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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위대한 경영-2nd
윤동한의 이어지는 글이다. 전쟁에 관한 소문이 돌며 임진 4월 15일 술시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보낸 관문에 왜선 90여 척이 부산포를 향하고 있다고 보냈다. 이어 경상관찰사 김수가 보내 관문에 왜선이 400여 척으로 늘었다.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전라우수사에게 전황을 알리고, 조정에 출전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담당 지역을 벗어나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 26일 “물길을 따라 적선을 요격하며 적으로 하여금 제 뒤를 돌아볼 염려가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란 선조의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일본군의 규모 400척에 비해 전라좌수군 전력은 절대 열세였다. 녹도 만호 정운이 찾아와 “전라우수영 군대는 오지 않고, 만약 기회를 늦추었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라며 출전을 건의했다. 5월 4일 동이 트자, 경상도를 구원하기 위해 85척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경상우수군을 만나기로 한 장소 당포에 도착하니 경상우수군은 보이지 않았다. 6일 원균의 우수군이 왔는데 판옥선 4척이 전부였다. 다음날 가덕도에 일본군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함대를 출전시켰다. 함대 이동 시는 정찰부대를 운용하며, 척후장은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이 맡았다. 옥포만 안쪽에 일본 수군의 전선을 확인했다. 30척을 정박시키고 마을을 약탈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한마음으로 전투에 임한 조선 수군은 포위하여 총통과 화살을 날렸다.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숨었다. 멀지 않은 바다에 일본 전선 5척이 지나가자 여러 장수가 쫓아가자,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숨었다. 적선 5척을 불태웠다. 수색 중 고성 적진포에서 적선 13척을 발견했다. 적선을 모두 불태웠다. 세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조선 수군은 사기가 승천했다. 임금이 관서로 피난했다는 소식에 분한 마음을 달래고 후일을 기약하며 여수 본영으로 돌아왔다.
6월 3일까지 여수에 도착하라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에 연락했고, 휘하 좌수군은 언제라도 출전할 준비를 시켰다. 경상우수사 원균에게서 급보가 왔다. 적선 10여 척이 노량으로 이동했다 내용이다. 사천 선창을 보니 일본군이 산기슭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공격하여 전선을 불태우려 했지만, 썰물로 물이 빠져서 판옥선이 들어갈 수 없자 싸우는 척하면서 퇴각했다. 함대가 후퇴하자 적은 언덕 아래에 모여서 총을 쏘며 기세등등했다. 그러는 사이 바닷물이 들어와 판옥선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거북선을 먼저 투입해 총통을 쏘며 적을 혼비백산시켰다. 뒤이은 판옥선에 일본군은 싸울 의지를 잃고 수풀이 우거진 산으로 도망쳤다. 작은 소선을 몇 척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불태웠다. 6월2일 아침에 당포에 적선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달려갔다. 적선 21척을 확인하고 거북선을 먼저 들여보내고 판옥선이 뒤따랐다. 애타게 기다리던 이억기의 전라우수영이 판옥선 26척을 끌고 왔다. 전력이 단숨에 2배로 증가했다.
당황포에 일본 전선 26척이 정박해 있었다. 외해에서 일본군이 올 것에 대비 당황포 입구에 전선 4척을 배치한 후 함대를 이끌고 진입했다. 철저한 자기 방어술이자 위기관리 대책이다. 승기를 잡은 이순신은 적을 몰아붙이면 적이 산속으로 도망갈 것을 염려하여 포위한 한쪽은 일부러 열어 두었다. 적을 바다로 끌어들이는 유인책이다. 포위망이 열리자, 일본 수군은 노를 재촉하여 탈출을 시도했다. 적선이 바다로 나오자 기다리던 거북선과 판옥선이 사방에서 포위하여 적선을 불태우고 머리 43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선 한 척을 남겨두고 당항포 입구로 나와 밤을 보냈다. 새벽에 일본군이 올라 탈출을 시도하리라는 것을 방답첨사 李純信이 예견한 것이다. 李舜臣은 부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은 배를 이용하여 도망치려는 적을 궤멸시켰다. 7일 오시에 영등포 앞바다에서 일본 전선 7척이 부산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고 추격하여 분멸시켰다. 4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조선 수군은 10일 진을 파하고 각자의 본영으로 복귀했다.
