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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지애] 04
#1. 호텔 - 타쓰지 방 타쓰지의 꿈.
타쓰지, 미인도를 보고 있는데 그림 속의 여인이 슥 튀어나와 타쓰지의 목을 감고 키스를 한다.
아득히 집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집사 : (한국말로) 도련님! 도련님!
타쓰지, 꿈에서 깨어나면 베개를 끌어안고 있고 집사가 화난 얼굴로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타쓰지, 베개를 홱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집사 : 저 그림은 어떻게 갖고 오셨습니까?
타쓰지 : (일어) 그냥. 마음에 들어서.
집사는 한국말로 하지만 타쓰지는 꼬박꼬박 일본말로 한다.
집사 : 저게 어떤 그림인지 아십니까?
타쓰지 : ...
집사 : 당장 일본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타쓰지 : 미인도 하나 가지고 웬 호들갑이야?
집사 : 저 그림이 보통의 미인도로 보이십니까? 저 그림은 천 년이 넘게 가문의 보물로 내려오는 그림입니다.
타쓰지 : (그림을 다시 본다) 저 여자가 누군데?
집사 : 후지와라 가문의 시조께서 사랑하셨던 여인이라고 들었습니다.
타쓰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림 앞으로 다가가 새삼 음미하듯 들여다본다.
집사 : 저 그림은 후지와라의 보물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보물입니다. 그러니까 당장 일본으로 보내야 합니다.
타쓰지 : 후지와라의 보물이면 내 보물이기도 해. 난 후지와라의 후계자니까.
집사 : 어머니께서 도련님을 왜 이곳에 보냈다고 생각하십니까?
타쓰지 : ...
집사 : 도련님은 아직 후계자가 아닙니다.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요. 여기서도 일본에서처럼 함부로 행동하시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타쓰지 : (집사를 노려본다)
집사 : 누가 도련님 편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타쓰지 : ...
집사 : 아침 준비 해 놓겠습니다. (나간다)
#2. 호텔 - 이그제큐티브 라운지
타쓰지와 집사, 마주 앉아 아침을 먹고 있다.
타쓰지 : (일어로) 그림은 당분간 눈 감아줘.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집사 : (잠시 보다가 한국말로) 그러죠.
타쓰지 : (일) 고마워.
집사 : ...어젠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타쓰지 : (일) 그냥 여기저기.
집사 : 이제부턴 한국말을 쓰세요.
타쓰지 : ... (일) 싫어.
집사 : 혹시 한국말을 잊으셨습니까?
타쓰지 : ... (일) 그냥 싫어.
집사 : ... (잠시 보다가) 어머님이 좋아하시겠군요.
타쓰지, 인상을 찌푸리더니 포크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집사를 노려본다.
집사, 그러거나 말거나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음식만 먹는다.
#3.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타쓰지가 나이 지긋한 이사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다.
직원들, 벌떡 일어난다.
노처녀 이대리, 타쓰지를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진다.
이사 : (타쓰지에게) 자,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들에게)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근무하시게 될 새 실장님입니다.
은비, 타쓰지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소를 지으며 타쓰지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만
타쓰지는 은비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타쓰지 :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후지와라 타쓰집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은비와 마케팅실 직원들, 타쓰지의 유창한 한국말에 깜짝 놀란다.
#4. 타쓰지 사무실
타쓰지, 책상에 앉아 있는데 노크소리.
타쓰지 : 네.
은비, 서류를 잔뜩 들고 들어와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은비 : (한국말로)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마케팅 자료들입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타쓰지 : ...
은비 : 그런데 언제 그렇게 한국말을 배우셨어요? 한국 사람이라 그래도 믿겠어요.
타쓰지 : ...
은비 : 혹시 진짜 한국분 아니세요?
타쓰지 : (무표정하게) 미안하지만 혼자 있고 싶은데.
은비 : (무안하다) 아, 예.
은비, 종잡을 수 없는 타쓰지의 행동에 불쾌하면서도 호기심을 느낀다.
은비, 깍듯하게 인사하고 돌아서 나간다.
타쓰지, 은비가 나가면 의자를 돌려 창밖을 내다본다.
#5. 여직원 화장실
은비,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고 있는데
상관없는 부서의 여직원 두 명이 저만치에서 떠는 소리가 들린다.
여1 : 너도 봤어?
여2 : 봤어, 아까 얼핏 봤는데 잘생겼더라.
여1 : 집안도 어마어마하대.
여2 : 아니, 근데 여긴 왜 왔대?
은비, 귀를 기울인다.
여1 : 경영수업 받으러 왔대나 봐.
여2 : 요즘은 그런 것도 국제적으로 하나 보지?
여1 : 하여간에 일본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집안이래.
여2 : 으아... 그런 남자 하나 꼬셔서 팔자나 고쳤으면 좋겠다.
여1 : 그 미모로?
여2 : 한 두 군데만 손보면 괜찮지 않을까?
여1 : 그래. 로또복권보단 가능성 있겠다. 한 번 시도해봐.
여직원들, 은비를 지나쳐 밖으로 나간다.
은비, 여직원들이 나가는 동안 못 들은 척 열심히 화장을 고친다.
#6. 관광호텔 앞
인철의 차가 입구에 선다.
인철, 호텔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공주를 돌아본다.
공주, 초점 없는 눈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다.
인철, 잠깐 갈등하다가 차에서 내려 공주 쪽 문을 열어준다.
인철 : 내려.
공주, 굳은 듯 앉아 있다.
인철, 거칠게 팔을 잡아 차에서 끌어낸다.
공주, 힘없이 끌려 내린다.
#7. 호텔 방
공주와 인철이 춘추의 앞에 서 있고 춘추의 뒤에는 부하들이 병풍처럼 서 있다.
춘추, 두 사람 앞을 왔다갔다하다가 갑자기 공주의 뺨을 갈긴다.
공주, 맥없이 쓰러진다.
인철, 곁눈질로 쓰러진 공주를 내려다본다.
춘추 : (목을 비틀어본다) 아, 이제야 체기가 좀 가라앉네. (인철에게) 너, 맘에 든다.
난 너처럼 빠릿빠릿하고 말귀 잘 알아듣는 놈들이 좋더라. 어제 많이 아팠냐?
