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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다해 11월30일 화요일 [(자)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수도회] 철부지로 살아가는 행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11,1-10
† 복음 루카 10,21-24
◈ 오늘의 묵상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장차 올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를
서서히 알게 되는데, 그 출발점은 임금이었습니다. 훌륭한 임금을
기대하던 이스라엘의 희망이 점점 발전하여, 다윗 왕조가 완전히 무너진
다음에도 새로운 햇순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사야가 예고하는 메시아는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는
분입니다. 교회는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맹, 지식과 경외라는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에 효경을 더하여 성령 칠은을 고백합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를 지닌 메시아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올바른 재판을 하고, 억눌린
이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불의를 심판하기에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평화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평화는 정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더욱이 하느님에 대한 경외가
없으면 정의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 두려운 줄을 모르는
인간이 자기 힘만 믿고 횡포를 부릴 때 정의는 무너집니다. 불의가
힘없는 이들을 덮치는 세상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려면 사자가 여물을 먹어야 합니다.
사자가 염소를 잡아먹는다면 염소와 사자는 같이 지낼 수 없습니다.
힘을 내세우면서 평화를 말하는 것은 거짓과 위선입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기다리며 갈망해 온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시작됩니다. 그 나라의 완성을 희망하며, 우리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시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인지 아니면 세상의 것인지
2015년 다해 11월30일 월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0,9-18
복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8-22
사람들은 종종 건배사를 외치고 잔을 부딪친 후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그 많은 건배사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 힘들다.”
그러면 이 건배사를 거꾸로 말해 응답하면서 잔을 부딪치는 것입니다.
‘내 힘들다’라는 건배사를 거꾸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다들 힘내!’가 됩니다. 그래서 저 역시 종종 건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그럼 제가 말한 건배사를 거꾸로 대답해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말하면서 “내 힘들다!”라고 크게 외치지요.
힘들다는 말이 뒤집으면 힘내라는 말이 됩니다. 어쩌면 스스로가 느끼는
고통과 시련들도 이렇게 뒤집어 생각하면 정반대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바꾸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머물면서 힘들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과감한 결단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결단을
내려서 바꾸려고 시도한다면 바뀔 가능성이 생기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문다면 바뀔 가능성은 전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단의 순간은 인생을 바꾸고 역사를 바꾼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사람은 인생도 또 역사도 바꿀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그들 모두 갈릴래아 어부들이었습니다.
당시의 갈릴래아 어부들은 대부분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따라서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배와 아버지를 뒤로 하고
주님을 따랐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 안에서 참 진리의 길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우리가 과연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속된 욕망을 끊으면 많은 것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부를 가지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일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의 부를 경멸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세상의
부를 주님보다 윗자리에 두는 삶을 경멸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지금 당장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주님인지 아니면
세상의 것인지를.....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서로 도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에우리피데스).
성 안드레아 사도.
책임지는 사회
종종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식당에 가게 되면, 신발장 앞에 ‘신발 분실
시에 책임지지 않습니다.’는 식의 문구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발을 잊어 버렸을 때 어떻게 될까요? 경고장의 말처럼 가게 주인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일까요?
우리나라 상법에는 그렇지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손님의 동의 없이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방적인 경고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님이 신발을 잊어 버렸을 때 배상을 해줘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책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신발을 가지고
들어가도록 하던가, 아니면 열쇠가 있는 신발장을 비치하는 것 등의
적극적인 방법 등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왜 ‘신발 분실 시에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경고 문구를 굳이 써 놓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경고 문구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질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떤 가게에서는 다른 가게와는 다르게 이런 글을
신발장 앞에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신발 분실 시, 책임지겠습니다.’
손님의 편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서 사람들이 더 많이 이 가게를
찾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거짓말까지
더하면서 책임 없음을 분명히 하려고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책임지려는
사람이 더욱 더 신뢰를 받는 세상이 아닐까요? 즉, 이제는 책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각종 핑계와 거짓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 있게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발 분실 시 책임을 지겠다는 문구.
◈ [수도회] 철부지로 살아가는 행복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다해 12월1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루카 10,21-24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드리나이다.”(10,21)
철부지로 살아가는 행복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인
메시아 위에 주님의 영, 곧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이 머물게 될 메시아 시대를 노래합니다(11,1-2). 그 시대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왔고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유다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잘 모르거나
알면서도 잘 지키지 않는 무식한 철부지들인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신 하느님께 기쁨 가운데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루카 10,2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신뢰와 존경을 드러내시고,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 고백하며 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10,21).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주도권을 인정할 때 순수하고 참된
감사가 우러나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0,21)
하시며 당신이 행하신 모든 업적을 하느님께 돌려드립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0,22).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알아보지 않고서는 행복을
누릴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들에 비추어 삶을 성찰해봅니다. 지식정보 시대인
오늘날처럼 수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유익하고 필요한 것처럼 보여도 탐욕과 타락을
부채질 하는 정보도 많고, 왜곡되거나 그릇되고 거짓된 정보들도
넘칩니다. 이런 지식들이 진정 하느님을 보는 눈을 열어주고 사랑의
지혜를 깨우쳐주지 못합니다. 영적 지혜도 자기만족과 이득을 얻는데
악용되기도 합니다.
