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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全鎣弼)
별칭 호(號)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 옥정연재(玉井硏齋)
출생 1906년 7월 29일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구)
사망 1962년 1월 26일(55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 : 교육자, 문화재 수집가, 문화재 보존가, 저술가
국적 대한민국
학력 와세다 대학 법학부
경력 고고미술동인회 회장
활동기간 1930년 ~ 1962년
장르 고고문화재미술학
자녀 : 전성우(장남), 전영우(차남)
친척 전인건(손자)
김광균(사돈)
전형필(全鎣弼, 1906년 7월 29일 ~ 1962년 1월 26일)은 일제강점기때 대한민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 후 사비를 털어 대한민국의 문화재를 수집, 보존, 연구한 문화재 수집가이자 동성학원을 설립한 교육가였다.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을 거금을 주고 입수하여 잘 보존한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들을 되찾아오는데 앞장섰으며,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중에도 한국의 문화재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였다. 사후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을 비롯한 많은 훈포장을 추서 받았다고 한다.
보화각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으로 개편되었고, 2013년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전형필의 우리 문화재 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전형필 생애의 최대 업적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보존인데, 그가 잘 보관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준 덕분에 한글의 창제원리, 과학적 우수성, 독창성을 올바로 알릴수 있는 좋은 근거자료가 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현재에는 간송미술관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생애
초기생애
1906년 서울 한성부(현 종로구)에서 전영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천뢰(天賚), 호(號)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이다. 그의 증조부는 중군(中軍, 西班, 정3품) 전계훈(全啓勳)이며 그의 작은 아버지 전명기는 내부주사(內部主事) 및 참서관(參書官)을 지냈다. 전형필의 집안은 증조 때부터 배우개(지금의 종로4가) 중심의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대부호 가문이였다.
작은 아버지 전명기가 후손을 얻지 못하자 전형필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학창시절에는 외사촌형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와 교류하며 보냈으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국문학을 전공하고자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21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후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1919년에 작은 아버지 전명기(양부)와 맏형 전형설이 사망하고[4] 1929년에 생부 전영기마저 사망하자 가문의 많은 재산을 단독으로 상속받아 23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거부 40인'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그가 상속받은 부동산 중에 논의 면적만 헤아려보면 무려 800만 평이 넘었는데, 이는 여의도 면적의 약 10배가 된다. 이곳에서 매년 2만 석 이상의 쌀을 수확했다. 그 밖에도 밭과 상가, 상권등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문화재 보존활동
학업을 마치고 1930년, 일본에서 귀국한 전형필은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조선의 중요한 문화재를 수집해 나갔다. 당시 전형필은 문화재 수집과 보존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고서, 고서화를 취급하던 서점)을 인수하고, 우리민족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구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문화재 보존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스승이었던 춘곡 고희동과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의 영향이 컸다. 고희동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민족주의자였으며 전형필의 고교재학시절 미술 교사였다. 오세창과의 인연은 1928년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일시 귀국한 시기에 스승인 고희동의 소개를 통해 맺게 되었다. 이후 오세창을 자주 만났으며 그로부터 민족문화 수호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서화 골동의 감식안을 키울 수 있었다. 오세창은 한학의 대가이며 민족미술의 대계를 정리한 '근역서화징'의 저자였다.
1934년에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매입하여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했으며,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웠다. 1940년경에 김태준을 통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입수하였다.
기타 활동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홍사준(전 부여박물관장)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인 고고미술동인회는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회이다.
상훈과 추모
1962년 1월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8월 15일에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추서되었고, 1964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 2014년 10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또한 문화재청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2012년 12월 14일 전형필의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521호로 지정하여 지정 관리하고 있다.
1966년 보화각은 전형필 선생의 수집품들을 연구정리하기 위해, 전형필 선생의 유족들과 지인들에 의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으로 개편되었고, 간송미술관에서는 1971년 봄부터 '겸재전'(謙齋展)주제를 시작으로 2014년 가을까지 일년에 2차례씩 무료 일반공개를 하였다. 현재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간송컬렉션을 선보이고자 동대문디자인프라자&파크에서 간송문화전을 진행하고 있다.
