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78
5월2일[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부활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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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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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uU8JUpGCKU
김민회 시몬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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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아마도 의식주의 충족이겠지요.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삶을 얼마나 궁핍하고 비참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의식주가 어느 정도 충족되고 나면, 자연스레 추구하게 되는 것이 놀이 문화요 축제 문화입니다.
바닷가에 살다보니 실감합니다. 뷰가 좋은 캠핑장은 사시사철 호황입니다. 강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캠핑을 하길래, 살짝 봤더니, 텐트며 캠핑 도구들이 최첨단이었습니다. 얼마나 춥고 불편할까 걱정했었는데, 세상 따뜻하고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놀이 문화나 축제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 기념비가 될만한 큰 사건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면서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축제가 다른 이방인들의 축제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안티우쿠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유다 마카베오가 되찾은 후, 성전을 정화시키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승리의 날을 경축하고 기렸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도 이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복음 10장 24절)
유다인들의 어투를 참작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손톱만큼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던가 확신하며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강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빈정거리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자극해서 빌미 잡힐 말을 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만 골라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복음 10장 25~27절)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 말씀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더라면 유치원생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유다인들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존재들이군요.
오늘 다시 한번 알아들을 귀를 청합니다. 들은 바를 잘 실천할 힘도 덧붙여 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무이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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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구원의 원리: 그분을 내 안에 살게 하면 내가 그분 안에 살게 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자가 찾는 가톨릭 성지는 멕시코의 과달루페라고 합니다. 스페인은 멕시코 정복 당시 원주민들을 많이도 학살하였습니다. 멕시코시티 대성당 앞마당에는 그 성당을 짓도록 일을 시키고 나서 그들을 살해하여 매장한 원주민들의 유골이 아직도 묻혀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스페인과 함께 들어온 종교, 즉 가톨릭을 믿으려 했겠습니까? 10년이 지나도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이들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안 디에고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시고 나서는 10년 동안 700만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은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 당신 발현할 당시의 모습을 새겨 넣어 주셨습니다. 그 망토에 그려진 성모님의 모습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닙니다. 그 색감을 내는 물감의 재료도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적외선으로 아무리 찾아보아도 스케치를 하거나 붓질을 한 증거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물감으로 그렸다면 그렇게 선명한 색채를 500년이나 유지할 수 없고, 또한 선인장 섬유로 만든 망토도 15년이면 썩어버리지만, 지금까지 기적적으로 건재합니다. 또한 그림에도 수많은 원주민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보고 그 여인이 자신들이 믿어오던 ‘달의 여신’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같은 그림이 태양을 등지고 달을 밟고 선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인, 즉 성모님으로 보입니다.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비엠(IBM)회사에 근무했던 호세 아스테 돈스만 박사는 1979년 원래의 성화를 고화질 영상으로 스캐닝해 냈고, 그 디지털 영성에서 잡티를 제거하자 성모님의 양쪽 눈에 많은 사람의 형상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홍채와 동공에서 최소 13명의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후안 디에고가 성모님께서 따 주신 장미를 망토에 싸고 와서 주교님 앞에서 펼쳐 보여줄 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두드러진 얼굴이 바로 후안 디에고의 얼굴입니다. 후안 디에고는 자신이 본 성모님을 증거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모님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믿고 받아들인 성모님이 그의 망토 안으로 들어와 새겨진 것입니다.
