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편적 구원의 서정
Nicolaus Ludwig Graf von Zinzendorf(1700-1760)는 독일 Dresden의 작센(Saxon) 選帝侯 고관 집에서 출생했습니다. 選帝侯(Princeps Elector)는 그 권력이 막강했습니다. 신성Roma제국 황제를 선정하는 선거인단입니다. 選帝侯는 伯爵, 公爵, 大公들이었습니다. 위계상 신성로마제국의 봉건제후들 가운데 왕 또는 황제 다음이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경건한 외할머니 손에서 경건훈련을 받았습니다. 엄격한 경건주의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습니다. 비텐베르그에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1721년 드레스덴 선제후의 사법자문위원이 되었습니다.
1722년 외할머니로부터 베르텔스도르프(Bertelsdorf)의 넓은 땅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피난길에 나선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정착지로 살게 했습니다. 1726년에 이르러서는 300여 명의 모라비안 교도들이 정착했습니다. 후에 ‘주님의 보호’라는 ‘헤른후트’의 독일 지명이 되었습니다. Zinzendorf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자각했습니다. 그래서 헤른후트를 국내외에 선교할 그리스도의 군병을 양성하는 훈련소로 삼았습니다.
그 후 1731년 덴마크 왕 크리스천 6세(Christian Ⅵ, 1730-1740년) 대관식에 참석했다가 덴마크 령인 서인도와 그린랜드 주민을 만났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귀국 후 선교열에 불탔습니다. 이때부터 서인도 제도 선교사(1732년), 그린랜드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1733년). 이 일은 세계 선교에 무지하던 당시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모라비안 교도들은 누구라도 구두 한 켤레만 준비되면 당장이라도 선교를 떠나겠다고 헌신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센 정부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진젠도르프는 작센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서부 독일로 갔다가 다시 베를린으로 갔습니다. 1741년 12월부터 1743년 사이에는 미국 조지아, 펜실베니아 등지에서 원주민 선교를 위해 8개의 학교를 세우고 모라비아 운동본부도 설립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을 통해 모라비아 교회는 프러시아(1742년), 영국(1749년) 등에서 훌륭한 교회로 인정받았습니다. 작센 정부도 진젠도로프의 추방령을 취소하고 귀환을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재산을 선교에 사용하여 거의 파산 상태였습니다. 육신마저 쇠잔해졌습니다. 진젠도르프는 말년에 영국에 거주하다 60세를 2주 앞두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8년간의 활동을 통해 226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19세기에는 유럽에 15개의 선교기관이 설립되었습니다. 모라비아 교회는 20세기 초반까지 세계 14개 나라에 3,000여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다고 합니다. 진젠도르프는 귀족다운 귀족이었습니다.
창세기38장은 sandwich장입니다. 37장과 39장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유다의 이 이야기를 넣었어야 할까? 굳이 넣지 않아도 될법한데 넣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중요해도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전13세기 팔레스타인에 대전투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만큼 큰 전투였습니다. 당대 중동의 강대국 헷 왕국과 이집트가 므깃도에서 대전투를 벌렸습니다. 이 당시 역사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동의 대전투보다 유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저자가 쓴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전쟁이야기보다 유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이야기하고,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가 끝날 때 요셉의 이야기로 넘어가다가 유다의 이야기가 갑자기 나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끝날 때는 창세기가 끝납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저자 모세는 이 부분에 유다의 이야기를 선택적으로 서술했습니다.
히브리서7:14을 보면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 주님께서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서도 하필 왜 유다일까? 유다의 계보로부터 그리스도께서 나신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창세기49:8을 보면 야곱이 유다를 축복합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 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8장을 보면 우리 보기에도 유다는 그 말씀을 받기가 상당히 부담이 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38장에 의하면 유다의 부끄러운 부분이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여느 나라들이 배출한 좋은 귀족 같이는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initial은 야곱의 아들 유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조상인 유다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납니다.
유다는 자신의 형제들을 떠나서 가나안의 친구인 히라를 찾아갑니다.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야기됩니다. 유다는 자기 형제들과 같이 있어야 했습니다. 물론 유다가 야곱의 집을 떠나 아주 멀리 가버린 것은 아닙니다. 후에 애굽에 내려갈 때 같이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이 유다가 자기들의 형제에게서 ‘내려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썩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능동적으로 내려갔다.’입니다. 팔레스틴의 고원지대는 서쪽으로는 지중해에, 그리고 동쪽으로는 해면보다 훨씬 낮은 깊은 열곡인 아라바하(Arabah)에 접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는 어느 곳을 여행하든지 위로 가거나 아래로 가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지리상의 중심지이므로, 여행자는 “올라가거나”“내려가거나”입니다. 그런데 내려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명성의 신분을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말은 언약을 맺지 않은 백성들 사이에서 거주하기 위해 약속의 땅을 떠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유다는 심히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의 잘못은 가나안에 내려간 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여자와 결혼까지 한 것입니다. 수아(富有)라는 유력한 가나안 사람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엘/r[e/‛ēl(자각하는)과 오난/@n:/a/’ônân(힘센)과 셀라/hl;ve/shēllâh(청원)를 낳았습니다. 유다는 셀라를 낳을 때 유다는 byzIK]/khĕzîb/거십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성의 이름이 이상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십은 “속이는, 실망시키는”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십이라고도 하고 거십이라고도 하며 고세바라고도 합니다. 거십은 아둘람에서 멀지 않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 성읍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악십(속이는자)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미1:14).
