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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생애
현 기 영
거칠게 밀리는 파도무리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는 현무암의 검은 해안선, 그 해안선을 한입 덥석 물어 떼어놓기라도 한 듯 작은 섬 하나 떨어져 나가고 우묵 들어간 곳에 우묵개라는 어촌이 자리잡고 있었다. 삼백여 호수의 제법 큰 마을이었다. 그 섬이 우묵개를 향해 진입해 들어가는 형국이라고 해서 수섬이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음양이 잘 어울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을 앞 바다에 해물 생산이 좋았다. 토지라고 해야 하나같이 가뭄 타는 돌짝밭들뿐인지라 그 섬이 없었더라면 마을이 그렇게 번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수리에 조금 풀빛을 이고 있을 뿐 불모의 바위투이로만 보이는 그 섬은 희한하게도 물속에다 해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밭을 가꾸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연못이 생기면 개구리들도 생기게 마련이니, 그래서 예로부터 이 마을에는 잠녀들이 많았다.
그렇게 그녀는 잠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생가는 갯가와 바로 맞붙어 있어서 종일 바다 물결 소리가 가득 실려 떠나지 않는 야트막한 초가집이었다. 해풍을 막으려고 두 겹의 돌담을 지붕 높이까지 쌓아올렸는데, 밀물 때면 돌담 밑굽까지 수면이 차올라 거기에 파래가 밀생하고 참게들이 돌담 구멍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녀의 이름은 간난이였다. 성은 양씨, 이름은 따로 짓지 않고 그냥 간난이라고 불렀는데, 호적 이름은 그것의 한자 표기인 ‘양유아’였다. 성씨밖에 더 준 것 없는 부친은 그녀가 열 살 나던 해에 홀연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남의 배 타기가 지겹다고 동네 분 두 사람과 함께 공동출자로 낚싯배 한 척 사서 부리다가 석 달도 못 되어 그만 변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저녁에 주낙낚시 상자를 어깨에 올려 메고 호기있게 대문을 나선 사람이 이튿날 아침 그 주낙낚싯줄에 자승자박당한 몸으로 죽어서 돌아올 줄이야.
먼 바다도 아닌, 수섬 뒤편에다 닻을 박았는데 홀연 들이닥친 돌풍에 배가 파선되어 그는 물에 드리운 낚싯줄에 두 팔이 휘감겨 헤엄 한 번 못 쳐보고 익사한 것이었다. 한배에 탔던 다른 두 사람은 무사했다. 그들이 시신을 업고 왔는데, 객사죽음한 사람은 집에 들여놓지 못한다고 대문 밖에서 멈칫거리는 것을 간난이 모친이, 집주인이 왜 제 집에 못 들어오느냐고 하면서 안으로 모셔들였다. “아이고, 요 어른아. 오늘은 무사(왜) 이리 늦읍데가? 시장할 톈디 어서 안으로 듭서” 하고 차디찬 시신의 손을 부여잡고 울던 어머니, 핏기 가셔 하얗게 바랜 아버지의 한쪽 뺨에 달라붙어 있던 싱싱한 해초 잎새 한 가닥. 그것이 간난이가 처음 겪은 죽음의 모습이었다. 파선된 배에 출자한 아버지 몫의 돈은 금융조합 빚이어서 밭 두 개 중 하나를 팔아서 갚아야 했다.
그렇게 부친이 졸지에 세상을 뜨고 말자, 댕기머리 날리며 한창 뛰놀아야 할 나이에 간난이는 벌써 양어깨를 짓누르는 생활의 무게를 실감했다. 종일 밭과 바다로 번갈아 드나들며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세 살짜리 어린 동생을 업고 키우느라고 어깨가 휘고 등짝에 오줌 지린내 가실 날이 없었다. 동무들이 재미있게 팔딱팔딱 줄넘기하는 옆에서 아기 업은 채 멀거니 구경만 해야 했다.
어머니가 집 안에 머무는 것은 비 오는 날뿐인데, 그런 날이라야 잠시 그 무거운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뭄 타는 잎새처럼 비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지! 비 오는 날, 아기를 어머니한테 맡기고, 그 자신도 잠시 응석받이로 돌아와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머리를 빗기기도 했다. 어머니의 치마에선 언제나 정겹고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아이고, 소로 못 나면 여자로 난다더니, 간난아, 어린것이 너무 고생이로구나.”
초경의 붉은 꽃잎이 내비치기 시작하던 열세 살에 간난이는 어머니를 따라 물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조그만 뒤웅박을 안고 얕은 물에서 새끼오리처럼 조짝조짝 걸음마 헤엄을 배우고 퐁당퐁당 자맥질도 배웠다.
봄풀처럼 한창 자랄 때인지라, 쑥쑥 길어지는 팔다리에 힘살이 붙고 담력이 생김에 따라 차츰 깊은 물로 나아갔다. 어머니는 어느 물, 어느 바위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 한번은 썰물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혼자 떨어져 물질하다가 하마터면 먼 바다로 끌려갈 뻔했는데, 그때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 다른 잠녀들한테 얼마나 야단을 맞았던지! 오리떼처럼 항시 무리짓는 것이 잠녀들의 존재방식이었다. 서로 삼촌, 조카라고 부르면서 혈족같이 뭉쳐져 있어서, 밭농사에 품앗이하기, 관혼상제 부조하기, 영등제 마을굿 치르기, 마을 아이들이 다니는 야학당에 기부금 내기,그리고 심지어 어업조합의 부당행위에 항의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집단행동이 아닌 게 없었다.
물질은 간난이에게 힘든 노동이긴 해도 즐거움도 있었다. 특히 여름철 땡볕에 앉아 캉캉 마른 조밭에 김을 매다가 물때가 되어 바다에 들면 가슴이 북창문 터진 듯이 시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 위는 비단빛, 물속은 공단빛이라고 물속 경치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해류에 너울거리는 해초숲, 배꼽 밑을 스쳐가는 잔고기떼, 햇빛 무늬들이 어룽거려 오색으로 빛나는 바위와 돌. 그 아름다운 경치 속에 가슴 뛰게 하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그 비밀이 번쩍 하고 눈에 발각되는 순간의 기쁨이라니! 무엇보다도 해중 귀물인 전복을 발견했을 때가 제일 기뻤다. 바위에 넓적하게 붙은 놈을 비창 찔러 데꺽 떼어내면, 함박주둥이 입놀림처럼 호물짝거리는 그 모양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은 금물, 큰 전복일수록 깊은 물속 침침한 바위 안쪽에 숨어 있게 마련인데, 그걸 탐내다가 목숨을 잃는 수도 있었다. 간난이도 아직 물질이 서툴 때 전복을 캐다가 바위 틈에 머리가 끼여, 큰일날 뻔했다. 아둥바등 사력을 다해 빠져나오느라고 물안경이 깨어지고, 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물이 한입 울컥 들어오는 순간에 간신히 물 위로 떠올랐던 것이다. 물도 하늘도 산도 벌겋게 보이던 그 위기의 경험은 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라는 교훈을 무서운 실감으로 일깨워 주었다.
팔다리가 늘씬하게 길어진 열일곱 살 나이에 그녀는 펑퍼짐한 제 궁둥이와 맞먹게 덩실하게 큰 뒤웅박을 안고 상꾼 잠녀가 되었다. 열 길 물속을 제 안방처럼 맘대로 드나들 수 있는 기량과 담력을 지녀야 ‘상꾼’ 소리를 듣는 법이었다. 섬 고장 갯마을에서 일등 신붓감이라면 물질 잘하는 처녀밖에 더 있겠는가. 게다가 도톰한 입술, 고른 잇바디에 생긴 용모도 오목조목 귀염성 있고, 허우대도 늘씬하게 빠져, 우묵개 마을에서 그녀를 탐내지 않는 총각이 없었다. 다른 잠녀들과 함께 잠시 물가에 올라와 모닥불에 언 몸을 녹이노라면, 총각들이 우연히 지나치는 척하고, 그녀의 몸매를 훔쳐보곤 했다.
