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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친타
▪요한 20,1- 9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도 부활 대축일에 유튜브 통해서 미사 참석하시는 분들
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운영자와 모든 느티 가족분들, 예수님의 부활 축하드립니다.
언젠가 강론에 말한 것 같은데, BC가 무슨 뜻이죠?
‘Before Christ’
AD는요? 이것은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죠.
‘Anno Domini(아노 도미니)’, ‘주님의 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기원전은 영어 약자를 쓰고 기원후는 라틴어 약자를 썼을까?
그 얘기도 한 번 했던 것도 같기도 하고 안 한 것도 같지만,
어차피 여러분께 같은 얘기를 이틀에 한 번씩 해도 다 새롭게 들으니 전혀 걱정이 없어요.
역사를 설명하니, 상식적으로 알고 계세요.
AD, Anno Domini는 ‘주님의 해’라는 뜻으로 기원후를 의미하게 되었죠.
처음 이 말이 쓰인 것이 6세기경이에요.
로마에 있던 신학자였던 디오니소스에 의해 학술 언어로 쓰였어요.
그러면 또 질문, ‘주님의 해’는 ‘예수님 탄생 후’ 부터예요, ‘부활 후’ 부터예요?
예수님 탄생이에요.
예수님 탄생을 기원전 1년으로 봐요.
그때는 ‘0(영)’이라는 개념이 없었죠. ‘기원 0’은 없어요.
그다음에 이제 BC, Before Christ, 영어죠.
이 말은 AD가 만들어지기 전에 만들어졌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AD라는 단어가 장착한 지 훨씬 후인 17세기에 처음 등장했어요.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때 분위기가 이미 영어권 학자들이 역사 체계를 정립하던 시기였죠.
내년에 다시 물을 때 기억할까요? 기억하세요.
내년에 또 얘기해도 돼요? (대답)네~~
어휴, 내가 이런 분들을 운영자로 모시고 카페를 운영하니.(웃음)
어느 성당 주일학교에 필립이는 아이가 있었어요.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되게 약하고, 또 잘 어울리지도 못했죠.
그래서 아이들이 좀 깔봤어요.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부활절을 앞둔 어느 날 주일학교 수녀님이 아이들에게
속이 비어 있는 계란 모양 플라스틱 통을 하나씩 주면서 숙제를 내주었어요.
뚜껑 딱 열면 속이 비어 있는 통, 상상되죠?
‘이 빈 달걀 안에 너희들이 생각해서 생명을 상징하는 것을 하나씩 담아오렴.
다음 부활절에 함께 열어 보자’
여러분은 그런 숙제를 받았다면 뭐 담아올 거 같아요?
아무튼 부활절 아침, 성당에 온 아이들 손에는 달걀모양 통이 하나씩 있었죠.
아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각자 가지고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기 시작했어요.
첫 번째 아이가 가져온 달걀 안에는 예쁜 꽃이 들어 있었어요.
수녀님은 ‘그래, 꽃은 봄에 피는 생명이지.’ 하셨죠.
두 번째 달걀을 열어 보니 귀여운 나비 모형이 있어.
수녀님은 ‘아,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도 새로운 생명이지.’ 칭찬하셨죠.
세 번째 달걀을 열어 보니 푸른 이끼가 담겨있었죠.
‘그래 이끼는 죽은 거 같지만 비만 오면 파래지지. 이것도 생명을 상징해.’
이렇게 주일학교 애들이 얼추 다 하고 맨 마지막에 누가 남았어요?
필립.
필립은 여전히 말이 없이 그냥 가져온 통만 들고 있었죠.
수녀님이 ‘필립, 나와 봐. 필립은 뭘 준비했어?’
그랬더니 아이가 부끄러운 듯이 들고 있던 통을 딱 열었는데,
여는 순간 아이들이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어.
왜 웃음을 터트렸을까?
(대답) 비어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맞아, 맞아 그게 정답이야.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니까 애들이 막 깔깔대고 웃었어.
그러면서 아이들은 똑같이 뭐라고 생각했냐? ‘봐. 저 필립, 바보야.’
수녀님이 내준 숙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온 거로 생각한 거죠.