우리도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집이 되어주는 그 사람에게 절대 해를 입히시거나 다른 이들이 해를 입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부모가 자기 아들이 해를 입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살게 되며 그분의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모님도 후안 디에고의 가슴 안에 당신이 들어가시는 것을 넘어서서 그렇게 당신을 받아주시는 후안 디에고를 당신 눈에 넣으신 것입니다. 어머니로서 당신과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을 동시에 받아들인 디에고를 어찌 당신 눈처럼 지켜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이 하느님이 내 안에 사시고 내가 하느님 안에 살게 되는 구원의 신비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간은 예루살렘의 성전 봉헌 축제일이였습니다.(제가 틀리지 않는다면) 이 축제는 마카베오 가문이 그리스인들의 예식으로 황폐화된 성전을 재건하여 제단을 다시 쌓고 하느님께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성전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 성전은 바로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우리가 마련하는 하느님의 집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을 성전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말로는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자신들의 불신을 그리스도께서 확실히 말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분 핑계로 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 양들이 아니므로 당신을 믿지도 그래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십니다. 당신의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목자의 힘 안에 놓이게 되어 안전하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받아들이면 당신의 아버지는 너무나도 위대하시어 당신을 받아들인 이들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노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신이 구원받을 배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분을 먼저 받아들여야 그분 보호 안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성전에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받아들이는 동시에 하느님의 성전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리고라는 동네엔 정탐꾼 여호수아(예수와 이름이 같음)와 동료를 숨겨준 라합이라는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해준 덕에 이스라엘이 예리고를 칠 때 라합과 그의 일가족은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라합이 약속대로 창문 밖으로 붉은 줄을 매달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붉은 줄은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흘려야 하는 나의 ‘피’의 상징입니다.
그렇게 그분을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 그를 또한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받아들여 주셨기에 당신 아들을 잉태한 성모님을 또한 돌에 맞아 죽지 않도록 천사를 보내시어 구해주시고 헤로데가 죽이려 할 때도 피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시기에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성모님을 지켜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진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만 하느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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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시고 하고,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저도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나올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0년 전에 아버지는 54살에 돌아가셨는데 성주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2년 후에 딸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는데 아버지의 기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성 금요일에 아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는데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성 주간에 그것도 성 금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으니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작년에 형제님과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부부는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있었던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성 금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형제님도 예수님께서 낙원으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였고,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또한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만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해준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평화롭고, 서로 아껴 주며,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고난 중에도 절망하지 않았고, 세상의 가치에 연연해 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존중의 말이었고, 칭찬의 말이었고, 닮고 싶은 이름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삶으로 보여준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새롭게 묵상하고 있는지, 하느님의 말씀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고 있는지, 가난한 이들을 먼저 선택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사랑과 존경을 가득 담아서 부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병자입니까? 하느님을 믿었으면서도 세상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병자입니다. 육신은 건강해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 영적으로 병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느님과 함께하면 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를 풀고 하얀 소복을 입고 길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 중에도 마귀의 유혹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귀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돈 마귀 때문에 성당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만의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교만함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커다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세 번째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소식은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등대가 되어 험한 풍랑 속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나침판이 되어서 지친 이들에게,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나였듯이, 우리들도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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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22-30: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성전 봉헌 축제 기간 중 유다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하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이미 여러가지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우리가 참으로 양 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르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알아듣는다는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마태 5,9 참조).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바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하셨으며,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손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하느님으로서 하나이며, 이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아버지와 나는 두 위격으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간의 사랑으로 하나이시다. 바로 성령 안에 하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한 모습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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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3-24)
여기서 유대인들이 한 말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확보하려고 한 말입니다. 앞의 9장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요한 9,22) 회당에서 내쫓는다는 말은 ‘파문’을 뜻합니다.
<그 일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단’이다.”라고 판단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말한 것은, 메시아라고 자칭했음을 자백하라고 강요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도 기도할 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당신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면(정말로 저를 사랑하신다면) 저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도를 바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기도는 겸손하게 간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것을(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것 같은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신앙인이 자기의 사정을 모두 주님께 말씀드리고,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정을 언제 어떻게 해결해 줄 것인지는, 즉 기도의 결과는 주님을 믿고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5-30)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믿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싫어했을까? 시골의 가난한 목수라는 편견 때문일 수도 있고, 회개하라는 말씀이 듣기 싫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세속의 복’을 주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으시고 ‘영적인 구원’만 말씀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25절의 “너희는 믿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왜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26절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나를 믿어서 나의 양이 되어라.”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양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자가 주는 생명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주는데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거부해서 못 받게 됩니다.>
27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양이 되려는 사람들과 이미 예수님의 양이 되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지침’입니다.
