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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1. 묵상글 (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 어울리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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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울리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사랑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오늘 주님께서는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바리사이들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울린다는 말을 가지고 오늘 축일의 의미를 성찰코자 합니다.
어울린다는 말에는 당신에게는 감색 또는 감색 옷이 잘 어울린다는 말처럼
무엇이 서로 조화롭고 좋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할 때도 격에 차이가 있지 않고 조화로움을 말합니다.
생김새나 신분이나 부 등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 때
우리는 그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잖습니까?
아무튼 주님께서 세관원을 제자로 부르시고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오늘 바리사이들이 비판하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그런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전혀 생각지 않으시고
그래서 같이 어울리고 한데 어우러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과 사랑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시조에 서로 다른 두 시가 있습니다.
“까마귀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가 흰빛을 샘낼세라.
맑은 물에 기껏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쏘냐.
겉 희고 속 검은 것 너뿐인가 하노라.”
이 두 시에서 바리사이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오히려 가서 어울리십니다.
교만은 차이를 얘기하지만
사랑은 필요를 얘기합니다.
교만은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 가지 말라고 하지만
사랑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만은 죄인과 어울리면 자기도 죄로 더럽힌다고 겁내는 것이고,
사랑은 자기가 더러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고 씻어주겠다는 것이며,
설사 내가 더러워진다고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하느님과 똑같음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 되어 오셨다고,
그렇게 당신을 낮추셨다는 취지로 필리피서 2장에서 노래하지요.
교만은 영적인 고고함에 집착하지만 실은 죄를 두려워 피하는 약함이고,
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죄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어울리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사랑을,
오늘 마태오 사도의 부르심을 통해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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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태 9,9)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우리의 잘난 모습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이나 봉사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 등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신명 7,7-8)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호의”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르심 받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애를 입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2)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타협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크신 자비요, 신의요, 호의였습니다. 용서요, 사랑이요, 곧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바로 이토록, 너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사랑과 호의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죄인이라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기에 앞서,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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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사랑의 의무 」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다른 너의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에 직면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 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 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러고는 사람들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오래전의 일인데 구상 시인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청중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세상이 지랄 같습니까? 사람이 지랄 같습니까?” 너무 적나라한 질문이었습니다. 이어서 “사람이 지랄 같아서 세상이 지랄 같아집니다.” 하셨습니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6,14-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총은 풍부하고 담을 그릇은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어서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사랑합니다.
@@ 정채봉 @@
진자와 가짜
진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들어 있고
가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장애물 경주
장애물 경주와 같은 것
출발보다 도착이 중요한 것
사랑의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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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5월에 저는 장례예배를 다녀왔습니다. 특별히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아는 분이 꼭 가야하는 자리이기에 함께 했습니다. 고인의 부인은 고인의 손에 묵주를 걸어 주었습니다. 저는 고인의 손에 있는 묵주를 보고 고인의 부인에게 위로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고 8월에 우연히 카페에서 고인의 부인과 아들 부부를 만났습니다. 고인의 부인은 저를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저는 장례예배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었는데 그렇게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면서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인과 저의 부친의 기일이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인과 저의 부친은 5월 5일에 선종하였습니다. 고인과 저의 부친이 같은 ‘뱀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인과 저의 부친은 이름도 비슷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인연으로 고인에 대한 기도를 부탁받았고, 저도 기꺼이 기도를 하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제인 제가 교회의 장례예배에 간 것도 평범한 인연은 아닙니다. 잊고 있던 분을 우연한 기회에 카페에서 다시 만난 것도 평범한 인연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새삼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사업의 동반자로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독특한 친화력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여는 사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 간결한 복음 말씀을 카톡으로 보내 준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신부님의 복음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기분이 좋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김치를 만들면 옆에서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고, 신자들을 위해서 밥상을 차려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마음을 여는 친화력과 감동을 주는 강론은 공동체에 활력을 준다고 합니다. 깊은 영성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여는 사제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밤샘 성체조배를 한다고 합니다. 성목요일의 성체조배처럼 교우들은 조를 편성해서 성체조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영성이 공동체에 위로와 용기를 준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으니 공동체는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오늘은 마태오 사도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던 마태오입니다. 그날은 몸도 좋지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면서 따랐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쁨 마음을 가졌고, 행동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알 수 있는 ‘마태오 복음서’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를 통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오셨는지,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서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제자들은 모두 ‘과거와 미래’를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와 미래 모두를 버렸던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한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직책도, 능력도 모두 한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께 마태오 사도처럼 우리도 ‘예’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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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보면 마태오가 주님을 초대한 듯 보이지만 복음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히려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정해진 장소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세리와 죄인들이 왔습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오늘 오늘의 식사는 주님께서 모두를 초대하신 것 같습니다. 마태오도 세리도 죄인들도….
