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서울대학교 우리문화탐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선운사
북한산 태고사 전경
◇고려 말 태고 보우가 도량을 열고, 조선 후기 북한산성과 함께 승영사찰로 변모
태고사(太古寺)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北漢山)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한국불교태고종의 종찰(宗刹)이다. 고려 말기 불교에 대한 폐단을 극복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던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가 인접한 중흥사(重興寺)에 주석하면서 개인의 수도처로 1341년(고려 충혜왕 복위 2)에 세운 사찰이다.
창건 후 보우가 5년 동안 머물렀고 중흥사의 동쪽에 위치한 이유로 동암(東庵)이라 불렀고 1382년(고려 우왕 8) 보우가 입적한 이후로는 그의 당호를 따서 태고암(太古庵)으로 고쳐 불렀다. 그러나 이후 조선시대 중기까지의 연혁은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보우가 창건 한 태고암은 고려의 왕조가 멸망하고 거의 폐허로 남아 있다가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승영사찰(僧營寺刹)로 다시금 변모한다. 당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중흥사에 머물렀던 승려 계파 성능(桂坡 性能, ?~?)이 옛 태고암 자리에 총 131칸으로 중건하여 산성의 수비를 담당시킨 것이다. 이때 태고사(太古寺)로 사액을 다시 걸면서 지금과 같은 이름을 얻었다. 1715년에 작성된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北漢山城禁衛營移建碑記)’에는 "보국사, 보광사, 용암사, 태고사 4사찰이 이 구역에 속한다(保國普光龍巖太古四寺屬焉)"고 기록해 당시 태고사의 역할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태고사는 북한산성 내 사찰에서 유일하게 영조(英祖, 1694~1776)가 하사한 어필(御筆)을 소장하고, 고종대에는 왕실의 책과 족보를 보관하는 등 왕실의 보장처 역할을 하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승군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세는 급격히 쇠락한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된 후 30개의 본산(本山)이 확정되면서 제1교구인 봉은사(奉恩寺)의 말사로 소속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을 겪은 전후로는 초가 하나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다. 그러던 1964년 청암스님(靑岩, 1912~2008)이 중창불사를 일으키면서 태고사의 법등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사찰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대웅보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건립되고 오늘날의 가람 모습을 형성하였다.
태고사 경내 전경, 京電하이킹, 경선전기, 1937년
◇불국토 경주 남산에 버금가는 수도권 불교의 성지 북한산에 위치하다
태고사가 자리한 북한산(北漢山)은 오랜 세월동안 형성된 기암괴석들로 강인한 위용을 자랑하며,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리고 가장 높은 세봉우리인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도 삼각산(三角山) 혹은 화산(華山)이라 부르며 신성시했다. 따라서 북한산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불교가 구심점이 되어 변화하는 시대의 정신이 담긴 다양한 층위에 유적과 유물을 남겼다.
568년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이 세운 진흥왕 순수비에는 북한산에 살고 있는 불교 도인을 기록하였다. 659년 백제와의 통일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을 위해 세운 장의사(藏義寺)나 신라 고승 의상(義相, 625~702)이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후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운 청담사(淸潭寺)도 모두 북한산에 위치하였다.
고려시대에 북한산은 삼경(三京) 중 하나인 남경(南京)에 속하고 왕들의 행차가 끊이지 않으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제8대 임금 현종(顯宗)은 재위에 오르기 전에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 964~1029)의 위협을 피해 신혈사(神穴寺)에 몸을 숨겨 목숨을 구했고, 1010년과 1018년에는 거란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태조(太祖)의 관을 임시로 옮겼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현릉(顯陵)으로 장례하였다. 제13대 임금 선종(宣宗)도 승가사(僧伽寺)에 행차하여 재물과 경례를 들였다. 이외에도 고려 초기에 활동한 법상종의 고승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境, 943~1034)도 삼천사(三川寺)에 주석하였고, 고려 말 태고 보우도 중흥사(重興寺)에 머물렀다.
삼각산 전경
조선시대에도 북한산은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인 중악(中嶽)으로 불리며 국가적으로 신성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왕실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사세를 유지하였다. 진관사(津寬寺)는 매년 수륙재(水陸齋)를 설행하였고, 그 유명한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는 아들의 무병과 장수, 그리고 자손의 번영을 위해 향림사(香林寺)에 나한탱화 200여 점을 봉안하기도 한다.
이렇듯 북한산은 역사적으로 왕실과 귀족 등 지배계층을 위한 불교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를 증명하듯이 마치 경주의 남산처럼 북한산도 불교적 색채가 가득하다. 현재 북한산 봉우리 중 불교적 이름이 남아 있는 봉우리는 영취봉(靈鷲峰), 석가봉(釋迦峰), 미륵봉(彌勒峰), 문수봉(文殊峯), 보현봉(普賢峯), 나한봉(羅漢峰), 의상봉(義相峯), 원효봉(元曉峰) 등 8개이다. 이 봉우리들은 수도권의 유일한 불국토였던 북한산을 상징하는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태고 보우 대선사 진영(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극락암 소장, 월주덕문작, 1955년)
◇태고 보우의 원융회통 가르침이 시작된 곳,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성지로 자리 잡다
고려 말 고승인 태고 보우는 1301년 9월 21일 출생하였다. 홍주(洪州) 출신으로, 부친의 성씨는 홍씨(洪氏), 모친의 성씨는 정씨(鄭氏)로 알려져 있다. 그는 13세에 출가하여 26세 때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고, 경전의 의미 등을 탐구하였다. 그리고 양평 용문산의 상원암(上院庵)에 들어가 관음보살 앞에서 12대원(大願)을 서원하였으며, 33세에는 감로사(甘露寺)에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고 게송(偈頌) 8구(句)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1341년 고려 충혜왕이 41세의 보우에게 삼각산 중흥사에 주석토록 하자 개인의 수행을 위해 중흥사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5년 동안 머물렀고, 46세인 1346년 원나라에 유학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알하였다. 당시 보우는 순제(順帝)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아 금란가사와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불자(拂子) 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특히, 보우는 평생 교와 선을 융합하여 원융회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인물로 주목된다. 그는 공민왕 5년인 1356년 왕사에 책봉되자 국왕에게 광명사(光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원융부는 ‘구산원융 오교홍통(九山圓融 五敎弘通)’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당시 사상적으로 분열ㆍ대립된 불교 종파였던 9산과 5교를 그는 임제선(臨濟禪)에 의한 9산선종(九山禪宗)으로 통일하여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현재 조계종에서는 태고 보우를 종조(宗祖) 또는 중흥조(中興祖)로 인식한다.