그런데 그때 생전 말이 없던 필립이 말을 하려는 거야.
‘응, 필립 어서 말해 봐.’
‘수녀님, 예수님 무덤도 비어 있었잖아요.
비어있는 무덤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의 시작 아닙니까?’
와! 예수님 무덤도 비어 있었잖아요.
비어있는 무덤 자체가 새로운 생명의 시작 아닙니까?
아멘.
그렇게 업신여기던 아이 입에서 그 놀라운 말이 나올 줄 아무도 몰랐죠.
순식간에 교실은 그냥 숙연해졌어요.
가장 부족하고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필립이 부활절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인
‘빈 무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거죠. 맞죠?
아마 숙제를 내준 수녀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비어있는 것이 바로 생명의 시작’ 아닙니까?
확실히 메시지가 강하죠.
그래서 부활절은 단순히 달걀을 나누는 날이 아니라,
절망의 상징이고 죽은 시체가 썩어들어가던 그 무덤이 비워짐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과 생명이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는 날이에요. 아멘.
그런데 이것이 기억되려면 본인이 사순시기에 비우고 살았어야 했잖아요?
여러분은 무엇을 비우고 살았나요?
제주부방장은?
(대답) 저는 나쁜 생각들, 악습을 비우려 노력했습니다.
강원부방장은?
(대답) 저는 식탐이 좀 많아서 그것을 내려놓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한 끼 굶었습니다.
인천부방장은?
(대답) 저는 주머니를 비웠습니다.
뭐 사먹느냐고?
(대답) 아니오, 기부했습니다.
세실리아는?
(대답) 저는 화를 비웠습니다.
됩디까?
(대답) 네
내가 시간 되면 가경자로 올려 줄게.
물어볼래요? 신부님은 뭐 비우셨어요?
비운 거는 많은데. 우리 강원부방장은 하루 한 끼를 굶었다고 했는데,
나는 일주일에 4일을 거의 안 먹었어요. 요플레 하나 정도 먹었죠.
식복사 오는 3일은 밥도 평소 딱 반만, 반찬도 적게.
나도 태어나서 이렇게 금식을 오래 해 본 처음이에요.
그런데 금식하게 된 동기가 사실은 거룩한 동기는 아냐.
저울에 올라가니까 세 자릿수!
이게 뭐 이게 사람이야, 돼지야?
너무 충격을 받아 체중계 배터리만 갈고.
이거 말이 안 된다. 신자들한테 피정 때마다 희생 극기하라고 하면서.
그렇게 시작은 됐지만 몸이 힘이 드니까 활동을 할 수 없어요.
제가 피정 때 말씀드렸죠.
이 세상 모든 제대로 된 종교인들이 자기의 절대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첫 번째 훈련 방법이 뭐라 했지요?
단식이에요.
제대로 된 스님들도 여름에는 하안거, 겨울에는 동안거.
굴속에 들어갈 때 좁쌀 몇 끼 가지고 들어가 자리 몸뚱아리와 싸우는 거예요.
제일 큰 고통 중 하나가 배고픈 고통이잖아요.
그런데 왜 그 단식이라고 하는 훈련 방법을 수천 년 동안 써 왔을까?
육신이 분명히 기름지면 영도 같이 기름이 머릿속에 끼어요.
우리 밥 잔뜩 먹고 묵주기도 잘 안되고, 피정에서도 졸음만 오죠.
지금도 봉쇄 수도원 이런 데는 1년에 1/3 정도는 다 금식이에요.
그렇게 살면서도 그분들 다 농사짓고 사세요.
그런데 우리는 한 끼 굶는 것이 아니라, 시간만 조금 늦어져도 화가 나잖아.
나도 이제 금식 동안 ‘굶으니, 화가 나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우리 고양이 초코한테도 가까이 오지 말라 그랬어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예수님 십자가를 계속 쳐다봤어요.
그레서 이번 사순절 동안 건강한 쌍둥이 뺀 것처럼 거의 9kg 뺐어요.
그래도 아직 앞은 9예요.
이렇게 첫 번째 전 살을 비웠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는 분심을 비웠죠.
단식하니 분명 정신은 또렷해져요.
그전에 정리를 하려고 했던 것들이 하나씩 정리가 됩디다.
