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81]절기節氣가 대체 무엇이길래?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바람도 불고 선선하기까지 하다. 처서處暑가 지나가니 모든 게 확실히 달라졌다. 처서는 ‘더위를 처분하다’는 뜻이런가? 하늘은 역시 뭉게구름과 함께 저처럼 깨끗하고 드높아야 진짜 하늘이다. 그 뜨겁던 폭염도 드디어 꺾인 듯하다. 이런 현상을 ‘처서 매직magic’라고 한단다. 폭염과 습도로 무더웠던 날씨가 갑자기 마술魔術처럼 조석으로 시원해지니 그럴 듯한 신조어이다. 오늘 아침, 친구가 김종길의 ‘또 한여름’이라는 멋진 시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소나기 멎자/매미소리/젖은 뜰을/다시 적신다//비 오다 멎고/매미소리/그쳤다 다시 일고//또 한여름/이렇게 지나가는가//소나기 소리/매미소리에/아직은 성한 귀/기울이며//또 한여름/이렇게 지나가는가>
그렇다. 이렇게 한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어정 칠월/건들 팔월’(어정거리며 7월을 보내고 건들거리면서 8월을 보낸다는 뜻)이 지나가고 있다. 최근 재밌는 말을 들었다. 고추도 끝물이라는데, 이때쯤 되면 고추 안에 든 고추씨가 유난히 많다고 한다. 어떻게든 씨를 남기려 함인가? 가지도 그렇다. 그동안 잘 열지 않던 가지가 마구마구 달리고 있다. 식물도 이제 곧 ‘제 시절’이 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리라. 흔히 처서가 지나면 풀이 안자라기에 벌초를 한다지만, 안자라는 것은 아니고, 이때쯤의 풀들은 예전보다 몇 배 더 그악스럽게(모지락스럽게) 자란다고 한다. 막바지 ‘발악’이라도 하는 것일까? 식물들의 생식(생존) 본능도 이와 같이 무섭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의 생존(생식) 본능은 어떠할까? 그 본능이 탐욕이란 옷으로 갈아입고, 얼마나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일으키던가? 쯧쯧쯧. 출세욕, 권력욕, 재산욕, 부의 세습 등에 택도 없는 명예욕까지 더해지니 오로지 흉하고 추하기만 할 따름인 것을. 가을하늘을 우러르며 ‘반성’을 하면 안될까?
아무튼, 절기가, 그것도 24절기가 오묘하다. 절기는 농촌생활의 필수지식이다. 절기를 모르면 농사를 짓기 어렵다. 콩은 하지 전후 닷새에, 무 배추는 처서 전후 닷새에 심어야 한다고 한다. 농촌에 산 지 5년째인데도 솔직히 24절기를 모른다. 초등학교 문턱도 가지 않은 할머니들도 꿰고 있는 것을. 10여년 전, 절기를 본격적으로 배워보려고 외우기까지 했건만, 도시의 삶은 절기를 몰라도 전혀 문제가 안되므로 ‘도로 새잽이’가 된 경험이 있다. 그때 써놓은 글을 발견했다. 흐흐. 그때의 졸문을 축약하여 싣는 까닭은 ‘이제 철들 때도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 어른들이 ‘철도 모르는 놈’ ‘철들 때도 됐는데’하는 ‘철’은 24절기를 말한다. 철은 봄철, 여름철 하듯 한 계절의 동안을 이른다. 계절을 안다는 것은 천리를 알아 사리분별을 잘 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천리를 알지 못하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모두 6절기가 있다. 입하立夏, 두릅 더덕 등 산채나물이 입맛을 돋우는, 여름의 기운이 일어선다. 그 다음이 뭇 생물이 조금씩 차오른다는 소만小滿. 이제 씨앗(種)을 뿌려야(芒) 하는 망종이다. 다음 차례는 1년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이니, 뙈약볕에 하지감자를 캐자. 이제 벼이삭이 고물고물 나오려하고 채소도 웃자라 바쁜데 궂은 비가 간헐적으로 내리는 때의 절기가 ‘작은 더위’ 소서小暑이다. 이후 20여일간 폭염이 몰아닥치고 열대야에 시달리는 때 ‘큰 더위’ 대서大暑.
이제 가을이다.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입추立秋, 그 다음이 엊그제 지난 처서이다. 처는 (더위가) 그친다는 뜻이다. 하얀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가 세월의 길목에서 마중을 나온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秋分이 뒤를 잇는다. 백로 다음이 한로寒露이고, 조락凋落의 계절, 찬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이다. 겨울채비를 서두를 때이다.
동장군이 걸음을 재촉하는 입동立冬이 금방이니 김장을 해야 한다. 눈이 적게 올까 많이 올까, 소설小雪과 대설大雪이 이어진 후 동지冬至이다. 1년 중 밤이 가장 긴 날, 동지날 팥죽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작은 설’이다. 깊어가는 겨울밤 소한小寒 추위는 곧바로 오는 대한大寒 추위보다 더 매섭다고 했다.
이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봄은 용수철spring처럼 통통 튄다고 해서 스프링인가. 한 모금 청량한 옹달생spring이기도 하다. 설레는 봄의 문턱, 입춘立春이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입춘방을 붙이자.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물이 많아진다는 우수雨水, 개구리가 겨울잠을 끝내고 튀어나온다는 경칩驚蟄, 칩거(蟄)하던 벌레들이 놀람(驚) 깬다. <우수경칩에 대동강물이 풀린다>는 속담은 간헐적으로 이뤄지는 남북회담때마다 단골멘트이다. 다음에는 봄을 확실히 가르는 춘분春分이니 추분과 같이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 한 해 농사준비를 해야 한다. 살아나고(春), 무르익고(夏), 거두고(秋), 숨을 고르니(冬), 1년이 금세 지나간다. 날씨가 기가 막히는 청명淸明과 곡우穀雨로 24절기는 끝이 난다.
해의 길이를 참조해 만든 24절기(양력), 선조들의 지혜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방긋 웃는 꽃잎마다 송송송> 동요 <구슬비>는 누구나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이 노랫말에 맞춰 24절기를 한두 번 불러보면 금세 외울 수 있다고 했다. 자, 그 곡조로 한번 따라해보자.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 어떠하신가? 금세 외워지시는가>>
10여년 전에 쓴 졸문이어서 부끄럽지만, 24절기를 알리려는 뜻만은 순수하지 않은가. 좌우지간 가을이 코앞이다Fall is at hand. 횡재橫財를 영어로 windfall이라 한다. 가을바람에 잎이 우수수 떨어지듯, 내 인생에 ㅣ 가을 '뜻밖의 선물(횡재)'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