일화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 1942년 경상북도 안동에 소재되어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은 원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김씨 문중의 가보였다고 한다. 세종이 광산김씨 문중에 여진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라는 것이다.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태준을 통해 전형필 선생에게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원에 넘겨주었다. 이용준은 판매가로 천원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문화재의 가치를 정확히 치르는 것으로 유명했던 전형필은 금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만원을 치렀다. 당시 천원이면 좋은 기와집 한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거간 노릇은 한 김태준에게는 수고비로 1천원을 주었다고 한다. 김태준과 이용준은 사회주의자였는데, 판매한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사용했다고 한다. 광복 후 김태준은 일련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했고, 이용준은 월북하였다고 한다.
광복후 해례본의 존재사실을 국문학계에 알렸고 영인본을 제작 배포하여 책의 내용을 공개하였다. 이로 인해 그동안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던 한글 창제 원리가 이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해 분명히 밝혀지게 되었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으며[9]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존 개츠비로부터 사들인 국보급 고려청자 20점은 모두 사십만원에 사들였는데 원래 제시한 가격은 오십만원 이상이었으나 전형필 선생의 문화재 사랑에 감동하여 판매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들이 전형필의 소장품들을 모두 가져가려 하자 포장을 맡아하던 소전 손재형과 혜곡 최순우가 이 핑계 저 핑계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였고 뜻대로 되지 않자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부러뜨린 척을 해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 전형필 또한 피난을 가지 않고 보화각 근처 빈 집에 숨어 소장품이 훼손될까 노심초사하였다고 한다.
경력
1906년 7월 29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4가 112번지에서 중추원의관 전영기와 밀양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 본관은 정선
1926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1930년 일본와세다대학 법과 졸업 / 귀국 후 춘곡 고희동 선생의 소개로 위창 오세창 선생과 교류, 문화재 수집시작
1934년 성북동 소재 북단장 개설
1938년 북단장 소재 사립미술관 보화각 설립
1940년 보성고보 인수, 동성학원 설립
1945년 보성중학교장 겸임
1947년 고적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피촉
1954년 문화재보존위원회 제1분과위원
1960년 고고미술 발간
1962년 1월 26일 서거
수상
1962년 대한민국 문화포장 추서
196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 추서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추서
참고 자료
이충렬 <간송 전형필> 김영사
지식채널e - 바보같은 남자, EBS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미술문화재단 공식블로그
외부 링크
[우리역사바로알기] 간송 전형필 이야기
[국립한글박물관] 간송 전형필의 문화재 사랑과 훈민정음 해례본
[KBS역사저널 그날] 국보를 되찾다, 문화유산지킴이 간송 전형필
[역사실험] 국보 70호 훈민정음해례본, 집10채 가격에 사들인 간송 전형필 (천상의 컬렉션)
간송 전형필 전기 저자 강연회
대한민국의 문화재 수집가 - 간송 전형필(全鎣弼)
본관 : 정선 전씨
자 : 천뢰(天賚)
호 :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 옥정연재(玉井硏齋)
출생 : 1906년 7월 29일
출생지 : 한성부 동서 연화방 중로계 이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4가)
사망 : 1962년 1월 26일 (향년 55세)
사망지 : 서울특별시
학력 : 어의동공립보통학교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법학 / 학사)
직업 : 교육자, 문화재 수집가, 문화재 보존가, 저술가
목차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한국의 교육자이자 문화재 수집가.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간송(澗松).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 등을 수집해서 이 땅에 남긴 인물.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에 위치한 간송미술관은 전형필이 1938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인 박물관이다.
2. 생애
1906년 7월 29일 한성부 동서 연화방 중로계 이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4가)에서 10만석 지기인 아버지 전영기(全泳基, 1865 ~ 1929)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2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전계훈(全啓勳, 1812 ~ 1890)은 본래 교서관(校書館:경서와 역사서 등의 인쇄 및 반포를 관장하는 관서)의 수장제원(守欌諸員)으로 근무하다가, 1872년 창덕궁 위장(昌德宮 衛將)·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877년 정3품 오위장(五衛將), 1885년 종2품 경상도 중군(慶尙道 中軍) 등을 지냈다. 작은아버지 전명기(全命基, 1870 ~ 1919)는 한성부의 가관(假官)을 전전하다가 1888년 종4품 부호군(副護軍), 1898년 경기관찰부 주사(京畿觀察府主事), 1906년 풍경궁 참서관(豊慶宮參書官) 등을 역임했다.