장자 엘이 다말/rm;T;/thâmâr(종려나무)을 신부로 맞습니다. 유다의 아내 이름은 수아의 딸로만 그칩니다. 그런데 유다의 며느리는 다말이라고 이름을 밝힙니다. 어쩐 일인지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악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죽이실 만큼 악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악을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다고만 했습니다. 죽어 마땅한 악을 유다의 장자인 엘이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난이 죽습니다. 죽을 이유는 계대혼인을 거부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兄死娶嫂制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자손을 보존하기 위한 혼인제도입니다. 형이 죽은 뒤 동생이 형을 대신하여 형수와 혼인하는 풍습입니다. 그런데 오난이 자기아들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본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오난의 이러한 행동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했습니다. 엘과 오난은 어떤 죄를 저질렀습니까? 여호와보시기에 악했습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엘과 오난이 죽으면 당연히 계대결혼의 예에 의해서 셀라와 다말이 혼인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생각에 다말과 혼인하게 되면 모두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셀라는 아직 어렸습니다. 그래서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친정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잘못은 엘과 오난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다말이 누명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유다의 생각이 상반되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집안에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엘이 악해서 죽었습니다. 다음으로 오난과 동침했습니다. 그러나 오난이 악했습니다.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 죽음이 여호와로부터 나왔습니다. 다말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다말을 의심했습니다. 다말한테만 가면 모두 죽는구나, 이것 큰일이다. 그래서 셀라를 다말에게 준다는 것은 생각을 달리 했습니다.
유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형제들에게서 가나안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내려가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누가복음10:30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여기 ‘내려간다.’는 말이 신학적인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확대해석하자면 교회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것입니다. 유다가 어디에 거합니까? 가나안땅에 거하며 가나안의 여자와 혼인을 합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진군하기까지는 가나안의 죄가 관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가나안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약속의 땅입니다. 하지만 가나안사람들과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유다는 가나안 사람과 사귀었습니다. 사귀는 것을 넘어서 자신도 혼인을 했고, 아들도 가나안 사람과 혼인을 시켰습니다. 심각한 일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유다가 왜 거십이란 곳에 있다고 했습니까? 유다의 이름은 “찬송한다.”라는 뜻입니다. 왜 “찬송”이 “실망시키는”이란 뜻을 가진 ‘거십’에 있습니까? 성경저자는 어떠한 message를 전하려는 것입니다. 왜 유다가 ‘거십’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유다는 현재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있습니다. 떨어져서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도원에 가서 수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라는 가나안에 갔습니다. 성도가 nightclub에 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을 묵상할 시간이 없습니다. 주간 낚시, 야간 dancing하느라 바쁘고, 등반하기에 바쁘며, party 하기에 바쁩니다. 일주일의 schedule이 꽉 찼습니다. 이것들로 인해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묵상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가나안의 여인과 혼인하고 아들들까지 혼인을 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벗어나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굉장히 먼 거리인 가나안 땅에 와서 거하였습니다. 이삭은 ‘가나안’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가나안에 거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의 땅임을 족장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족속과 사귀거나 통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의 풍습은 따라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가나안의 딸과 결혼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까지 세 명이나 낳았습니다. 참으로 형통한 것 같았습니다. 내리 아들을 세 명이나 낳았으니, 유다에게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았는데 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는데 형통합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교회도 다니지 않는데 우리 집보다 잘 됩니다. 아들딸들의 출세로 잊어버릴만하면 사람의 통행이 많은 곳에 현수막이 걸립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집이 오히려 잘되어야지, 어떻게 저 집이 잘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5:19-21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겐족속, 그나스족속, 갓몬족속, 헷족속, 브리스족속, 르바족속, 아모리족속, 가나안족속, 기르가스족속, 여부스족속의 땅을 주신다 하셨습니다. 가나안의 열 족속의 땅을 주신다는 이유는, 가나안을 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들을 멸망시킵니까? 가나안의 남자들은 모두 무당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은 신전의 창기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을 멸망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 땅의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폭탄을 들고 불씨가 있는 곳에 뛰어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위를 보는 삶이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自敍傳이란 어떤 사람의 자신의 생애를 기술한 전기입니다. 자서전은 저자-화자-주인공이 같습니다. 자서전은 분량에 어떠한 제약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방식에도 기준이 없을 만큼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솔직한 서술은 자서전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조건입니다.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왜곡시켜야 할 사항들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유다 등이 위대하지만, 숨기고 싶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숨길 수 있었으면 숨겼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도 숨기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과오가 성경에는 적나라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왜 모세는 유다의 치부를 드러냈습니까? 유다의 치부를 샅샅이 드러냅니까? 보편적인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보편적이지, 특수한 사람들만을 위한 구원은 아닙니다. 소위 말해서 élite들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교회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교회는 그 지역에 산다고 다닐 수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선 이 교회를 다니려면 golf를 쳐야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자격심사가 있습니다. 최소한 장차관을 했던 사람이어야 하며, 그에 상당한 급이 되어야 한다면 이런 교회에 우리들이 갈 수 있습니까? 절대로 갈 수 없습니다.