1)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이 말씀은 당신의 ‘목소리만’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들은 다음에는, ‘들은 것’을 실천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2) “나는 그들을 알고” 이 말씀은 당신 양들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의 양들을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뜻과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3) “그들은 나를 따른다.” 이 말씀은 “너희는 언제나 항상 나를 따라라.”라는 뜻입니다. 양들이 목자의 뒤를 따라가듯이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소리를 듣는 사람은 목자의 뒤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서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28절의 말씀은 ‘약속’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으로서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주권은 영원하고 절대적임을 강조하신 말씀인데, 여기서 ‘아무도’라는 말은, ‘악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을 가리킵니다. 그것들은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9절의 말씀은, 당신의 구원사업은 곧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사업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28절의 ‘내 손에서’ 라는 말이 29절에서는 ‘내 아버지의 손에서’라는 말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절대자이신 분이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거나 방해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30절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은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뜻인데,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라는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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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우상 숭배로 더럽힌 예루살렘 성전을,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다시 정화하여 하느님께 봉헌한 일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자신을 ‘에피파네스’(신의 현현)라 일컫던 안티오코스 4세가 저지른 신성모독을 모든 이가 뼈저리게 되새기던 그날 그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목숨을 건 정면 승부였습니다. 이러한 ‘도발’을 서슴지 않으신 것은 유다인들과 나누는 마지막 대화이며, 그들이 진리와 생명으로 돌아서기를 간절히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목숨을 앗아갈 셈이오?(직역)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 대답은 이미 예수님께서 지금껏 거듭 밝혀 오셨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분의 대답을 듣고 난 뒤 돌로 치려고 한 것을 보면(10,31 참조) 그들은 처음부터 불신과 완고함을 거둘 뜻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불신앙을 주님 탓으로 돌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을 ‘내 숨통을 조이시는 분’으로 여기며,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듣거나 보면서도 자신을 더 설득해 보라며 멀찍이 서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도 실천 없이 기대만으로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의 양들은 당신 곁에서 귀 막고 있는 유다인들이 아닌, 용기와 결단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 응답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따르는 사랑받는 양으로 살아갑시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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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12월 중순, 겨울에 거행되는 성전 봉헌 축제는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인들을 몰아낸 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새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축제 기간 내내 촛불을 켜 놓고 압제의 어둠에 시달리던 그들이 자유의 빛을 되찾은 기쁨을 기념하였습니다.
기원후 1세기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이 성전 봉헌 축제를 더 장엄하게 지내며 하느님께서 메시아, 곧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해 줄 구세주를 보내주시기를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다그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들은 마카베오가 시리아 왕국을 물리쳐 승리한 것처럼,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힘 있는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당신 스스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시도록 하여 예수님을 반역죄로 죽일 근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시고, 다만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고 하시며, “당신이 메시아요?” 하는 질문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내가 한 일을 보아라.”(요한복음 10장 38절 참조)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과 당신의 신성이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오로지 내어 주는 사랑만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복음 10장 11절)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온 생애가 양을 위하여 언제나 함께하고, 목숨까지 내놓는 삶이었음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나서듯이 우리에게 당신의 삶을 보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그분의 양이 될지, 다른 메시아를 찾아 나서는 ‘다른 양’이 될지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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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강조하시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복음 10장 25절)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거듭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여러 경로로 보여주셨음에도 그들이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거나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실 때 결코 당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일만 할 뿐이고, 그분의 말씀만 전할 뿐이라고 누차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느님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복음 10장 29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기 위해 그분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맞아들이시어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목숨을 바쳐 끝까지 지켜주시는 착한 목자시지요.
아버지께서 선택해 아드님에게 보내시는 이들은 구원의 여정 안에 든, 복된 이들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복음 10장 30절)
예수님 입에서 드디어 결정적인 말씀이 선포됩니다. 유다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던, 아마도 명확하게 듣고 싶기는 하지만, 실은 직면하기 두려운 내용일 겁니다.
