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고 미안하다. 단지 그 말만을 계속 하게 되는구나. 미안하다는 말로 내 잘못들을 모두 용서받고, 과거의 모든 일들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미안하다고 하여야 하겠지. 아니 네게 무릎 끊고 빌어서라도 네게 용서받고 싶고, 과거의 모들 일들을 되돌리고 싶다. 정말 그러고 싶다. 하나 이제와 어떤 말로도, 어떤 노력으로도, 그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겠지.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아쉬워서 만은 아니다. 네가 이 세상 어느 곳엔가 행복하게 살아가고만 있었더라도 나는 그 과거의 모든 일들을 잊어가고 있을 것이고, 네게 미안해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단지 너를 날 사랑해 주었던 고마운 사람으로만 기억했겠지. 널 사랑하였던 과거의 감정들이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너를 다시 떠올리지도, 다시 그리워하지도, 다시 사랑하지도 않았겠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에 왔어야 너를 다시 떠올리고, 다시 그리워하고, 다시 사랑하게 되는구나. 그리하여 과거의 일들을, 너와 나의 사랑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구나.
내겐 너무 벅차고 힘든 그 시기에 넌 나를 다시 믿어주고, 다시 선택해주고, 다시 내게 사랑을 주었지. 너는 내 곁에서 나를 위해 주고, 위로해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힘을 빌려 주었지.
길을 걸을 때는 너는 내내 내 왼쪽에 붙어 내 팔을 끼고 내 곁에 있었고, 몇 시간이고, 함께 걸어 주었지. 내가 책을 볼 때는 너는 내 맞은 편에 앉아, 나를 바라봐 주었고, 가끔 내가 고개를 들어 널 볼 때면 상냥하게 미소지어 주었지.
지하철 막차를 타기 위해 함께 뛰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자판기 커피 한잔을 나눠 마시면서도 행복해 했고, 집으로 가기 위해 헤어지는 때에는 손을 흔들고 몇 번이고 돌아보며 아쉬워했었지.
집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기대어 잠을 청할 때쯤이면 네 전화가 오곤 했었지. 간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보고싶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말했었지. 그리곤 혹 내가 피곤해 할까 질 지라는 아쉬운 끝맺음을 했었지.
그래, 너는 그리도 이 못난 나를 사랑해 주었었지.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내게 하였고,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네 사랑을 알 수 있게 해 주었지.
나도 미친 듯 너를 사랑했었지. 영화처럼, 소설처럼, 유행가 가사처럼, 그렇게 온 마음을 바쳐 너를 사랑했었지. 너를 기쁘게 해 주려 했고, 너를 행복하게 해 주려 했고,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건 모두 해 주려 했었지. 무엇 하나 네게 해 준 건 없고, 해 줄 수도 없었지만... 짧은 몇 달간이었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그리 하려고는 했었지.
그러나 공부를 그만두고, 내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차츰 변해 버렸지. 나는 너무나 사랑에 미숙한 사람이었기에...
너를 묶어두려는 집착에 네 주위 사람들을 질투했었고. 네 활기찬 생활을 질투하고, 네 미래를 질투하였지. 네가 선배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것이 싫었고, 언제나 바쁜 네 모습이 싫었고, 굳이 유학을 가려고 고집하는 것이 싫었지.
나를 지키려는 알량한 자존심으로 너를 외롭게 하고, 너를 힘들게 하고, 네게 상처를 주었지. 조그만 일에도 나는 꼬투리를 잡고, 짜증을 내었지. 넌 아무 잘못도 없이 내 앞에서 전전긍긍했고, 난 그런 너를 무시했었지.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에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확신하지 못했고, 우리의 사랑을 의심했지. 환상에서 깨어나면 곧 내다 버리고 마는 것이 사랑일 것이라 생각하였고, 그 환상이 깨어질 것을 지레 무서워했지.
결국 나는 무심히 네 곁을 떠나 버렸지. 그리곤 그 이후론 두 번 다시 예전의 우리로 돌아갈 수 없었지. 그 이별이 나의 집착과 욕심, 나의 자존심과 옹졸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고통이 따른 뒤의 일이었지.
미경네 집은 미영과 그녀의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기영은 그 중 큰 남동생으로 미경과는 네 살 차이가 났다. 녀석의 전화를 받은 것은 졸업을 앞둔 내 대학 4학년 가을이었다.
"형, 나야, 기영이."
"오, 그래, 반갑다."
그의 반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미경을 먼저 떠올려야 했다.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혹 그녀의 소식을 듣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건데, 니가 웬 일이냐?"
"형이 백일주 사 준다 했잖아. 기억 안 나?"
녀석이 말하는 백일주는 대입수능시험을 백일 앞두고 마시는 술이다. 예전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그리고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분명 녀석과 그런 약속을 했었다.
당시에 나는 그의 영어 과외 선생이었다. 미경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나는 여름방학 기간 동안 그를 가르치게 되었었다. 남자 형제가 없어 외로웠던지 녀석은 나를 몹시 따랐었다. 동생이 없는 나도 녀석을 친동생처럼 아꼈었다. 과외가 끝난 뒤에도 녀석은 가끔 내게 전화를 하거나 미경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 나왔었다.
"물론. 기억하고 말고. 야∼ 세월 빠르네. 니가 벌써 고3이냐?"
"그럼, 공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후, 이제 지긋지긋해."
"어쨌든 공부하느라 고생했고. 이제 수능 얼마 안 남았지. 열심히 해라. 후회 안 하게."
"애∼ 그만 좀 하지."
그는 여전히 개구쟁이 동생 같았다. 내가 과외 하던 때에도 이와 비슷한 대화가 많았다. 내가 점잖게 공부하라고만 하면 녀석은 언제나 귀엽게 투정을 부렸다.
"형 건데 백일주는?"
"그래, 사 줘야지. 어디서 볼까?"
그와는 다가오는 토요일 저녁에 미경과 가끔 들리던 우리 학교 앞의 한 호프집으로 약속을 정했다. 녀석은 자신이 목표하는 대학이 우리 대학이라며, 굳이 그곳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미경과 관련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특히 녀석은 그녀의 친동생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그녀에 대한 감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판단했기에 그와의 약속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 주 토요일 7시경에 기영을 만났다. 녀석은 그새 어른이 다 되어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고1 때 모습은 키도 작고,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었다. 그런데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청년이 그일 거라 생각할 수 없을 만치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180㎝ 육박하는 큰 덩치에 약간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대뜸 악수를 청해왔다.