얽힌 실타래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그게 보여. 응. 보여.
영이 맑아지는 거예요.
제가 카페에 부활 축하 인사 올리면서 간단히 이렇게 적었지요.
‘빈 무덤이 곧 부활입니다.’
오늘 늘 무시당했던 필립이라는 아이의 입에서 부활절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나왔죠.
‘예수님 무덤 비어 있었잖아요. 비어있는 것이 생명의 시작 아닌가요?’
오늘 복음에는 세 사람이 등장하요. 마리아, 베드로, 요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사람을 잊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두 부류죠.
첫 번째는 나를 정말 비참하게 하거나 망하게 한 사람.
그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지옥으로 떨어졌어.
그런 사람 못 잊죠.
하지만 반대로 시궁창에 빠져 있는 나를 꺼내서
두 발에다 힘을 주어 살아가게 해준 내 영적인 은인이 있죠?
우린 그분도 못 잊어요.
막달라 마리아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예수님.
성경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예요. 부마자예요.
한 마리도 아니고 일곱 마리가 그 여인을 한평생 괴롭혔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주변에서 손가락질하고 미쳤다고 오만소리 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부마자에게서 일곱 마귀를 예수님이 떼어냈어요.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해 준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죠.
부마자였던 자기를 개심시키고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만드신 그분을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가 바칠 수 있는 거는 돈도 아니고, 사랑뿐이었어요.
그래서 유대인의 관습대로 죽은 지 사흘 되는 날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갑니다.
사랑하는 그분의 무덤을 제일 먼저 방문했던 것은 열두 사도 중에 누구도 아니었죠.
그런데 가서 보니 없어요.
무덤을 막았던 큰 돌도 옆으로 굴려져 있고.
그것이 한두 사람이 굴릴 수 있는 무게가 아니거든.
깜짝 놀랐죠.
막달라 마리아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요.
‘이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는 것만으로 직성이 풀리지 않아서 시체까지도 숨겼구나.
시체를 모독하고 있구나.’
이게 첫 번째 가능성이에요.
물론 성경에는 그런 얘기는 안 나와요. 그냥 내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시신이 있으면 거기가 성지가 될 수가 있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모일 수가 있기에 아예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었나 보다.
두 번째로 막달라는 또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까?
도굴꾼을 생각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역사를 보면 무덤 도굴꾼들이 많았어요.
막달라 마리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도저히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가죠.
다른 제자 이름은 등장이 안 돼요.
이제 두 번째로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베드로가 예수님을 몇 번 배반했어요? 세 번.
세 번 배반했던 것을 다른 제자들도 다 알고 있었어요.
‘어휴, 저게 맏형이야?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실망이야, 실망.’
이런 분위기였음에도 놀라운 것은 여전히 베드로는 제자들의 집단에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기에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의 제일 큰 지도자인 베드로를 찾아간 거예요.
신비스럽죠?
예수님이 없어진 그 빈자리의 중심축이 바로 베드로였던 거죠.
베드로에게 그러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그를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 나도 저분 입장이라면 배반했을 거야. 그래도 저분만 한 분 없잖아.
형님, 우리 다 잊을 테니, 그냥 우리 곁 떠나지 말아 주세요.’
아마 요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듣고 둘은 뛰었죠.
누가 더 빨랐을까요? 요한.
왜요? 당연히 젊으니.
베드로는 숨을 할딱거리며 쫓아가는데 요한은 단숨에 갔지요.
하지만, 안을 들여다만 보았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나와 있어요.
하지만 베드로는 충동적인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죠.
계산할 것도 없이 머뭇거릴 것도 없이 그냥 들어가죠.
그리고 이제 지금부터 중요한 것인데, 이 둘의 태도예요.
베드로는 그냥 ‘빈 무덤을 보았다’로 끝나요.
그런데 요한은 ‘나중에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로 끝나요.
사실은 둘 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없었어.
놀라는 거예요. 그죠?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는 ‘그냥 보았다.’
어떤 뉘앙스가 있느냐? 그냥 덤덤한 상태예요.
‘아유, 이럴 줄 알았어. 도둑놈들이 아니면 유대놈들이~ ’
막달라 마리아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감탄하거나 부활 신앙까지 이어지진 않은 거예요.
