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니뮈스 보스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네덜란드 화가 히로니뮈스 보스(Hieronymus Bosch, c.1450-1516)가 그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Christ Carrying the Cross)는 제가 인상 깊게 봤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작가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다소 괴이하고 익살스럽게 그렸는데요. 그림을 보면 성직자와 군인으로 보이는 이들, 예수의 땀과 피를 닦아주었던 베로니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받치는 사람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현장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합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길거리에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고, 뒤를 이어 끔찍한 처형의 행렬이 지나갑니다. 놀라는 행인들과 상인들 틈으로 사형수들은 고통스럽게 처형 틀을 끌고 가지요. 처형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사형수들을 향해 조롱 섞인 욕을 외쳐대고, 그저 누군가의 죽음을 구경거리로 여기는 사람들의 시선과 처형을 반대하는 이들의 울음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찹니다. 행렬이 지나가면 길거리는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상인들은 물건을 팔고 아이들은 뛰어놀지요.
평소엔 볼 수 없는 표정을 보게 되는 곳
현장 기도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이 많이 쓰이는 곳은 바로 공간입니다. 사람들의 일상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습니다. 노래패 꽃다지의 〈내가 왜〉라는 노래에는 “내가 왜 세상에서 내버려진 채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이 가사에는 1,000일 넘게 노숙 투쟁을 벌이고 있는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의 심정이 잘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면 길거리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저 역시 그동안 농성 천막과 집회 시위를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지나가던 수많은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농성 천막 주변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표정과 감정들을 발견하게 되는 곳입니다. 어수선하게 정돈되지 않은 농성 천막 내부와 그곳을 둘러싼 현수막들이 보이면 사람들 표정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집회를 준비하면서 의자나 깔개를 바닥에 올려두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인도가 좁아지는데요.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얼굴에 짜증이 계곡물처럼 쏟아집니다. 거기에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투쟁가까지 울리기 시작하면 그곳을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쾌함과 두려움이 더해집니다.
한편 다른 얼굴들도 있습니다. 농성장이 시끄럽건 말건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더 큰 소리로 이야기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바닥에 앉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한마디를 내뱉고 가는 사람들의 당당한 얼굴을 보면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본인도 한 말씀 하시겠다며 다가오는 불콰한 얼굴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무슨 일이라도 나지 않을까 긴장되는 마음이 앞섭니다. 혹여나 근처에서 경찰차 소리가 나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죠. 이 기도회와는 상관없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경찰차가 지나가고 나서야 이내 안심하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아는 얼굴들
어찌 됐든 모르는 사람들이 농성 천막 주변을 지나가는 경우는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아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지요. 어떤 날은 신학대학원 시절 인사 정도만 주고받던 한 목사님이 우연히 제가 있는 현장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를 보시고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죠. 그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는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냐?’라고 말하는 듯한 그분의 얼굴에 선뜻 어떤 대답도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아, 그 사람들, 기독교 핑계 삼아 데모하는 사람들이잖아”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기도회가 열리던 어느 회사의 본사 건물에서 일하던 교회 후배의 말이었죠. 그 현장에 갈 때면 행여나 그 후배와 마주치진 않을까, 마주치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움과 긴장감, 약간의 피곤을 느끼며 길거리 기도회로 향했던 날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가끔 아는 사람이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주변을 기웃거리게 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현장의 소식을 전할 기회가 생기기를 원하기 때문이지요.
그곳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얼굴
그래도 매주 가는 현장에서 만나는 환한 얼굴을 보면, 낯선 것들을 마주하며 움츠린 마음이 다시 조금씩 제자리로 찾아옵니다. 젊은 목사가 이런 일을 하는 게 대견하고 신기하다며 감탄하고 격려해주던 얼굴들도 있습니다. 잘하는 것도 하나 없는데, 먼저 다가와 고맙다며 커피 한 잔 건네주시는 조합원분들의 얼굴을 보면 곧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반대로 현장에서 만나는 반가운 얼굴, 특히 농성하는 분들의 얼굴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불쑥 찾아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기도회가 이분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저 기독교인들의 만족을 위한 요식행위는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 곤란함은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좀 더 강하게, 선언하듯 구호를 외친다 한들 지나가는 누구 하나 귀 기울이지 않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조합원분들의 얼굴을 통해 나타나시곤 합니다. 농성 현장에서 알게 되는 당사자분들 중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더 보편적인 말과 태도로 기도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려고 노력합니다. 현장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기독교의 전통과 상징을 적절하고 조화롭게 사용하려 하지요. 그동안 수없이 많은 기도회를 해왔지만, 왜인지 막상 조합원들이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곤란할 수 있는 질문을 꺼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한번은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천막에서 기도회를 진행할 수 없어서 본사 빌딩 로비에서 진행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로비에는 집회와 단식 농성 등 시위를 막기 위해 사측이 옮겨둔 사람 몸보다 큰 화분이 여러 개 놓여있었죠. 결국 기도회는 화분 틈에 불편하게 앉아서 겨우 비를 피하며 진행되었습니다. 뒤편에서는 기도회를 하지 말라는 관리인과 조합원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중이었지요.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한 조합원께서 말했습니다.
“여기가 자연 교회네요.”
그 한마디에 정신없던 로비는 순식간에 예배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아, 그렇지. 교회라는 것이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공간이라면, 본인을 기독교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모여서 누군가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함께 평화를 외치는 그 자리야말로 교회겠구나!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을 통해 기독교인인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크게 외쳐서 혹은 말씀을 잘 전해서가 아니라, 엄청나게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현장 기도회를 하면 종종 구레네 사람 시몬에 관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쓰러진 예수의 십자가를 우연히 함께 진 사람 시몬은 성서에 단 한 번 언급이 되는데요. 로마서에 나오는 문안 인사를 통해 그와 그의 가족이 이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됩니다. 과연 십자가를 함께 진 순간, 그 이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길거리 기도회를 진행하다 보면 동아리 선배를 잘못(?) 만나서 현장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색한 마음을 갖고 우연히 찾아온 기도회에서 느끼게 되는 무언가가 그렇게 그들을 한 번 두 번, 매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번 현장을 지키게 했습니다.
오늘도 그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꼭 현장 기도회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위해 무분별하게 파괴되는 자연의 곁에서 쓰러진 나무를 통해 마주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얼굴, 고통받는 이들의 뒷모습을 통해 만나는 상처 입은 그리스도, 용역과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을 막기 위해 서로의 팔을 얽어맨 사람들 속에 함께하시는 성령이 하나님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