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사도 12,1-11; 2티모 4,6-18; 마태 16,13-1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2024.6.29.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진리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하는 교회에 있어서 주춧돌은 그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이며, 그 기둥은 그분의 복음을 널리 전하여 튼튼한 공동체들을 세운 바오로입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또 어느 지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는 이 방식 즉 신앙 고백과 복음 선포 및 공동체 건설 방식은 변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신앙 고백으로 복음을 진리로 고백하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면서 하느님과 진리를 갈망하는 이들을 초대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 복음 진리를 살아가는 공동체들을 세우게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고백의 모범이 되어 준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셨던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하느님의 선택이 바야흐로 열매를 맺도록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으며, 신앙 증거의 표양이 되어 준 바오로는 그 선택이 땅 끝까지 퍼져 나가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방인들 안에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이 전해 준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이시고 그분을 가장 닮으신 분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분임을 우리가 알게 되었고, 바오로의 신앙증거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성령의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것임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이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여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하려는 후대의 사도직을 위해서 실로 절묘한 조화와 균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이끄신 섭리적 안배의 결과요 또한 이 섭리를 알아듣고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놓은 주춧돌과 바오로가 세운 기둥으로 지어진 하느님의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려 1800여 년 동안 지구 반바퀴를 돌아 동아시아에 이른 후에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살아온 한민족에게도 전해졌는데 이는 반만년 동안 하느님을 믿어 온 바탕 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정교한 믿음의 실체로 전해진 역사로서 실로 오묘한 섭리였습니다. 한국 초대교회에서 이룩된 이 놀라운 역사의 기적의 실상은 이러하였습니다.
18세기 말 조선 천지가 정신적이고 사상적인 암흑에 둘러 싸여 있던 무렵에, 천진암 강학회에 모인 선각자 선비들이 들여온 그리스도 신앙의 기초 위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주춧돌을 놓고 최양업 토마스가 기둥을 세웠습니다. 이 두 사제는 조선 천주교회의 길잡이로서 모진 박해 속에서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걸어갔던 길을 훌륭하게 걸어갔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고도 믿음이 모자라서 스승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천주교를 박해하던 조정 대신들로부터 천주교를 배교하고 사제가 되기까지 닦은 서양 학문으로 조정에 봉사하겠다면 높은 벼슬을 주겠다던 회유를 받았었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치명함으로써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한국 천주교의 깃발을 높이 들었고,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한 길을 닦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고자 상해에서부터 이 작은 돛단배를 타고 오직 바람과 해류에만 의지하여 제주도 용수리를 거쳐 충청도 강경 해안에 상륙함으로써 입국에 성공하였다. 사진은 강경 나바위에 도착했던 라파엘호 모형. 이 배의 이름은 토비야가 갈 길을 인도해 주던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나는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대기하고 또 그분 앞으로 들어가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인 라파엘이다.”(토빗12,15)
그런가 하면, 박해자였던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기성 사도단의 추천으로 사도요 선교사가 되었지만 만만치 않는 방해와 중상모략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교회가 보편적인 진리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로마 문명과 정면승부를 통해 소아시아와 그리스 등지에 수많은 공동체들을 세웠는데, 최양업 토마스 사제 역시 천주공경가를 지은 이벽과 주교요지를 지은 정약종 등 평신도 교부들의 노력에 힘입어 ‘사향가’ ‘영세가’ ‘천당가’ ‘지옥가’ ‘십계강론’ ‘삼계대의’ ‘견지’ ‘고해’ ‘성체’ ‘종부’ ‘신품’ ‘칠극’ ‘혼배’ ‘제경’ ‘행선(行善)’ ‘애덕’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총 19편의 천주가사(天主歌辭)를 더욱 많이 지어 교우촌 신자들에게 알리고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천주가사는 ‘사향가’(思鄕歌)인데, 4·4조의 기본 운율에 총 8백33행으로 되어 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本鄕) 찾아가세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 곳이 본향인고 …
잠깐 세상 위하다가 무궁세에 어찌하며 미친 마귀 섬기다가 흉(兇)한 화형(火刑) 어찌하랴 무궁세를 지내도록 영원 상생(常生) 이곳이라 우리 인생 바랄 것이 이곳 밖에 다시 없네 세상 만복 다 받은 들 천당 복에 비길소냐 인간 고초(苦楚) 다 당한들 지옥 영고(永苦) 비할소냐… 십계(十誡)로 장대(將臺)삼고 지덕(智德)으로 문(門)을 내고 애덕(愛德)으로 정병(正兵)삼고 겸덕(謙德)으로 기병(騎兵)삼고 묵상(默想)으로 병서(兵書)삼고 성경(聖經)으로 방패(防牌)삼고 절덕(節德)으로 기(旗)를 삼고 의덕(義德)으로 갑옷삼고 용덕(勇德)으로 말(馬)을 삼고 신덕(信德)으로 선봉(先鋒)삼고 망덕(望德)으로 복병(伏兵)삼고 고상(苦像)으로 절부(節斧)삼고 십자가로 창검(槍劍)삼세"
이 사향가는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생각하며 현세의 박해를 이겨내자고 신자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가 순방하며 이런 천주가사들을 가르치고 성사를 봉행하면서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가 밤중에 산길을 걸어 미사를 봉행하고 성사를 집전했던 교우촌의 숫자는 189군데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보편 초대교회에서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그리고 한국 초대교회에서는 김대건과 최양업 사제가 주님의 집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덕분에 하느님의 백성이 제사를 바치고 찬미를 드리며 진리를 선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교우촌에서 태어나 신앙을 배우며 자라난 이 두 사제가 한국 가톨릭교회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신앙을 치명으로 증거함으로써 당시 교우촌 신자들은 물론 모든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이 된 수선탁덕(首先鐸德. 첫 번째 사제라는 뜻) 김대건 안드레아, 그리고 불과 6개월 동안만 사목하고 순교한 김대건의 빈 자리를 채우고자 치명도 미루고 12년 동안 전국 심산유곡을 찾아 한 해에 7천 리를 밤길과 산길로 돌아다니면서 미사 봉헌과 교리 교육 그리고 애덕 실천으로 교우촌을 키워낸 최초의 사목자 최양업 토마스, 이 두 사제의 삶과 신앙을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맞이하여 두 위대한 사도의 삶과 신앙과 함께 기억하고 기립니다. 한 사제는 순교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고, 다른 한 사제는 가경자(可敬者, Venerable. 시복 후보자를 뜻하는 말)로서 시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교수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증언하면서, 자신은 이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자 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