"형, 오랜만이지?"
"그래, 야∼, 자식 많이 컸다."
우리는 몇 년 동안 떨어져 지낸 형제처럼 포옹을 했다. 악수만으로는 그 동안 미뤄왔던 정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포옹을 하면서 언 듯 그보다 내가 덩치가 작고 더 어려 보여 내가 동생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 한 잔 해야지. 뭐 마실래?"
나는 그의 요구대로 병 맥주를 세 병 시키고, 마른안주를 주문했다. 그는 어디서 술을 배웠는지 술을 곧잘 하였다. 주도를 아는 채 하며, 내 잔이 비면 곧바로 채워주기도 했다.
그의 대학 진로와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들으며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만 남았다. 웨이터를 불러 맥주 두 병을 더 주문하려 할 때쯤 그는 미경의 이야기를 꺼냈다.
"형, 누나하고 왜 헤어졌어."
그의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했다. 아직 어린 그에게 그녀와 헤어질 때 내가 어떤 마음에서였는지 설명하기란 무척 힘든 문제였다. 아니, 지금에 와서는 그녀와 헤어진 이유들로 나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핑계거리를 찾는 것뿐이었다.
"헤어진 게 아니고, 바빠서 잠시 못 만나고 있는 거야."
"그럼 잘 됐네. 사실은 누나도 조금 있으면 올 거야."
그는 시계를 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순간 나는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아직도 가슴이 설레어야 했다. 어쩌면 오늘 그와의 약속 자체가 그녀를 만나기 위한 수순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를 만나고자 나오면서 그녀를 혹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나는 분명 했었다. 실제 그와 오늘의 약속을 한 날 나는 그녀의 꿈을 꾸기도 했었다.
내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부언 설명을 해 주었다.
"누나보고도 백일주 사달라고 했거든, 형하고 만나는 지는 몰라."
이제야 그가 어떤 의도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와 그녀가 연애를 할 그 당시,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후원해 준 이가 그였다. 아직 어렸던 그가 우리들 사이에서 무엇을 느꼈음인지, 우리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곧잘 하려 했었다. 고맙게도 그는 내가 자기 누나의 애인이 되길 바라는 듯했다. 그 자리 또한 그의 의도적인 작전으로 백일주를 핑계삼아 나와 그의 누나를 화해시키고자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몇 번이고 시계를 보면서 그의 누나를 기다렸다.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8시쯤이면 나타나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20분이 더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누나가 너무 늦는다고 투덜거렸고, 한 클래스의 맥주를 한꺼번에 마셨다.
"원래 니 누나 약속 잘 안 지켜."
그를 그런 식으로 위로하면서도 좀 채 나 자신은 진정할 수 없었다. 조바심에 안절부절 하면서, 몰래몰래 시계를 보곤 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이 더 지나서야 그녀는 호프집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녀의 모습은 예전과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예쁘고, 또 매력적이었다.
그가 손을 흔들어 그녀를 불렀다. 우리를 발견한 그녀는 잠시 놀라더니 곧 화난 표정으로 바꿨다. 그리곤 아예 나는 무시하고 자기 동생을 야단치기 시작했다.
"야, 너 친구하고 백일주 마신다고 했잖아."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녀는 내 앞에서는 한번도 화낸 적이 없었고, 언제나 상냥하고 너그러운 여자였다. 이번 일은 정말 그녀를 화나게 한 것 같았다. 동생을 너무 윽박지르는 것 같아 보다 못해 내가 나셨다.
"미경아, 그만 않아라. 앉아서 얘기하자."
웬 간섭이냐는 듯 나를 째려보는 화난 눈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또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내 맞은편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실은 내가 기영이한테 부탁했어. 너 보고싶다고. 같이 만나자고."
"정말이니?"
그녀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듯했다. 기영이 낄낄거리며 웃지만 않았어도...
"너, 민호가 니 친구냐?"
그녀가 또 화를 낼까 나는 또 나서야 했다.
"기영이 하고 술자리에서는 친구하기로 했지. 그지 친구야."
"맞아, 형, 그래 맞아, 친구야!"
"자, 한 잔 따르고..."
"그래, 형. 아니, 친구야!"
어눌한 콤비플레이였지만 분위기를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화난 표정이 사라졌고, 우리의 바보스런 행동에 웃기까지 했다. 어쨌건 그 덕에 그녀의 잔에도 술이 채워지고, 술자리는 어색하나마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그가 잠시 화장실을 간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녀가 물어왔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너 보고 싶어하며, 너 생각하며 지냈지."
놀랍게도 나는 불쑥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 그녀를 잊기 위한 노력을 수 없이 하였지만, 그녀를 다시 보는 순간 나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잊기 위한 고통스런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시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 한 마디면 충분한 듯했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그녀는 금방 예전의 다정한 표정으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너 많이 변한 것 같아. 그 동안 뭐 했니?"
나 스스로도 변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 술자리에서 시종일관 여유 있고, 자신만만하게 분위기를 이끌어 갔었다. 단지 술기운이 아니라 내 변화에서 나오는 조금은 유들유들한 말과 행동들을 그녀 또한 발견했을 것이다.
"그래,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나도 많이 변했지. 다음에 다 얘기 해 줄게. 기영이 온다."
그의 등장으로 우리의 오붓한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그러나 즐거운 술자리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시던 맥주를 마저 마시고, 2차로 소주를 몇 병 하고 나서, 그가 술에 취해 눈알까지 벌게질 때쯤에야 그 날의 술자리는 끝이 났다.
술에 취한 그녀의 동생을 부축하여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으로 그 날의 내 책임은 마무리되었다. 고맙다며 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배웅하는 그녀를 보면서,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의 전화가 바로 걸려왔다.
"어제 고마웠어."
"뭘. 별로 ..."
"기영이 어제 너무 버릇없이 굴었지. 미안해."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도 기영이 동생처럼 생각하는데..."
그녀는 지난밤의 이야기만 했다. 언제나 그녀 쪽에서 만나자는 말을 먼저 했기에, 그 말이 나오기를 한참을 기다렸다. 끝내 그녀 입에서 그 말이 나오려 하지 않아,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제의했다.
"오늘 시간 있니?"
"왜?"
"영화나 같이 보자고..."
그녀가 보고 싶었다. 지난밤에 그녀를 보긴 하였지만 ...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았다. 예전 그녀와 사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낮에는 아빠 심부름 가야하고. 저녁 때 보면 어떨까?"