그런데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란, 그것도 율법이 정한 신분에 속하지 않는, 출신이 뻔한 일개 목수 아들의 자기 계시는 유다인들에게 신성모독으로 들릴 뿐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사랑의 확증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라는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그 사랑이 바로 우리가 닮아갈 수 있는, 우리에게도 실현 가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만물의 근원이시고 창조주이신 분, 우리의 주인이신 분이 친히 우리 곁에 내려와 우리 곁에 사시며 목숨까지 바쳐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 당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결코 어둠 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큰 죄인이어도 그렇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의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사도행전 11장 22절)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처음에는 이방 지역에 사는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 예수님의 복음은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곳곳에 신도의 무리가 형성되게 되지요.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그곳에 바르나바를 파견해 그들의 신앙이 잘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지역이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하느님의 백성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사도행전 11장 25절-26절) 바르나바는 주님을 체험한 후 돌아선 사울을 이방인을 위한 복음 선포의 협력자로 합류시키지요.
사도행전 저자가 서술한 대로 바르나바가 착하고 선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가능했을 겁니다. 이 둘의 관계가 물론 끝까지 이어진 건 아니지만 그 또한 교회 성장을 위한 주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 안에 역동적으로 보이는 교회의 모습, 즉 교회가 교회를 낳고, 신생 교회의 성장을 도우며 함께 자라나는 여정의 모범이며 희망은 아버지와 아들, 성령 안의 사랑과 일치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고, 삼위 하느님이 사랑의 유대로 한 분이신 것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이 일치를 지향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이 말씀을 통해 그 사랑 안에 푹 잠기고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언젠가 천상 혼인잔치에서 주님 얼굴을 마주 뵙고 누릴 영원한 행복을 주님께서 잠시나마 미리 맛보게 해주시는 은총을 허락해 주시길 빕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 사랑의 유대 안으로 초대되어 주님 안에 한 형제 된 우리는 모두 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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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앎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유다인들은 눈앞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메시아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메시아다, 구세주다’라는 생각이 그릇된 ‘메시아 상’을 만들고 결국은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때로는 아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설명이 분명할수록 그들의 고집은 더욱 굳어질 따름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가고, 유다인들은 유다인들의 길을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농사를 짓는데도 ‘농사법’을 끊임없이 개선하지 않으면 더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 방법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를 통해서 다시 방법을 얻게 될 것입니다. 품종개량도 하고 거름을 주는 시기도 바꿔보고…… 새 방법을 시행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하나가 된 주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사도들이 말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5,29)
시편을 보면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139,2-3)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는 분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1,7)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아는 바가 주님을 섬기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남아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은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잘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아드님 예수님이 하나됨은 삶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 증거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구원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니셨지만 하느님이십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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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어떤 자매님과 이야기 나눴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 자매님은 자기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렸을 때 가난으로 인해 잘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 공부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공장이 들어가서 돈을 벌어야 했던 이야기,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고 이제 행복해지나 싶었는데 사고로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이야기, 사는 게 바빠서 아이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해서 매우 미안하다는 이야기….
‘와~~ 정말 힘든 삶을 사셨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힘드셨겠어요.”라면서 공감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제 아픔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들 모두 나름의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만 아픔이 있고 또 불행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가지고 있는 아픔이고 불행이었어요. 그러다가 성당에 우연히 다니게 되었는데, 그 뒤에 모든 것이 달라 보였어요. 행복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둘러보니 행복은 널려 있더라고요.
예수님 덕분이에요. 예수님 만나면서 행복이 보였거든요. 그리고 제 삶도 예쁘게 볼 수 있었어요. 안쓰럽고 불쌍한 삶이 아닌, 나름 멋진 삶인 것 같아요.”
여러분은 자기 삶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불행만 있고 그래서 안쓰럽고 불쌍한 삶일까요? 시선을 바꾸어 자기 마음을 주님께 둔다면 다른 것이 보이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간직하며 자기 삶이 멋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참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이 자기 삶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라고 질문합니다. 메시아는 ‘기름 바른 자’라는 뜻으로, 이 메시아가 나타나면 주위의 적들을 물리치고 시온에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선악을 가리어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부풀어 있었지요. 그런데 이 메시아는 누가 분별할까요? 사실 이 일은 랍비들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메시아가 아니라고 선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믿고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확증을 잡아서 로마 당국에 고발하려는 심보였던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말씀을 들어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시선을 바꾸지 못하니 바로 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 삶도 불행의 삶으로 만들 뿐입니다.