그러나 홀어머니와 어린 오랍동생을 찌든 가난 속에 내팽개쳐 두고 시집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시집가기 전에 집안살림을 다소 낫게 일구어 보려고 여간 억척같이 굴지 않았다. 그러나 때가 왜정 시절이라, 어업조합이라는 착취기관의 그물에 갇힌 잠녀 신세로서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는가. 그래도 그중 육지 벌이가 좀 나은 편이어서 육지부로 물질 다니기 시작했다. 육지 물질은 특히 처녀들에게 인기 있어서 단 한 번이라도 갔다 오지 않으면 시집도 안 간다고 떼쓸 정도였다. 아기가 딸리면 운신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돈도 돈이지만 시집가기 전에 섬 밖 구경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큰 화통으로 어마어마하게 연기를 토하는 연락선도 타고 싶고, 간떨어지게 꽤액, 소리지르며 내달리는 기차도 타보고 싶고, 부산 해운대 여관밥도 먹고 싶고, 대마도에서 젖가슴 드러내 놓고 물질한다는 왜년들도 구경하고 싶고, 멀리 노령 땅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호말같이 크고 억세고 머리칼 붉다는 로스케 년들도 구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의 호기심일 뿐 반 년간의 객지생활은 언제나 고달팠다.
섬 떠나 일하러 가는 것은 갯마을의 여자들만이 아니었다. 섬땅에 상륙한 왜자본은 쌀금을 똥금으로 폭락시켜 농촌을 거덜나게 만들었으니 섬 주위 연락선 기항지마다 남부여대하여 왜고장의 노동시장에 품팔러 가는 군상이 꼬리 물고 이어졌다. 우묵개의 젊은 남정네들도 자주 일본 대판에 노동품 팔러 다녔다. 그 중 구리공장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먼저 자리잡은 마을 사람들의 연줄로 그 공장에 모여들어 많을 때는 쉰 명이 넘었다. 벌이가 좋은 대신 몹시 근력이 패는 중노동이어서 종종 스트라이크가 일어난다고 했다.
간난이는 이 년 동안 내리 육지로 물질 다녔다. 첫해엔 대마도, 이듬해엔 주문진에 갔다. 타관객지 낯선 바다는 정도 안 붙고 무엇보다 물이 찼다. 몸이 어찌나 시리던지 물에서 나와 이빨을 딱딱 마치면서 배 위의 화덕 불에 언 몸을 벌겋게 익히노라면 탁탁 튀는 불똥이 맨살에 닿아도 뜨거운 줄 몰랐다. 그녀의 발둥엔 화상자국이 거뭇거뭇 찍혀졌다. 물결 높아 물질을 쉬는 날에도 그녀는 세든 주인집 농사일을 도우며 일손을 놓지 않았다. :
그렇게 이 년간의 살 깎이는 고생 끝에 그녀는 기어코 부친이 잃어버렸던 밭을 되찾고 말았다. 그것은 참으로 남자 재주로도 감히 이루지 못할 일이어서 마을에 열녀 효부 났다고 사람들이 여간 칭찬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 간난이는 더 이상 시집 안 가겠다고 버틸 구실이 없어졌다. 나이도, 혼기 늦어진다고 반사십이라고 부르는 스무 살이 되었다. 등에 업고 키운 오랍동생도 어느덧 열네 살이 되어 송아지 첫짐 지는 꼴로 서툴기는 하지만 어머니의 밭일을 제법 도울 줄 알게 되었다.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가장 노릇 하겠다고, 큰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쟁기질 배우고 고기잡이 그물질도 익히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시집간다고 하니까 어쩐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뭔가 야릇한 불안감이 그녀의 마음을 놓지 않았다.
중신어미가 들락날락하더니, 뜻밖에도 글 읽는 선비 집안인 김직원 댁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신랑감은 연전에 별세한 김직원의 장손이었다. 읍내 향교의 중책인 직원 일을 맡아 보았다 하여 김직원인데 생전에 여러 모로 덕행을 보여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는 십여 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 야학당의 설립자이자 한문과목을 맡은 교사이기도 했다. 공립학교와 똑같은 과목들을 가르치는 그 학당은 마을 아이라면 누구나 값싼 수업료로 다닐 수 있고, 거기서 사 년 공부를 마치면 가정형편에 따라 읍내나 다른 마을에 있는 공립학교에 편입시험을 쳐 오학년에 진학할 수 있었다. 아무튼 김직원은 한문만은 젊은놈한테 맡길 수 없다고 칠순 나이에 노환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십 년 넘게 몸소 가르칠 정도로 소문난 고집쟁이였고, 조금도 선비 태깔 내는 법 없이 흙내 물씬 나는 농투사니 행색 그대로, 타고난 성미가 소탈했다. 바쁜 농사철에는 도포로 갈아입기가 번거롭다고 농사꾼 일복인 감물 들인 갈옷을 입은 채로 향교에 나타나 다른 도포짜리들의 눈총을 태연히 받아넘기곤 했다. 그는 십 년 터울로 두 아들올 두었는데, 장남은 신랑의 아비 되는 사람으로 일찌감치 시속에 눈밝혀 장사에 나서 버리고, 작은아들만이 마을 학당의 교사로서, 농사짓고 글 읽는 집안의 가통을 엇고 있었다.
간난이처럼 하냥 갯물에 젖어 살아온 잠녀의 신분으로서 그만하면 분수에 넘치는 혼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물림해 온 물질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양갓집 며느리로 팔자를 바꾼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마치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송충이가 갈잎 먹으면 떨어진다는데…….
신랑은 조부와 숙부의 대내림을 받아 얌전한 공부꾼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렸다. 여섯 살 연하의 아직 꽁지도 덜 나온 수평아리같이 어린아이를 신랑이라고 맞이해야 하나? 업고 키운 오랍동생과 동갑 나이로 함께 마을 학당의 사학년에 다니는 까까머리 학동이었던 것이다. 밥술깨나 먹는 집안에서 외아들 조혼은 흔히 있는 풍습이긴 하지만, 막상 당할 생각을 하니 간난이는 속이 느글거려 견딜 수 없었다. 아이고, 개떡을 떡이라고 하며 아기 신랑을 신랑이라 하랴. 며느리를 일찍 봐서 종년 부리듯 부려먹자는 심보겠지.
그러나 혼사란 워낙 어른들이 알아서 하는 일이라 간난이로서는 쓰다 궂다 말도 변변히 못 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눈물만 찔금거렸다. 정 시집살이가 싫으면, 어린 신랑이 철들어 데리러 올 때까지 친정살이를 하는 수도 더러 있는데, 그렇게 시집은 가되 살지 말고 돌아와 버릴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신랑이 자라서 다른 여자에게 눈돌려 버리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혼례를 치른 여자는 문서상 헌계집이 되어 버리는데…… 풀어진 옷고름은 다시 매면 되지만 한번 얹은 머리는 다시 댕기머리로 바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해서 팔자 그르친 여자들이 마을에 더러 있었다.
간난이가 곱게 땋아 얹은 머리 위에 녹둣빛 장옷을 쓰고 타기 싫은 꽃가마를 타던 날, 어머니도 옷고름으로 눈물을 쩍었다. “얘야, 원래 말도 많고 흉도 많은 게 시집살이여. 그저 눈 질끈 감고 참는 게 제일이느니. 네 서방이 커서 네 편 들 때까지 두어 해 고생은 될 거다. 그러니까 어린 서방 네 동생 키우듯이 잘 키워사 헌다.”
마을 밖까지 이름난 김직원 댁 혼사인지라 하객들이 많아 삼 일 잔치를 치렀다. 가난한 섬고장 퐁습대로 손님들은 털이 쑹쑹 박힌 돼지고기 석 점, 순대 한 점, 두부 한 점, 술 석 잔에다 쌀이라곤 눈밝은 닭이나 주워먹음직하게 드문드문 섞인 통보리 팥밥을 대접받고, 하얀 입쌀밥은 새서방 새각시 상에만 올랐다. 이 섬고장 여자들이 일생 먹어서 서 말 다 못 먹고 죽는다는 그 귀한 입쌀밥이 삼 일 동안 끼니 때마다 올라왔건만 시름에 겨운 간난이에게는 그저 소태 맛일 뿐이었다.
시아버지는 말장사를 크게 한다는 핑계로 외방에 나가 있는 날이 많았다. 농사일은 머슴아이 하나 붙여 아예 아내한테 맡겨 버리고 줄창 밖으로만 나돌아다녔다. 보름에 한 번쯤 나타나서는 며느리 보기가 민망스러운지 어슬픈 웃음이나 샐샐 홀리다가 단 이틀도 머물지 않고 훌쩍 떠나 버리곤 했다. 집에 올 때마다 각이 잘 빠져 걸출하게 생긴 백말을 타고 나타났는데, 기름 발라 빗자국도 선명하게 뒤로 빗어넘긴 하이칼라 머리도 그렇고, 뭔가 모르게 심상찮게 불길한 냄새가 풍겼다. 좋은 말을 구하려고 이 마을 저 마을 안 가는 곳 없이 다니느라 그렇다고 했지만, 말대꾸도 않고 눈을 허옇게 뜨고 흘겨보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버리는 시어머니의 눈치로 봐서 어디에 첩살림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허랑방탕한 남편을 두었으니, 시어머니의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남편이 훌쩍 사라질 때마다 분에 못 이겨 주먹으로 제 복장을 내지르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저놈 어디 가다 돌에나 걸려 거꾸러지라! 아이고, 전생 궂은 내 팔자여.”
