 성격, 업적 등을 기록한다.
이 작품은 묘지명(墓誌銘)의 명편으로 내세우는 것은, 망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동시에 담아 왜곡된 세태에 대한 비판을 준엄하게 나타내고 있다.
▶ 經(경)은 형성문자로 経(경)의 본자(本字), 经(경)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실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巠(경; 세로로 곧게 뻗은 줄)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옷감 짜는 날실, 씨실인 緯(위)에 대하여 일컬음이다. 經(경)은 경서(經書), 불경(佛經), 주기도문(主祈禱文), 판수가 외는 기도문(祈禱文)과 주문(呪文), 피륙에 세로 방향으로 놓여 있는 실인 날실, 경도(經度), 경선(經線) 등의 뜻으로 지나다, 목매다, 다스리다, 글, 경서(經書), 날, 날실, 불경, 길, 법, 도리, 땅의 가장자리, 경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스릴 리/이(厘), 다스릴 발(撥), 다스릴 섭(攝), 다스릴 치(治), 지날 력/역(曆), 경영할 영(營), 다스릴 리/이(理), 지날 과(過),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씨 위(緯)이다. 용례로는 액운이 지나감을 경겁(經劫), 약이나 세균 따위가 입을 통하여 몸 안으로 들어감을 경구(經口), 종교의 교리를 적은 글 또는 성인의 말이나 행실을 적은 글을 경전(經典), 경전과 그것의 해석서를 경전(經傳), 나라를 다스림을 경국(經國), 계속하여 그치거나 변하지 않음을 경상(經常), 두 지점의 정도의 차이를 경차(經差), 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을 경학(經學), 현재까지 직업 상의 어떤 일을 해 오거나 어떤 직위나 직책을 맡아 온 경험을 경력(經歷), 경전을 실은 문장을 경문(經文), 인류가 재화를 획득하여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활동을 경제(經濟), 계획을 세워 사업을 해 나감을 경영(經營), 주로 회계 및 급여에 관한 사무의 처리를 경리(經理), 시비나 선악이 분간되는 한계를 경계(經界), 거치어 지나감을 경유(經由), 오장 육부에 생긴 병이 몸 거죽에 나타나는 자리를 경락(經絡), 경락에 있어서 침을 놓거나 뜸을 뜨기에 알맞은 곳을 경혈(經穴), 나라를 다스리는 큰 사업을 경국대업(經國大業), 나라 일을 경륜하고 세상을 구제함을 경국제세(經國濟世), 세사를 잘 다스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함을 경세제민(經世濟民), 온 세상을 다스림을 경천위지(經天緯地), 세상을 다스려 나갈 만한 재주를 경세지재(經世之才) 등에 쓰인다.
▶ 史(사)는 회의문자로 㕜(사)는 고자(古字)이다. 中(중)과 又(우; 손)의 합자(合字)로, 中(중)은 신을 모실 때 쓴 나뭇가지, 또 천문(天文)을 조사할 때 쓰는 계산용 막대이고, 又(우)는 손, 손에 가지다의 뜻으로, 나중에 천문이나 나랏일을 기록하는 관리라는 말에서, 기록, 역사의 뜻이 되었다. 그래서 史(사)는 사기(史記), 역사, 기록된 문서, 사관(史官;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거나 국가의 공문서 작성을 맡은 사람), 문인(文人), 문필가, 서화가, 화사하다, 꾸밈이 있어 아름답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역사에 정통한 사람을 사가(史家), 역사를 편수하는 관리를 사관(史官),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사실(史實), 역사로 전하여 내려온 기록을 기초로 하여 쓴 전기를 사전(史傳), 간략하게 기술한 역사을 사략(史略), 역사의 연구 편찬에 필요한 문헌이나 유물을 사료(史料), 사초를 쓰던 신하를 사신(史臣), 사관이 될 만한 재능을 사재(史才), 사관이 역사를 기록하는 필법을 사필(史筆), 사서를 쓴 관계로 인하여서 입는 화를 사화(史禍), 역사적 현상을 전적으로 파악하여 이것을 해석하는 입장을 사관(史觀), 역사를 기록한 책을 사기(史記), 역사에 관해 적은 기록을 사록(史錄), 역사에 관한 주장이나 이론을 사론(史論), 역사의 개요 또는 그것을 쓴 책을 사요(史要), 역사 상으로 남아 있는 중대한 사건이나 여러 가지 사실의 자취를 사적(史蹟), 역사 상의 사실과 일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사화(史話),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을 사학가(史學家),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시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사적지(史跡地),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재(才), 학(學), 식(識)의 세 가지 장점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사유삼장(史有三長) 등에 쓰인다.