인철 : 아닙니다.
춘추 : 잊어버려라.
인철 : 예.
춘추 : (지갑에서 만 원짜리 열장을 세어 내민다) 야, 기름값이나 해.
인철 : (받는다) 고맙습니다.
춘추 : 가봐.
인철 : 예.
인철,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공주를 힐끗 돌아본다.
공주,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는데 팔에 힘이 없어 부들부들 떨리기만 한다.
공주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인철, 갑자기 자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인철, 무거운 발길을 가까스로 옮긴다.
#8. 다시 호텔 앞
인철, 호텔에서 나와 차에 탄다.
인철, 선뜻 시동을 걸지 못하고 그때까지도 손에 쥐고 있는 십만원을 내려다본다. 참담하다.
인철, 안주머니에 돈을 꾹 찔러 넣고 시동을 켠다.
#9. 관광호텔 욕실 (밤)
춘추, 거울에 벗은 상체를 비춰보고 있다가 갑자기 두 팔을 올려 알통을 잡아본다.
춘추,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돌려 가슴 근육도 모아보고 주먹으로 한번 툭 쳐보더니
거울 가까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삐져나온 코털을 확 잡아 뽑는다. 눈물이 핑 돈다.
#10. 호텔 방 (밤)
춘추,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온다.
공주,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고 준하, 종성, 쭈구리, 고쳐진 방문을 지키고 서 있다.
테이블에는 얼음통에 담긴 와인과 잔이 놓여 있다.
춘추, 턱짓으로 부하들을 내보내고 와인을 꺼낸다.
춘추 : 아깐 미안했어.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버지한테 맞은 거 빼곤 너한테 처음 맞아봤거든.
부하들 앞에서 얼마나 쪽이 팔렸는지... 이해하지?
공주 : ... 나를 처음 발견한 곳이 어디냐?
춘추 : (씩 웃으며)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군. 강가에 기절해 있는 걸 내가 발견하고 내가 데려왔지. 난 네 생명의 은인이야.
공주 : 나를 그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느냐?
춘추 : 이 밤에?
공주 : 나를 데려다 다오.
춘추 : 가봐야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일 텐데?
공주 : ... (긴 함숨을 내쉰다)
춘추 :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젊은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면 쓰나.
공주 : ...
춘추 :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가며) 나도 초등학교 이학년 때 집을 나와서 안 해 본 일 없이 다 해보고 살았다.
서울 한 복판 거칠 뒷골목에서 비바람 맞아가며 암표를 팔고, 젖은 풀빵을 먹어가며 끼니를 때웠지.
그때부터 세상을 깨달은 거야.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나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면
아무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는 걸! 어떤 놈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그래서 오늘날 내가 있게 된거야.
난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하지. 나란 놈은 얼마나 대견한 놈인가... (어느새 공주 옆에 바짝 다가가 있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얘기해. 이 김춘추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으니까. 미국 비자만 빼고.
공주 : 배고프다. 먹을 것을 좀 구해다오.
춘추 : ...
시간 경과
공주 앞에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잔뜩 펼쳐져 있고 공주, 미친듯이 이것저것을 먹는다.
춘추, 앞에 앉아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고
부하들, 처음처럼 문가를 지키고 서서 공주를 보고 있다.
공주 : (문득 고개를 들어 춘추와 부하들을 본다) 뭘 그리 보고 있느냐? 민망하니 고개를 돌리거라.
춘추와 부하들, 얼떨결에 고개를 돌리지만 뭔가 이상하다.
#11. 나이트클럽 플로어 (밤)
인철과 혁,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꽥꽥 소리 질러 대화하고 있다.
혁 : 야! 너같은 짠돌이가 웬일이냐? 이런 데서 술을 다 사고?
인철 : 야! 쟤, 어떠냐?
혁 : 누구?
인철 : 쟤 말이야, 쟤! 아까부터 나만 쳐다보는데?
혁, 인철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 못생긴 여자가 계속 눈짓을 하며 춤을 추고 있다.
혁 : (허걱) 인철아! 너, 왜 그래? 참아!
인철, 혁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그 여자 앞으로 다가가 오바하며 춤을 춘다.
혁, 할 수 없이 인철을 따라가 옆에서 춤을 추며 다른 데로 끌고 가려 애쓴다.
#12. 같은 나이트클럽 룸
타쓰지, 은비, 이대리, 등등 마케팅실 직원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다.
이대리, 마이크를 잡고 열애의 마지막 부분을 열창을 한다.
이대리 : 사랑을 태우리이이라!!!!
우레와 같은 박수. 누군가 앵콜을 외친다.
이대리 : 우리 넓은 데로 춤추러 나가죠! 실장님! 가요!
이대리, 괜히 타쓰지의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간다.
은비, 이대리를 가소롭다는 듯 보며 따라 나간다.
#13. 다시 플로어
은비와 타쓰지 일행, 춤을 추고 있다.
타쓰지, 처음에는 점잖게 흔들다가 점점 실력이 드러난다.
은비와 직원들(특히 이대리), '우와' 하는 얼굴로 춤에 열중하는 타쓰지를 보는데
타쓰지의 등 뒤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던 인철이 자꾸 타쓰지와 부닥친다.
타쓰지, 부닥칠 때마다 인상을 쓰며 뒤를 째려보지만 인철은 너무 격렬하게 추느라 알지 못한다.
급기야 타쓰지, 동작을 멈추고 인철을 노려보고 선다.
직원들, 긴장하고 그 사실을 눈치 챈 혁이 인철을 슥 잡아당긴다.
인철 : 왜? 뭐?
혁 : (턱짓으로 뒤를 슥 가리킨다)
인철 : (돌아본다. 자신을 노려보는 타쓰지에게) 뭐? 왜?
혁 : (인철을 잡아 끌며) 니가 자꾸 건드리잖아. (타쓰지에게) 죄송합니다.
인철 : (탁 뿌리친다) 춤추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인철, 또 격렬하게 춘다.
은비 일행, 타쓰지가 계속 인철을 노려보고 있자 한 쪽으로 잡아끈다.
이대리 : 실장님. 여기 넓어요.