그런데 서방한테 소박맞은 여자 홧김에 개 배때기 차는 격으로 그 소박이 간난이한테 왔다. 시어머니는 여간 당찬 살림꾼이 아니었는데 일손이 잰 만큼 잔소리가 많았다. 간난이는 매일같이 바늘쌈지 입에 문 것 같은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밭고랑 하나씩 타고 쌍나란히 앉아 김을 매다 보면, 어느새 저만큼 앞서 나간 시어머니가 뒤돌아보면서 일손 더디다고 끌끌 몸살나게 혀를 차고, 손바닥이 부르트게 방아를 찧어도 보리에 뉘가 많다고 핀잔이고, 늦은 밤 물레질하다가 깜박 졸아 실이 끊어지면 잠이 많다고 흉보고, 참새도 잠 안 깬 어둑새벽에 먼저 잠깨어 겉보리를 물 섞어 쿵쿵 찧으면서 “요 며늘아기야. 네 가랭이에 해가 비추는디, 어서 일어나 이방아 도와 주라” 하고 단잠을 깨우기 일쑤였다. 준치 잔가시 같은 그 잔소리들이 정말 지겨웠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지만 구박받는 제 각시에게 시늉일망정 다정한 말 한꼭지 하는 법 없는 신랑도 실망스러웠다. 일 년 후 마을 학당 사 년 공부를 마치면 읍내 공립학교에 편입해야 하는데 그 시험이 여간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고 제 각시가 바로 코앞에서 귀청 떨어지게 야단맞는데도 모르쇠 등돌리고 앉아 책만 읽어야 하나. 아직 어려서 그런가, 본심이 무정해서 그런가? 저러다가 커서 제 아비처럼 나를 소박맞히는 건 아닌지…… 말이 안 나게 쉬쉬하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시아버지는 첩살림만 차린 게 아니라 말장사합네 하고 한라산을 남북으로 넘나들며 투전판 찾아다니는 이골난 노름꾼이었다. 그
러고서 어찌 양갓집인가. 시집이란 데가 정말 어느 한구석 마음 붙일만한 곳이 없었다. 요놈의 시집을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섬 근처에 뒤웅박 안고 자유롭게 둥둥 떠서 물질하는 벗들이 못내 부러웠다.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당장 바다로 달려가고 싶었다. 바다는 출렁대며 자꾸만 오라고 손짓하고, 정말 오금에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물질을 못 하게 막는 시어머니가 밉살스러웠다. 요즘 세금값도 안 나오는 것이 밭농사인데, 그것만 붙잡아서 어떡허나, 물질로 벌어서 보태야지.
그래서 간난이는 결국 시집살이 두 달 만에, 글 읽는 집안이라고 물질 못 하게 된 금기를 깨뜨리고 말았다. 간난이는 양갓집의 금기를 깨뜨렸고 시어머니는 간난이의 뒤웅박을 깨뜨렸다. “이런 집안 망신이 있나! 쌍것 씨는 못 속여. 그렇게 말라 말라 했으면 들어야지, 그 천한 물질을 그렇게 하고 싶어 환장났더냐! 요년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시어머니는 불탄 밭에 소 뛰듯 날뛰며 작대기를 휘둘렀는데 몸만 다친 게 아니라, 자신의 분신같이 소중한 뒤웅박도 무참히 얻어맞아 박살났다. 매맞은 아픔보다도 “쌍것 씨는 못 속여” 한 말에 만정이 떨어졌다. 그녀는 물질을 천시하는 집안에 이제는 더 시집종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날로 당장 봇짐 싸고 친정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러나 소박맞고 온 딸을 친정이라고 반겨 줄 리 없었다. 정으로 못 살면 법으로 사는 것이 시집살이라고,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라고, 다시 시집으로 쫓아낼 궁리만 하는 어머니였다. 그래서 그녀는 경상도로 물질가는 잠녀 동아리에 끼여 섬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울산에서 구룡포에 이르는 해안을 목선 타고 오르내리면서 작업을 했는데 해초가 워낙 흉작이라 벌이가 시원찮았다. 세월이 약이라 그렇게 반 년간 떠나 있으면 이혼이 기정사실로 굳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시어머니가 사람을 놓아,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어서 시집으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보내 왔다. 그러나 간난이의 마음은 이미 돌같이 굳어져 있었다. 쌍것 씨는 못 속인다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인가. 몰질 못 하면 시집도 안 산다고 간난이는 완강히 고집을 세웠다. 마침내 시어머니가 굴복했다. 곡식 잘 안 되는 밭이라고 그냥 내버릴 수 있는가. 아무리 미운 며느리지만, 이왕 맺은 관계를 그렇게 쉽사리 노끈 끊듯 끊어 버릴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간난이를 데리러 오던 날, 시어머니는 어린 신랑과 함께 왔다. 간난이는 내친김에 어린 신랑한테도 단단히 다짐을 받아 냈다.
“서방님, 나를 데려갈 테면, 내 말에 대답해 봅서. 나중에 커서 나를 물질하는 천한 계집이라고 박대할 거우꽈? 또 나중에 커서 서방님은 젊고 나 혼자 늙어 나를 늙은년이라고 발로 차버릴 거우꽈? 서방님, 난 그렇게는 못 삽네다. 날 버릴 테면 지금 버립서. 꽃 좋고 잎 좋은 청춘인 때 나를 버립서.”
간난이는 서러움에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린 신랑의 눈에도 눈물이 홍건했으나 말씨는 또렷했다.
“아무 걱정 마. 절대로 아버지를 본받지는 않을 테니깐. 난 김직원의 손자란 말이여. 할아버지처럼 덕망 있는 사람 될 거라.”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만, 시아버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 간난이가 시집에 다시 들어간 지 두 달이 채 못 되어, 식구들이 모르는 사이에, 놀부집 지봉 위의 박덩이처럼 엄청 커진 시아버지의 빚덩이가 집의 반쪽을 결딴내고 말더니 나중에는 첩살림도 거덜나 시아버지는 파선된 배처럼 반쯤 기울어진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속에 타는 울화를 끈다고 술을 억병으로 마셔 대다가 몇 달 후 그 독한 술에 밸이 녹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잖아도 성미 급한 시어머니인데 이 지경을 당해 정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장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마당에 꽈당 하고 까무러쳐 쓰러진 시어머니는 그 길로 몸져 드러눕고 말았다. 반쯤 넋나가 퀭한 두 눈을 허공에 걸고 그린 듯이 누운 병자의 모습은 애처로웠다. 험하기 짝이 없던 입도 미음을 떠먹일 때마다 조금 달싹거릴 뿐 언제나 멍하니 벌어져 있었다. 사발 바닥에 찍힌 목숨수(壽)자가 훤히 들여다보이게 멀겋게 쑨 미음죽, 그것을 병자에게 떠먹일 때마다 간난이는 두려운 마음으로 사람의 목숨을 생각했다. 그녀는 조석으로 탕약을 달이고 미음을 끓여 공양하면서 정성껏 시어머니를 돌봤다. 그러던 어느 날, 허공에만 결려 있던 병자의 눈길이 문득 간난이한테로 옮아왔다. 그때야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온 것이었다. 병자의 퀭한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이고 며눌아기야, 참말로 고맙고 고맙구나.”
간난이도 울었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거진 스무 날 동안 앓다가 한잠 자고 난 누에처럼 맑은 표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 서방이 죽고, 네 서방이 가장이 되었으니, 이제는 네가 이 집 안주인이 아니냐”
하고 웃음엣소리를 하면서, 굳이 안방을 내주고 건넌방으로 물러가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시어머니의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져, 잔소리는커녕 오히려 며느리의 눈치를 볼 지경이었다. 차츰 두 여자는 친모녀처럼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 하는 일마다 대충 의논이 맞아떨어지곤 했다. 머슴아이도 내보내고 둘이 합심해서 열심으로 살림을 꾸려 갔다. 둘이 찧는 보리방아도, 옆엣사람 보기 좋고 먼뎃사람 듣기 좋게 쿵쿵 사이가 고르게 맞고, 지남철같이 위아래가 꽉 붙어 무거운 맷돌도 둘이서 의좋게 손잡이를 붙잡으면 스릉스릉 가볍게 돌아갔다. 일이 힘에 부치면 노래로 이겨 나갔다.