구원의 요람인 교회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의 권위 아래 살아가는 성도들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A.D.70년에 멸망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테두리 안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생존의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보존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성령님에 의하여 진로를 결정해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생각에 구원은 유대인을 위한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 사건을 통하여 모든 민족적인 울타리가 허물어졌습니다. 이방인들도, 죄인들에게도 구원이 임했습니다. 유대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초민족적이었습니다. 다인종적인 신자들의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마28:19-20)을 순종하기 위하여 교회는 선교적인 기관이 되어야 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세상의 모든 나라들에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자 교회가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사도적인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항해 중에 나침판이 고장 난 것과 같았습니다. 교리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타락하는 성향이 급격하게 나타났습니다. 당시 세계 여러 지역에 있던 교회들이 순수한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으로부터 급격히 떨어져 나갔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엉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교리 면에서 잘못된 견해들을 신봉하였습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Pelagius적이고 사제 중심적이었습니다. Pelagius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구원받든지 말든지를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은총론 및 예정설의 내용을 변질시켰습니다. 또한 原罪를 부정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교회는 참된 교회를 규정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도들의 직접적인 계승자인 주교(bishop)는 안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주교는 교회를 다스리는 외형적인 기관장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주교들은 분명히 참된 사도적 전통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입니다.
2세기경 몇몇 교부들은 제도로서 주교구(bishopric)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카르타고/Carthage 주교였던 Cyprian은 주교들을 사도들의 참된 계승자들로 간주했습니다. 주교들을 재촉해서 “주교단이라는 단체를 만들게 했습니다. 따라서 Cyprian에게 있어서 신자란 주교에게 복종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Extra ecclesiam nulla salus
Salus extra ecclesiam non est
라는 격언이 생겼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성경적이지 않는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주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주교들이 답을 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교들이 성경에 대해서 해박했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서서히 특별한 교회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교회의 권력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성경보다 주교의 말을, 말씀보다 교황의 말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보편적이기 위해서 개혁을 해나갔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위기 때마다 磁氣disk를 돌리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잘못 갈 때 바로잡으셨습니다.
모세가 왜 유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어떤 message를 전달하려는 의도입니다. 모세가 왜 자기조상의 치부를 드러냅니까?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message를 전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창세기의 원저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유다의 치부를 드러내는 목적은 무엇인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1-6을 보면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인물이 나옵니다. 유다와 다말, 살몬과 라합, 보아스와 룻,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의 관계는, 도덕적으로 지역적으로 민족적으로 해석이 안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수치스러운 구절들을 넣으면서까지 거룩한 계보를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12:20-23절을 보면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고 하셨습니다. 헬라인들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성경의 2번 camera가 Hellas인들을 비추입니다. 여기의 헬라인들은 개종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많은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개종한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을 때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영광은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영광은 ‘죽음과 부활과 성령의 오심’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이방인이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24절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건물은 너무나도 화려합니다. 그 어떤 연주장보다 교회당이 더 많이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찬송가는 꾸밈 음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당은 꾸민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서 혹 보편적인 교회가 되지 않고, 특별한 교회가 되고 싶어서 한껏 특별해지려고 한다면 보편적인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28:18-20을 보면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복음은 민족적인 보편성에서 나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하게 하는 사역입니다. 이 사역을 온 세상 앞에 나타내는 보이는 공동체인 교회의 성격이어야 합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귀족 같은 생활을 누리라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교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universality)은 지리적이지 않습니다. 지역적이지 않습니다. 민족적이지 않습니다. 인종적이지 않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교회는 어떤 한 계층만 파고드는 사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년목회를 하는 중에 병원에서 오늘 내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청년목회를 하니까 내 소관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바로 가야 합니다. 청년목회 따로 노인목회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일꾼입니다. 동서남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역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갈 때까지 이 사역을 계속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Asia로 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행16:6) 바울사도는 성령님의 요구에 순응을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순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순응을 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성령님의 요구에 우리들은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유다의 약점을 말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입니다. 당대에 유다보다 행실이 좋게 보이고 더 성실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실 예수그리스도는 유다로부터 나와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나올 역사는 계속해서 알려져야 했습니다. 그 하나하나도 빠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유다의 고귀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수치만 폭로됩니다. 성경은 유다의 영광스러운 면만을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치에 휩싸이게 합니다. 이런 불명예가 대적자들에게 어떤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이 손상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움(ejkevnwsen/ekênȱsen)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영광에 기여를 합니다. 따라서 그의 영광은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면을 보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도 육신을 입으셨을 때는 영광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낮은 몸으로 사셨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조상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구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