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9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언약이며 이 언약들의 원형은 창세전 언약입니다.
모든 언약이 피로 맺어지듯 창세전 언약 또한 피로 맺어진 언약임을 믿습니다.
언약의 당사자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이시지요.
그 아들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곧 창세전 언약의 연장선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차서가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차서가 없는 항상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여 선택된 것이 아니라 내가 조성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성령 안에서 아들과 함께 나를 택하셨으니 그 언약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하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하 15:24-37
제목 : 카이로스 곧 하나님의 시간과 크로노스 곧 인간의 역사의 상관관계.
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28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31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32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33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34 그러나 네가 만일 성읍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전에는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었더니 이제는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35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왕의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알리라.
36 그들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그들과 함께 거기 있나니 너희가 듣는 모든 것을 그들 편에 내게 소식을 알릴지니라 하는지라.
37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읍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 나의 묵상
압살롬은 예루살렘에서 소외된 지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그들을 결집하여 반역을 시도하였고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반역의 소식을 접한 다윗은 신하들과 함께 급히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와서 도망 길에 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하였지만 특히 그렛, 블렛 그리고 가드 사람 등 이방사람들이 그와 함께 하였다.
한편 제사장 사독과 하나님의 궤를 멘 모든 레위인도 다윗과 함께 하였다.
이들이 언약궤를 내려놓자 아비아달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때까지 제사를 드렸다.
이 때 왕은 사독에게 언약궤를 도로 메어다가 예루살렘 성으로 가지고 가라고 하였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자기에게 닥친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 믿음이다.
그는 언약궤를 자기가 소유함으로써 하나님을 억지로 자기편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또한 자기부인의 표현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자기를 인도하여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자신은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제사장들을 통해 정보를 얻기 위함이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은 전령이 되어 성읍에 있는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사독과 레위인들은 언약궤를 메고 다시 예루살렘 성읍으로 들어가 머물게 된 것이다.
한편 다윗과 그의 신하들은 탄식과 고통 속에서 감람산을 향해 올라간다.
그들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가리고 맨발로 울면서 올라갔다.
이 때 다윗은 그의 모사꾼인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그는 여호와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 후에 다윗은 자신이 자주 제사를 드렸던 감람산 정상에서 아렉 사람 후새를 만난다.
후새는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쓴 모습으로 다윗을 맞음으로 이미 다윗의 열악한 운명에 동참하고 있다.
이 때 다윗은 후새가 자기와 함께 가는 것보다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그것은 후새로 하여금 압살롬의 궁으로 들어가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폐하고 제사장들에게는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임무를 맡긴다.
그렇게 다윗은 전령인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통해 왕궁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이렇게 후새는 다윗의 말에 순종하여 예루살렘 성읍으로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인간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방법은 참으로 신묘막측하시다.
이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부터 시작한다.
아담이 그것을 먹지 않아야 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그 선악과를 두지 않으셨으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선악과를 두시고 그로 하여금 그것이 너무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도록 하신 것이다.
물론 선악과를 두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게 하셨다면 아담 이하 모든 인간은 이성과 인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충분히 인격과 이성을 작동하여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아담을 비롯한 모든 인간은 그 선택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선택일 뿐이었다.
아담은 그렇게 자기의 유익을 위한 선택 곧 선악과를 먹는 것을 택하여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판단의 주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아담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의 한계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렇게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선택을 했을지라도 그들 중에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있다(딛 1:2, 엡 1:3-6).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바로 원시복음이라는 창 3:15절, 곧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창세전 언약이라 한다.
이처럼 인간의 역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택함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분리된 세상사(世上史)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역시 광야 40년의 인생과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갈 때의 모든 삶이 아담 앞에 있던 선악과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들이 진짜 가나안에 들어갈 때 가나안 거민들이 전혀 필요없는 존재들이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미리 없애주셨어야만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 앞에 선악과를 두신 것처럼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들 그곳에 들어가면 그것들과 교제하지 말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며 그들은 어린 아이들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들 눈앞에 보인 것은 철병거였다.
적어도 사울 시대에 블레셋과 싸울 때를 보면 이스라엘은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불과 몇 멍에게만 칼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아마도 청동기 시대나 그 이전의 시대를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거민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당시의 철병거는 이스라엘에게 비하면 탱크였다.
이스라엘은 새총으로 싸우는데 가나안은 탱크를 가지고 싸운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그 멋지고 아름답게 보이는 철병거들을 없애버릴 수 있겠는가?
전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쟁에 승리하여 그들을 몰아내기는 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이 소유한 철병거는 아담 앞의 선악과와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결코 없앨 수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빼앗아서 잘 연구하여 자기들의 전쟁 승리의 도구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의 역사이며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셨기에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카이로스’라는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렇게 택함을 받은 자들이 차원이 전혀 다른 ‘크로노스’라는 인간의 역사(歷史)를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넘어지고 자빠지는 연약한 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 할지라도 걸림돌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걸림돌조차 시온의 기초돌이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 분 안에서 넘어지는 것이 은혜인 것이다(롬 9:33, 마 21:42).
나는 이 카이로스의 역사인 묵시와 크로노스의 역사인 인간의 역사를 알기까지 숱한 시간을 허비하였다.
그런데 내게 복음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 상관관계를 깨달아 알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땅 곧 크로노스가 나의 현실이 아니라 나를 택하셨던 그 나라, 곧 창세전의 세계요 또한 묵시이며 종말 이후에 내가 들어갈 그 나라가 진짜 나의 삶이요 현실임을 깨달았을 때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미처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상이기에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두르기도 했지만, 이제 나의 육신이 죽어 그 나라에 들어갈 때가 되면 나의 진짜 본향에 들어가기 때문에 기쁨으로 그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외쳤던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처럼, 나 또한 그 사망을 꾸짖으며 당당하게 그 나라에 입성할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자신의 운명을, 언약궤에 맡겨두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그의 성숙한 믿음을 봅니다.
엘리 시대,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지니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지 않아서 자기들이 졌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보내어 실로의 성소에서 언약궤를 가져오게 하였으나 그 때 그들이 가져왔던 언약궤는 빈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영이 그 궤를 떠난 이후였기 때문입니다.
(시 78:59-60)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반듯하게 일어나 하나님을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다윗의 역사는 오늘 연약한 나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전에 나를 택하시고 그런 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모질고 험한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신 우리 주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