타쓰지, 못 이기는 척 끌려가 다시 전문가처럼 춤을 추는데
인철, 엉덩이를 쭉 빼고 뒷걸음질로 플로어를 누비다 다시 타쓰지의 엉덩이를 건드린다.
멋진 폼을 구사하던 타쓰지, 스템이 엉켜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다.
도저히 못 참겠다. 타쓰지, 인철을 돌려세워 다짜고짜 턱을 갈긴다.
인철, 나가떨어지고 플로어에 있던 사람들, 비명을 지르며 피한다.
타쓰지, 룸으로 돌아가려고 플로어에서 내려가는데.
인철 : (벌떡 일어나며) 쳤어? 너 오늘 죽었어!
인철, 혁이가 말릴 사이도 없이 타쓰지에게 달려들어 등에 올라타며 어깨를 물어버린다.
타쓰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혁 : 인철아!
은비 : 실장님!
혁이와 직원들, 두 사람에게 달려들어 뜯어말리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순식간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타쓰지를 막아서며 인철과 혁의 팔을 뒤로 꺽어 잡는다.
인철 : 야! 니들 뭐야? 이거 안 놔? (하다가 타쓰지를 알아본다) 어?
타쓰지 : (인철을 알아보고) 너!
#14. 복도
인철과 타쓰지, 서로 겸연쩍게 서있다.
복도 저 쪽에 경호원들이 서서 안 보는 척 감시하고 있다.
인철, 괜히 어깨를 툭 치는데 하필이면 자기가 물었던 자리다.
타쓰지, 아프지만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
인철 : 어떻게 지냈어?
타쓰지 : 넌?
인철 : 나야, 뭐, 그렇지. 어머닌 안녕하시냐?
타쓰지 : ...
인철 : 니네 엄마 치맛바람 대단했었는데.
타쓰지 : ...
인철 : 너, 일본 갔다는 소문 들었는데?
타쓰지 : 명함 있냐?
인철 : 어, 그래. (주머니를 뒤지며) 난 지금 패션 쪽에서 일하는데... (경호원들을 슥 보고) 넌 뭐하냐?
타쓰지, 인철의 명함을 받아들고 보다가 명함 지갑을 꺼내 인철의 명함을 넣고 자기 명함을 꺼내 건넨다.
인철, 취중에도 타쓰지의 행동 하나하나, 몸에 지닌 물건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타쓰지 :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해라.
인철 : (받으며) 어, 그래.
타쓰지 : 일행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반가웠다.
인철 : 어, 그래.
타쓰지, 돌아서서 가버린다.
인철, 명함을 들여다본다. 앞면은 한자로 뒷면은 영어로 이름이 씌어있다.
인철 : (영문을 보며) 후,지,와,라, 타...지?
인철, 의아한 얼굴로 타쓰지가 사라진 쪽을 돌아보는데 경호원들은 어느새 없어졌다.
복도 끝에서 은비 역시 의아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14-1. 엄박사네 집 (밤)
엄박사, 자고 있는 순자 옆에서 패를 뜨고 있지만 머리 속에는 인철의 집에서 본 공주 생각 뿐이다.
엄 :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정말 이상해... 어, 이상해. 이상해. 뭐하는 여잘까? 술집 여자 같지는 않던데. 어, 정말 이상해...
순자, 피곤에 절은 얼굴로 벌떡 일어나 엄을 째려본다.
순자 : 중얼거리지 좀 마! 잠 좀 자자.
순자, 다시 눈을 감으며 픽 쓰러진다.
이때 복도를 걷는 발소리에 이어 인철이네 집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엄, 날카롭게 돌아본다.
#15. 인철이네 집 (밤)
인철, 들어와 불을 켠다. 공주를 데리러 나갈 때 그 모습 그대로 엉망이다.
인철, 엉망인 집안을 물끄러미 보다가 괜히 방에 어질러진 것들을 걷어차는데.
엄 : (소리) 인철이! 들어 왔나?
인철 : 누구세요!
엄 : (소리) 어, 나야.
인철 : (문을 열며) 밤늦게 웬일이세요?
엄 : (집안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며 막 들어온다) 어, 그냥. 잠이 안 와서.
인철 : 그러게 낮잠 주무시지 말라 그랬잖아요.
인철, 바닥에 있는 것들을 대충 한쪽으로 밀어 치우기 시작한다.
엄 : (냉장고를 뒤지며) 나도 안잘라고 애쓰는데, 손님 없을땐 여간 심심한게 아니야. 마누란 일 나가지, 앤 학교 가지.
설거지 하고 방바닥 대충 닦고 나면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야.
엄,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소주와 플라스틱 김치통을 찾아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잔을 찾아 씽크대를 뒤진다.
인철 : (치우며) 아주 박살이 났네, 박살이 났어.
엄 : (조금 미안한 얼굴로 한 옆에 서서 소주를 마시며) 아유, 집안이 엉망진창이 됐네. 아으 써. 이거 언제 먹던 거야?
인철 : 몰라요.
엄 : (몸서리를 치면서도 다시 따라 마신다) 어으, 써! 근데 그 아가씨하고는 어떤 사이야?
인철 : (계속 치우며)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엄 : 관상이 보통 관상이 아니던데...
인철 : ...
엄 : (김치를 집어 먹으며) 정말 술집 아가씨야?
인철 : ... 왜요?
엄 : 아니, 그냥, 좀 이상해서.
인철 : (치우다말고) 뭐가요?
이때 문이 벌컥 열리고 숙희가 졸린 눈으로 들어온다.
숙희 : 아빠! 엄마가 남의 집에서 밤늦게 수다 떨지 말고 지금 당장 오래!
엄 : (쪽팔리고 비참하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버럭) 금방 간다 그래.
숙희 : 데리고 오래.
엄 : 뭐? 데리구 와? 내 이 여편네를 그냥!
엄, 급하게 나가 버린다.
인철, 씩 웃다가 치우던 것들을 그대로 놔두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풀썩 드러눕는다.
춘추에게 맞아 바닥에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던 공주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인철, 이불을 확 뒤집어쓴다.
#16. 은비네 집
토스터에서 새까맣게 탄 빵이 튀어오른다.