그런데 요한은 젊으니까 아직 무섭잖아.
그러니 먼저 달려가긴 했지만, 밖에 있다가 형님이 ‘들어와,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들어가고 나서 ‘보고 믿었다.’
여기서 요한이 믿은 것은 부활을 믿은 것이 아니라 없어진 걸 믿었다는 겁니다.
혼돈하지 마세요.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을 믿은 게 아니에요.
그러면 부활은 언제 믿었느냐?
다락방에 나타났을 때, 그때야 ‘예수님께서 부활했구나’ 하는 것을 믿었죠.
오늘은 부활을 믿은 게 아니에요.
신앙은 놀라거나 감탄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은 지성과 의지와 우리의 감성이 잘 조화된 전인격적인 응답입니다.
이 둘은 평소 주님이 하셨던 이야기를 떠올렸어야 했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할 거라고 말하셨었죠?
그런데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도둑놈이 훔쳐 갔나 생각하고 있던 거죠.
이 둘은 단순히 없어진 걸 믿은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가 정신이 없어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헛것을 보고 쫓아온 것이 아니고,
정말 없어졌다는 것을 믿은 겁니다.
또 나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시면서 왜 머릿수건을 접어놓고 가셨을까가 늘 궁금해요.
그래서 ‘내가 그분을 닮아 정리 정돈을 잘하는구나.’ 생각해요.
나 혼자 사는데, 어디 나가려면 정리를 다 하고 나가야 해요.
이것은 결벽증과는 좀 다른 거예요.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막살고 싶은 유혹이 들어요, 아무도 안 보니까.
공자님이 하신 말씀 ‘신독(愼獨)’이라는 말씀을 드렸었죠?
‘홀로 있을 때 경계해라.’
제가 신자분들 오면 집구경을 시키는 이유가 깔끔함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했죠.
‘나는 이 옷을 정리하면서 내 흩어진 마음을 정리한다.’
나는 청소를 하면서도 항상 의미를 두고 한다.
정원을 가꾸면서도 그렇죠.
정원은 사람 손이 안 가면 몇 개월 지나면 풀밭으로 바뀌어요.
신자들이 잘 정돈된 정원에서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겨.
하지만 사방에 풀들이 무성하고 그래 봐. 다르거든요.
그래서 머릿수건을 왜 접어놓고 떠나셨을까? .
나는 이렇게 해석했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어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활시켜 주신 거죠. 그죠?
예수님도 아마 눈이 딱 떠졌을 때 되게 흥분하셨을 것 같아요.
‘내가 얘기했던 대로 내가 부활했구나!’
부활하면서 올라가기 전에 하시고 싶은 일이 많으셨을 거예요.
이제는 자동차도 필요 없고 날아다니니 다락방에서 요놈들 뭐 하는지 좀 봐야 하고,
또 무엇보다도 제일 걱정되는 성모마리아, 위로해 드려야 하고.
승천하기 전에 할 일이 많으신 거야.
이 양반이 흥분해서 무덤을 나가시다 뒤를 돌아보니 세상에, 엉망이야.
머리 감았던 것은 저 밑에 떨어져 있고 수의도 그냥 뚤뚤 말아 있고.
‘내 제자들이 와서 볼 거야. 누군가는 볼 거야.’
아마 내가 집 나가면서 정리하는 그 마음이었을 것 같아.
다시 굴에 들어가셔서 머리 쌓던 것을 탁탁 잘 접어 한쪽에 잘 두셨죠.
왜 복음사가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썼을까?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얘긴데, 그죠
‘축복받고 흥분하지 말아라.’ 그거예요.
우리는 많은 경우 성령 세미나 피정하러 가서 축복받고 그날은 천국 같죠.
하지만 피정하고 나갈 때는 컴다운(calm down) 해야지요.
나의 흥분도 마귀가 이용할 때가 있어.
마귀는 다 알아요. ‘아이고 저것 며칠이나 가나?’
그러니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받은 은혜를 묵상하며 열매가 맺어지도록 해야 해.
아멘.
혼자 있을 때가 참 중요해요.