"그래, 그러지 뭐."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영화표를 구할 수가 없어 영화 보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암표를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애초 만남의 목적이 영화가 아니었기에 저녁 겸 술을 한 잔 하기로 했다.
우리는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고기 집에서 저녁을 했다. 그곳은 삼겹살을 좋아하는 그녀와 자주 들리던 장소였다. 아쉽게도 고기를 굽고 음식을 챙겨주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주위의 어수선함도 한 이유였겠으나 그 동안의 긴 공백과 과거의 풀지 못한 앙금이 어쩐지 우리 사이를 너무 멀게 하는 것 같았다.
고기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소주를 제법 먹었는데도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장소를 옮겨볼까 하여 그녀에게 제의했다.
"술 한 잔 더 할래?"
"안 돼.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해."
그녀의 대답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이러다 다시는 그녀와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두려웠다. 필요하다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서라도 예전의 다정했던 시절로 되돌리고 싶었다.
집에 바래다준다는 제의마저 한사코 사양하는 그녀를 억지로 끄잡고 버스를 타며 나는 다시 한번 굳은 결심을 하여야 했다. 지금이 그녀를 내게 묶어둘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고...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뭔데?"
그녀의 집 앞에는 공원이 있었다. 그녀와의 많은 추억이 있는 장소였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공원 안쪽에 있는 벤치로 갔다. 그녀도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그곳 벤치에 앉아 나는 그녀와 헤어진 후의 지난 일년 반 동안 내가 어떤 생활에 했으며, 그렇게 하여 어떻게 내가 변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어느새 내 말 속에 빨려 들어와 동조해 주고 있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너 많이 변했다고 느꼈어."
그런 대화들로 한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정작 내가 하려 했던, 그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피하려 했고, 그녀에게서 도망치려 했고, 매정하게 헤어지려 고만 했던 이유는 차마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었고, 보고 싶어 가슴을 저려했었고, 잊으려고 스스로를 괴롭혔었던 사실들은 말해 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여유 있고 아량 넓은 사내처럼 행동했지만 나는 여전히 자존심만 내새우는 옹졸한 사내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다행인지 그녀 또한 그것들에 대해 굳이 물으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도 매정했던 내게서 부정적이거나 그녀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올까 무서워했는지도... 그리하여 그녀 스스로 어떤 형태로든 그것들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를 용서해 주기로 했을 지도...
그녀는 자정이 지났어야 귀가했다. 분명 내게 일찍 들어가야 한다고 했지만, 헤어질 때는 많이 아쉬워했다.
2
그 날 이후 그녀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다정한 연인이 되었다. 그녀와 어울리고, 그녀 친구들과 어울리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다. 그녀는 언제나 내 옆에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으며, 부끄럼 없이 애정을 표현했다. 나 또한 조금은 당당하고, 때로 유들유들하게 보일까 두려워하며, 내 마을의 일부나마 들어내 보일 수 있었다.
그녀와 헤어졌던 과거의 일들은 그냥 덮어둔 채 서로가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편했고, 그 일들을 굳이 알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을 만치 우리는 절박하기 서로를 원했다. 어쩌면 그렇게 과거의 일들을 그냥 덮어두는 것은 그녀 나름의 나에 대한 배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간 내가 대학 졸업반이라는 중압감과 여러 모로 힘든 상황일 때, 그녀는 나를 다시 믿어주고, 내게 돌아와 사랑을 주었다. 그녀는 내 곁에서 나를 위해 주고, 위로해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힘을 빌려 주었다. 그로 인해 나는 내 선택을 밀어붙일 힘을 얻었고, 내게 있어 인생의 새로운 진로를 잡아 나갈 수 있었다.
그 때는 이미 내 마음속에 대학에 남아 계속 공부를 하고, 결국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지워진 상태였다. 그것은 나의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도에 밀려가듯 인생 행로를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도달할 것 같은, 아무런 내 의지가 포함되지 않은 길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 동안 나는 내 길을 새롭게 정했으며, 그 길로 나가고자 했다.
집안의 반대도 없지 않아 있었다. 소심하기만 하고 사업가로서의 기질이 전혀 보이지 않는 나를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부모님들로서는 내가 사업가가 되겠다는 것이 참으로 무모하게 보였을 것이다. 부모님들은 걱정하였고, 내 선택을 포기하길 원했다. 그러나 나는 절대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집에서의 잦은 다툼으로 인해 외박을 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김성일 교수님의 실망과 분노는 그보다 더했다. 나는 두려워 그분을 직접 만나 뵙고 내 의사를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언젠가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다시 찾아뵙고, 제자의 도리를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만 할 뿐이었다.
그런 시기였기에 그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성공한 사업가가 될 것이라 굳게 믿는 듯했다. 가끔 내 선택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에도 그녀만은 언제나 끝없는 신뢰를 주었다.
어떤 면으로 보면 나의 인생 진로에 대한 새로운 결심은 그녀로 하여 가능했다. 나는 그녀를 가장 바른 시간 안에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으며, 그러자면 교수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길보다는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사업가의 길이 보다 났다고 판단되었다.
그녀의 애정은 유별났다. 사랑에 빠진 대부분의 여자가 그러하겠지만 그녀가 내게 보내는 애정은 그 보다 더 유별났다. 그녀는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때로 희생적으로까지 보였다.
내가 오빠라는 호칭을 듣고 싶어하자 그녀는 주저 없이 그렇게 했다. 실제 그녀와 나는 동갑내기로 생일이 석 달 정도 차이가 날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둘만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녀는 여자치고는 조금 큰 키로 키가 작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나오면 나란히 걷는 것을 싫어했다. 어느 날부턴가 그녀는 굽이 없는 구두만을 신었다.
또 내가 머리 긴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자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고, 화장한 모습이 예쁘다고 하자 나를 만날 때면 언제나 화장을 곱게 하고 나왔다. 그녀에게서는 내가 선물한 화장품 냄새가 났으며, 내가 좋아하는 상큼한 향수 냄새가 났다.
그녀의 직접적인 애정표현은 그보다 더했다. 학교에서건, 버스에서건, 지하철에서건 내내 내 손을 잡고 있거나 내 팔을 끼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오히려 더 자신 있게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는 여자였다. 때로 그것이 나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지만, 또한 행복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흔하게 했지만, 그것이 모두 진심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게 행동했다. 그 행동들은 나를 감동시켰으며, 그녀만큼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도서관에서 한참 책을 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녀 자신도 졸업 이후의 진로를 고민해야 함에도 자신의 일은 제쳐두고, 언제나처럼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한참을 책을 들여다 보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왜?"