채여사 :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아줌마를 한 시간씩 일찍 오라 그러던지 해야지, 아, 피곤해. 여보-! 은비야-! 아침 먹자-!
잠옷 바람의 채여사, 접시를 빵에 담아 들고 식탁으로 간다.
식탁에는 빵, 베이컨, 버터, 잼, 쥬스, 우유 등이 놓여 있다.
봉수와 은비, 각자 출근준비를 하고 방에서 나와 식탁으로 온다.
봉수 : 또 빵이야?
봉수와 은비, 능숙한 솜씨로 새까만 빵에 잼을 바른다.
은비, 아침을 먹으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채여사 : 식당 가면 맨날 한식만 먹는 사람이 왜 그래요? 아침 한 끼쯤은 양식으로 먹을 수도 있지. 촌스럽게 꼭 된장 먹어야 돼?
봉수 : 거, 빵 좀 안 태울 수 없어? 입이 다 찢어질라 그러잖아.
채여사 : 그럼, 내일부터 당신이 구워. (갑자기) 어으, 갈비냄새. (봉수의 양복냄새를 맡아보며) 이거 어제 입던 옷 아니야?
봉수 : 아니야. 갈아입었어.
채여사 : 어떻게 그 냄새는 드라인 해도 안 빠져? 업종을 바꾸든지 해야지, 정말.
봉수 : 우리 식구 그 덕에 이만큼 사는 거야. 강북에서 식당해서 강남에서 이만한 평수에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채여사 : 강남이면 뭐해? 강북 아파트 두개나 팔아서 겨우 전세 들어왔는데?
봉수 : 강남, 강남, 노래를 부른 사람이 누구야? 다시 이사 가?
채여사 : 그거야, 애 교육 때문에,
은비 : (말끊으며) 아, 시끄러워서 밥을 못 먹겠네. 나 먼저 나간다.
은비, 나가버린다.
봉수 : 애 저렇게 교육시킬라고 강남으로 이사 온 거야?
채여사 : 이 아줌마는 왜 이렇게 안 와?
#17. 은비네 아파트 앞
인철의 차가 서고 인철과 순자가 차에서 내린다.
인철, 트렁크에서 장바구니를 내려준다.
순자 : 사 오래는 것도 많아. 번번이 고마워.
인철, 장바구니를 들고 현관까지 따라가 건네준다.
순자 : 참, 근데 그 아가씬 어떻게 됐어?
인철 : 갈게요.
순자 : 그래, 가. (들어간다)
인철, 돌아서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인철 : (받는다) 여보세요... 어, 그래...알았어. 그것만 사 가면 돼? ....응, 알았어. 금방 갈게.
인철이 전화를 받는 동안 은비가 아파트에서 나오다가 전화를 받는 인철을 돌아본다.
인철, 세련된 미모의 여인이 자신을 쳐다보자 갑자기 멋있는 척 하며 전화를 끊고 차 쪽으로 가는데
은비, 인철에게 다가온다.
인철, 괜히 자기 차 뒤에 주차되어 있는 외제차 쪽으로 가서 선다.
은비 : 안녕하세요?
인철 : 아, 안녕하세요?
은비 : 여기 사세요?
인철 : 저, 아세요?
은비 : 저기...혹시...어제 나이트에서...
인철 : (누구지?) ...
은비 : 우리 실장님하고 ... 싸우셨던 분 아니세요?
인철 : 실장님이요?
은비 : 후지와라 타쓰지라고 일본에서 오신,
인철 : 아! 그럼 그 옆에 계셨던 분?
은비 : 예.
인철 : 반갑습니다. 이런 데서 또 뵙네요. 여기 사세요?
은비 : 예.
인철 : 아, 예. ... 출근하시나 봐요?
은비 : 예. 여기 사시면 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인철 : 아, 뭐... 예.
은비 : 근데 우리 실장님하곤 잘 아세요?
인철 : 예? 아, 예. 그 친구하곤 뭐...
은비 : 아! 친구분이세요?
인철 : 예.
은비 : (더 이상 묻기가 민망하다) 어...저,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인철 : 예, 그러죠. 언제 한 번 그 친구하고 같이 만납시다.
은비 : 어머,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명함을 꺼내 내밀며) 저한테도 연락처 하나 주시겠어요?
인철 : 예?
인철, 은비의 명함을 받고 자신의 명함을 꺼내준다.
은비 : 강남 어패럴? 디자이너시네요?
인철 : 아, 예.
은비 :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은비, 인철의 차 옆에 있는 자신의 차에 올라 붕 떠난다.
인철,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은비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차에 바짝 붙어 선다.
이때 누군가 툭툭 친다.
누군가 : 남의 차에서 뭐하는 겁니까?
인철 : 죄송합니다.
인철, 바로 앞에 주차해놓은 자기 차에 탄다.
#18.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
은비, 차에서 내려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다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타쓰지를 본다.
은비 : 실장님, 안녕하세요?
타쓰지 : (가볍게 목례한다)
은비 : 어젠 잘 들어가셨어요?
타쓰지 : 네.
은비 : 어제 그 친구분 있잖아요.
타쓰지 : (표정 없이 돌아본다)
은비 : 저랑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거 있죠? 어떻게 아시는 친구분이세요?
타쓰지 : 원래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요?
은비 : 네?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타쓰지, 엘리베이터에 성큼 타 버린다.
은비, 무안한 얼굴로 따라 탄다.
나란히 서서 살짝 외면하고 서 있는 두 사람. 문이 닫힌다.
#19. 사무실
은비,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타쓰지의 태도가 생각할수록 불쾌하다.
이때 이대리, 타쓰지 사무실과 주변을 살피며 앉은 채 의자를 엉덩이로 끌고 다가온다.
이대리 : (조용히) 우리 실장님, 도대체 정체가 뭘까? 어제 경호원들 봤지?
은비 : ...
이대리 : 우리 실장님. 보기보다 터프하더라. 근데 그 남자도 너무 잘 생기지 않았니? 그 남자는 누굴까?
두 사람이 어떻게 아는 사일까? 근데 그 남자 옆에 있던 그 남자도 괜찮아 보이지 않디?
오오오, 왜 그렇게 다 멋있는 거야? 그렇게 멋있는 놈들이 쌨는데 난 왜 시집을 못가는 거야?
