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사랑 Ⅱ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태 13, 24-30)
사랑의 하느님이신 그분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 지 예수님을 통해 가라지 비유로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의 기쁨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빠름을 느낍니다. 옛날에 6시간 걸리던 KTX가 서울과 대구에 1시간 50분이면 도달합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느린 것처럼 느껴집니다. 또 미국은 나사에서 태평양을 2시간에 횡단할 수 있는 여객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빨리빨리’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AI나 쳇GPT가 나와서 뭐든지 척척 빨리해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삶이 마치 풍요로워지고 더 좋아지는 것처럼 보입니다마는 우리의 내면은 사실 안타깝기도 합니다. 빠름에 의해 우리의 인내심은 줄어들고 기다림과 인내라는 미덕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빨리 먹고 빨리 일하고 빨리 만들어내는 그런 삶, 거기에 지친 삶 속에서 서서히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문명의 위기에 지친 삶이 이제는 느림의 미학에서 우리 자신을 찾고 우리가 누군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그런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인간의 ‘빨리빨리’와는 달리 하느님의 인내와 기다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밀밭의 가리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의 식탁에 하느님의 인내와 기다림, 그것에 영적 시선을 잠시 머물러 봅시다. 복음의 비유는 큰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복음서의 집주인처럼 주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밭에 뿌려진 씨앗 가운데 밀 뿐만 아니라 가라지가 있는 것을 아시고 이를 뽑아버리자는 종의 탄원에 수확할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자고 하시며 그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라고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신부님의 마지막 논문을 쓸 때의 주제였습니다.
신부님은 사형제도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주제를 갖고 논문을 썼는데 이 복음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복음 말씀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라지를 뽑아버려야 한다는 신학적 이론을 가지고 사형제도를 정당화했습니다. 그래서 중세기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재판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복음을 끝까지 유지하다가 제2차 공의회 때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생명의 복음’에서 교회는 처음으로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경제적 논리, 인간적 논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누구나 밀밭의 가라지는 뽑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어찌 보면 인지상정이고 인간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고 하셨을까요? 인간의 삶에는 복음 말씀대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습니다. 악한 이(가라지)가 많으면 세상은 멸망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이 상식이고 이론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세상의 논리와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보면 농사를 망칠 수 있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이런 인간적인 논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논리는 초월적입니다. 복음의 관점은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초월적입니다. 인간이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길에, 자갈밭에,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일지라도 좋은 밭이 되어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그 모든 밭의 모습이 우리의 인간입니다. 모든 것이 구원되도록 바라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고, 또한 지금은 비록 잘못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기다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드러났듯이 하느님은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악의 원천을 근절시키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겠는가, 악과 선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느님은 모범 답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게 하시는 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셨기에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까지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창조는 위대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죄를 막으셨다면 우리는 원죄 없이 살 수 있었을 텐데 싶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하느님의 창조는 인간을 당신이 마음대로 부리기 위한 로봇이나 종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관계에서 자유의지에서 잘못 생산되는 그 모든 악과 어두움을 당신이 치유해 주시면서 인간이 완성에 이르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죄의식은 죄의 아픔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복음을 보면 가리지 비유에 담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당신의 의지가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리 삶이 비록 고달프고 힘들고 좌절하고 어렵고 슬픔에 떨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아멘.
2024. 07. 27. 올리베따노 수녀원 유스티노회 피정 김정우 신부 강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