마귀들도 혼자 있을 때 공격을 굉장히 강하게 해요.
별의별 생각이 다 들거든요. 분심도 심하고.
그래서 수도자들, 은수자들이 뭔가 분심이 들고 마귀가 장난할 때는 단식을 했죠.
예수님도 광야로 가셨잖아요.
모세도 십계명 받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했잖아요.
여러분들도 뭔가 삶이 힘들고 실타래가 꼬이고 그럴 때는 단식하세요.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받을 때 먹으면 풀린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는 더 휘말려 들어갈 것 같아.
뭔가 힘들고 꼬이고 안 풀릴 때는 일단 음식으로서 좀 약간 거리를 두어 봐요.
내가 영이 맑아져야만 분별력이 생기거든요. 분별력이 생깁니다.
이제 두 가지만 얘기하고 끝나게요.
‘사랑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한지 복음에 나와 있죠.
첫 번째 진심으로 사랑하고 믿는 자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어요.
막달라 마리아, 아까 얘기했듯 절대로 주님을 잊을 수가 없는 그런 관계죠.
제자들도 겁먹고 있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여자지만 용감하게 가요.
무슨 꼴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로마 병정들한테 찾아간 거예요.
예수님께 기름 발라 드리려고요.
이렇게 예수님은 정말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믿는 자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는 얘기죠.
그리고 두 번째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믿는 자에게는 뭘 맡기시냐?
당신 엄마를 맡기세요.
십자가 밑에서 사도 요한밖에 없었잖아요.
다른 인간들 다 도망쳤잖아요.
쓰러지시는 성모님 팔짱 끼고 옆에 있던 게 요한이랑 막달라 마리아예요.
그래서 요한이를 쳐다보면서 뭐라 그랬어요?
‘어머니 요한이가 오늘부터 당신 아들입니다.’
‘요한아, 오늘부터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인류에게는 엄마가 생겼어요.
내가 감곡성당에 있을 때 와 보신 분 기억날 거예요.
미사 끝나고 강복 주기 전에 ‘제대 위에 계신 일곱 개의 총알구멍이 있는
매괴 칠고 성모님을 향해 ‘엄마’라고 세 번 외칩시다.‘
처음에는 남자들은 멋쩍어 안 하다가 두 번째부터 울음이 터지는 거예요.
미사 후 80 된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신부님, 저 오늘 여기 와서 엄마 찾았어요‘.
7살에 엄마 여의고 한평생 그리워하면 살았는데, 성모님이 엄마인 것을 알았어요.
요한이에게 ’오늘부터 네 엄마란다. 엄마 오늘부터 저 대신 아들이에요.‘
실제로 요한은 성모님을 끝까지 모셨죠.
박해가 일어나니 에페소로 성모님을 모시고 피난 갔어요.
성모님이 돌아가시고 승천하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에페소예요.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모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가슴 깊이 담아두는 사람에게 두 가지 축복을 주신다.
첫 번째 당신의 모습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보여 주세요. 아멘.
체험을 통해서 보여 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십자가라고 하는 고통을 통해서 보여 줄 때도 있고,
정말 어떤 때는 주님을 꿈에서도 볼 수도 있고,
또 어떤 데는 본당 신부님의 모습이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로 바뀔 수도 있어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가슴에 담아두는 사람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두 번째는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신다는 거예요. 아멘.
그래서 성모님은 예수님의 엄마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엄마예요.
그러니 가톨릭이 이천 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살고,
때로는 철부지처럼 방황도 하는 어두운 시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성숙해 나가는 거죠.
또 그렇게 수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가톨릭이 따뜻한 것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죠.
아이들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 아빠 안 불러. 나도 그랬어.
문 열면서 ’엄마 밥 줘.‘
그래서 우리 자매님들은 성모님처럼 살아야 할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는 겁니다.
아멘
오늘 이것은 꼭 기억합시다.
첫째, 부활절은 예수님을 부활시키려고 부활절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빈 무덤이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 부활하셨을 때 당신의 모습을 보여줬던 사람, 또 당신의 어머니를 맡겼던 사람은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고 가슴 깊이 두는 사람들이고, 바로 이 두 가지를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아멘
♣2026년 주님 부활 대주일 (4/5)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