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뒤집어 보기/로체스터의 미친 아내 버사의 일생 재구성/유럽·남성 중심주의 간결한 필치로 꼬집어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읽은 독자는 누구나 로체스터와의 결혼을 앞두고 잠들어 있는 제인의 방에 들어와 혼례용 베일을 찢는 광녀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키가 크고 거구에 검고 숱한 머리가 등에 늘어져 있었다.얼굴은 무시무시하고 야만적이었으며 붉게 충혈된 눈을 굴리고 있는데다가,얼굴의 윤곽은 검게 부풀어 있었다”고 제인은 잠결에 본 여인의 모습을 상기한다.
그녀는 바로 로체스터가 자메이카에서 결혼했으나 광기때문에 손필드장의 다락방에 감금해 둔 로체스터 부인이었던 것이다.이 여인은 ‘제인 에어’에서 선량한 주인공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을 가로막는 악의 화신과도 같은 장애물로 취급된다.
그러나 서인도제도 출신의 백인여성이었던 리스는 처음 ‘제인 에어’를 읽을 때부터 자신과 같은 배경을 가진 이 여인에게 관심과 연민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 그녀는 19세기 초 영국인과 결혼한 뒤 광녀가 된 크레올(남아메리카·서인도제도 등지에서 태어난 백인.인종적으로는 백인이나 문화적으로는 태어난 지역의 영향을 받아 비유럽적이다) 여인들의 수가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크레올들이 같이 생활하는 유색인들에게 문화적으로 동화되고 따뜻한 풍토의 영향을 받아 게으르고 관능적이며 퇴폐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럽인과 결혼한 크레올 여인들은 종종 그러한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리스는 로체스터의 부인 버사 메이슨도 유럽 남성들의 이러한 유럽중심주의적 남성중심주의적 가치관의 희생물일지도 모른다는 점에 착안해 버사 메이슨의 입장에서 본 로체스터와의 결혼,그리고 다락방에서의 감금생활을 다시 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넓은 사르가소 바다’다.
‘제인 에어’에서 버사 메이슨의 가족은 그녀의 어머니가 광녀이고 알코올 중독자였음을 감추고 비싼 지참금을 주어 로체스터를 속이고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넓은 사르가소 바다’는 우선 제1부에서 버사 메이슨의 어머니가 광기와 알코올 중독자가 된 내력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앙투아네트(버사의 본명)의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 아네트는 쿨리부리라는 농장의 주인인 남편 코스웨이를 잃은지 얼마 안 돼 노예해방을 맞게 된다.1830년 영국정부가 단행한 전 세계의 영국 영토에서의 노예해방은 물론 도덕적으로 백번 옳은 행위였지만,서인도제도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백인 농장주들에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워낙 든든한 생활인이 못되는 젊은 과부 아네트는 피폐한 농장에 무일푼으로 남게 되자 부유한 영국인 메이슨과 결혼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나 메이슨은 토착문화에 익숙지 못해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불신을 사는 언동을 하여 어느날 흑인 농장 노동자들은 메이슨의 저택에 불을 지른다.
이 과정에서 아네트는 불구라서 유달리 집착을 가졌던 아들 피에르를 잃게 되고,그 충격으로 메이슨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정신적 균형을 잃게 된다.그녀는 시골의 흑인 부부에게 맡겨지는데 남편은 아름다운 그녀를 성적 노리개로 이용하며,그녀가 다루기 힘들게 되면 럼주를 주어 진정시키곤 했다.이것이 로체스터가 말하는 버사 어머니의 광기와 알코올 중독의 내력이다.
로체스터는 결혼 후 잠시동안 앙투아네트의 미모와 매력에 탐닉한다.그러나 순간의 열정이 가시고 난 뒤 깊어가는 문화적 이질감의 인식을 부채질한 것은 앙투아네트의 이복형제라고 주장하는 다니엘 코스웨이라는 혼혈아의 고자질이다.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에 대해서,그리고 앙투아네트에게 처녀 시절 다른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니엘에게서 들은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에 대한 혐오감이 깊어간다.앙투아네트는 멀어져가는 로체스터의 마음을 잡기 위해 로체스터에게 최음제를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한 뒤 밤을 지낸다.깨어난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체스터는 아내에 대한 반발로 아멜리라는 혼혈인 하녀와 공공연히 관계를 맺는다.
깊어가는 증오의 골을 견디지 못한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처럼 럼주의 위안에 의지하게 되면서 점점 정신의 균형을 잃고,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그리고 묘한 소유욕이 겹친 감정으로 로체스터는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아내를 데리고 가 손필드장의 다락에 감금해버린다.
춥고 낯선,실내가 모두 붉은 빛과 금빛(아마도 희생의 피비린내와 물욕을 상징하는)으로 장식된 손필드장에 온 앙투아네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촛불을 잘못 다뤄 불을 내고,뜨거운 기운을 피하기 위해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 뛰어내려 종말을 맞는다.
이와같이 소설의 종말은 ‘제인 에어’에서 버사의 종말과 아귀가 맞지만,이 소설은 ‘제인 에어’의 세계관을 이 소설에서 타자화된 버사의 입장에서 뒤집어 다시 쓴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혹은 제3세계의 입장에서 유럽중심주의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인 지배문화의 역사를 다시 뒤집어 쓰려는 시도가 활발한 요즈음의 문학풍토 속에서 리스의 작품은 각광을 받고 있다.이러한 사상성을 떠나서도 간결하면서 섬세하게 서인도제도의 향기를 담아내는 그녀의 필치는 그 자체로도 감각적 호소력을 지닌다.
인생의 대부분을 가난하고 아프고 불행하게 살았던 리스의 솔직한 목소리가 지금 다시 우리의 가슴에 아름답게 와 닿는 것을 보면 예술은 역시 이승에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영원성과 구원의 한 형태인 듯하다.
◎외롭고 가난했던 진 리스
진 리스는 도미니카의 로소섬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웨일스 출신의 의사였고,어머니는 서인도 제도에 거주해 온 백인의 후손이었다.16세 때 영국에 건너간 리스는 연극학교를 두학기 다닌 뒤 코러스 걸로 일하기 시작한다.다감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에다 의지가 약했던 그녀는 일생을 통해 세번의 결혼,여러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하고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해 고통을 달래기도 한다.‘센강의 좌안과 다른 이야기들(The Left Bank and Other Stories)’로 27세 때 작품활동을 시작한 리스는 57년 영국의 문단에서 재발견된 뒤 ‘넓은 사르가소 바다’를 쓰기 시작하여 67년에 완성,발표하게 된다.불행하고 버림받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주요 소재로 한 그녀의 소설들은 그러나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형식적 실험과 온결성을 추구한다.‘넓은 사르가소 바다’는 리스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사진은 93년 제작된 동명영화 포스터.존 듀이건이 감독하고 카리나 롬바드가 앙투아네트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