이순신은 늘 자기를 낮추고 부하 장졸은 물론 어부와 항왜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모든 소리를 즐겨 들었다. 그 첩보들이 정리되고 긴요한 정보로 해석되면 곧 이순신 함대의 작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6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 진출하니 목동이 알려준 대로 적선 73척이 견내량에 있었다. 견내량은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대규모로 들어가 싸우기 어려운 곳이다.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하면 육지로 도망갈 수 있다.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모두 수장시키기로 했다. 판옥선 6척을 들여보내 싸움을 걸었다. 적이 닻을 올리고 일제히 앞으로 나오자, 조선 수군은 거짓으로 배를 돌려 외해로 도주했다. 일본 장수 ‘와키자카’는 두 달 전, 용인 광교산 전투에서 1,500명 기병으로 조선군 약 5만을 일거에 무찌른 경험이 있어 조선군을 얕잡아 보던 차였기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외해로 도망하는 판옥선을 쫓아 나왔다. 적이 한산도 넓은 바다에 도달한 순간 이순신은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라“ 명을 내린다. 판옥선이 선두 적선 3척을 쳐부수었다. 화포에 기세가 꺾인 일본 수군이 물러나 도망가기 시작하는데, 기세가 오른 조선 수군은 앞다투어 돌진하며 각종 총통을 쏘아붙였다. 적선 59척이 차례로 불길에 휩싸이고 순식간에 적이 제압되었다. 한산도대첩은 그렇게 승리를 거두었다. 9일 아침 탐망꾼이 와서 ”안골포에 적선 40척이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학익진으로 안골포에 도착하니 적선 42척이 고기비늘처럼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안골포 역시 지형이 좁아 이순신은 외해로 유인했으나 한산도의 패전 소식을 접한 왜군은 일절 나오지 않았다. 여러 차례 공격하다 이순신은 갑자기 공격을 중지시켰다. 백성들이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데 만약 적선이 분멸한다면 백성에 분풀이할 것이 염려된다는 것이다. 포구 밖으로 배를 돌려 밤을 지냈다. 밤사이 적은 모두 도망가고 시체만 남았다. 조선 수군은 12일 한산도로 돌아오고 휴식과 군수품 보급을 위해 해산했다. 전라좌수군은 13일 여수로 귀대했다.
4차 출전, 8월 1일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과 협선 92척이 합동훈련을 했다. 경영자라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성급하게 서두르다 실패하는 수장이 얼마나 많은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여수의 전라좌수영에서 남해 전역과 부산포까지 모든 함대를 운용하기엔 지리적으로 너무 멀었다.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기로 결단했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1953년 하반기부터 굶주림과 전염병이 번져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선조실록에 삼 도에 사망자 1,904명, 앓는자 3,759명 모두 5,663명에 이르렀다. 줄어든 수군 병력 보충을 위해 두 차례 무과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항왜와 의병을 두루 끌어안아 민군 협조 체제를 만들었다. 군량을 준비하고 선박을 건조했다. 조정의 승인을 얻어 추진한 둔전은 모두 네 곳이다. 병사들과 목수들을 독려하여 전선을 늘려가 전함을 180척의 거대한 함대를 만들었다.