"안경 한번 벗어볼래."
그녀는 가끔 나의 안경을 벗겨 자신의 손수건으로 닦아주곤 했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안경을 벗어 그녀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 날은 좀 달랐다. 그녀는 안경을 받을 생각은 안하고 안경을 벗은 내 얼굴만 계속해서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시선이 거북하고 어색해서 나는 안경을 다시 끼려고 했다.
"오빠! 정말 잘생겼다."
다시 끼려던 내 안경을 빼앗아 안경알을 닦아주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계속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결국 내가 부끄러워 얼굴을 돌리고야 말았다.
"정말 잘 생겼어."
나는 스스로 잘 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자기비하가 아니라 냉정하게 나 자신을 평가할 때 나의 외모는 잘해야 평범 정도였다. 그런 나를 잘 생겼다고 표현하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았다. 그녀의 사랑에 가슴이 찡해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단순히 나의 단점을 눈감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의 눈에는 나의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 듯했다. 유달리 단점이 많은 나였지만 그녀는 주저 없이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나는 그녀의 사소한 단점들까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였지만, 인형 같다거나 연예인 같지는 않았다. 누가 보아도 매력적인 외모였지만, 이마가 조금 좁고, 눈빛이 호수처럼 맑다거나 별처럼 반짝거리지는 않았다. 또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쾌활하고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순수하다거나 티 없이 맑은 영혼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완벽하다고는 절대 표현할 수 없었다.
내게 있어 그녀는 사랑스런 여자였지만, 그렇다고 거짓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분명 단점들이 있고, 그것들이 그녀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떨어뜨리는 작용을 했다. 나는 그녀의 더 많은 장점들을 사랑했을 뿐, 그녀의 단점들까지 덮어두거나,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맙고 또한 부담스럽게도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런 그녀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완벽하다고 하여야 할 것 같았다.
몇 가지 사업구상을 하고 있다고는 하여도, 현실적으로 자본과 경험이 없는 내가 바로 사업을 시작하기는 불가능했다. 회사에 취직하여 돈을 모으고, 사회경험을 쌓을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낮에는 도서관에서, 저녁에는 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내가 공부하고 있는 학원을 찾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대개 샌드위치며, 김밥 같은 간편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음식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가져다 주는 음식은 언제나 낙낙하였기에 새로 사귄 학원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수도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할 때면, 그녀는 내 옆에 붙어 이것저것 챙겨주었고, 내 건강을 걱정해 주었다. 그 모습들로 하여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고, 나는 우쭐해 했다.
그렇게 그녀는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나 또한 그녀를 사랑하였다. 영화처럼, 소설처럼, 유행가 가사처럼, 그렇게 온 마음을 바쳐 그녀를 사랑하였다. 그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고, 그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건 모두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속 시원히 그녀에게 해 줄 수가 없었다
취업 준비로 모든 시간을 공부에 매달려야만 했고, 졸업 후의 진로 문제로 집안에서는 이미 더 이상 용돈을 받을 수 없었다. 학원비조차 친구에게 빌려야 하는 처지에서 내가 그녀에게 해 준 것이라고는 싸구려 커플링 반지가 고작이었다.
예전 그녀가 원했을 때, 커플링 반지를 못해 주었던 일은 그녀와 헤어진 후 내도록 내 마음속에 미안해했던 부분이었다. 뒤늦게 나마, 싸구려 나마 한 커플링 반지를 그녀는 무척이나 소중히 여겼고, 그 반지를 나누어 끼면서 행복해 했다.
부족한 나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고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지하철 막차를 타기 위해 함께 뛰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자판기 커피 한잔을 나눠 마시면서도 행복해 했고, 집으로 가기 위해 헤어지는 때에는 손을 흔들고 몇 번이고 돌아보며 아쉬워했다.
집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기대어 잠을 청할 때쯤이면 그녀의 전화가 오곤 했다. 간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보고싶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곤 혹 내가 피곤해 할까 질 지라는 아쉬운 끝맺음을 했다.
3
졸업이 다가오는데 취직자리는 찾지 못해 초조해 하고 있을 때 나는 운 좋게 사촌형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막내이모의 큰아들로 어렸을 적부터 줄곧 나를 아껴준 사람이었고, 시내 중심가에 큰 외국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내가 보기에 제법 성공한 사업가였다.
지난 설에 나는 이모님 댁에 세배를 드리러 갔었고, 그 때 학원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내 구상을 그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나의 구상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그는 내게 학원의 영어강사 겸 기획실장이라는 과분한 역할을 맡겨 주었다.
나는 그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미경에게 알렸고, 그녀는 나보다 더 기뻐하며 축하를 해 주었다.
내가 학원에서 일을 하며 바쁜 생활 속에 그녀와의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할 즈음부터 우리의 관계는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 또한 졸업 후의 진로 문제로 고민하며, 바쁘게 쫓아다녀야 했었다.
당시에 나는 그녀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고 있었다. 단지 만남의 횟수가 줄어든 이유만으로 그것을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그 보다는 내가 취직을 하고 과분한 역할을 맡으면서 오만해 졌고, 그로 인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보고 싶어 할 때, 그녀는 곧바로 달려올 상황이 아니었었고, 옹졸한 나는 그것을 탓했다. 그녀 또한 자신만의 생활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왠지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그녀의 생활이 싫었다. 친구들과 선배들과 다양한 형태의 만남을 가지며 너무 바쁜 그녀가 싫었다.
또한, 나만을 바라보지 않는 그녀의 시선들에 대해 짜증을 내었다. 그녀는 가끔 나 외의 다른 남자들과 영화를 보고, 등산을 가곤 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한 것은 결단코 아니었으나. 너무나 태연하게 그렇게 행동하는 그녀가 밉살스러웠다.
결정적으로 내 불만이 증폭된 것은 그녀가 내가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먼 진로를 선택하려 한 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려 준비하기 시작했고, 나로서는 그녀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내가 불만스러워 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 사소한 불만들로 나는 그녀에게 투정을 부렸고, 대체로 그녀는 나의 그런 불만들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어느 때는 나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일들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기도 했고, 그녀는 아무 잘못도 없이 내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미안해했다.
