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에서
민서현
오후 다섯 시는
젊음이 개찰되지 못하는 시간
나보다 더 살아낸 그가
사 개월 차이로 할인받았다며 너털웃음이다
남들은 늙음을 거부하지만 그는 나이를
호사라 여기며 퇴락한 왕조의 뜰을 걷고 있다
검버섯 낀 얼굴과
백송의 등걸 같은 머리카락
등 굽은 반추의 몸이
쓸쓸해지는 고궁의 여백을 닮아 있다
나도 언제쯤 저리 고즈넉해질 수 있을까
이제 내 몸에도 조금씩 여백이 생기는지
오후 여섯 시가 헐렁해진다
불시개화한 봄꽃들의 시절은 간데없고
겨울눈을 달고 벌써부터 봄을 기다리는 목련들
한 꼬집 멀어진 사랑을 나는 오늘 묻지 않기로 한다
먼 훗날 우리가 사라진 후원에도
여전히 푸른 이끼가 끼고
고사목이 천년의 배경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백 년 전 이곳을 걸었던 옛사람들의
더께 쌓인 그림자가
후일담처럼 우리를 따라 걷고
아이들이 사금처럼 빤짝이며 뛰어간다
[작가소개]
김포문학신인상으로 등단(2018), 사)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 이사, 김포문학상, 마로니에 전국 여성백일장에서 수상하였으며, <달詩> 동인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달詩> 시선 공저 『척尺』,『시차여행』『꽃을 매장하다』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시향]
창경궁 관람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 9시까지, 입장료는 천 원입니다 시인은 젊은이들이 없는 오후 다섯 시의 한산한 고궁을 찾았습니다 사 개월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 동행인은 어르신 우대를 받아 입장합니다 파란과 우여곡절이 들끓었던 육백 년 왕조의 뜨락을 관람하는데, 나이 덕분에 혜택을 받았다고 너털웃음을 웃었답니다 친밀감이 느껴집니다 텅 빈 고궁의 여백처럼, 연륜에서 풍겨 나오는 너그러움일까요? 늙음을 고쳐서라도 나이를 거부하고 싶어 하는 이즈음 세태지만, 육백 년 왕조의 뜨락에서는 고작 육십오 년 인생나이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느꼈을까요? 고궁의 저물녘이 더 고즈넉해지는 듯합니다 불시 개화했던 봄꽃 같은 시절은 가고 겨울눈을 틔워 봄을 기다리는 목련나무를 보며 이제 조금은 덤덤해져버린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을 않기로 합니다 백 년 전 이곳을 걸었던 옛사람들의 그림자가 시인을 따라 걷는 듯한 검기운 시간, 그때 마침 사금처럼 반짝이는 아이들이 뛰어 갑니다 고궁을 지켜낼 희망을 봅니다 먼 훗날 시인이 사라진 후원도, 고사목이 천 년의 배경을 지켜 주리란 믿음마저 생깁니다 반짝이는 아이들이 있어 가능한 바람일 테지요 애착도 욕심도 다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저물녘 산책입니다
글 : 박정인(시인)
첫댓글 가을 끝자락 고궁이 아닌 공원을 한바퀴 돌아 나왔습니다
제 시 보다 더 시 같은 시평 감사합니다
요며칠 생각도 있고 할 말도 많은데 말문이 트이지 않아서 주춤했어요 ㅎㅎ
굼뜬 우리의 해후지만 반가움은 한결 같다, 믿기로 해요
좋은 시 출산해 주셔서 감상하는 동안 고즈넉하고 즐거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