이여이여 이여도허라
이여이여 맷돌이여
어서나 뱅뱅 돌아가라
김을 매다 보니 저녁 때가 늦었구나
이 보리쌀을 갈아야 저녁밥을 할걸
본디 저녁 늦는 집에 오늘이라고
밝은 때 하랴
이여 이여 이여도허라
어린 신랑도 틈틈이 집안일을 돕기는 했으나 정신은 언제나 책에 가 있었다. 책은 숙부한테서 빌려 왔다. 밭에서 늦게 돌아올 때면 으레 어린 신랑이 저녁밥을 지어 놓곤 했는데, 한번은 아궁이에 불때면서 책 읽다가 바짓가랑이를 태워 먹은 적도 있었다. 간난이는 그렇게 공부에만 머리 쓰는 신랑이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 불안하기도 했다. 그저 한장 한장 뜯어내어 방도배나 했으면 좋음직한 그 종이묶음 속에 쌀도 있고 돈도 있고 권세도 있단다. 종이는 닥나무로 만든다는데, 오죽 글 읽는 선비가 부러웠으면, 가난한 여자들이 부르는 맷돌 노래에 이런 사설이 들어갔을까?
내가 죽거든 닥나무 밭에 묻어
이내 가슴에 닥나무 나거들랑
베어다가 종이 백지 맹글어
일천 선비 글발에 놀고져라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노래에만 남아 있을 뿐, 글 읽으면 오히려 우환이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왜놈 정치에 반항하다가 고문당하고 징역 가는 사람들이 대개 신식 공부를 한 청년들이라는 것을 간난이도 알고 있었다. 시숙부도 그런 사람이었다. 교실 밖에 망보게 해놓고 몰래 아이들에게 조선글을 가르치다가 순사가 오면 얼른 책과 공책을 지붕 위에 숨긴다고 했다.
이듬해 봄 남편은 용케도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여 읍내 공립학교 오학년에 편입했다. 읍내까지 팍팍한 시오리 길을 벗도 없이 혼자 걸어서 통학해야 했는데, 아직 종아리가 덜 여문 열다섯 살짜리로서는 여간 고달픈 게 아니었다. 처음 며칠은 발바닥에 물집 터져 걷기 어려운 신랑을 간난이가 업으며 걸리며 읍내 근처까지 바래다 주었다. 도중에 인가가 없어서 비를 만나면 그대로 쫄딱 젖을 수밖에 없었는데, 간난이가 중간까지 마중 나가 찬비 맞아 덜덜 떠는 신랑을 마른 옷으로 갈아입히고 삿갓 씌워 데려오기도 했다. 운동화가 빨리 닳을까 봐 길에서는 짚신을 신고 학교 근처에 와서야 운동화로 갈아 신고는 했는데 그 먼 길을 다니느라고 한 달에도 짚신 여러 켤레가 축났다. 신발값뿐만 아니라 수업료, 학용품값 일체가 간난이가 물질로 번 돈에서 나갔다. 간난이는 그렇게 공부하는 어린 신랑을 정성껏 뒷바라지하면서 키워 나갔다. 매일 오고 가는 그 먼 길 위에서 신랑은 점점 장딴지가 굵어지고 키도 쑥쑥 자라났다.
세월은 느리게 별탈 없이 흘러갔다. 공립소학교를 졸업한 신랑은 곧바로 농업학교에 진학했다. 그 학교만 졸업하면 관공서 취직은 받아 놓은 밥상이나 다름없었다. 몸도 숙성하여, 안으나마나 매양 싱겁기만 하던 어린아이가 어느덧 가슴팍 실하고 입김 뜨거운 사내대장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농업학교를 마친 남편은 실망스럽게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관공서 취직을 마다하고 마을에 눌러앉고 말았다. 조선놈이 관리가 되면 왜놈의 앞잡이밖에 더 되겠느냐고 하면서 일본으로 떠난 숙부를 대신해서 열여덟 살 나이에 야학당 선생 자리로 들어갔다. 선배교사 두 사람과 함께 밤에는 야학을 하고 낮에는 소비조합일을 보았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샛별소년단을 만들어 그들을 가르친다고 날마다 샛별 보는 새벽에 일어나곤 했다. 돈벌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순사들의 눈총 받는 일만 골라서 한다고, 딴생각 말고 살아갈 연구나 하라고 시어머니가 극구 말렸지만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새벽마다 따뜻한 잠자리 속을 혼자 빠져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난이는 차츰 체념을 배워 갔다. 그것이 장부의 뜻이라면 아내 된 도리로서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부터 마을의 아침은 참새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 체조하고 마을 길 쓰는 샛별소년단의 씩씩한 노랫소리로 밝아 오곤 했다.
동무야 동무야 앞으로 나아갑시다
반도 정기 타고난 우리 어린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큰아버지의 고깃배를 타던 친정동생은 그 무렵 제주와 부산 간을 왕래하는 연락선에 견습선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나, 시숙부가 마을 청년 수십 명이 노동자로 일하는 대판의 구리공장에서 한바탕 크게 스트라이크를 터뜨려 놓고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유황불이 활활 타는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온도계가 팡팡 터질 정도로 시뻘겋게 녹은 쇳물이 팥죽 끓듯 펄펄 끓는 용광로 앞에서 땀을 억수로 쏟으며 일하는 것이 보통 고역인가. 땀을 바가지로 쏟고 쏟은 땀만큼 피가 바싹바싹 말라들어 갔으니, 아무리 근력 좋은 사람이라도 반 년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숙부는 그 용광로에 불 못 때게 굴뚝 꼭대기까지 올라가 삐라를 뿌리며 스트라이크를 선동한 것이었다.
대판에서 노동품 팔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입에서 이따금 튀어나오던 ‘스트라이크’ ‘착취’ ‘투쟁’ ‘무산자’와 같은 낯선 말들을 간난이는 나중에 야학당에서 바로 남편의 입에서 다시 듣게 되었다. 물질하는 여자도 글을 알아야 왜놈들한테 속씨 않고 물건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젊은 잠녀 네 명을 설득하여 야학공부를 시켰는데, 그 중에 간난이도 끼였던 것이다.
“조합은 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야 진짜 조합이지, 저놈들이 만든 조합은 잠녀 노동자를 착취하는 관제 노동조합입니다. 눈뜬 봉사는 코 베어 가도 모릅니다. 저울눈 볼 줄 모르고 장부책 볼 줄 모르니까 저놈들이 맘대로 속이는 것 아닙니까. 아는 것이 힘, 배워야 합니다. 배우면 험이 됩니다. 또 아무리 약한 험이라도 뭉치면 강한 힘이 됩니다. 무산자의 무기는 단결뿐입니다.”
밖에 새어나가지 않게 나직이 힘주어 말하는 남편의 형형한 눈빛을 바라보노라면, 간난이는 저도 모르게 주먹이 꼬옥 쥐어지는 것이었다.
한 달간 야학당에 다닌 간난이네들은 채취물 계량할 때 서로 번갈아 가며 입회자로 나섰다. 이백 넘는 잠녀들 앞에 허벅지를 벌겋게 드러낸 물옷 바람으로 혼자 튀어나와 저울대를 가운데 두고 조합 서기놈들과 맞서는 것은 두려운 만큼이나 가슴 뿌듯하게 보람찬 일이었다. 언제나 왜놈 서기보다 그 앞잡이인 조선놈 서기가 한술 더 떠 설쳤다. 무식한 것들이 사람을 의심한다고 마구 물건을 패대기치면서 바락바락 욕질해도 꼼짝도 않고 버티고 서서 저울눈을 속이지 않나, 상등품을 하등품으로 깎지 않나, 일일이 눈밝히고 감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절도 몇 달 못 가고 시국은 점점 암흑의 진구렁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일제가 대륙에 벌여 놓은 전쟁판이 커짐에 따라 물자 조달을 강요당한 식민지 조선 백성의 고통도 점점 심해졌다.