지금 나의 시선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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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하니까>
요한 10,22-30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사랑하니까>
그분이 나를 부르시네
사랑하니까
내가 그분 목소리를 알아듣네
사랑하니까
그분이 나를 아시네
사랑하니까
내가 그분을 따르네
사랑하니까
그분이 나를 영원히 살게 하시네
사랑하니까
내가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사네
사랑하니까
그분은 나를 결코 빼앗기지 않네
사랑하니까
나는 그분을 결코 떠나지 않네
사랑하니까
그분은 나와 하나이시네
사랑하니까
나는 그분과 하나이네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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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하는 이의 소리>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오늘 유다인들은 안달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이미 말씀하셨고 당신이 하신 일이 당신의 정체를 증언하는데도 유다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고, 믿지 못함은 그들이 주님의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유다인들이 믿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함은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인격적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격적 신뢰 관계? 예, 목자와 양의 인격적 신뢰 관계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인격적 관계이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격적 관계이어야만 믿을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인격적 관계가 아닌 이해관계일 경우 정말 순수하게 예수님을 알고픈 게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고 싶은 거고, 잇속으로 예수님을 견주어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빼먹을 것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이렇게 잇속에 따라 알려고 해서는 어떤 사람의 전모를 알 수 없고 진면목은 더욱 알 수 없으며, 예수님은 더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해관계는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런 바라봄은 전체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의 어떤 것만을 노려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리고 바라는 것이 없을 때 보려고도 하지 않고 마치 필요 없다고 버리듯 아예 존재를 버려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인격적인 관계는 양과 목자의 관계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즉시 알아듣고 주님을 따릅니다. 사랑과 믿음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워싱턴 디시에 인접한 메릴랜드에서 살았는데 한 달에 한 번 뉴욕에 가서 강의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가려면 필라델피아라는 곳을 지나야 하기에 그날도 필라델피아에서 새로운 사람을 태우고 출발하였는데 저 앞에서 한국말 하는 소리가 뒤에 있는 제제까지 들리는 거였습니다. 옆에서 하는 미국말은 들리지 않고 저 멀리에서 하는 한국말이 들리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오랫동안 듣지 못한 한국말, 먹고 싶은 한국 음식과 마찬가지로 듣고 싶었던 한국말이 들리니 옆에서 하는 수많는 말들을 가운데서도 한국말이 들리는 거였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소리를 즉시 알아들을 수 있고 사랑하는 이의 소리가 귀에 꽂히는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목소리를 즉시 알아채고 주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주님을 즉시 알아보는 것은 그러므로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인격적 사랑은 우리의 귀와 눈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보게 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님을 믿게 하고 따르게 합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주님의 알아 뵙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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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 은총, 선택, 배움, 훈련 -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떻게 사느냐?” 묻는다면 ‘믿음으로 산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제는 참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5월 성모성월의 첫날이었습니다. 수도원을 찾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입니다. 계속되는 부활시기 파스카의 계절이자 신록의 계절, 신록의 기쁨 가득한 5월입니다. 믿음의 색깔은, 파스카 예수님의 색깔은 아마도 이런 신록의 색깔일 것입니다. “믿음으로”라는 성가 480장도 생각납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 생명 다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 넋을 다하리 믿음으로.”
노년 품위의 우선 순위도 ‘믿은, 건강, 돈’이 되겠습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의 은총, 믿음의 선택, 믿음의 배움, 믿음의 훈련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믿음입니다. 사실 믿음의 여정에도 우리는 기도처럼, 사랑처럼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오늘 믿음을 강론 주제로 택한 것은 복음의 다음 말마디입니다. 완고한 불신과 무지의 유다인들에 대한 다음 예수님의 말마디입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믿음은 주님의 양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의 잣대가 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순시기 끊임없이 반복된 초대송 후렴이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8)는 성구였습니다.
새삼 믿음의 은총, 믿음의 선택, 믿음의 배움, 믿음의 훈련임을 또 믿음의 개방임을 깨닫습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입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보고 배울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물론 기도도, 사랑도, 희망도, 겸손도 도대체 보고 배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믿음의 스승들입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는 2021년 7월 20일 써붙인 말마디가 여전히 붙어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
살아가면서 나이들수록 수도공동체에 대한 감사는 더욱 커집니다. 제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수도공동체의 형제들이요 형제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날마다 끝없이 배웁니다. 겸손도 희망도 사랑도, 섬김도 배우고 특히 믿음을 배웁니다. 말 그대로 배움의 학교, 믿음의 사관 학교가 수도공동체입니다.