그는 이후 작은아버지이자 당숙인 전명기에 입양되었지만, 99칸 한 집에서 양부모와 양조부모까지 사는 관계로 양육은 그대로 친부모가 맡았다. 이 배경으로 훗날 양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하늘이 내린 백만장자, 어쩌면 억만장자가 되는데 전형필이 막대한 양의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24살 때 이러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서울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라잃은 백성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어라"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만 평생의 스승 위창 오세창을 만나며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일세."
전형필은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오세창이 건넨 '근역화휘'와 '근역서화징'으로 문화재를 감식하는 눈을 기른다.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를 시작으로 본격 우리 문화 유산을 수집하는데 헌신한다. 전형필은 1900년대 초부터 일본인들의 손에 흘러 들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우리의 문화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 붓기 시작한다. 고서화 수집의 전진 기지로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이후 고려 청자, 조선 백자, 돌로 만든 탑과 부도, 금동여래입상 등 보기 좋은 예술품을 지켜낸 것이 아닌 예술적 가치를 넘어선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혼을 지켜낸 것이다. 고려 청자의 대표작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국보 제270호) 등은 모두 전형필이 일본으로 팔려갈 뻔한 것을 거액을 주고 사들여 지켜낸 작품들이다.
1938년 서울 한복판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며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중 하나인 간송미술관이 세워진 것은 전형필에 의해서다. 설립 당시 오세창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이라고 이름붙였다.
1940년대 일제는 조선어 사용 금지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등 민족 말살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6월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판매자가 천원이라고 했지만 귀한 물건은 제 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집 10채 값인 만원을 주고 천원은 수고비로 주며 사들였고 한국전쟁 때는 몸에서 떼지 않은 채 지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귀한 것을 귀하게 보는 눈으로 먼 미래까지 보며 내 나라를 지켜낼 방법을 알았던 전형필이기에 기와집 400채 값으로 영국인 존 개츠비에게 고려 청자와 조선 청화백자 20점을 사고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 문화재 특히 혜원 신윤복의 그림 '혜원 전신첩'을 찾아온다. 1945년 광복이 되어서도 '고적 보존 위원'으로 피촉되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정리해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느라 박물관 개관은 뒤로 미룬다.
6.25 전쟁 때 북한군들이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등 국보급 문화재를 포장할 것을 명령해 도난당할 위기에 맞았으나, 문화재들을 일부러 늦게 포장했다고 했다. 당시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유물들을 평양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포장하라고 협박했는데, 북한군의 선전으로 인해 경계가 다소 약해진 것과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적은 점들을 고려해서 문화재 포장을 지연시켰다고 한다. 당시 전형필은 모처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등 가장 중요한 문화재 몇 점만 간신히 들고 은신하면서 지냈고 전형필이 소장한 문화재들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던 최순우, 손재형 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미 포장한 유물들도 이런저런 이유들을 갖다 붙이면서 다시 꺼냈다 포장하기를 반복하고 문화재를 나무 궤짝에 담아야 한다며 궤짝이 제작되기까지 시간을 끌었다고 하며 심지어 어느날은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기 했으며 허구한날 북한군에게 화이트 홀스 위스키와 우키요에, 춘화도를 주면서 경계심을 풀게 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이를 들키고 말았으나 고작 3일만에 서울이 탈환되면서 북한군들은 결국 문화재를 챙기지 못한 채 헐래벌떡 평양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다만 1.4후퇴 때는 어쩔 수 없이 적지 않은 소장품들을 놔둔 채 피난을 가야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적지 않은 유물들이 유출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전형필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자 전형필 본인보다 먼저 소장품들이 부산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풀려서 골동품상에 팔리고 있기도 했다고.
1953년 휴전 후 남은 소장품들을 정리하며 미술학자들과 함께 보다 규모있는 박물관을 구상하였고 아버지의 유언으로 현재 서울의 보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육 사업도 하였지만, 1959년 엄청난 재정 사고가 발생해 그 빚을 갚기 위해 가족들까지도 극심한 쪼들림에 시달려야 했다. 재단에서 빚을 갚지 못해 학생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아 돈을 댔다. 사실 서화와 도자기 몇 점만 팔았어도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았겠지만 전형필은 끝까지 자신의 문화재 수장품들을 지켜 낸다.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재단의 빚을 모두 갚은 후 갑작스레 들이닥친 병마인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져서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하다 1962년 자택에서 향년 55세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보성중고등학교 교정에서 영결식을 행하였으며, 장지는 양주군 노해면 원당리의 집안 선산이다. 행정구역이 바뀐 현대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431번지이다.