과장 : 이대리! 그거 다 했어?
이대리 : (인상을 확 쓰며 혼잣말로) 아, 노는 꼴을 못 봐요. (과장을 보며) 다 돼 가요?
이대리, 다시 의자를 엉덩이로 밀며 앉은 걸음으로 돌아간다.
은비, 이대리가 돌아가자 타쓰지의 사무실을 돌아보며 인철의 명함을 꺼내 들여다본다.
#20. 옷공장
혁, 온 몸에 실밥을 잔뜩 붙인 채 바쁘게 재봉질을 하고 있다.
인철, 소파에 앉아 타쓰지와 은비의 명함을 꺼내들고 만지작거리고 있다.
혁, 못참겠는지 자기가 박던 옷가지들을 인철에게 홱 집어던진다.
인철 : 왜 또 그래?
혁 : 내가 억울해서 그래. 왜 맨날 나만 일하고 있냐? 너, 뭐하는 놈이야? 이렇게 할 거면 동업은 왜 시작했어?
허구헌날 기집애들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다가 사기나 당하고. 정신 나간 년 데려다가 뒤치다꺼리나 하고.
그래갖고 어느 세월에 강남 어패럴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우겠냐? (얘기를 하며 흥분해서 벌떡 일어난다)
너, 처음에 나한테 뭐라 그랬어? 미쏘니, 베네똥, 그런 거 하나도 부럽지 않게 만들어주겠다 그랬지?
멀쩡하게 좋은 직장 잘 다니고 있는 나를 꼬셔서 동업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될 거 아냐?
왜 맨날 나만 일하고 너는 놀아? 내가 니 시다바리냐? 그리고 내가 언제까지 이런 옷들만 만들고 있어야겠냐?
나도 제대로 된 옷 좀 만들고 싶어. 팔도 있고 다리도 있는 옷!
인철 : 조금만 참아라. 이번엔 제대로야.
혁 : (한숨) 또 어떤 년인데?
인철 : (명함을 뒤집으며) 고은비.
혁, 인철의 손에서 명함을 탁 빼앗는다.
혁 : 뭐야, 이거?
인철, 다시 탁 빼앗아 주머니에 넣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혁 : (받는다) 네, 강남어패럴입니다. ... 강인철 디자이너요? 잠시만요. (송화기를 가리고 인철을 노려본다)
너, 내가 디자이너로 명함파지 말라 그랬지?
인철 : (혁의 손에서 수화기를 낚아챈다) 네, 강인철입니다.
혁, 인철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린다.
인철 : 아! 고은비씨? ... 아, 그럼요. 괜찮습니다. 방금 회의 끝났어요. ... 네? 오늘 저녁에요? ...잠깐만요, 스케쥴 좀 확인해보구요.
(송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혁이에게 보란 듯이 혀를 쭉 내민다) 여보세요. ... 오늘 저녁, 시간 괜찮습니다.
... 네. ... 네. ... 네, 좋습니다. 그러면 이따 뵙죠.
인철, 전화를 끊고 미소를 머금으며 생각에 잠기는데.
혁 : 에라 이!
혁, 마네킹으로 인철을 강타한다.
#21. 관광호텔방
춘추와 준하, 부하들,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다.
춘추, 이마를 짚고 머리를 숙이고 깊이 고민하고 있다.
부하들, 상처가 더 심해져 있다.
준하 : 우리가 아무래도 덤터기 쓴 거 같습니다.
춘추 : ...
준하 : 기다렸다는 듯이 저 여자를 데려온 걸 보면 그 놈도 무척 당한 것 같습니다.
그 놈도 감당이 안 되니까 우리한테 떠넘긴 거 아닐까요?
춘추, 고개를 드는데 양 쪽 콧구멍은 솜으로 틀어막았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준하 : 기름값 십만원은 괜히 주신 것 같습니다.
춘추 : ...
준하 : 그 놈한테 다시 돌려보내는 게 어떨까요?
이때 욕실문이 벌컥 열리고 공주가 안에서 나온다.
춘추패거리들, 춘추를 중심으로 서로 뭉친다.
공주, 관심 없다는 얼굴로 의자에 가 앉아 테이블 위에 남은 음식을 다시 먹는다.
춘추일당,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공주를 보는데 테이블 위에 있는 전화벨이 울린다.
공주, 흠칫 놀라고 춘추일당, 날카롭게 돌아본다.
준하, 공주를 경계하며 조심조심 테이블 쪽으로 다가와 멀리서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든다.
준하 : (받는다) 여보세요. ... 아, 네. (춘추에게) 박변호삽니다.
춘추 : 그래? (받아든다) 어, 나야. ...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수고했어. ... 그래.
(끊는다. 부하들에게) 서울로 돌아간다. 짐 꾸려라.
부하들, 우와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부둥켜안는다.
공주, 춘추가 내려놓은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본다.
춘추와 부하들, 좋아하다말고 문득 공주를 돌아본다.
준하 : 쟨, 어떡하죠?
춘추, 공주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생각에 잠긴다.
#22. 나이트클럽 대기실
문이 열리면 김상무가 공주를 데리고 들어온다.
화장도 하고 몸도 풀던 무희들, 공주를 주시한다.
공주, 낯선 분위기에 긴장한 얼굴로 서 있다.
상무 : 새로 온 애니까 잘 가르쳐봐. 옷도 좀 갈아입히고. 회장님이 특별히 부탁한 애니까 신경 좀 써라. (나가버린다)
무희들, 뭐야? 하는 얼굴로 공주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공주, 유곽의 여인들처럼 짙은 화장을 한 무희들은 슬픈 눈으로 찬찬히 둘러본다.
무용2 : (거울로 보며) 너, 어디서 왔냐?
공주 : ...
무용3 : 어우동 출신인가 봐. 이름이 뭐야?
공주 : ...
무용4 : 몇 살이냐?
공주 : ...
무용2 : 벙어리야?
공주 : ...
무용1 : 나도 처음엔 저랬다. 말도 하기 싫었어. 괜히 건드리지 말고 끝에 자리 하나 만들어줘라.
누군가 공주를 끌고 가 맨 끝자리에 앉힌다.