그럼에도 나의 불만은 줄어들지 않았고, 차츰 커져만 갔다. 급기야 그녀와의 사랑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모든 이유는 내게 있었다. 현정과의 만남도 하나의 이유였다.
현정은 민수의 동기 여자얘였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가을 학기 때였다. 당시에 나는 미경에게 쏠리는 일방적인 사랑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싶었고, 그래서 나와 비슷한 마음의 아픔을 가진 민수와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 현정과도 알게 되었다.
그녀와 친하게 된 계기는 그녀의 생일에 내가 베푼 아주 사소한 친절 덕이었다. 나에게는 그다지 기억에 남길 정도의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내도록 고마워하였고, 어느날부터인가 그 고마움은 남녀간의 애정 비슷한 것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강의 시간에 늦어 바쁘게 학교로 오르고 있었다. 우리 대학의 정문 앞에는 높은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 앞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이왕 늦었는데, 좀 놀다 쉬는 시간에 들어갈래?"
"그러지 뭐."
내가 바쁘게 뛰어가서 들으려던 강의는 2시간 짜리 강의로 1시간 강의 후에는 쉬는 시간이 있고, 출석체크는 수업이 끝난 후에 했다. 그녀의 제의는 쉬는 시간에 들어가 출석체크만 하자는 것이었다. 그 강의에 크게 흥미가 없는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도서관 옆 벤치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와 가을 바람이 좋니, 단풍구경 가고싶니 하는 얘기를 했다. 그러다 그런 얘기들 끝에 그 날이 그녀의 생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 그럼. 생일축하 해야지. 가자."
"강의는?"
대학 강의라는 것이 한번쯤 빼먹는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주저하는 그녀를 억지로 데리고 내가 아는 학교 앞 호프집으로 갔다. 그 호프집은 나의 단골집으로 그 곳 주인과도 안면이 있었다.
그녀를 자리에 앉혀놓고 나는 생일케이크와 샴페인을 사러 다시 호프집을 나왔다. 생일케이크와 샴페인을 사고 막 호프집으로 다시 들어가려다 생일선물 생각이 났다. 여자에게 선물을 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난감하였다. 마침 호프집 옆에 꽃가게가 보였고, 장미꽃 한 다발로 선물을 대신하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좋아했고, 내게 고마워했다. 몇 차례나 그 말을 반목하여 나를 쑥스럽게 만들었다.
"민호야! 정말 고마워. 그리고 오늘 나 정말 행복해."
그녀는 그렇게 생일축하를 받아 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생일이나 특별한 기념일이면 당연히 모든 가족이 모여 축하를 하는 것이 우리 집이었다. 그런 분위기와 환경 속에 자란 나였기에 그녀의 반응은 너무 지나쳐 보였다. 그녀가 아침에 미역국도 먹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녀가 가엽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민수를 불려 함께 그녀의 생일 축하를 해 주기로 했다. 그는 선선히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우리는 그의 자취방으로 몰려갔다. 거기서 미역국을 끊여 함께 그녀의 생일밥을 먹고, 술도 제법 마셨다.
그 밤, 나는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과거사를 들었다. 그녀는 분노하며 자신의 아버지를 주정꾼이고, 난봉꾼이라고 했고 그녀의 어머니를 불쌍하고 바보 같은 여자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 술에 취해 살았고, 자신의 아내와 딸을 마구잡이로 구타하는 못난 사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 하나만을 바라보며 모진 장삿일을 마다하지 않는 억척스런 여자였다. 거제서야 나는 언제나 어둡게 느껴졌던 그늘 진 그녀 얼굴의 사연과 나의 조그만 친절에 감동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술에 취한 그녀는 서럽게 울었고, 가여운 마음에 나는 그녀를 꼭 안아 위로해 주며 그녀가 실컷 울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녀는 술에 취해서인지 내가 하지 않은 약속을 기억하게 되었다.
"언제나 네 곁에서 너를 행복하게 해 줄게."
비록 살아오면서 지키지 못한 약속을 수없이 하였지만, 미경을 향한 짝사랑으로 괴로워했던 내가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사랑표현과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나의 약속은 단지 그녀의 좋은 친구로서 언제나 그녀 곁에 있어주겠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 날 이후 나는 그녀를 더욱 가까운 친구로 대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녀는 친구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둘만 있을 때 그녀는 그런 내색을 하였으며, 그것은 이미 미경이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내겐 부담이었다.
현정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가끔 그녀의 어두운 성장환경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추측되는 히스테리를 보았었고, 그것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은 좀 더 포근하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나는 그녀를 피했고, 그러면서 그녀도 나를 잊어버리길 바랬다. 그리고 실제 그녀가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녀가 나에게 품었던 감정을 완전히 지웠을 것이라 믿었다.
세월이 지나 내가 대학 졸업반이 되고, 취직을 하여 학원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 날은 마침 발렌타인데이였다. 오전에 미경이 찾아와 초코렛 상자만을 던져주고 훌쩍 가버린 날이기도 했다. 오후에는 면접을 보아야 하고, 저녁에는 가족들과 친척집에 가야 한다는 그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망하고 짜증이 났다. 여느 연인들처럼 발렌타인데이를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우울한 마음으로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하려 할 때, 현정은 초코렛 바구니를 들고 학원으로 나를 찾아 왔다. 초코렛 바구니는 가게에서 파는 흔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직접 만든 정성과 노력이 가득 담긴 것이었다. 그 선물은 무정하기만 한 나조차 감동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그녀와 함께 술을 마신 것이 실수였을까? 그녀는 술에 취해 때로는 울면서, 때로는 호소를 하면서, 노골적인 애정표현을 해 왔다. 나는 당황해 했고, 내내 거북해 하며 그녀의 애정표현을 감당하여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술에 취해 그만 잠이 들었고, 나는 또 한번 당황해야 했다. 그녀의 집을 알지 못하는 내가 아무리 깨워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렇다고 그녀를 술집에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를 여관에 재워야 했다.
둘만이 있는 뜨거운 여관방에서 갑갑해 할까 그녀의 겉옷을 벗겨주고, 침대에 눕히고, 배에 이불을 덮어주면서 나는 가슴이 떨리고, 얼굴이 벌개 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신체 건강한 멀쩡한 성인 남자였다. 나는 힘들었지만 자제력을 잃지 않았고, 더 이상의 갈등을 하지 않기 위해 여관방을 급히 빠져나와야 했다.