그러더니 해가 바뀐 어느 날 느닷없이 이름도 성도 왜놈식으로 고치라고 창씨개명의 명령이 떨어져 사람마다 치욕에 몸을 떨었다. 조선 백성의 골수를 후벼 내고 속창자까지 바꿔 왜놈 종자로 환골탈태 시키려는 일대 공작이 벌어진 것이었다. 조선글을 읽는 것은 물론, 조선말 하는 것도 범죄시되어 하시하처를 막론하고 왜말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이때 우묵개 마을의 야학당에도 흉측하기 짝이 없는 물건 두 개가 생겨났으니, 왜왕 사진과 사이렌이었다. 오전 오후로 하루에 두 번 사이렌이 울었다. 사이렌이 울면 마을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하다 말고 허겁지겁 야학당에 모여들어, 왜왕 사진 앞에 경배하고 “가타카나 히라카나” 하면서 왜말을 배워야 했다. 단 한 마디 반항적 언사도 용서 없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사람들은 자기들 중에 숨어 있는 스파이가 두려워 입을 굳게 다물었다. 채취물 계량할 때마다 당당하게 입회자로 나서던 간난이네들도 자연히 주눅들어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를 당하여 간난이는 남편 걱정에 늘 좌불안석이었다. 소비조합도 소년단도 금지당한 터에 다시는 그런 불온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게다가 그 더러운 왜말 강습까지 억지로 떠맡게 되었으니 오죽 낙담했을까? 부끄러워 하늘을 못 보겠다고 노상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는 남편이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왜말을 강습하던 중에, 느닷없이 ‘으악’ 하고 무서운 괴성을 터뜨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그 일로 남편은 경찰 주재소에 끌려가 호되게 얻어맞았다. 어떻게나 혹독하게 맞았던지, 볼기짝과 양 허벅지가 온통 멍들고 피터진 상처투성이였다. 차마 끔찍하고 너무도 무서워서 간난이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으악’사건으로 남편은 더 이상 그 더러운 왜말 선생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가슴에 쌓인 울분은 무엇으로 삭이랴. 이판사판 자포자기하여 또 일을 저질러 버리면 어떡하나.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똑똑한 청년들이 하나 둘 잡혀 들어간다는 소문이었다. 심지어 일본에서 갓 돌아온 윗동네 한 청년은 경찰 주재소에 귀향신고하러 갔다가 아무 날 몇 시에 ‘귀국’했다고, 즉 ‘귀향 대신에 ‘귀국’이라고 했다고 모진 고문을 당한 일도 있었다. 너희 나라가 망한 지 언젠데 ‘귀국’이냐. 나쁜 사상에 물든 놈이 틀림없다고 그렇게 개 패듯 패더라는 것이었다.
거진 일 년 반 가량 잠적해 있던 시숙부가 끝내 잡히고 말았다는 소문이 인편에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듣자 남편은 간신히 매달렸던 동아줄이 끊어져 버린 듯 아주 낙담하여 어깨가 축 처져 버렸다. 술밖에 의지할 데가 없어 이때부터 술 마시기 시작했다. 술 배운 지 몇 달 못 되어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소문난 술꾼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술로 울분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숙부처럼 일을 저질러 감옥 가는 것보다 낫겠지, 저러다가 언젠가는 정신이 돌아오겠지, 징역꾼 서방보다 술꾼 서방이 낫다고, 간난이는 애써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고 했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나자, 주재소 순사놈들도 남편을 아주 고질적인 술꾼으로 여겨 버렸는지 더 이상 감시의 눈총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술은 좀처럼 끝날 기세가 아니었다. 이 술집 저 술집, 외상을 달아 놓아 술값이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했고 그 빚을 간난이가 물질로 벌어서 갚아야 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 갔다. 저러다가 시아버지처럼 술로 망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각시의 눈물도, 어머니의 하소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이고 며눌아기야. 참말로 미안허구나. 네가 그 고생 하며 물질로 한푼 두푼 번 돈을 서방이란 놈이 술값으로 다 녹여 없애니, 아이고 내가 부끄럽고나 부끄러워.”
이렇게 눈물을 글썽이며 탄식하던 시어머니는 드디어 그 불 같은 성미를 터뜨리고 말았다. 집 나간 지 거진 보름 만에 술냄새를 확 끼치면서 돌아온 아들을 뒤뜰의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어다 다짜고짜로 사정없이 후려팬 것이었다. 복승아나무 가지는 무당이 환자 몸에 붙은 잡귀를 때려 쫓을 때 쓰는 회초리였다.
“이눔아, 이 술로 망할 눔아, 네 애비가 날 과부 맹글더니, 아이고 이젠 이 집에 쌍과부 생길로고나. 저 불쌍한 네 각시 보라! 네가 저 아이하고 결혼했지, 술과 결혼했느냐. 술이 네 첩이냐. 술이 첩이라면 내가 때려서 내쫓아야겠다. 에라, 요 망할것 맞아 봐라. 술이 네 몸에 붙은 잡귀라면 그것도 내가 때려서 쫓아내야겠다. 에라, 요놈의 잡귀, 너도 맞아 봐라, 엇쉬, 쑤어나라!”
악에 받친 시어머니는 말리는 간난이까지 후려치면서 힘이 다해 제풀에 쓰러질 때까지 회초리를 놓지 않았다. 장승같이 우뚝 선 채 고스란히 매를 얻어맞은 남편은 젖은 눈빛으로 침울하게 두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간난이의 신상에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남편이 혹시 잡혀들지 않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녀가 잡혀들고 만 것이었다. 왜놈들은 그 무렵 화약 원료인 감태라는 해초를 잠녀들로부터 강제로 공출받아 왔는데 지정된 수량에서 조금만 모자라도 이백여 잠녀들을 꿇려 놓고 단체기합을 주기 일쑤였다. 허벅지를 벌겋게 드러낸 물옷 바람의 여자몸으로 자갈밭에 무릎 꿇는 벌을 받아야 했으니, 그런 수모가 어디 있을까. 그날은 물결이 높아 채취물이 적을 수밖에 없었는데도 벌을 주려고 하자, 여자들이 아우성치며 달려든 것이다. 조합서기들 중에 한 놈은 꽁지 빠지게 줄행랑 놓고 한 놈은 붙잡혀 뭇매를 맞았다. 주동자가 따로 없는 우발적인 사건인데도 간난이는 다른 세 여자와 함께 주동자로 몰려 이십 일 구류를 살았다. 네 여자 모두가 물건 계량할 때 입회자로 나섰다고 해서 보복을 당한 셈이었다.
이 사건이 충격을 주었던지, 아니면 시어머니의 복숭아나무 회초리가 효험이 있었던지, 그제서야 남편은 잠을 너무 오래 잔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술에서 깨어났다. 이때부터 남편은 다시 얌전한 가장으로 돌아와 낮에는 밭일하고 밤에는 바느질하는 간난이의 곁에 누워 책을 읽었다. 그게 순사가 알면 곤란한 책이었던지 읽다가 문 밖에 인기척이 나면 얼른 책을 베갯잇 속에 감추곤 했다. 아무튼 그녀는 참으로 오랜만에 사는 게 이런 것이다 싶게 푸근한 행복감을 느꼈다. 간난이의 뱃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시국은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대륙전쟁이 한창인 판에 이번엔 느닷없이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공출량이 구르는 눈덩이처럼 갈수록 불어나, 점심 굶는 집들이 속출했다. ‘나라를 위한 노력봉사’라는 미명 아래 우묵개 잠녀들은 허기진 몸으로 날마다 감태 채취에 강제 동원되었다.
간난이는 뱃속의 아기와 함께 힘겹게 물속을 헤엄쳐 다녔다. 그러나 달이 차 몸 밖에 나온 아기는 못 먹어서 그런지 아흐레 만에 속절없이 시들고 말았다. 그리고서 석 달이 채 못 되어 또 임신했다. 시절은 갈수록 궁핍해져 갓난아기가 살아가기에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점심 굶기는 예사이고 하루 두 끼마저 굶는 집들이 늘어갔다. 낟알 곡식은 공출로 빼앗기고, 밀기울 범벅, 콩깻묵죽, 보릿겨죽이 밥상에 올랐다. 간난이는 두 번째 아기도 실패하고 말았다. 자식농사 반타작밖에 못 하는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연달아 두 번 실패하고 보니, 억장이 무너지는 듯 가슴이 아팠다. 어미는 자식을 땅에 묻지 않고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파래 섞인 콩깻묵죽에 서러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 기막힌 세상에 그 아기들은 무엇을 먹겠다고 태어났던가. 너무도 허망했다. 그렇게 빨리 갈 것을 왜 태어났던가. 더 이상 임신하는 것이 두려워 울기만 하는 간난이를 시어머니가 간곡한 말로 달랬다. 아기 잃은 슬픔은 다시 아기를 낳아야 잊혀지는 법이라고.
이듬해 간난이는 세 번째 아기를 낳았다. 저 아기도 어미 가슴에 못이나 박고 가버릴 테지, 하고 아주 체념하고 있는데, 보름 만에 뜽금없이 시어머니가 출생신고하겠다고 나섰다. 살지 죽을지 모르는데 왜 그런 헛수고를 하나. 백 일 넘게 살아야 비로소 인간 취급해서 호적에 올릴까말까 하는데…… 그런데 시어머니의 뜻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무슨 수를 쓰든, 이번 아기는 꼭 살려야 되지 않겠느냐 하면서 불쑥 꺼낸 그 ‘무슨 수’가 황당하게도 아기를 무당집 호적에 당분간 올려놓자는 것이었다. 인간의 생사와 길흉화복은 인력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아기가 나중에 크면 호적을 파오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남편도 미신이라고 반대했지만 결국 시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아기를 같은 동네에 사는 여자무당 박씨네 호적에 올렸다.
