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붉게 피다
한여름의 햇살은 모든 것을 뜨겁게 달군다. 산도 들도 한낮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숨을 고르는 시간, 유독 더 붉게 피어나는 꽃이 있다. 백일 동안 지지 않는다고 하여 이름 붙은 백일홍이다. 꽃은 계절을 장식하지만, 백일홍은 계절을 견디며 피어난다.
오래된 돌담을 따라 걸었다. 시간의 결이 고스란히 남은 담장은 수많은 계절을 품은 얼굴처럼 따뜻했다. 기와지붕 아래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들고, 담장 곁 백일홍은 불꽃처럼 피어 있었다. 붉은 꽃송이마다 바람이 머물렀다가 천천히 지나갔다. 그 풍경 앞에 서니 계절도 잠시 걸음을 늦추는 듯했다.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손을 뻗는 순간, 꽃은 사람을 향해 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향해 피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꽃은 더 화려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다정해졌다. 수백 개의 작은 꽃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꽃차례를 이루는 모습은 혼자서는 완성될 수 없는 삶을 닮아 있었다.
백일홍은 참 신기한 꽃이다. 봄의 화려함을 탐내지 않고,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가장 뜨거운 계절을 자신의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꽃들이 하나둘 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온 힘을 다해 피어난다. 그래서 백일홍의 아름다움은 화려함보다 성숙함에 가깝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계절이 있다. 누군가는 이른 봄에 꽃을 피우고, 누군가는 늦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남보다 늦다고 조급해할 이유도, 먼저 피었다고 자만할 이유도 없다. 자연은 언제나 제때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붉은 꽃 아래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햇살은 꽃잎 끝에 금빛을 얹고, 바람은 꽃향기를 담장 너머로 실어 나른다. 오래된 기와와 돌담, 그리고 백일홍은 서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새것은 시간이 지나 낡지만, 오래된 것은 시간 덕분에 깊어진다는 사실을 그 풍경이 말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문득 사람도 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음은 화려하지만, 세월은 깊이를 선물한다. 얼굴에는 주름이 늘어도 마음에는 향기가 쌓인다. 오래 견디며 살아온 사람일수록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 주고, 위로가 되어 준다. 백일홍이 긴 시간을 견디며 붉어지듯 사람도 긴 시간을 살아내며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꽃을 바라보던 시선은 어느새 나 자신에게로 향했다. 얼마나 많은 계절을 지나왔는지, 또 얼마나 많은 계절을 지나가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인생은 피는 날보다 견디는 날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견딤이 있었기에 오늘의 꽃도, 오늘의 사람도 존재한다.
붉은 꽃송이 사이로 석양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한낮의 강렬한 붉음은 조금씩 부드러운 분홍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가장 찬란할 때보다 서서히 저물어 갈 때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꽃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빛을 다 쏟아낸 뒤에도 오래 기억되는 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따뜻함이다.
돌담을 돌아 나오며 마지막으로 백일홍을 바라보았다.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조급하게 피지 말라고, 쉽게 지치지 말라고, 자신의 계절을 믿으라고 말하는 듯했다.
올해도 백일홍은 어김없이 붉게 피었다. 그리고 그 붉음은 꽃잎에만 머물지 않았다. 긴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조용히 번져, 오늘을 살아갈 작은 용기 하나로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