내가 자제력을 잃지 않은 것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는 식의 특별한 인생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미경을 사랑하는 내가 이미 그녀에게 미안해해야 할 짓을 한 것 같았고, 그 이상의 행동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연을 모르는 현정은 또 한번 오해를 했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순결을 지켜준 믿을만한 남자로 오해했다. 어쨌든 그 일로 그녀는 나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 진 듯했고, 그녀의 헌신적으로까지 보이는 구애에 나도 차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4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생애에 유일한 한 여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 상대는 당연히 미경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그 말을 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멋진 프로포즈를 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했고, 내가 그 말을 하려 할 때쯤에는 이미 내 마음속에 그녀에 대한 사랑의 확신이 지워지고 있는 상태였다. 현정은 집착으로까지 보이는 끊임없는 구애를 내게 해 왔고 그러는 가운데 내 사랑은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끊임없는 구애에 감복헌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의 매력에 빠지거나, 그녀의 배경과 조건에 혹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나 약한 여자였다. 몸이 약하고 마음이 약한 여자였다. 그녀는 야윈 몸에 언제나 비실비실 하였고, 자주 피곤해 하고, 아파 눕는 약골이었다. 변화무쌍한 감정변화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걸핏하면 짜증을 내고, 우는, 함께 하기엔 너무 힘든 여자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구애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그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녀를 가엽게 여겼고, 동정하게 되었고,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었고, 그것이 어쩌면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스스로 의심해 보았다.
언젠가 사랑은 상대를 아끼고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현정에 대한 나의 마음이 그러한 것 같았다. 내가 그녀의 겉에 없으면 그녀는 불안해하고, 애타게 나를 찾았다. 나는 그녀를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았고, 미경에게는 너무 죄스럽게도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런 혼란스런 감정 속에서 현정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미경이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한두 번은 그녀에게 솔직히 고백하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화 낼 것이 두렵고, 그 상황에서는 내가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고, 옹졸한 자존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 달라진 행동과 어색한 표정을 그녀도 보았을 것이고, 그럼에도 그녀는 한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고, 한결같이 나를 신뢰하는 듯했다.
그녀에게 내내 미안한 마음을 가졌고, 이제 더 이상의 혼란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고, 고민은 또 다른 고민을 낳는 것이 아닐까? 혼란스럽다는 것은 고민하며 그 고민의 꼬리를 다시 무는 바보들의 행동이 아닐까? 답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 속에 있고, 그 마음에 따라 행동하면 되지 않을까? 나는 분명 그녀를 사랑하였고, 그녀의 존재는 나를 통째로 흔들 수 있지 않은가?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나를 더 절박하게 만들었다. 나의 불만에도 그녀는 굳이 유학을 고집하였고, 그 해 여름이 지나기 전에 액세서리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액세서리를 좋아했다. 액세서리 가게는 그녀와의 데이터 장소 중 하나였으며, 내가 준 대부분의 선물은 액세서리였다. 그녀는 미적 감각이 뛰어났고, 자신을 예쁘게 잘 꾸미는 것도 그 미적 감각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액세서리 디자인을 배운다고 하면 나는 환영하고, 축하하며, 힘이 되어 주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나는 2년여의 시간 동안 그녀와 헤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것을 빌미로 그녀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우리는 함께 등산을 가곤 하였다. 그녀는 혼잡스런 시내보다는 산을 좋아하였고, 나도 산을 좋아하였다. 정상을 목표로 힘들게 산을 오르다 보면 서로를 위해 줄 수 있었고, 그러는 가운데 서로에게 미흡했던 일들을 반성할 수 있었고, 또 용서할 수 있었다.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 식목일에 우리는 모처럼 근교의 산을 찾았다. 때 이른 봄꽃들을 감상하며, 등산로를 따라 정상을 향했고, 암석으로 이루어진 꼭대기에서 야호를 부르며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하산하는 길에 암자를 들러 약수를 마시며, 땀을 식혔다.
그녀가 피곤해 하는 듯 하여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케이블카 정류장은 산 중턱쯤에 있었고, 그곳에서 우리는 그녀의 서클 선배들을 만났다.
"오빠! 여기서 다 보네. 놀러 온 거야."
그녀는 호들갑스럽게 반가워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나에게도 안면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차례로 그들과 인사를 나눠야 했다. 그들 속에 경식이라는 선배도 있었고, 그와 인사를 하게 되면서, 어쩐지 그 자리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경을 짝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와 미경이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 준 의리 있는 사내였다. 그로 인해 그와 나는 상당한 친분이 쌓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나는 그와 그녀와의 만남 자리를 의도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바램과는 달리 불행히도 그 날 우리는 동행을 하게 되었으며, 저녁을 함께 하고 나이트를 가야 했다. 나이트에서 그녀는 정말 잘 놀았다. 마치 춤꾼이라도 된 듯 온 스테이지를 누비며, 현란한 댄스를 보여 주었다.
그런 현란한 댄스가 아니었더라도, 우리 일행 중 유일한 여자인 그녀가 주목을 받고, 일행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나이트클럽 불빛 아래에서 그녀는 너무도 예쁘고, 상냥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선배들은 잔을 권하고, 내내 그녀를 챙겨주었다.
그 모든 모습들을 보면서 그들과 어울리지 못해 소외된 듯한 내가 싫었고, 모든 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그녀가 미워졌고, 그런 자리를 즐기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급기야 내 화를 폭발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경식이 선배는 저녁 식사 때의 반주에서부터 제법 많은 양의 술을 마시는 것 같았고, 그곳에 와서도 내내 술을 마시더니, 이미 혀가 꼬부라지고,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내게 술을 권하며 주정처럼, 그러나 분명 진심으로 말을 했다.
"나 미경이 사랑한다. 너 이 자식! 미경이 불행하게 하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그가 나를 불쾌하게 하려 했다거나, 시비를 걸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유치한 사람이 아니었고, 단지 술에 취해 숨겨 두었던 자신의 진심이 입으로 나온 것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화를 참을 수 없었고, 미경의 만류에도 그 자리를 떨치고 나와 버렸다.
나는 방향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길을 걸었다. 다행히 미경은 곧 따라 나왔고, 내 뒤를 쫓아 왔다. 처음엔 내게 말을 걸며 화를 풀어보려 하다가,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포기하였다. 나를 너무 잘 아는 그녀는 내가 스스로 화를 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한시간여를 걸었을까? 그제야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그녀의 집인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여전히 내 옆에 있었고, 어느새 내 팔을 끼고 있었다. 내가 한 행동이 너무 유치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내가 쓸데없는 걸로 화를 냈지."