무희들, 금새 공주의 존재를 잊은 듯 자기들 일에만 몰두한다.
공주,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자신의 멱살을 잡고 닦달하며 끌고 가, 춘추 앞에 쓰러진 자기를 두고 떠나던 인철의 모습이 떠오른다.
공주의 눈에 눈물이 핑 돈다.
공주,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씁쓸하게 웃는다.
공주 : (독백) 나는 내 마음을 닫았다. 더 이상 누구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나라를 잃고, 부모형제와 사랑하는 아리까지 잃고
이제 마지막 남은 나의 명예와 자존심까지 잃었다. 이 낯설고 더러운 세상 속에서 치욕 속에 생을 이어가야 할지,
아니면 비록 새의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이 될지라도 아리의 곁으로 돌아가야 할지....
공주,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목걸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손을 목으로 가져간다.
#23. 옷공장
인철, 휘파람을 불며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외출준비를 하고 있다.
머리를 정성스레 매만지고 한 올을 이마로 늘어뜨려 보지만 춘추에게 얻어터진 얼굴은 가려지지 않는다.
인철 : 아, 별 거지같은 기집애 때문에 정말, 야, 한 오만원 있냐?
혁 : (일하며) 오만원 같은 소리 하네. 너, 저번에도 십만원 꿔관 거 아직 안 갚았다?
인철 : 앓느니 죽지. 먼저 간다.
인철, 윗도리를 집어 드는데 주머니에서 목걸이가 툭 떨어진다.
혁, 재빨리 탁 집는다.
혁 : 이게 뭐냐?
인철 : (당황한다) 어, 그거?
인철, 얼른 혁이의 손에서 목걸이를 낚아채려는데
혁, 얼른 팔을 치켜들어 피하며 목걸이를 본다.
혁 : 비싸 보이는데?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인철 : 내놔. 가짜야. (다시 빼앗으려는데)
혁 : (피하며) 잠깐만! 어, 이거 봐라? 알이 장난이 아닌데?
인철 : 내놔!
인철, 확 빼앗아 주머니에 넣는다.
인철 : 간다. (나가려는데)
혁 : (봉투를 홱 던진다) 야! 이거 나타샤 건데, 늦게라도 갖다 달래.
인철,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 들고 혁이를 흘기며 밖으로 나간다.
#24. 전당포 앞 (저녁)
인철, 걷다가 전당포 간판 앞을 지나친다.
저만치 갔던 인철,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본다.
#25. 전당포 전당포
주인, 돋보기를 끼고 공주의 목걸이를 들여다보고 있고
인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다.
주인, 흥분을 감추며 목걸이를 자세히 본다.
주인 : 얼마 필요해?
인철 : 얼마 줄 수 있는데요?
전당 : ... 오백?
인철 : (오백원인줄 알고) 예? 이 아저씨가 장난하나?
전당 : 아니, 그러게 얼마 필요하냐니까?
인철 : 됐어요, 주세요.
전당 : 팔백.
인철 : (뭔가 이상하다) ...
전당 : 많이 쳐주는 거야. 정상적인 물건도 아닌 거 같은데. 이거 어디서 났어?
인철 : ...
전당 : 더 이상은 안돼.
인철 : 줘봐요.
전당 : 썼다. 천!
인철 : 아, 글쎄, 줘봐요.
전당, 부들부들 떨면서 마지못해 준다.
인철, 탁 낚아채 들여다보다가 주머니에 슥 넣는다.
인철 : 다시 올게요.
전당 : 천이백!
인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간다.
#26. 전당포 앞 (저녁)
인철, 목걸이를 쥔 손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서 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머리 속이 혼란스럽다.
#27. 레스토랑 (밤)
인철, 물 한 잔을 앞에 놓고 자리에 앉아 목걸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인철 : 천이백? 허! 차! 뭐하는 기집애야, 도대체?
집사 : 강인철씨?
인철, 얼른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으며 돌아본다. 모르는 남자가 서있다.
인철 : 누구세요?
집사 : 저는 이께다 나오다까라고 합니다.
인철 : 네?
집사 :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인철 : 무슨 일 땜에 그러시는데요?
집사 : (앉는다) 고은비씨를 만나러 나오셨죠?
인철 : (뭐야?) 그런데요.
집사 :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외람되지만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인철 : ...
집사 : 후지와라상을 아시지요?
인철 : ...
집사 : 어제밤에 만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철 : (기가 막히다) 허!
집사 : 후지와라상께서는 강인철씨가 후지와라상 주변 사람들을 만나지 않길 바라십니다.
인철 : (점점 기가 막히다) 이거 보세요! 내가 누굴 만나든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에요?
집사 : 후지와라상과 관련된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인철 : (열 받는다) 그 자식이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모르지만 내가 그 자식을 팔아먹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집사 : 모욕적인 언사는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고은비씨한테 친구라고 하셨다면서요?
인철 : (기분 더럽다) 하, 참, 나, 원.
집사 : 고은비씨하고 같은 아파트에 사신다고 말씀하셨더군요.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임대 아파트에 사시는 걸로 돼 있던데.
인철 : 당신들, 뭐야? 도대체!
집사 : 흥분하지 마십시오. 전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러 왔을 뿐입니다. 고은비씨와 강인철씨, 두 분이 어떤 관계로 발전하든
저희는 관심 없습니다. 다만 두 분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후지와라상이 관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집사, 인철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가버린다.
인철, 기분 더럽다.
인철 : 내 이 자식을 그냥! 어으! 으아! 아으!
인철, 물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는데 은비가 들어온다.
은비 : (앉으며) 어머,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인철 : (물이 목에 걸린다. 캑캑거리며) 아, 아, 예.
은비 : 요 앞에서 웬 차가 길을 막고 안 비켜주더라구요. 죄송해요. 제가 뵙자고 해놓고.
바쁘신데 제가 시간 뺏는거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인철 : (앞에 흘린 물을 바쁘게 털어내고 사레들린 목을 추스르느라 계속 캑캑거리며) 아, 아, 아, 별 말씀을.
은비 : 괜찮으세요?
인철 : 아, 저기, 죄송한데요.
은비 : 네?