그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에게 뭐라 뭐라 구시렁거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디 가서든 대접 받는 바리사이들인데 유독 주님 앞에서만은 작아지는 그들이었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혹은 초대받아야 하는 것은 응당 바리사이 자신들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자신들은 뺀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화가 났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렇게 세리와 죄인들을 초대하셨고 마태오도 그 자리에 함께 가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주고 싶으셨을까요? 과연 주님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과연 우리 공동체는, 우리 교회는 세리와 죄인들이 초대받는 곳일까요? 아니면 들어서기 어려운 높은 문일까요?
우리는 과연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 하나요? 아니면 우리끼리 서로 격려하며 살기를 바라는 걸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든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제자들 즉 우리와 함께 주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가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고 사명입니다.
주님께 함께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렸던 마태오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주님 가시는 그곳에서 기쁘고 즐겁기를 기도합니다.
재탄생
남은 밥은
냉동실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밥도 있다.
그들은 다시 뜨거운 팬 위에 몸은 누인다.
그 열기를 견디고 견딘다.
지금까지 견딘 열기만 해도 한 트럭인데
팬 위에서 또 다른 새로움을 위해 견뎌낸다.
뜨거움만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게 해도 견딜 수 있냐고 묻는 것처럼
누군가가 팬에 누인 몸뚱이를
이리저리 꾹꾹 눌러댄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밥은 누룽지로 재탄생한다.
더 바삭하고 더 단단하고 쉽게 상하지 않는
누룽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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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동안은 꿈에서 계속 뵐 수 있었습니다. 비록 어떤 대화도 나눌 수는 없었지만 꿈에서라도 뵙고 나면 그날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도통 꿈에서 뵐 수 없었습니다. 보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하나 전처럼 꿈에 뵐 수 없으니, 밤늦게 모임을 마치고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오면 허전한 마음이 밀려오곤 했습니다.
이런 허전한 마음이 밀려올 때, 우연히 인터넷에서 어느 방송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가족의 목소리와 모습을 가상 현실 VR로 구현해서 유가족과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인공지능 AI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이렇게까지 만나야 할까 싶었습니다. 진짜 사람이 아닌데, 그렇다고 그 영혼이 찾아온 것도 아닌데 이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또 다짐까지 한다는 것이 과연 진짜 의미가 있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이 죽음의 영역까지 점령하려는구나 싶었습니다.
진짜 같지만, 또 과학 기술의 발달로 앞으로는 더 진짜 같겠지만, 이런 식의 만남은 크게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영상일 뿐이니까요. 이를 영상으로 보지 않고 진짜 살아 있는 실체로 여기면서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가상의 현실에만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세상에만 머물려고 합니다. 편하고 쉬운 길,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길, 고통과 시련은 전혀 없는 길,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길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세상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은 주님께서 가신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대신 주님의 뜻이 가득 담긴 사랑의 삶을 걸어가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카파르나움에서 로마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향해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모두를 버리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모으고 있었던 재산을 버리는 것이고, 편하게 앉아 세관을 지키는 삶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멈추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사도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따릅니다.
지금 자기 삶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세상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참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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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람들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생각에 의해서 고통 받는다(에픽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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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따라라.”