마치 환자가 인터넷에서 본 의학상식과 정보를 가지고 의사에게 따지듯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두뇌 게임’을 하거나, 하느님의
힘이 아닌 세상 지식에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찬찬히 되짚어
보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더 열심히 추구해야 하는 건 하느님을 아는
지혜임을 상기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려면 참으로 그런 세상의 지식들을 내려놓는
무장해제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3,19) 하느님 앞의 철부지란 성
프란치스코처럼 복음 말씀을 해석 없이 단순하게 받아들여 철저히 사는
그런 순수함을 지닌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 사람은 자신이나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살기에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리는
메시아의 시대를 '지금, 여기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철부지들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며, 자신이 행하거나
이루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도구삼아 이루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를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행하시므로, 어떤 순간에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길 줄 아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한 철부지일 것입니다.
머리속을 채우는 지식과 경험의 껍데기 속에 갇힌다면 번민과 걱정
근심, 그리고 욕망의 회오리에 휩싸이고 말 것입니다. 세상 지식 뿐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교만은 더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10,23)라는 예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행복한
철부지가 되어 주님을 기다리지 않으시겠습니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다해 12월1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1-24)
모두 행복한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잎이 다 떨어진 가지 사이로 성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우리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언지를 여쭈어 볼
우리의 예수님이 계셔 우리는 행복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우리 마음안에 있음을 먼저 깨닫게 됩니다.
행복은 사랑의 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행복은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맡겨드려야 볼 수 있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행복은 제자들처럼 맡겨드릴 때 행복해지는 삶의 순간순간들입니다.
행복은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철부지들의
가슴뛰는 심장속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지금 정녕 행복하신지요?
행복은 생명에 대한 새로운 길로 초대하며 그 새로운 길위에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다시 사람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바라봅니다.
행복은 예수님을 우리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과 마주하는 기쁨이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다해 12월1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루카 10,21)
올해의 마지막 한장 남은 달력을 시작합니다.
이 마지막 한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하였는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 답을 주시네요.
"주님의 영 안에서 즐거워하라."
그냥 희희낙낙 웃고 떠들며 지내라는 건 아니겠지요.
주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라고 하시네요.
이러한 영 안에 머물러 살면 얼마나 흐뭇하고 즐거울까요.
그러나 욕심부리지 말고 하루에 한가지 영 안에서만
살려고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그리하여 12월 한달이 주님의 영 안에서
즐거워하며 보내는 그런 달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아무나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무나 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무나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게 될 것이니 참으로 즐겁고 흐뭇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서울] 대림 제1주간 화요일
2015년 다해 11월30일 화요일 [(자)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 10,21-24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것을 아름다운 노래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용실에서 일하는 분들을 보아도 부럽습니다.
그분들은 가위로 아름다운 머리모양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는 경기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물리학자는 세상의 이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가 아픈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아이 어머니의 생각이 온통 아이에게 가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을 보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언젠가, 동창 신부가 메일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우주에 설치된
전파 망원경에서 보내온 사진들입니다. 별, 은하, 은하단의 모습입니다.
이제 막 형성되는 별, 은하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너무 멀리
있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볼 수 없지만 별, 은하, 은하단은
분명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작아서 볼 수 없지만
전자 현미경을 통해서 우리는 작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몸에도
수십조개의 세포들이 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세포, 핵, 분자,
원자, 전자, 양성자의 세상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들이 꿈꾸지 못했던 세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전쟁, 폭력, 욕망, 갈등, 분열, 시기심, 원망, 분노로 가득한 것 같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치 작은 씨앗 속에 커다란 나무가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땅을 파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는 농부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어린이와 늑대가 춤을 춘다는 생각,
사자와 염소가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알코올 중독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폭력과
폭언을 일삼던 형제가 온순하게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만과
불평이 가득했던 사람이 웃음을 보이고, 용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지
모릅니다.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지
모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사랑의 눈으로 보면, 희망의 눈으로 보면 욕망과
분노로 가득차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만을 추구해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우주에서 지구는 먼지보다 작습니다.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서 사람은
또 먼지 보다 작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모으려고 하듯이 나도 이 사람들을
모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해 주소서.’
“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이사야 예언자도 바로 그 사람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시고,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는 신앙인들
2015년 다해 12월1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집을 리모델링하는 것보다 아예 새 땅에 새로 짓는 게 더 쉽습니다.
병이 난 다음에 고생하는 것보다 미리 개선된 삶을 사는 게 낫습니다.
범죄자를 잡아 감옥보내기보다 소박한 생활에 젖어 사는 게 낫습니다.
나이 들어 슬기롭고 지혜롭기보다 내려놓고 버려 소박한 게 장합니다.
아무리 잘나고 힘 있다 해도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는 무력자체입니다.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는 신앙인들은 아기처럼 살기에 행복해질 겁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볼 것을 보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다해 12월1일 화요일 [(자)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 10,21-24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을 수 있는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기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상상을 다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데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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