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道 정자기행(3993)- 정자詩로 만난 인물-이재의(李載毅)
조선 후기 유학자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1772 영조 48 ~1839 헌종 5).
송환기(宋煥箕), 박윤원(朴胤源)의 문인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홍직필(洪直弼1776~1852),
다산 정약용(丁若鏞), 정조 때 시(詩)와 서(書)에 능하여 이름을 떨쳤던
사헌부 장령 능산 황기천(黃基天 1760∼1821),
곡성출신 심두영(沈斗永) 등과 교유했다.
1805년(순조5)에 봄, 그의 나이 34세 때 어머니와 함께
류정모(柳鼎模)에게 소학을 배우며 동문 수학한 당시
함평 수령으로 있는 동생 이재홍(李載弘)을 찾아갔다가
월출산(月出山), 강진(康津), 화순 동복(同福), 담양 창평(昌平) 등의
명승을 유람했다. 영암에 있을 때 달마산과 두륜산의 승경을 유람하며
지은 시문을 남유만제(南遊謾題)편에 남겼다.
이 시기 1805년(순조5)에 담양 창평의 환벽당(環璧堂)에서 정철의 후손이요
호남을 대표하는 재야 학자인 정재면(鄭在勉)과 교유했다.
이후 1813(순조13) 여름, 큰아들 이종영(李鍾英)이 영암군수로 있을 때
전남 영암에 기거하면서 강진, 배진(裴津), 영암, 해남 등의 사찰과 누정을 유람한다.
1814(순조14) 3월, 강진에 유배 온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과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에 창건된 만덕산(408m)에 있는 백련사라고
불렀던 만덕사(萬德寺)에서 만나 토론하고 시를 수창했다.
萬德寺 南遊時
萬德山中白蓮社 前臨海口納潮頭 洞天幽邃常靈籟 島嶼高低欲盡浮
拂袂遠來尋古刹 肩輿直上坐虗樓 雲嵐只恨黃昏近 擬待明朝更賞秋
이때 정약용과 각별한 관계가 있었던 초의선사와 같이이 했던 모양이다.
초의가 머물던 일지암(一枝庵)에서 읊은 시(次草衣禪新搆小庵韻)가
그의 문집 문산집에 남아 있다.
廬峰復續遠公緣 移錫尋眞別搆椽 十笏居堪藏貝葉 半升鐺可煑山泉
香燈照寂庭留柏 花漏談空塔傍蓮 鰲病鯨歸誰與伴 祖師來意問西天/文山集卷五
대흥사 내 표충사(表忠祠)에서도 시를 남긴다.
頭輪山下表忠堂 云是淸虗住錫鄕 玉鉢錦袈留往跡 况玆 宸墨又珍藏 / 文山集卷二
정약용과 주고받은 시집인 이산창화집(二山唱和集)이 있다.
이재의가 다산과 시를 주고 받은 시 10편을 장서각 수장고에서 발견되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정순우 관장이 다산의 새로운 친필
시편 10수와 함께, 최근 장서각이 발행한 한국학 학술지
‘장서각’ 14호에 소개하고 있다.
다산
소나무 단에 하얀 돌 평상은/바로 나의 거문고 타는 곳
산객이 거문고는 걸어두고 가버렸지만/바람이 불면 절로 소리를 내네
松壇白石牀 是我彈琴處 山客掛琴歸 風來時自語
문산
외로운 소나무가 절개를 안 고치니/은둔자가 이리저리 노니는 곳 되었지
그 곁에는 작은 단이 하나 있으니/이 맘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랴
孤松不改節 隱者盤桓處 傍有小壇築 此心誰與語
다산
연꽃앞이 진흙 속에서 솟아올라/물에 뜬 푸른 모습 작은 아이 주먹 같네
다른 꽃들 다투어 다 피고 나면/나를 보고 곱게 웃음 짓겠지.
荷葉泥中出 浮靑曲似拳. 待他花競綻 相對笑嫣然
문산
연꽃잎은 물을 뚫고 올라왔건만/붉은 꽃망울은 터질 생각 않았는데.
작은 개구리는 몸속까지 파랗게 / 단정한 모습하고 진종일 앉았구나.
蓮葉初穿水 紅酥未解拳 小蛙通體綠 終日坐端然
다산
물고기와 나는 둘 다 서로 잊었는데/누가 호천에서 우리를 보는가.
숨어도 또한 훤히 드러났기에/작은 섬을 난간처럼 둘러놓았네.
魚我兩相忘 問誰濠上觀 其潛亦孔炤 小島環如欄
문산
물고기는 스스로 즐거워하고/늙은이는 스스로 구경을 하네.
그러다 연못 빛 사랑스러워/ 조용히 돌난간에 올라본다오
魚以自然樂 翁以自然觀 且愛池塘色 幽幽上石欄
다산
도인이 흉금을 씻고 싶으니/한 줄기 신비의 샘물이라오.
산 사슴은 때때로 내려와서/물마시고 진흙에 발자취 찍고 가네.