성서의 사람들, 교회의 성인들은 말 그대로 믿음의 대가, 믿음의 달인,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이들의 희망과 기쁨, 사랑과 지혜, 찬미와 감사, 평화와 자유도 그대로 믿음의 표현들입니다. 제가 늘 경탄하는 바는 저보다 13세 연상의 88세 고령의, 그러나 정신은 영원한 청년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벌써 41차 해외 사목 방문으로 4.28-30일까지 헝가리를 방문하여 6회나 긴 강론을 하셨고, 귀국 중 비행기 내에서 인터뷰 내용에 감탄했습니다. 어쩌면 노령의 나이에도 이렇게 기억력이 좋고 말씀도 잘하시고 총명하신가 하고 말입니다. 이 또한 믿음의 표현이겠습니다. 교황님의 무엇이 그렇게 헝가리 국민들을 열광케 하는지 물음에 대한 헝가리 주재 교황대사의 답변입니다.
“두 가지이다. 그의 기쁨, 그의 열정이다. 그들은 기쁨에 넘친 사람을, 늘 미소 띤 사람을 본다. 복음의 기쁨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교황님의 이런 면모를 본다. 중부 유럽에 속하는 헝가리는 겨울날이 길고 구름 낀 회색빛 어둔 날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신자든 아니든 교황님의 빛나는 기쁨과 미소는 이들에게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황님의 성실성이다. 교황님은 말씀의 사람이요 참 성실하게 말씀하신다. 이래서 항가리 사람들은 교황님께 깊이 감동하고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의 보증 수표같은 교황님입니다. 희망과 사랑처럼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이렇게 보고 배울 분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바로 교황님의 기쁨과 열정, 성실성 모두가 믿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교황님뿐 아니라 오늘 기념하는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의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이분은 성 바실리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더불어 동방의 4대 교부가 되는 분입니다.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는 성자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성자 예수님의 신성을 힘껏 변호하면서 교회를 수호한 교회의 사람, 믿음의 전사였습니다. 5차례나 유배기간중 숱한 죽을 고비도 넘겼고 그런 와중에도 귀한 집필 활동도 계속하셨으며 수도승들의 교과서라 일컫는 사막 수도승의 아버지 “성 안토니오의 생애”도 쓴 분입니다. 그러면서 78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목숨은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중, 참으로 주님의 양들 중의 양들같은 존재가 안토니오 성인이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우리 또한 이런 착하고 지혜로운 믿음의 양들이 되는 것 또한 은총이요 선택이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좋은 양이 될 때 신자들의 착한 목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는 우리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여정 중인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믿음의 성인들, 교회의 사람들이 바로 이 복음 말씀의 생생한 증거가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 중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파견되는 혜성 같은 존재, 바르나바 역시 믿음의 용사임을 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정말 호감이 가는 멋지고 아름다운 성령과 믿음의 사람 바르나바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 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의 선교임을 깨닫습니다. 결론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몫이 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분들의 열정과 노력,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보고 배우라 선물로 주어진 성인들이요 교회의 어른들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믿음의 스승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끊임없이 보고 배울 열정도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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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LLRqGtRU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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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 30)
초록의
오월 속에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믿음은
우리 인격의
구현입니다.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믿음은
일치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새로운
발견이 됩니다.
믿음에서
사랑을
끌어내시는
일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믿기에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됩니다.
오늘이 바로
그 믿음의
시간입니다.
믿음은
믿음 때문에
더욱 깊어집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 사이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믿음을
부르며
살아갑니다.
믿음에
속한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믿음이
세상을
바꿉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람이 됩니다.
믿음은
가짜를 버리고
진짜가 되는
삶입니다.
믿는 사람들
사이에
한마음이 되시는
하느님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믿고
또 믿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믿음을 위해
기도드리는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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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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