-홀로와 더불어, 따름의 여정-
모든 종교에 기도가 필수이지만 가톨릭 교회야 말로 기도의 보고寶庫입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순서대로의 네 기도문이 기도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입니다. 집무실에 들어와 “만세육창” 기도를 바치기전 우선 순서대로 바치는 네 기도문입니다. 사실 가톨릭교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견고히 하는데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보다 더 짧고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 신간서적의 표지 그림과 글자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땅이 주는 치유의 선물, 맨발로 걸어라, 돈이 안 들고 부작용이 없는 최고의 자연치유요법, 일상의 감기부터 암, 심혈관, 뇌질환, 고혈압, 당뇨, 아토피, 치매, 코로나19 등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맨발걷기를 시작하라!”
정말 바람직한 맨발걷기 운동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반드시 하나 추가하고 싶습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맨발로 걸어라.” 이렇게 의식하면서 걷든다면 걷기는 그대로 기도가 되고 최고의 의사이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부르는 과정이 극적입니다. 마태오에게는 주님과의 극적인 만남이자 은총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길이신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마태오의 간절한 눈빛을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앞서 마태오의 주님을 찾는 갈망이 우선했음을 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없으면 주님 찾아오시지도 않고 찾아 오셔도 모릅니다. 마태오의 갈망의 눈빛을 일별하자마자 즉시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말씀하시지 않고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던 주님이시겠는지요!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마태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또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그 삶은 어떠했을런지요? 그러니 주님의 부르심은 크나큰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길을, 빛을, 희망을 찾는 갈망이 있습니다. 살아있다하여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참길이자 참빛이자 참희망인 주님을 만나 따를 때 참으로 살아 있다 할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아니곤 누구를 따르겠는지요?
“나를 따라라.”
주님은 누구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며 있는 그대로의 갈망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참으로 무시받고 사람 대접 못받던 마태오에 대한 일체의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의 갈망을 보고 부르십니다. 평생 날마다 주님을 따라 나서는, “따름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각자 홀로 또 더불어의 따름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따라 나선 마태오를 당신 제자 공동체에 합류시키는 주님이십니다. 이제 홀로와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른 마태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어울린 제자공동체를 보자 바리사이들은 즉시 제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인 밥을 함께 나누는 식탁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명쾌하여 복음적 제자 공동체, 교회 공동체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그대로 하느님 마음이, 하느님 사랑이 반영된 제자공동체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나 이제나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는 엘리트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 병자들의 공동체, 참으로 주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부족한 이들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병이 없어서 부름받기로 한다면 세상에 부름 받을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죄없는 사람, 병없는 사람 어디있겠는지요? 죄를 용서받고 병을 치유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사실 길이자 빛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잃으면, 잊으면 누구나에게 뒤따르는 죄요 병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는 제자들의 교회공동체의 특징과 삶의 원리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우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 말씀하시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기본적 덕목 지침을 명시합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정말 필요한 덕목이 겸손, 온유, 인내심, 평화, 일치요 이 또한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하나 중심의 공동체의 특성을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요,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한 분 하느님 아버지를 일치의 중심에 두고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순례 여정중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공동체 성원의 내적성장에 관한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공동체 형제들이라면 누구나 깨닫는 진리입니다. 저마다 받은 고유의 은총들이 상호보완되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의 성장이요 각자의 성장임을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는 바오로입니다.
“성도들인 공동체의 형제들은 각자 직무를 수행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니 날로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충실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우리 공동체의 궁극의 목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와 성숙, 충만한 경지에 이르는데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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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먹는 밥>
그저 주린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삶을
함께 이루는 것이니
차린 거 별로 없어도
여럿이 함께 먹어야
밥은 맛날 뿐만 아니라
참으로 밥이지요
함께 밥 먹을 사람 많은
사람에게야
함께 먹는 밥이
뭐 그리 대단할까 마는
아무도 선뜻
밥 함께 먹자 하지 않아
서럽게 홀로
밥알 삼키는 사람에게
함께 먹는 밥은
참으로 꿈같을 테지요
이 자그마한 소중한 꿈
우리 함께 이뤄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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