공출은 더욱 혹심해져, 식량뿐만 아니라 말도 소도 끌어가고, 총탄 만든다고 조상의 제상에 오르는 놋그릇들은 물론 심지어 부러진 숟가락몽뎅이까지 훑어 갔으니 홍합 껍데기로 밥숟갈을 대신할 지경이었다. 왜놈 앞잡이들의 행패가 무서웠다. 공출을 독촉한다고, 개 싸다니 듯 마을을 돌며 숨겨 놓은 양식들을 빼앗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자기 밭 소출로는 도저히 공출을 감당 못 해 밭을 팔아 버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말고삐를 풀어다가 목매달아 죽는 사람도 있었다. 간난이네는 마당가 두엄자리 밑에 구덩이를 파 양식을 숨기고 있었는데 용케 들키지 않고 쥐 소금 먹듯 조금씩조금씩 꺼내다 먹었다. 천행으로 아기는 별탈 없이 자라 주었다.
물자 공출에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사람 공출 바람이 불어닥쳤다. 열아홉, 스무 살짜리는 군대에 잡아가고 그 위로는 탄광 인부, 전쟁 노무자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친정동생은 연락선 선원이라 상관없었지만 남편이 걱정이었다. 남편은 스물네 살로 징용 대상이었다. 공부깨나 한 사람들은 대개 징용 가는 대신 관청일에 하수인으로 뽑혀 가고 있었는데, 남편 역시 그렇게 왜놈 앞잡이가 되느냐, 악마굴 같은 탄광에 끌려가느냐, 양단간에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간난이가 꾀를 내어 육지로 물질 갈 잠녀들을 모집해 남편을 그 인솔자로 삼았다. 남편은 왜말을 할 줄 알아서 인솔자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잠녀 아홉 명을 모집한 간난이 부부는 돌 지난 아기를 시어머니한테 맡기고 연락선으로 섬을 떠났다.
그들이 반 년을 기약하고 머문 곳은 금강산 바로 위 장전이라는 제법 큰 어촌이었다. 고향에서는 늘 일이 바빠 성산 일출봉도 구경한 적 없는 간난이로서는 그 유명한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바로 눈앞에 두고 보니, 정말 팔자에 없는 호강이다 싶었다. 그러나 벌이가 좀 낫기는 했지만 고향에서와는 달리 타관 객지 낯선 바다의 물질은 언제나 두렵고 고달팠다. 작은 목선을 타고 금강산 앞바다를 이리저리 떠돌며 작업을 했다. 일이 바쁠 때는 포구로 돌아가지 않고 배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강원도 불바람'이란 돌풍도 두렵고 낯선 조류의
흐름도 두려웠다. 북에서 내려오는 조류는 차디찼고 자칫 조류를 잘못 만났다간 먼 바다로 끌려가 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야말로 칠성판 같은 죽은 나무로 만든 배에, 혼백상자 같은 뒤웅박에 의지한 채 열 길 물속 저승문을 들락날락해야 하는 고달픈 생활이었다. 남편은 관청과 물상객주를 상대하는 일 외에도 작업하는 잠녀들을 뒷바라지하고, 땔감도 해오는 허드렛일꾼 노릇도 했다.
그렇게 금강산 근처 바다 위에서 여섯 달째 작업을 하고 있던 구월 초승께 문득 풍편인 듯 종전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가 여름철이라 시원한 배 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해상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진 스무 날이 지난 뒤에야 지나가는 고깃배로부터 그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태극기와 붉은기가 함께 내걸린 장전읍 거리엔 사람들이 해방의 기쁨에 들떠 흥청거리며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졸지에 삼팔선이 그어져 그 이북에 놓인 간난이네 일행은 해방의 기쁨보다 혹시 고향에 못 돌아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컸다. 전쟁터와 탄광에서 놓여난 귀환동포를 실은 배들만 더러 왕래할 뿐, 남쪽으로 내려가는 배편은 이미 끊겨 육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간난이의 남편을 인솔자로 앞장세운 여자 아홉 명은 고리짝에다 살림 행장을 꾸려 넣어 한 짐씩 짊어지고 그 멀고 험한 산길을 걸어갔다. 깊은 계곡을 끼고 구름이 걸리는 산등성이 위까지 꾸블거리며 올랐다 내려오는 강원도 산길은 걷기에 여간 힘들지 않아 쉴 때마다 퉁퉁 부은 발을 물에 담가야 했다. 큰 산 작은 산 여럿을 넘고 엿새 만에 평강읍에 도착했다. 삼팔선 형편을 수소문해 보니 다행히도 삼팔선은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사람들이 예사로 드나든다고 했다. 심지어 친일지주, 밀정, 불량배 노릇 하다가 도망가는 자들까지도 삼팔선 넘는 것을 눈감아 준다고 했다. 이북에서는 해방된 새 세상에 그런 자들과 함께 살 수 없다고 마을에서 백 리 밖에 나가 살라고 쫓아 버리는데 삼팔선을 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인간쓰레기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평강읍 길거리에 태극기와 함께 붉은기가 나부끼고 오고 가는 행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 ‘우리의 은인 소련군 만세’ ‘위대한 붉은군대 만세’라는 현수막을 걸어 놓고 연설하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간난이는 난생 처음 거기서 양코매기 로스케 병정들을 보았는데, 키가 껑충 크고 낯색은 횐데, 머리칼은 붉어 도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머리칼이 붉어서 ‘붉은군대’일까?
기차는 붉은군대의 물자를 나르느라 분주하여 좀처럼 사람들을 태워 주지 않았다. 여러 날 지체하고 나서 간신히 기차를 잡아탔는데, 어찌나 사람들이 몰렸던지, 간난이네는 차 지붕 위로 기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안장 없는 말잔등 타는 격으로 불안한 여행이었으나 그런대로 별탈 없이 철원을 지나 연천에 닿았다. 삼팔선 가까운 곳이라 기차는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일행은 다시 무거운 다리를 끌며 기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갔다. 삼팔선을 몰래 넘는 사람들은 길잡이를 앞세워 산길을 택하는 모양이었지만, 길잡이를 구할 형편이 못 되
는 간난이네는 그저 기찻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단봇짐 짊어진 젊은 패거리를 두 번 만나긴 했으나 한결같이 길을 물어도 대답도 않고, 간난이네가 뒤따라올까 두려운지 잰걸음으로 앞질러 달아나 어느 샛길로 숨어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왜놈 밀정 노릇 하다가 쫓겨가는 놈들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남편은, 저런 인간쓰레기들을 자꾸 이남으로 내려보내면 어떡하느냐고 개탄스러워했다.
이틀 후 삼팔선에 닿았는데 기찻길 끝에 초소가 있었다. 가슴을 졸이며 다릿목에 다가가니, 따발총을 거꾸로 멘 로스케 병정들이 앞을 딱 가로막구 조선말로 “못 가!” 하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간난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편이 초소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짐 조사한다고 고리짝 행장이 마구 풀어헤쳐졌다. 그러나 거기에 나타난 것은 제주 잠녀들의 곤궁한 생활모습뿐이었다. 둥그런 뒤웅박, 찌그러진 알루미늄솥, 식기, 때묻은 누비이불, 헌옷 따위들. 남편은 다행히 반 시간쯤 조사받고 놓여났다.
탄탄한 콘크리트 다리를 마치 살얼음 밟듯 벌벌 떨며 건너가니 이번에는 또 다른 양코배기 병정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미군이었다. 다시 고리짝 짐들이 풀어헤쳐지고 남편이 초소에 끌려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 별탈 없이 조사가 끝나 모두들 후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별안간 한 놈이 디디티 분무기를 들이댔다. 그런 물건을 본 적이 없는 여자들인지라 총이라도 들이대는 줄 알고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들이 겪은 것은 더러운 모욕이었다. 키들키들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분무기 꼭지로 여자들의 치마, 저고리를 함부로 들추면서 디디티를 물컥물컥 뿜어 넣자 여자들이 질색하여 비명을 질렀다. 머리 위까지 밀가루를 뒤집어쓴 듯 허옇게 디디티를 뒤집어 쓴 간난이네를 보면서 다른 놈들도 재미있다고 깔깔대고 웃었다. 그 삼팔선 통과의식은 조선인 통역의 훈시로 끝이 났다.