이후 보성중고등학교 재단법인 '동성학원'의 이사장직은 전형필의 후손들이 맡고 있다. 그 뒤 후손들은 선친 전형필의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 1966년 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그를 중심으로 간송 전형필 수집품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와 학문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971년 가을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품 전시회를 연다. 2018년 4월 6일 사망한 전성우 이후 새로 취임한 전인건 둘 다 간송 전형필의 후손이다.
3. 기타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선수 및 야구부장으로 활약했다. 참고로, 포지션은 1루수였다. 출처 이때 축구부장 박정휘, 미술부장 이마동과 함께 친하게 지내서 '삼총사'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특이하게도 친구들은 자기 적성과 맞게 직업을 가졌는데 전형필은 야구와 관련없는 쪽으로 직업을 가졌다.
-시인 김광균과 사돈이었다.
-부산에서 비슷한 활동을 한 석당 정재환 박사는 '부산의 간송'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의 소장품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며, 박물관 이름도 석당박물관이다.
-또 다른 기증가로 동원 이홍근(1900~1980) 선생이 있다. 살아 생전에 4,941점이나 되는 고려, 가야, 신라 등등 많은 문화재들을 전재산 바쳐가며 사 모았고 세상을 떠날 때 모조리 나라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덕분에 1980년대 국민학교 시절 교과서에서도 실린 바 있다. 이홍근이 기증한 문화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양 출신의 김동현 선생도 전형필 선생에 비견될 정도의 문화재 수집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금속 유물의 대가였으며, 대구의 오구라 다케노스케, 원산의 미요시, 군산의 미야자키 등의 일본인에게 유물을 사들이고 지켜내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김동현 선생의 생전 소장품 수백점 중에서 지정문화재는 국보 5점, 보물 4점이었으며, 대표적으로 국보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김동현 선생의 소장품은 생전에 고(故) 이건희 회장에게 기증한 관계로 현재 리움미술관에 소장, 전시중이다.
-비상교육 중학교 국어 3학년 교과서, 천재교육 중학교 영어 3학년 교과서에서 소개되었다. 2021년 고3이라면 간송 선생을 각종 교과서에서 6번 넘게 봤을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부자로서 편하게 현실에 순응해 잘살 수 있었지만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광복 후 교육에 힘썼다는 점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유명한 유일한 박사와 비슷하다. 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이며 일생에 비판할 점이 사실상 없어 후손들의 학교 교과서에 모범적인 인물로 실렸다는 점도 두 인물의 공통점이다. 차이라면 전형필은 문화계, 유일한은 기업계에서 헌신했다는 점이다.
-2010년 소설가 이충렬이 전형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쓴 간송 전형필이라는 전기 소설이 출간되었다.
-2010년대 이후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Go Go 카카오프렌즈 등의 학습 만화에 전형필의 업적이 소개되면서 어른들보다 초등학생들이 전형필의 업적에 대해 잘 아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공식적인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는 못하였다. 독립유공자의 선정 기준으로 수감 생활을 행하였다는 점이 강하게 작용하는데 전형필은 수감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전형필이 받은 공식 서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와 예술 발전에 기여한 이들에 수여하는 금관문화훈장(1등급) 뿐이다. 그나마도 2014년에야 추서하였는데 금관문화훈장의 훈격은 문화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등급으로 매우 높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말년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방학리(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지었던 옛집이 한때 소실되었다가 2015년 서울 도봉구청의 주관으로 복원되어 개장하였다. 현재 전형필의 종로 생가는 재개발로 소실되어서 유일하게 이곳에서 전형필의 생애를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형필의 묘소도 인근에 있다. 옛집 외에 간송미술관 바로 옆에 전형필의 직계 후손이 거주하는 집이 있기는 한데 이 곳은 후손들의 사생활을 위해 일반인들에게는 비공개하고 있다. 이 집은 엄밀히 말하면 전형필의 자택이 아니라 별장이었는데 간송미술관을 정식으로 세우기 전 문화재들을 보관하고 미술관 설립 활동을 하며 거주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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