"아냐. 경식이 오빠가 너무 심했어. 다음에 만나면 따져야겠어."
그렇게 그녀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건 즐거운 분위기를 결정적으로 망친 것은 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를 탓하려 하지 않았고, 위로하기에 급급했다. 그녀는 내게 너무 고마운 사람이었고, 그런 그녀를 상처 주고 배신하는 행동을 일순간이나마 마음 속에 품은 내가 부끄러워 졌다.
"일본 잘 다녀와. 가면 열심히 공부하고, 그리고 건강해야 돼."
"왜 벌써 그런 말 해? 아직 몇 개월 남았는데..."
그랬다. 그녀는 8월 중순쯤에 가기로 되어 있었고, 아직도 4개월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 말을 꺼낸 것은 그녀의 장래를 위해 스스로 물러나기로 한 내 결심을 다시 돌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녀가 바라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기로 마음먹었었고, 되도록 그녀를 축하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또 다른 결심을, 정말 중요한 결심을 그녀에게 말해 주려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약속을 받아 두는 것이었고, 나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현정과의 일로 비롯된 내 마음의 혼란을 정리하고자 함이 가장 큰 이유였다.
두 시간 여를 더 걸어 그녀의 집 앞 공원에 도착하였을 때쯤 나는 내 결심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미경아! 내가 계획하고 있는 건 삼 년이다. 삼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성공할 거다. 삼 년 후 오늘 내게 결혼하자고 멋진 프로포즈 할 거다. 그때까지 기다려 줄래?"
"그럼, 삼 년이고, 십 년이고, 백 년이고 기다려야지. 사랑해, 민호야!"
그녀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녀에게서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는 추호도 상상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한 번도 그런 류의 약속을 하지 않았음에도, 나와의 행복한 미래를 이미 그리고 있었던 것일까?
내 결심을 들으며 너무도 행복해 하는 그녀를 보며, 세상을 다 얻은 듯 나 또한 만족스러워했다. 그 순간만은 그녀에 대한 어떠한 불만도 없었고, 그녀에 대한 내 사랑도 의심하지 않았다.
5
미경은 자기 가족들과의 여행에 나를 초대하고 싶어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행사를 운영하고 계셨고, 종종 호텔무료숙박권 따위를 얻어 가족들과 여행을 가곤 하는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4월의 마지막 휴일에 그녀는 내가 그 여행에 함께 하기를 원했다.
그녀의 남동생인 기영의 과외를 하면서부터 이미 나는 그의 가족들을 모두 알게 되었었고, 그들은 나를 그녀의 좋은 친구로서 따뜻하게 대해 주었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나를 소개시키고자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은 그녀가 나와 교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나는 그 여행이 부담스러웠다. 그녀에게 장래에 대한 약속을 하고, 약속을 받은 그 다음날 나는 바로 후회하고, 내 섣부른 약속을 자책하였다. 나는 여전히, 아니, 더 큰 감정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미경과 현정 사이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그런 종류의 갈등이나 혼란은 분명 아니었다. 현정의 무섭기까지 한 구애에도 나의 마음은 여전히 미경에게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나 약해 보이는 현정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고, 미경과의 장래를 약속하면서 현정을 계속 만난다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미경의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인사를 한다면 나는 너무 가증스런 놈이 아닐까? 그녀의 초대는 당시의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그녀는 기영이가 꼭 같이 가고 싶어한다느니, 어머님이 날 보고 싶어한다느니 하면서 굳이 나를 초대하고자 했다. 결국 내가 재삼 거절 의사를 분명히 하고 나서야 포기했다.
그녀는 마음이 크게 상했는지 그 이후 얼마동안 연락이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그 얼마동안 우리는 만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내겐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에 그녀와의 영원한 사랑을 확신하지 못했고, 우리의 사랑을 의심했다. 환상에서 깨어나면 곧 내다 버리고 마는 것이 사랑일 것이라 생각했고, 그 환상이 깨어질 것을 지레 무서워했다.
현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고, 미경을 사랑한다고 믿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내 착각이 아닌가 의심하였고, 그토록 그리워하다 다시 찾은 사랑을 배신하는 나를 보며, 영원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고 ... 사랑에 대한 수 없는 의심과 회의를 반복하며, 차라지 모든 것을 외면하고 도망치기로 했다.
미경을 만나지도, 현정을 만나지도 않았다. 미경은 연락이 뜸해져 있었지만, 현정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학원으로 전화가 오거나, 심지어 학원 앞에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갈등이 없진 않았지만 모진 마음을 먹고, 바쁘다는 핑계로 그녀를 피해야 했다.
실제 당시부터 나는 무지하게 바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구상한 프랜차이즈 학원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내 구상을 현실화하고 그것을 사업화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었고, 나는 몸과 마음을 모두 메달에 그 일에 전념하여야 했다.
학원에서 일을 시작한 후 몇 달 동안은 단지 업무를 파악하고, 강의를 하면서 내가 구상한 사업의 가능성들만을 검토하였었다. 학원의 실태를 조사하고, 주위의 조언을 듣고, 외국의 사례들을 수집하고, 그러면서 서서히 내 구상에 대한 확신을 얻었었다.
그 확신을 바탕으로 내 구상을 사업화 하기 시작했다. 나의 가장 큰 조력자는 당연히 그 학원의 원장이자 사촌형이었다. 그는 전폭적으로 나를 밀어주었고, 어떤 때는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곤 했다.
나는 사업계획서를 짜고, 미국 대학의 어학교재를 검토하고, 교재 사용과 대학 브랜드 활용에 대한 계약을 하고, 프랜차이즈 모집을 위한 사업설명회 준비를 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미경도 잊었고, 현정도 잊었고, 사랑에 대해 회의했던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나는 일에 미친 사람처럼 밤이고, 낮이고, 일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미경을 연락을 다시 받은 것은 그녀가 일본으로 가기 하루 전날이었다. 전에도 가끔씩 연락이 왔지만 굳이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무정하게 피하려고만 하였다. 그녀 또한 그런 내 태도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나 내일 출국해"
"그래, 이왕 가는 거, 일본 가서 잘생긴 쪽바리 녀셕 하나 사귀어 봐라."