▶ 百(백)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音)을 나타내는 흰 백(白; 희다, 밝다)部와 一(일)의 뜻을 합(合)하여 일백을 뜻한다. 百(백)은 열의 열 곱절, 아흔 아홉에 하나를 더한 수(數), 일백(一百)의 뜻으로 백 번, 여러, 모두, 모든, 온갖, 백 배 하다 등의 뜻과 힘쓰다(맥), 노력하다(맥)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백 번째의 대 또는 오래 이어 내려오는 여러 세대를 백대(百代), 백 갑절을 백배(百倍), 여러 가지의 일이나 온갖 일을 백사(百事), 백 대의 수레를 백승(百乘), 백 사람이나 갖가지로 다른 많은 사람을 백인(百人), 어떤 수를 백으로 나눔을 백분(百分), 언제든지 이김을 백승(百勝), 여러 가지로 많이 나옴을 백출(百出), 많은 가족 또는 여러 가지 변명을 백구(百口), 일반 국민을 백성(百姓), 여러 학자들이나 작가들을 백자(百子), 높고 낮은 모든 벼슬아치를 백관(百官), 온갖 과일을 백과(百果), 온갖 방법이나 갖은 방법을 백방(百方), 모든 것 또는 여러 가지를 백반(百般), 여러 사람이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일을 백가쟁명(百家爭鳴), 몇 백년 후까지도 마멸 되지 않고 남음을 백고불마(百古不磨), 오래 전부터 가깝게 지내오는 일가 사이의 친분을 백대지친(百代之親), 여러 가지 좋은 맛으로 만든 음식을 백미음식(百味飮食), 모든 일이 다 실패됨 또는 아무 일도 아니 됨을 백사불성(百事不成), 모든 일이 뜻대로 됨을 백사여의(百事如意), 해롭기만 하고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음을 백해무익(百害無益), 후세까지 오래도록 모든 사람의 스승으로 숭앙되는 덕과 학문이 높은 사람이라는 백세지사(百世之師) 등에 쓰인다.
▶ 子(자)는 상형문자로 어린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아들을 뜻한다. 지금의 子(자)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글자가 합쳐져 하나가 된 듯하다. 지지(地支)의 첫째인 子와 지지(地支)의 여섯째인 巳(사)와 자손의 뜻이나 사람의 신분이나 호칭 따위에 쓰인 子가 합침이다. 음(音)을 빌어 십이지(十二支)의 첫째 글자로 쓴다. 子(자)는 ①아주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어 ②신문이나 잡지 따위 간행물의 어느 난을 맡은 기자가 자칭할 때 쓰는 말 ③십이지(十二支)의 첫째 쥐를 상징함 ④자방(子方) ⑤자시(子時) ⑥글체에서 그대의 뜻으로 쓰이는 구투(舊套) ⑦글체에서, 아들의 뜻으로 쓰이는 말 ⑧민법상에 있어서는 적출자(嫡出子), 서자(庶子), 사생자, 양자(養子)의 통틀어 일컬음 ⑨공자(孔子)의 높임말 ⑩성도(聖道)를 전(傳)하는 사람이나 또는 일가(一家)의 학설을 세운 사람의 높임말, 또는 그 사람들이 자기의 학설을 말한 책 ⑪자작(子爵) 등의 뜻으로 아들, 자식, 첫째 지지(地支), 남자, 사람, 당신, 경칭(敬稱), 스승, 열매, 이자(利子), 작위(爵位)의 이름, 접미사(接尾辭), 어조사(語助辭), 번식하다, 양자로 삼다, 어리다, 사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여자 녀/여(女), 어머니 모(母), 아버지 부(父)이다. 용례로는 아들과 딸의 높임말을 자녀(子女), 며느리 또는 아들의 아내를 자부(子婦), 아들과 사위를 자서(子壻), 아들과 손자 또는 후손을 자손(子孫), 아들과 딸의 총칭을 자식(子息), 남의 아들의 높임말을 자제(子弟)십이시의 첫째 시를 자시(子時), 밤 12시를 자정(子正), 새끼 고양이를 자묘(子猫), 다른 나라의 법률을 이어받거나 본떠서 만든 법률을 자법(子法), 모선에 딸린 배를 자선(子船),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자막집중(子莫執中),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을 자모지심(子母之心), 듣고 본 것이 아주 좁고 고루한 사람을 일컫는 자성제인(子誠齊人),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는 자위부은(子爲父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