조선 수군의 강력함과 의병의 봉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결국 그는 갈라치기로 선조 조정과 이순신을 이간질할 전략을 세운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첩자 ‘요시라’를 경상좌병사 김응서에게 보냈다. 그는 자신의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가 어느 날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니, 조선 수군이 그 바닷길을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면 잡아 죽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첩자는 이중간첩이었다. 조선에 좋을 대로 이야기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자기에 유리한 대로 보고했다. 양국 수뇌부는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내칠 생각은 없었다. 이것이 간계라 판단한 이순신은 부산으로 출병치 않았다. 일본은 이순신을 유인해 전멸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왕명을 따르지 않은 이순신을 체포해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 대세였다. 이순신을 두둔해 줄, 류성룡은 지방에 있었다. 삼도통제사 원균에게 군량미 9,914석과 화약 4,000근을 인계하고, 이순신은 체포돼 의금부에 하옥된다. 도체찰사 ‘이원익’이 상소를 올린다. “순신을 살려 공을 세워 나라를 구하고 죄를 갚게 하소서“ 일흔이 넘은 ‘정탁’이 탄원과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가 선조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어렵지만 감옥에서 풀려나온다. 아들이 파직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여수 고음천에서 뱃길로, 고향으로 돌아오다 여든셋 고령에 배에서 사망한다.
두 번째 백의종군이 시작된다. 나이 쉰셋 때다. 27일의 의금부 옥살이를 견뎌내고 권율의 도원수부가 있는 합천 초계로 향한다. 원균의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궤멸했다. 명량해전이 벌어진 9월 16일까지 두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조선 수군의 재건을 이룩해 냈다. 칠천량해전의 일본 수군의 기록은 조선 수군 160척을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인 대승으로 기록하고 있다. 뛰어난 리더, 탁월한 경영자는 한마디 선언에 목숨을 건다. 동서고금의 지도자와 명장들, 지금 세계의 최고 경영자들 한마디 말고 대중을 울리고 웃기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순신은 임금과 조정, 백성의 마음마저 얻어낸 완벽한 경영자였다. 엄격한 신상필벌과 내부 결속을 다졌다. “해남 현감 류형이 적에게 붙었던 윤해와 김언경을 결박하여 올려보냈으므로 단단히 가두었다. 무안한감 남언상은 가두고 전선에 구금했다. 우수사가 말하기를 김득남을 처형했다고 말했다.” 난중일기 10월 22일 내용이다. “적에 붙었던 정은부와 김신웅, 왜놈을 시켜 우리 사람을 죽인 자 두 명과 선비 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을 무도 목 베었다.” 10월 30일 일기다. 하삼도 모든 배는 관청 배든 개인 배든 가리지 않고 통행첩을 발행했다. 통행첩이 없으면 간첩으로 보고, 통행할 수 없게 하니, 피난해 배를 타고 온 이들이 모두 통행첩을 받게 되었다. 배의 크기에 따라 쌀을 바치는데 큰 배는 석섬, 중간 배는 두 섬, 작은 배는 한 섬으로 했다. 모두 먹을 식량을 싣고 왔으므로 쌀을 바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도요토미의 죽음이 조선까지 알려지고 패색이 짙은 일본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명 연합군은 고금도에서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이날 밤 삼경에 공이 배 위에 꿇어앉아 하늘에 말하기를 ‘오늘 진실로 죽을 결심을 했습니다. 바라건대 하늘이시여 반드시 적들을 다 죽여주시옵소서’라고 했다”라고 한다. 이항복의 이 공 유사 내용이다. 그리고 11월 19일 새벽 싸움을 북돋우다 철환에 맞았다.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구나.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하마”라고 말한 뒤 세상을 떠났다. 관음포 앞바다였다. 이순신으로 인해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이 300년이나 미루어졌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로 정권이 교체되고 명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국기가 무너지고 기울었다. 스스로 야만족이라 부르던 청나라에 나라를 넘겨주고 명나라는 멸망한다. 조선은 지도부에 아무런 변화도 끌어내지 못했다. 다만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이 있어 못난 조선 왕가 외 지도층의 민낯, 그리고 전후 수습 과정을 살필 수 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6년 7월 15일
이순신의 위대한 경영-2nd
윤동한 지음
가디언 발간
첫댓글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감사합니다.
좋은 글
시원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