인철 : 제가 갑자기 볼 일이 생겨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은비 : (어처구니없지만) 하, 할 수 없죠, 뭐.
인철 : 제가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인철, 봉투를 집어들고 뒤도 안 돌아보고 급하게 나가 버린다.
은비, 황당하고 불쾌하고 모욕적이지만 왠지 인철에게 끌린다.
#28. 호텔 - 타쓰지 방
타쓰지,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며 양복을 벗어 아무데나 집어던지고 리모콘을 집어 티브이도 켜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미인도 앞에 선다.
타쓰지 : 백제 공주라고? 흠...
휴대전화벨이 울린다.
타쓰지 : (받는다) 모시모시.
소리 : (인철, 꽥) 야, 이 새끼야! 너 죽을래?
타쓰지 : 누구세요?
소리 : (인철) 나다, 강인철, 이 새끼야!
타쓰지 : 누구?
#29. 거리 (밤)
인철, 걸어가며 전화를 하고 있다.
인철 : 누구? 누구? (열 받아서 선다) 너, 거기 어디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끊어졌다) 어쭈! 끊어?
인철, 다시 통화버튼을 막 누르는데 인철의 앞으로 집사가 탄 차가 슥 지나간다.
인철, 눈이 홱 뒤집혀 지나가는 택시를 잡는다.
인철 : 택시! 택시!!!
인철의 앞에 택시가 서고 인철, 급하게 택시에 오른다.
#30. 택시 안 (밤)
인철 : 아저씨! 저 차 좀 쫓아가 주세요.
인철, 앞차를 놓칠세라 차 앞으로 튕겨 나갈 듯이 머리를 들이밀고 앞을 본다.
기사, 사이드미러가 안 보이자 인철의 머리를 뒤로 확 밀어버린다.
#31. 호텔 앞 (밤)
집사의 차가 현관 앞에 서고 집사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간다.
이어 택시가 들어와 서고 인철이 내린다.
인철, 호텔을 째려본다.
#32. 로비 (밤)
집사,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간다.
그 뒤를 봉투를 든 인철이 성큼성큼 따라간다.
#33. 엘리베이터 앞 (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집사가 탄다.
집사, 층 단추를 누르고 문이 닫히길 기다리는데 인철이 탄다.
집사, 깜짝 놀란다.
인철, 말없이 집사를 째려보는데 문이 닫힌다.
#34. 타쓰지네 층 엘리베이터 앞 (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인철, 엘리베이터에서 튀어나온다.
집사, 얼른 따라내려 인철을 막아선다.
집사 :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여기는 사적인 공간입니다.
인철 : (비웃으며) 사적인 공간 좋아하네. 그 자식 어디 있어요?
집사 : 돌아가십시오. 안 그러면 물리적인 힘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인철 : 맘대로 하시지.
인철, 갑자기 아무 문이나 발로 걷어차며 소리를 지른다.
인철 : 야! 너, 어디 숨어 있어? 빨리 안 나와? 야!
집사, 갑자기 사사삭 다가와 인철의 옆구리 급소를 꽉 누른다.
인철, 호흡이 곤란해지며 너무 아파 괴성을 지르며 꼼짝을 못한다.
인철 : 으으으으으...
이때, 타쓰지 방문이 양쪽으로 벌컥 열리고 타쓰지가 나타난다.
타쓰지 : (일어로) 놔 줘.
집사, 인철의 급소를 풀고 물러난다.
타쓰지 : 들어와. (돌아서 들어간다)
인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집사의 눈치를 보며 타쓰지를 따라 가까스로 방으로 들어간다.
#35. 타쓰지 방 (밤)
인철, 아픈 옆구리를 문지르며 생전 처음 들어와 보는 호텔 스위트룸의 거실을 주눅 든 얼굴로 두리번거린다.
집사, 따라 들어와 문을 닫는데.
타쓰지 : 나가 있어.
집사 : (인철을 슥 보고 나간다)
타쓰지 : 앉아. 뭐 좀 마실래?
타쓰지, 홈 바로 가서 술을 꺼내는데
인철, 기웃기웃 구경을 하다가 미인도가 걸려 있는 침실 쪽을 들여다보려고 하자
타쓰지, 얼른 방문을 닫아버리고 다시 홈바로 간다.
머쓱해진 인철, 창 밖과 방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며 의자에 앉는다.
타쓰지, 크리스탈 언더락스 잔에 위스키를 따라와 인철에게 한 잔을 건네고
자기는 술잔을 든 채 창가에 가서 밖을 내다보고 선다.
타쓰지 : 여기까지 웬 일이야?
인철 : (주눅들지 않은 척 괜히 건방지게 소파등걸이에 팔을 올려놓고 거드름을 핀다) 여기서 사냐?
타쓰지 : 응.
인철 : (기가 막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 출세했다?
타쓰지 : (피식 웃으며 창가에 걸터앉아 인철을 본다)
인철 : 근데 이름은 언제 바꿨냐?
타쓰지 : 그게 원래 내 이름이야.
인철 : (이해가 잘 안된다) 하! 왜 하필이면 쪽바리 이름을 쓰냐?
타쓰지 : 그게 용건이야?
인철 : 아니. (갑자기 생각났다) 너, 왜 남의 뒷조사 하고 다녀?
타쓰지 : ...
인철 : 내가 누굴 만나든, 내가 어디서 살든,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타쓰지 : ...
인철 : 나,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사람 보내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타쓰지 : ...
인철 : 알았어?
타쓰지 : ... 그래.
인철 : ... (잠시 보다가) 오늘은 내가 옛 정을 생각해서 이쯤에서 참는다. 갈게.
인철, 술잔을 내려놓으려다가 술이 남아있자 얼른 마시더니 거칠게 내려놓고 벌떡 일어난다.
타쓰지 : 저녁 같이 할래?
인철 : 됐어. 너나 쳐먹어.
인철, 홱 돌아서 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봉투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간다.
타쓰지, 잠시 인철이 나간 문을 보다가 돌아서 다시 창 밖을 본다.
잠시 후 집사가 들어온다.
집사 : ... 그 분 때문에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타쓰지 : 아니야.
집사 : 식사 준비됐습니다. 내려가시죠.
타쓰지 : 나 좀 나갔다 올게.