태고사 삽도(불교창간호, 1924년)
보우는 신돈의 미움을 받기도 하였으나, 공민왕과 우왕은 그를 높이 존경하여 16년 동안 왕사, 12년 동안 국사를 역임토록 하였다. 보우는 1381년 봄에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1382년 여름에 소설암(小雪庵)으로 다시 옮겨 머물게 된다. 그러다가 같은 해 12월 미질에 걸렸고, 12월 23일 문도들을 불러놓고 마지막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고 세수 82세 법랍 69세 나이로 입적하였다. 이때 국왕은 그의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한다. 태고 보우의 시신을 다비한 후 사리 100과를 국왕에게 올리자 시호를 ‘원증(圓證)’, 탑호를 ‘보월승공(寶月昇空)’으로 내렸다. 문도들은 그와 인연이 깊은 태고사를 비롯해 양산사(陽山寺), 사나사(舍那寺), 소설암(小雪庵) 등에 분사리하여 석탑, 승탑 등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근대기 조선 불교계의 대표적 잡지인 ‘불교(佛敎)’ 창간호(1924년 발간)에서 안진호스님(安震湖, 1880~1965)은 ‘태고암배관기(太古庵拜觀記)’에서 보우의 승탑, 태고암 전경, 태고암가(太古庵歌) 등을 소개하면서 한국 불교계 전통에서 그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시키기도 하였다.
태고사 원증국사탑비전 전경
◇태고 보우가 남긴 흔적 원증국사탑비와 탑, 그리고 2022년 부처님 오신날
현재 태고사 경내에는 창건주 태고 보우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탑비와 그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 남아 있다.
원증국사탑비는 태고사 경내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 편에 건립되어 있는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이 탑비는 귀부(비석 하단의 용 또는 거북형태의 석조), 비신(비석의 몸통), 이수(용의 형상을 한 비신의 머릿돌)를 모두 갖추었으나, 각각 다른 돌을 치석하여 짜 맞추었다.
이 작품은 귀부에 대한 전체적인 평면이 사각형을 이루고, 좌우 너비에 비해 높이가 낮아 귀부가 지대석에 달라붙어 움츠린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수도 구름과 용이 평면적으로 조각되어 양식의 간략화 및 형식화가 진행되었다.
비는 원증국사가 입적한 3년 뒤인 1385년(고려 우왕 11)에 세워졌으며, 글은 고려 후기의 문신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었고 글씨는 문신이자 명필로 이름을 떨친 권주(權鑄, 미상~1394)가 적었다. 원증국사탑비는 비신과 귀부로 구성된 고려후기 전형적인 탑비이며, 전체높이가 340㎝로 그 규모가 매우 크다. 한편, 비신 뒷면에 있는 음기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의 당시에 관직명이 기록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에 반해 원증국사탑은 태고사 북편으로 형성된 낮은 능선 상에 세워져 있다. 현재 원증국사탑비와 떨어진 탑전에 따로 모셔져 있는데, 오래 전에 도괴되어 무너져있던 것을 1980년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은 전체높이가 410㎝이며, 탑신폭이 87.5㎝로 그 규모는 매우 큰 편이다. 장대석을 이용해 만든 지대석 위에 기단을 비롯해 탑신과 상륜 등의 모든 부재가 갖추어져 있는데, 기단에 있는 사각형의 하대석과 원형의 탑신석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부재가 팔각형을 이루고 있어 고려시대에 유행하는 팔각원당형의 승탑 양식을 잘 따른다.
이 작품은 기단부터 상륜까지 사각, 팔각, 원형 등 다양한 형태의 부재들이 섞여 있어,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일관성이 없는 편이지만, 여러 단면의 부재들이 승탑의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후기에 건립된 승탑 중에서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건립 시기는 태고사 경내에 있는 원증국사탑비가 입적한 지 3년 후인 1385년에 세워졌으므로 늦어도 1385년 이전에는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몇 년간 우리들을 괴롭혀 왔던 코로나19가 2급 감염병으로 햐향되고, 사회 곳곳에서는 일상회복을 준비 중이다. 어김없이 올해에도 봄날은 왔다. 공교롭게도 다음 주면 부처님 오신 날이다. 태고사가 위치한 북한산은 수도권에서도 남녀노소가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따라서 이번 주말에는 수도권의 유일한 불국토이자 고승 태고 보우의 정신과 흔적이 남겨져 있는 북한산 태고사를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김수현 고양시청 학예연구사
태고사 원증국사탑비전 유리건판 사진(1910년대)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