그녀의 출국을 축하하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해야 함에도 나는 괜한 심통에 비꼬는 말을 했다.
"아냐, 너보다 더 잘생긴 사람 온 천지에 없을 거야."
"뭐!"
그녀의 변치 않은 사랑에 나는 놀랐다. 그리고 그동안 연락을 끊고 피하려고만 한 내 자신이 부끄럽고,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내일 몇 시 비행기니?"
"2시 동경행 비행기야."
그녀의 비행기 시간을 확인하면서, 꼭 배웅을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한국을 떠나던 날은 마침 내가 구상한 사업의 첫 시험날이었다. 불행히도 그 날은 프랜차이즈 학원을 모집하기 위한 사업설명회 날이었고, 전체 일을 총괄해야 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시간을 빼서 그녀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그 이후 정말로 내게 실망했는지 그녀는 통 연락이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외국에 나가 있다하더라도 평소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로 볼 때 한 달에 한두 통의 전화는 있을 법했다. 그러나 그녀는 1년여 동안 한번도 연락이 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일이 너무 바빠 그녀가 떠났고, 내 곁에 없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았다.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내가 보고 싶다 하여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쁜 일들이 끝나고, 조금씩 여유를 되찾아 갈 즈음에 나는 내가 얼마나 사랑에 미숙한 사람인지를 깨달았다. 그 깨달음에는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
의외로 현정은 나에 대한 집착을 쉽게 포기한 듯했다. 처음 내가 그녀를 피하고 멀리하는 태도를 보였을 때, 그녀는 신경질적으로까지 보였다. 그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고, 오히려 내 쪽에서 불안하여 그녀의 소식을 탐문해 보아야 했다.
그녀의 친구를 통해 접한 소식은 차리리 어이없다고 해야 했다. 그녀는 이미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많은 남자를 사귀고 있었고, 얼마 후 결혼을 했다.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착실한 은행원으로 마음이 아주 따뜻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모든 소식들을 전해 들으면서도, 슬프거나 배신감 따위를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남편 된 사람의 성실함과 착한 성품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내 마음은 큰 부담을 던 듯했고, 안심이 되었다. 그녀의 너무도 돌연한 태도변화에 일순간 황당했다고는 하여도 진실로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입장이었다.
내게 있어 현정은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녀를 가엽게 여기고 동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기심으로 가득한 내가 그녀를 선택하였다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었을 것이고, 우리는 서로를 불행하게 하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하여도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만으로는 행복해 질 수 없지 않은가? 특히나 나 같은 사람에 있어서는 그런 일방적인 희생은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 그렇게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미경의 경우는 달랐다. 이미 나는 다시 그녀를 그리워하기 시작하였다. 특히나 현정의 결혼 소식을 들은 후, 내 마음속에 자리한 미경의 자리를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고, 내가 가졌던 그녀에 대한 사랑의 확신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미 후회하고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린 것 같았다.
몇 번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 하고, 만나려 하고, 용서를 빌려 하고, 그렇게 하여 다시 그녀와 사랑하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겐 그럴 용기도 배짱도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사정을 하여도 그녀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단지 그녀와 이별하는 것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위하는 것이라고 자위하였다.
미경이 그리워 견딜 수 없을 때면, 나는 민수를 불러 술을 마셨다. 술기운을 빌어 그에게 내가 미경에게 했던 잘못된 행동과 말과 마음을 털어놓았고, 후회하고, 용서를 빌고 싶은 당시의 심경을 솔직히 고백하곤 하였다. 그는 언제나 섣불리 충고하지 않고, 나 스스로 결정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그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리고 있다고 했고, 단지 그 답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어서라고 했다.
그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내가 해야 할 행동은 그녀에게 솔직히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비는 것뿐이었다. 실제 일본에 있는 그녀를 찾아가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용기 없는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일 년여를 혹 그녀의 연락이 오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하였다.
따가운 한낮의 태양이 비추는 여름에는 신전을 찾는 참배객이 적었다.
그 날은 특히 한적하여 성인은 신전 앞뜰에서 조용히 명상에 잠길 수 있었다.
청년이 찾아 온 것은 늦은 오후 해가 막 서산으로 지려 할 즈음이었다.
삿갓을 깊이 눌러 선 청년은 신상 앞에서 잠시 참배를 드린 후 곧바로 성인에게로 왔다.
"선생님,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신은 명상을 방해하는 청년에게 짜증내지 않았다.
"네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청년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들은 술에 취해 그 밤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술에 취해 얼싸안고 춤추고 노래부르고, 술에 취해 지킬 수 없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을 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술과 같아 사람을 환상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사랑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인은 되물었다.
"너는 왜 참배를 하였느냐?"
"저는 신에게 축복을 빌었습니다."
"너는 신이 네게 축복을 줄 것이라 믿느냐?"
"예. 저는 신을 믿고 신의 축복을 믿습니다."
청년은 성인이 왜 그런 것들을 묻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닌 성인의 물음에 또박또박 답하였다.
"너는 보이지 않는 신을 믿고, 직접 겪어보지 않는 신의 축복을 믿으면서, 왜 네가 보고 네가 겪어본 사랑을 믿지 않느냐? 너는 직접 보고, 직접 겪었기에 사랑이 술에 취한 듯 그 밤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 것이고, 술에 취한 듯 얼싸안고 춤추고 노래부르는 것이고, 술에 취한 듯 지킬 수 없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
성인의 말이 곧 이어졌다.
"너는 스스로 사랑을 보고도 겪고도 부정할 뿐이다. 너는 사랑이 존재함을 알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사랑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알 것이다."
청년은 크게 깨닫고, 성인에게 감사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제가 사랑하는 여인이 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더라도 영원히 그 여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산을 내려가는 청년을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 잡목이 성인에게 말했다.
"저 청년은 행복하겠군요. 사랑이 존재함을 알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사랑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알기에 진정한 사랑을 하고, 사랑해서 행복해 질 수 있겠군요."
"아니다. 저 청년은 사랑이 존재함을 알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사랑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알았지만, 사랑이 존재함을 깨닫지 못했고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고 사랑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했다."
잡목은 조용히 성인의 다음 말을 경청했다.
"사랑이 존재함을 깨닫고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사랑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사랑이 존재함을 의심하지 않고 사랑이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고 사랑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저 청년은 자신 스스로 보고 겪은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자신 스스로 보고 겪은 그 여인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하는구나. 저 청년은 스스로 본 것을 겪은 것을 부정하려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