道人欲洗襟 一脉神泉液 山鹿有時來 飮餘泥印跡
문산
담 장 밑 한 개의 둥근 샘 /돌 틈에서는 천년의 수액이 흐르고
사슴이 물 마시고 흔적은 남아있으나 / 호랑이 쭈그리고 있던 자취는 사라졌네
牆根一眼泉 石髓千年液 鹿飮有新痕 虎跑無古跡
다산
우거진 녹음은 곳곳에 가득하고/고요히 꽃 소식 바람 불어오네.
잠시 활짝 핀 작약 꽃을 보니/섬돌에 비친 꽃 빛 붉기도 하구나.
冉冉綠滿地 寥寥花信風 須看勺藥怒 一墀照天紅
문산
억새 풀 갖가지 색깔은/봄바람이 제멋대로 꾸몄나보다.
약초밭 노인에게 공손히 하례 하니/앳된 얼굴이 저물녘에 다시 붉어지네
林莣萬種色 管領獨春風 恭賀藥園叟 童顔晩復紅
다산.
끝없이 푸른 등나무 길에/지팡이 짚고 홀로 대에 오른다.
봄이 지나도 넝쿨은 뻗지 말게나/혹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蘿徑靑無際 携筇獨上臺 經春毋使蔓 或恐有人來
문산.
등나무 드리운 좁은 돌길이/꼬불꼬불 서쪽 대에서 멀지 않구나.
때때로 푸른 그늘 속에/적적한데 중하나가 찾아준다네
垂蘿細石徑 紆曲近西臺 時於綠陰裡 寂寞一僧來
사진=丁若鏞 賞心樂事帖
다산
조수는 출렁대고 바다 하늘 광활한데/외로운 돛단배는 돌아 올 줄 모르는 듯
또한 꽃다운 숲 아래를 보라/깃 드린 뱁새는 온종일 한가하다네.
乘潮海天濶 孤颿不知還. 且看芳林下.栖鷦盡日閑
문산
한 점 안개 속 돛단배. 갈매기는 파도위로 갔다 왔다 하구나
멀리서도 알겠다 배에 앉아 있는 사람/내 맘처럼 한가하질 못한 것 같구려.
一點烟帆色 鷗波去復還 遙知坐舟者 不似我心閑
다산.
늙은 매화나무 베어버린 건/ 어린 가지 푸른 눈을 보려고 했지.
가장귀 자리를 남겨 둔 것은 / 아마 술병 걸어 둘 속셈 아닐까.
斫却老梅樹 要見嫩梢靑 留下杈椏處 唯應挂酒甁
문산.
화나무 아래에서 미인을 보았더니/꿈속에라도 눈이 번쩍 뜨이네.
아 달이 지는 이 밤에/슬퍼하며 빈 술병만 대하고 있겠지.
梅下美人夢 夢中猶拭靑 也應月落夜. 怊悵對空甁
다산.
돌절구는 둥글기 동이 같아서/ 여덟 아홉 되는 충분히 들어갈 듯.
새롭게 복령 죽이나 먹어보려고/한가히 노승에게 찧게 하였지.
石臼團如盎 能容八九鍾 新謀茯笭粥 閒遣老僧舂
문산.
산 집에 깨끗한 절구 하나는/티끌 세상이라 곡식 찧는 일 없으니.
노토에게 영약을 던져준다면/예전처럼 달 속에서 찧겠지.
山家淸一臼 塵世冷千鍾 老兎投靈藥 依然月裏舂
다산.
화초 섬돌 곁에 대나무를 심었더니. 재빨리 꽃밭을 파고 들어버렸기에
때마침 새롭게 내린 비를 힘입어/소리나는 돌담 가에 옮겨 심었지.
種竹鄰花砌 侵花已走鞭 會蒙新雨力 移植響牆邊
문산.
장소 골라 어린 대를 옮겨 심어/봄이 오면 재배기술 시험하리라.
돌이 죽순을 억누를까 걱정되기에/ 작은 뜰에 붙여서 잘 보호해야지
得所移新竹 春來試赭鞭 猶嫌石壓笋 扶護小階邊
그는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특히 주역(周易)을 전공하였고,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다산 정약용과는 유배지에서 만남이 있은 이후로
1814~1839년까지 25년 동안 인성 논쟁이 활발하게 지속되었다.
다산 정약용과 이재의(李載毅)와 사단(四端), 맹자 해석을 중심으로
경학(經學)의 해석에 대한 대해 3년에 걸쳐 피터지게 논쟁하는 학구의 사이였다.
완도의 관음굴로 함께 들어가 끝장 토론을 벌렸다
그들은 어느날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達磨山) 서쪽 중턱에 있는
749년에 신라의 의조(義照)가 창건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고,
이듬해 만선(晩善)이 다시 지은 미황사(美黃寺) 누각에도 오른다.