“혹시 여러분이 이북에서 나쁜 병균을 묻히고 들어오지 않나 걱정해서 소독해 주는 것이니, 그리 알고 이분들을 고맙게 여겨야 해요. 그러나, 에 또, 그것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여러분이 혹시 저쪽 사상을 묻히고 들어오지 않나 하는 것이오. 저기 있을 동안 뭘 보고 뭘 들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지 저쪽 사상은 우리 이남에서는 아주 나쁜 병균이다, 이 말이오. 이 점 명심해야 합니다.”
남편은 후에도 그때의 수치를 잊지 못하여 종종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곤 했다. 야만인 취급했다고, 그것은 방역도 그 무엇도 아닌 뼈아픈 민족적 모욕이었다고.
이렇게 미군 초소병한테 디디티 세례를 받고 삼팔 이남에 들어섰는데, 그러나 밟고 있는 땅이 도무지 제 나라 땅 같지가 않았다. 짐승 같이 키 큰 미군들이 떼지어 걸어다니고, 미군차량들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무섭게 내달리고 있었다. 간난이는 마치 남의 나라 땅에 잘못 발을 들여놓은 듯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땀과 먼지와 피로에 찌들어 영락없이 떼거지 행색인데다 남자 하나에 여자 아홉이 딸려 있는 꼴이 영판 우스웠던지, 지나치는 미군들이 손가락질하고 낄낄댔다. 그들 중 한 놈이 과자 부스러기 한줌을 뿌렸으나 간난이네는 머리 숙인 채 본 척도 않고 역을 향해 걸어갔다.
그날 오후 늦게 일행은 기차 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 안팎은 온통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아무리 서울 구경은 사람 구경이 제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간난이는 자신이 관청 마당에 갖다 놓은 촌닭처럼 느껴졌다. 대합실은 물론 역전 광장까지 사람들이 그들먹했는데, 한쪽에서 시국연설회가 벌어져 이따금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나오곤 했다. 남편도 사뭇 들뜬 표정이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연설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시국형편을 알아보기도 했다.
여행에 지칠 대로 지친 간난이네는 근처의 조그만 여관방에 들어 하룻밤을 달게 잔 다음, 다시 기차를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콩나물시루 속 같은 차 안에서도 여기저기서 승객들끼리 건국 문제, 시국형편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져 있었다. 남편이 토론에 한몫 끼여들고, 간난이도 삼팔선 넘어온 값을 하느라고 쫑긋 귀를 세워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흥분해서 목청을 돋우었다. “왜놈들이 물러갔는데, 왜 미국놈 소련놈은 아직도 남아 있나.” “정치 하겠다는 놈들이 나라 세우는 일을 왜 제 나라 백성한테 물어 보지 않고 미국놈 소련놈한테 물어 보나.”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게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난다” 했다.
그렇게 하여 간난이네는 해방된 지 거진 한 달 보름 만에야 갖은 고초 끝에 고향땅을 밟을 수 있었다. 살아 생이별인 줄 알았던 고향 식구들을 재상봉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오죽했으랴. 간난이는 그새 부쩍 자란 아들아기를 품에 안고 기쁨에 겨워 엉엉 울었다. 시어머니는 세상에 이런 경사는 없다고 시루떡에 멍석 한자리 펴놓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덩기덩기 춤을 추었다. 감옥에 있던 시숙부도 풀려 나와 있었다. 과연 해방이 좋기는 좋았다. 공회당 마당에 잔뜩 쌓아 놓고 실려 가기를 기다리던 공출 보리가 해방과 함께 도로 마을 사람들한테 나누어졌으니, 집집마다 먹을 것이 풍족했다.
간난이네가 입도한 후에도, 전쟁터, 공장, 탄광의 사지에서 놓여난 귀환동포들의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생환자들과 함께, 죽어서 한줌의 유골로 돌아오는 이들도 많았다. 시체도 유골도 없는 비참한 죽음도 허다했다. 8·15를 석 달 앞두고 목포를 향하던 연락선이 미군기의 폭격을 맞아 침몰되면서 함께 수장된 삼백 명 가까운 몰사죽음이 바로 그런 비참한 죽음이었다. 그래서 ‘해방자' 미국은 애초부터 섬사람들에게 그 떼죽음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삼 년 후 이 섬을 피로 물들인 수만 떼죽음의 전조였다.
해외에서 귀환하는 젊은이들의 입도는 그해가 저물도록 이어졌다.
온 섬이 부쩍 늘어난 인구로 흥청거리고 젊은이들은 건국의 꿈에 밤잠을 설쳤다. 우묵개 마을에도 청년들이 갑절로 불어나 새로 꾸린 청년회가 제법 활발하게 돌아갔다. 간난이 남편은 청년회의 간부였다.
그러나 시국은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놓은 듯 야릇하게 돌아갔다. 삼팔선은 갈수록 굳어지고 해방이 되자 보복이 두려워 피신했던 친일파들이 미 군정의 부름을 받아 착착 원대복귀하여 친미파로 변신하고 있었다. 왜순사 노릇 하던 자들이 왜순사복 차림 그대로 ‘미 군정 경찰’이라는 완장만 두른 채 버젓이 사람들 앞에 나서고, 공출 많이 안 낸다고 매 때리고 벌주던 면서기들도 여전히 그 흉측한 국민복 차림에다 수건을 꽁무니에 차고 버젓이 행세하고 다녔다. 게다가 해방 바람에 아주 날아가 버린 줄만 알았던 공출도 이듬해부터 되살아났다. 삼팔선이 막혀 비료도 안 들어오는 판에 무숟 농사가 되겠는가. 보리는 흉작인데 섬 인구는 엄청 불어나 모두들 먹자고 아우성인데 보리 공출이라니, 해방된 나라에 공출이 웬말이냐고 사람마다 원성이 자자했다. ‘8·15는 진정한 해방이 아니다’ ‘완전독립’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마을마다 ‘보리 공출 절대 반대’라고 쓰인 삐라가 사방에 나붙고, 공출 독촉하러 나온 면서기들이 얻어맞는 사태가 잇따라 발생했다. 우묵개에서도 면서기 구타사건이 발생하여 청년 두 명이 경찰에 끌려가 모진 매를 맞고 구류를 살았다. 흉년에 역병이라더니, 그 무렵 호열자가 크게 창궐하여 삼백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람들마다 세상을 저주하고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졌다.
민심이 극도로 흉흉한 가운데 이듬해 읍내에서 삼일운동 기념대회가 열려 태극기와 마을기를 앞세우고 모여든 이만 군중이 이런 세상 못 살겠다고 ‘완전독립’을 외쳤다. 일제 대신 다른 외국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한 진정한 해방은 아니며 이제부터 진짜 해방을 준비해야 한다고, 사기그릇 깨지면 여러 조각 나지만 삼팔선이 깨지면 한덩어리가 된다고 온 읍내가 떠나가라고 기염을 토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대답은 무자비한 총격이었다. 미 군정 경찰의 총격으로 여섯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섬 백성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온 섬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시장이 철시되고, 학교, 회사는 물론 관공서마저 문을 닫았다.
육지부에서 응원경찰대, 서북청년단이 대거 미 함정을 타고 들이닥쳤다. 마을별로, 직장별로 검거 선풍이 무섭게 몰아쳐 사람들이 잇따라 잡혀 들어갔다. 일단 잡혀들면 불문곡직 등줄기에 누린내나도록 몽둥이찜질을 당해야 했다. 특히 서청은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들 중에는 이북에서 왜놈 밀정 노릇 하다가 쫓겨난 자들이 많이 끼여 있다고 했다. 검속을 피해 산으로 달아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고깃배를 타고 아예 섬 밖으로 튀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연락선을 타면서 보름에 한 번 꼴로 들르던 친정동생도 이때부터 집에
오는 발걸음을 아예 끊어 버렸다. 드디어 간난이네 집안에 불행이 닥쳤다. 시숙부가 잡혀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 이웃집 귀머거리 할머니가 혼자 자는 방에 숨어 있던 남편도 결국 잡히고 말았다.
경찰서에 갇힌 남편이 걱정스러워, 간난이는 매일같이 날만 밝으면 읍내로 종종걸음을 치곤했다. 구속자 면회는 일체 금지였다. 유치장마다 이백 명 넘는 구속자들로 넘쳐났다. 유치장이 가까운 경찰서 울타리 밖에는 언제나 구속자 가족들이 잔뜩 모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거기에 서 있노라면 모진 고문에 못 이겨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들려 와 간난이는 그때마다 제 몸에 매가 닿는 듯 진저리치며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한번은 사람을 구워 먹는지 무서운 비명 소리와 함께 살 타는 냄새가 비릿하게 풍겨 와 그만 까무러쳐 버린 적도 있었다.