집사 : ...
타쓰지 : 옛날 살던 동네에 한 번 가보고 싶어서.
타쓰지, 방으로 들어간다.
집사, 말없이 고독해 보이는 타쓰지의 뒷모습을 본다.
#36. 클럽 대기실 (밤)
공주의 옷을 벗기려던 무용수들, 비명을 지르며 한꺼번에 나가떨어진다.
무용수들 : 으아아!
공주, 씩씩거린다.
공주와 무용수들, 얼마나 격렬한 몸싸움을 했는지 모두 머리는 산발을 하고 옷도 엉망이 되어 있다.
이때 다른 무용수가 들어와 그 광경을 본다.
열린 문틈으로 밖의 음악소리가 꿍짝꿍짝 들린다.
무용4 : (자기 자리로 가며) 아직도 못 벗겼어?
무용2 : 무슨 저런 년이 다 있어?
무용3 : 힘도 더럽게 쎄네.
공주 : 한번만 더 내 옷을 벗기려 들면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겠다.
무용1 : 자! 너는 오른쪽 팔 잡아. 너는 왼쪽 팔! 나는 다리 잡을게.
공주, 불안한 얼굴로 벽에 딱 붙어 방어자세를 취한다.
무용1 : 자! 다시 한 번 해보자. 하나! 둘! 셋!!
우와!! 무용수들, 다시 공주에게 와락 달려든다.
#37. 클럽 룸 (밤)
김상무, 춘추와 부하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다.
상무 :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들 했어.
춘추 : 나 없는 동안에 김상무가 고생했지, 뭐.
상무 : 아닙니다.
춘추 : 자, 김상무도 한 잔 받아.
춘추, 상무에게 술을 따라주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무용1이 산발을 하고 쌍코피를 흘리며 뛰어 들어온다.
상무 : 뭐야?
무용1 : 상무님! 쟤 이상한 애야. 어디서 저런 앨 데려왔어?
춘추, 미안한 얼굴로 외면하고 준하와 부하들도 짐작이 간다는 듯 안쓰러워한다.
상무 : 어허! 회장님께서 특별히 뽑아온 앤데 무슨 소리야?
무용1 : 아무튼 우리 힘으론 못 갈아입히겠으니까 오빠들이 갈아입혀. (확 나가 버린다)
상무 : (춘추에게) 무슨 얘깁니까? 이상한 애라뇨?
춘추 : 냅둬. 자, 한 잔 하자.
모두들 잔을 든다.
춘추 : 우리의 불기소처분을 위하여!
일동 : 위하여!
#38. 클럽 앞 (밤)
인철, 봉투를 들고 클럽 입구로 들어서며 기도에게 인사한다.
인철 :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간다)
#39. 대기실 (밤)
공주, 구석의자에 불안한 얼굴로 앉아있고
무용수들, 공주와 씨름하며 망가진 화장과 머리를 매만지느라 정신없다.
무용1 : 아, 어떡해. 이러고 어떻게 무대에 올라가?
무용2 : 그러게 말이야. 손톱도 다 뿌러졌어.
무용3 : 도대체 쟤를 어따 쓰겠다는 거야?
무용2 : 저런 애를 무용수로 키우라는 게 말이 돼?
이때 문이 열리고 인철이 들어온다.
인철 : 안녕. 언니들.
무용들, 오빠 왔어? 안녕. 등등...
인철, 들고 온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 놓는다.
인철 : 야, 나타샤! 왜 두 번 심부름 시켜?
나타샤 : 고마워, 오빠.
인철, 봉투를 뒤져 안에 든 옷을 꺼내다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린다.
구석자리에서 공주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인철,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공주, 인철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물이 핑 돌지만 울지 않으려 애쓴다.
인철 : (당황스럽지만 애써 여유를 보이며) 너, 여기 왜 있냐?
무용1 : 어머! 오빠도 아는 애야?
인철 : 아니, 뭐 안다기보다도 그냥 좀. (얼버무리며) 얘들아, 오빠 간다.
인철, 공주를 외면하며 돌아서 나가려는데.
공주 : 잠깐!
인철 : (서서 돌아본다)
공주, 자리에서 우아하게 일어나 인철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인철, 괜히 불안하다.
인철 : 왜?
공주 : 혹시 네가 내 목걸이를 갖고 있느냐?
인철 : (뜨끔하다. 과장되게) 뭐? 너, 나, 지금 도둑놈 취급하는 거냐?
공주 : (빤히 보다가) ... 아니면 됐다.
공주, 홱 돌아서 다시 자리에 가 앉는다.
인철, 공주를 버리고 돌아설 때보다도 더 비참하다.
인철 : (무용수들이 자기를 보고 있자 괜히 큰소리로) 이게 사람을 뭘로 보고! 에잇!
인철, 신경질을 내며 문을 꽝 닫고 나간다.
무용수들, 나간 인철과, 눈물을 뚝 흘리는 공주를 조용히 번갈아 보는데
공주,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간다.
#40. 클럽 안
현란한 조명, 춤추는 무용수들, 분주한 웨이터들, 왁자지껄한 손님들 사이를 가로 질러 나가는 인철.
공주, 대기실에서 나와 두리번거리다 인철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테이블 위를 뛰어넘어 인철의 앞을 가로막아 서더니 다짜고짜 인철의 뺨을 후려갈긴다.
손님들, 비명을 지르고 웨이터들도 무슨 일인가 하여 다가오고 음악도 춤도 멈춘다.
공주 : (눈물을 뿌리며) 내가 너한테 뭘 그리 잘못했느냐?...
인철 : ......
공주 : 내가 너를 기억하듯이 너 또한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란 것 밖에 더 있느냐? 내가 비록 알지 못할 곳에 떨어져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시종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네가 어찌 나를 이토록 능멸할 수 있단 말이냐?
인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한 가운데 가슴 한 켠이 싸아해진다.
공주,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인철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춘추와 부하들, 무슨 일인가하여 나오다가 마주 서 있는 인철과 공주를 본다.
춘추, 턱짓을 하면 부하들, 공주를 끌고 안으로 들어간다.
인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맥없이 끌려가는 공주.
인철, 그런 공주를 가슴 아프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