路轉山腰入美黃 寺門遙挹海天長 捲嵐樹色來珍島 落日鍾聲出道塲
金字猶傳牛背軸 紙花常繞佛前香 瑰觀最冠諸名刹 凈界烟霞孰主張/文山集卷五
미황사 상수암(上峀庵) 次蓮潭韻
箇中淸景畵難容 誰識斯庵刱始功 晦老遐情遊鴈宕 遠師高躅住廬峰
境深古礎猶聞鳥 歲久喬松欲化龍 或恐時人已知處 故敎雲氣洞門封
達摩山
脫來塵劫不勝危 無數尖峰骨格奇 怳若達摩初說法 羣羣白衲列參差/ 文山集卷二
海月樓 次退漁韻
達摩山壓海門浮 地盡天南不盡流 卜夜登臨猶有恨 我來無月此高樓
極目風花似靄浮 怒潮聲壯尙衝流 島夷不復窺邊釁 曠感嵬勳獨倚樓
다른 생각을 가졌지만 서로의 세계관을 존중하며 교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지식인들의 고급스런 놀이는 시주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재의와 "그대가 한음정에 이르러 묵게 되거든 /
날 위해, 죽게 된 몸 이별이 아쉽다 말해 주소
君到漢陰亭上宿 爲言垂死惜分離"하며 지냈던 사이 정약용이 읊기를
소나무 단(壇)에 하얀 돌 평상은 / 바로 나의 거문고 타는(彈琴) 곳
산객이 거문고는 걸어두고 가버렸지만 / 바람이 불면 절로 소리를 내네...
松壇白石牀)(是我彈琴處) 山客掛琴歸 風來時自語
이재의도 수준 높게 감흥을 읊는다.
외로운 소나무가 절개를 안 고치니 / 은둔자가 이리 저리 노니는 곳 되었지
그 곁에는 작은 단(壇)이 하나 있으니 / 이 맘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랴
孤松不改節 隱者盤桓處 傍有小壇築 此心誰與語
1814년(순조14) 9월, 수일간 다산(강진)에 머물다
광주 무등산 서석대(瑞石臺), 입석대(立石臺) 등을 유람하고 고향을 갔다
오르는 길에 남원 광한루(廣寒樓)도 오르고 시를 남긴다.
大都會闢廣寒樓 形勝湖南第一州 過客登臨橫野色 飛仙消息杳雲愁
蛟龍城外山如拱 烏鵲橋邊水自流 得月方知眞面目 百年今夜見瀛洲
그의 문집 문산집 권11 부록(附錄) 다산문답(茶山問答)은
1814년 정약용과 만덕사에서 토론한 이후, 「맹자」의 사단(四端)과
사덕(四德)의 관계, 성(性)의 개념 등에 관해 3년여 걸쳐 나눈
7차의 왕복서신 중에 2~5차 서신으로 그들의 교류를 대변하고 있는 대목이다.
다상 정약용이 해배된 후에도 정약용과 함께 서경(經書)와 예서(禮書)를 읽고
토론하고 춘천으로 가는 물길을 오르며 승경을 구경하고
곡운(谷雲), 청평(淸平) 등을 유람하며 양가집을 오가며 학문적 교류가 지속되었다.
이때 였을까? 다산 정약용이 어느날 뱃놀이로 노닐면서 배 안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감흥을 나타냈다.
박식하고 고상 담박한 문산자(이재의)는 / 비밀한 기약이 청산에 있는지라
띳집 짓고서 몸소 농사지어 먹고 / 노 저으며 때로 한가함을 즐기네
博雅文山子 幽期在碧山 結茅思食力 蕩槳樂偸閒
예악은 마음에 두지 않거니와 / 산수(山水)는 얼굴을 향하기에 합당해라
이 길이 원래 자유자적함이니 / 백구(白鷗) 같은 흰 물굽이에서 묵으리
禮樂休牽戀 煙霞合駐顔 此行元自適 且宿白鷗灣 /歸田詩草 다산시문집 제7권
자신의 거처를 형제간의 우애를 읊은 시경의 당체(常棣)의 뜻을 취해
취화당(棣華堂)이라 하고 우애를 돈독히하며 지냈다.
그러나 65세 때인 1839년(헌종 5) 5월,
동생 이재형(李載亨)이 먼저 죽고 8월,
장남 이종영 마저 양곡(楊口) 유배지(謫所)에서 죽는다.
당체(棠棣)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인데, 형제가 화목하게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을 노래한 시로 “당체의 꽃이여 밝고 곱지 않은가?
지금 사람은 형제만 같음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그의 작품집 남유만재(南遊謾題)는 영암에 있을 때 달마산과
두륜산의 승경을 유람하며 지은 시축에 쓴 것이다.
지암정(芝巖亭)에서 읊은 시로 그의 내면의 세계를 들어다 보며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칮이 나선다.
냇가에 임한 방벽에 아침햇살 들어오니/기왓고랑 나무 틈새로 정자 깊숙이 자리했네.
무성한 꽃과 풀에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흐르는 물과 텅 빈 산은 예나지금 같구나.
朝日臨溪壁氣侵 瓦溝樹隙一亭深 萋萋芳草人何去 流水空山自古今
참고문헌=文山集卷四 完山李載毅汝弘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