그 혹독한 신문은 결국 고문치사로 사람 셋을 잡아먹고 나서야 끝났다. 주동자급은 목포 감옥에 보내지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징역형을 받은 이십여 명 중에 시숙부도 끼여 있었다.
석 달 만에 풀려 나온 남편은 몸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뼈마디가 어긋나게 당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 길로 병석에 드러누워 버린 남편은 얼마 후 콩콩 밭은기침을 자주 해대더니, 피 섞인 가래를 뱉어 내기 시작했다. 폐병은 고문을 심하게 당한 사람에게 걸리기 쉬운 병이라고 했다. 폐병에 좋다는 닭엿, 마늘엿을 번갈아 고아 먹이면서, 간난이는 정성껏 남편의 병시중을 들었다. 남편은 비록 결딴난 몸이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병마를 이겨 내고 말겠노라고 했다. 마을 청년들이 문병 와서, 슬프고 막막한 심정에서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면 엄하게 꾸짖기도 했다.
“왜 한숨쉬나. 난 아직 죽은 송장이 아니여. 반드시 다시 일어날 거여. 자네들, 이 망가진 몸을 보면 솔직히 두려울 테지. 나도 잡혀서 저렇게 당하면 어떡허나 하고 용기가 쏙 들어가겠지. 그것이 바로 저놈들이 노리는 거여.”
미 군정 경찰과 섬 청년들 사이에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은 철이 바뀌어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우묵개 마을에도 거의 매일같이 경찰이 왔다. 현지 입대하여 미 군정 경찰복으로 갈아입은 서북청년들이었다. 그들이 무서워, 우묵개 청년들은 동만 트면 도시락 싸들고 한라산 쪽으로 피해 버리곤 했다. 산에서 칡넝쿨도 걷고 땔나무도 하고 이미 입산해 있는 청년회 간부들을 만나 얘기를 듣기도 하면서 하루 해를 보내다가 저녁에야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그 동안에 마을에 남아서 서청한테 시달려야 하는 여자들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억센 이북 사투리를 쓰면서 총구를 들이대는 그들은 왜놈들보다 더 무서운
정복자였다. 아들을 내놔라, 남편을 내놔라, ‘후원회비’란 명목으로 돈을 내놔라, 술 내놔라, 쌀밥 해내라, 전복 반찬 내놔라, 닭 잡아 내라. 아니, 닭은 저들이 사격술 연습한다고 직접 총을 쏘아 잡았다. 심지어 사람들한테도 함부로 총질하여 한번은 잠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마을로 떼지어 올라오는 것을 자기네를 공격해 오는 줄 알고 얼결에 총을 쏘아 한 여자를 부상 입힌 적도 있었다. 간난이 남편은 갈수록 병이 깊어져 서청놈들도 눈돌릴 정도로 벌겋게 각혈을 토하곤 했다.
이런 기막힌 사정은 다른 마을도 대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한두 달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 무서운 압박을 당해야 하나. 밭일도 고기잡이도 손놓아 버리고 허구한 날 산으로 쫓기던 젊은이들은 산에서 그들끼리 모이면서 차츰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입산자인 청년회 간부들이 나타나 그들을 지도했다. 침입자 서청을 몰아내고 마을을 지키자고, 더 나아가 점령군을 몰아내고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망국의 5·10선거가 바로 눈앞에 닥쳐왔다고, 남과 북이 각각 다른 정부를 세우려 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앉아서 죽느니, 서서 살자’라는 말이 온 섬에 유행하면서 마을 자위대가 잇따라 생겨났다. 대밭에서 죽창이 깎여지고, 땅속에서 왜군들이 파묻고 간 녹슨 총들이 발견되어졌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궁지에서 드디어 항쟁의 불꽃이 솟았다. 막다른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향해 덤벼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 단독선거 반대투쟁이기도 했다.
온 섬이 열화 같은 함성으로 가득한 가운데 세 선거구 중 두 군데가 선거 보이콧을 당했다.
드디어 군대가 출동하고 사태는 곧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이제 섬 젊은이들은 진압이 아니라 토벌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15세 이상 섬 젊은이라면 그물코나 꿰매고 밭고랑 수나 헤아릴 줄 아는 무식꾼일지라도 가차없이 토벌해야 할 폭도였다.
중산간 지대 이백여 마을이 불에 타면서 한라산은 살육의 피구름으로 덮였다. 수도 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 갔다. 남편 내놔라, 아들 내놔라 하더니 급기야는 입산한 남편 대신 아내가 죽어야 하고, 입산한 아들 대신 에미 애비가 죽어야 하는 잔혹한 대살(代殺)행위가 자행되었다. 젊은이가 있는 집은 그가 붙잡혀 죽어야만 남은 식구들이 안전했다. 입산도 두렵고 마을에 있기도 두려워 어중간한 곳에 피신한 청년들도 입산자로 간주되었다. 물로 갇힌 섬중이라 입산이 아니면 숨을 데가 없어, 어제 본 사람 오늘 없고, 아침에 본 사람 저녁에 없었다. 도처에 떼주검들이 늘비하고 핏물이 고랑을 파고 흘렀다.
병석에 누운 간난이 남편의 몸에서도 피가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각혈할 때마다 한 움큼씩 피가 쏟아져 나왔다. 밖에서 떼죽음의 소식이 들려 올 때마다 입산한 청년들이 마지막 한 사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싸우고 있다는 말이 들려 올 때마다 남편은, 싸우다 죽어야 할 몸이 방 안에 누워 헛된 피만 홀린다고, 흑흑 흐느껴 울곤했다. 몸 속의 피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검은 제복의 두 사내가 들이닥쳤을 때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나갈 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해놓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면도칼로 팔목의 동맥을 끊고 마지막 피를
흘려 버렸다.
두 사내가 먹이를 놓친 짐승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리다가 물러난 뒤 간난이는 시어머니와 함께 남편의 시신을 수습했다. 너무 놀랍고 무서워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삭정이같이 마른 시신을 자신의 흰 광목치마로 감싸고 가까운 밭으로 업고 가 가매장했다. 곡소리도 크게 못 내고 서러운 눈물을 자꾸만 안으로 삼켜야 했다.
그러나 저승차사들은 다시 찾아왔다. 싸락눈이 흩뿌리는 이른 아침, 난데없는 거친 군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어 젖혀졌다. 찬바람이 일시에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간난이를 지목하고 나오라고 했다. 간난이는 어린 아들을 부둥켜안은 채 부들부들 떨고 그 앞을 시어머니가 막고 서서 미친 듯이 허우적거렸다.
“우리 며누리 아무 죄도 없수다. 천부당만부당한 일, 사람 잘못 찾아왔수다. 죄라면 서방 잘못 만난 죄…… 아이고, 서방이 죽어 버렸는데, 또 무슨 죄가 남았수꽈? 기어이 데려갈 테면, 날 데려갑서. 그런 자식을 낳은 이 에미 죄가 더 크우다. 아이고, 제발 날 데려갑서.”
그러나 염라대왕의 명부에 이미 그녀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기상천외하게도 그것은 왜정 때 만들어진 경찰기록이었다. 칠팔 년 전 왜놈 조합서기들과 맞서 싸우다가 이십 일 구류 산 것이 기록에 올라 남편과 한통속의 사상불온자로 점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죄였다. 일제에 의해 불온분자라고 낙인찍힌 자는 해방된 땅에서도 여전히 불온분자였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왜놈들한테 대항한 것이 칭찬받을 일이지, 왜 죄가 되느냐고, 간난이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그러나 그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차디차게 비웃었다. 삼팔선이 그어진 때 우연히 이북에 놓여 스무 날 가량 머물렀던 것을 놓고, 나쁜 사상을 가지지 않았다면 왜 그렇게 오래 이북에 머물렀느냐는 것이었다. 삼팔선 넘을 때 조선인 통역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간난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이런 세상에 구차하게 목숨 붙여 살아 무엇 하랴. 간난이는 무서워 떨고 있는 어린 아들을 마지막으로 꼬옥 껴안아 주었다.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귀중한 일점 혈육……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이 에미는 이 세상 살 수 없어 저 세상 살러 간단다. 아가야, 부디 몸 성히 자라서 새 세상 보거라. 그리고는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태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저녁 무렵, 바닷가 눈 덮인 모래밭에서 간난이를 포함한 여덟 명의 우묵개 사람들이 일제히 불 뿜는 총구 앞에서 쓰러졌다.
(『마지막 테우리』, 창작과비평사, 1994)
2016년 4월 30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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