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82]87세 선생님이 보내주신 책선물?
어찌 하다 보니, 내 휴대폰에 1300여명의 명단이 있다. 오지랖하고는? 솔직히 별로 바람직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많은 인간들 중에 ‘선생님’이라고 붙여 저장한 두 분이 계신다. 한 분은 초중등학교와 대학교까지 통틀어 16년 동안 유일하게 존경하는 고3때 담임선생님이다. 다른 한 분은 한국고전번역원(교육부 산하 전문학술기관)에서 4년여 근무하면서 만나뵌 원로 한문학자이다. 그분을 존경하는 이유는 '내가 나이 들면 저런 분이 됐으면' 하는 ‘진짜 원로元老’이기 때문이다. 첫째 생각이 유연하시다. relexable. 1937년생, 우리 나이로 87세이다. 평생 한문학만 공부하셨지만(동아대학교 국문학과도 졸업했다), 한번도 잘난 체 하시는 것을 못봤고, 언제나 조용조용, 점잖으시다.
그분에게 한문 한 줄 배운 적이 없지만, 나를 늘 아끼는 제자나 후배 또는 동료처럼 대해 주셨다. 황감한 일이다. 산일(오늘 오전에 2년 선배의 묘자리를 파는 일)을 하고 오니, 툇마루에 놓인 책 선물. 얼른 뜯어보니, 그 선생님이 펴낸 ‘뿌리깊은 논어’(논어집주대전 현토 완역. 노상복 역주, 이스턴퍼블리싱 2023년 7월 31일 펴냄, 각 385쪽, 365쪽, 각 25000원) 상, 하권이었다. 너무 반갑고 놀라 전화를 드렸다. “뭐 대단한 것이라고, 전화까지 하냐?”며 수줍어하신다. 2016년인가, 선생님을 기관지에 싣고자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논어는 ‘인생독본서’로서 200번을 읽어도 부족하다”고 말씀하신 것도 떠올랐다. 이 논어역주 책은 2002년부터 현재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속의 청계서당에서 강의한 것을 제자들이 녹취하여 정리한 것이라 했다.
선생님은 청계서당 말고도 성고서당, 신고서당 등에서 사서오경을 강의해 왔으며, 지금도 ‘예기’와 ‘춘추’를 강의하는 87세의 ‘당당한 현역’이다. 원래 신학문을 공부한 후, 뒤늦게 고명한 선비를 만나 7년 동안 한학 공부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이 중재重齋 김황金榥(1896-1978)인데, 우리나라 '마지막 유종儒宗'으로 일컫는 분이다. 중재의 마지막 제자이기도 하다. 중재는 10년 공부를 중단한 것을 “3년만 더 공부하면 완전히 문리文理가 완전히 트일 텐데”하며,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북한산록 진관사에서 인터뷰 당시에도 그 스승님과 돌아가신 부친을 회고하며 하염없이 우시던 선생님 모습에 뭉클했었다.
아무튼, 논어집주대전을 현토하여 완역한 역주집인만큼 ‘새로 읽는다’는 마음으로 읽겠지만, 과연 완독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장담은 못하겠다. 다만, 선생님의 저서 선물로 인하여, 2018년 무술년 원단元旦에 선생님께 직접 받은 연하장을 기억해내 여기저기 찾아 마침내 발견했다<사진>. 그때도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기억을 더듬어 옥편을 찾았다. ‘餞迓茂祿무아전록’이라니? 헤어진다는 전餞, 맞는다는 아迓, 아름답다는 무茂, 복록 록祿자인데, 뜻은 묵을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일년내내 아름다운 복록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멋지다! 너무 유식하다! 그 아래에는 ‘구경재久敬齋주인 최대아崔大雅을 위하여’라고 쓰여 있고, 끝에 ‘학산노초學山老樵’가 썼다고 되어 있다. ‘대아大雅’라니? 대아는 나이가 비슷하거나 문인에 대해 편지 겉봉의 상대편 이름 밑에 쓰는 ‘00님께’정도의 지칭이다. 언감생심, 황공무지할 일이다. 학산은 선생님의 호이다. 이런 연하장을, 그것도 스무살이나 위인 원로 한학자로부터 받아본 사람이 있느냐며 자랑도 칠 일이 아닌가.
게다가 선생님은 퇴직 후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와 ‘제2의 삶’을 살겠다니까,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송서送書’까지 써주셨다. 송서란 한문학의 독특한 문학장르이다. 이런 격식에 맞는 송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열 명도 채 되지 않으리라. 진짜로 선생님이니까 가능한 일일 터. 감격, 감동한 기억이 새로웠다. 하여, 언젠가 쓴 졸문의 주소를 부기한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단상 42/시간여행 2]‘송서送序’라는 문학장르 - Daum 카페
참, 나는 복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은 것같다. 한 친구가 “너는 참 행복한 놈이다”고 한 말이 맞다. 엊그제는 어느 고등학교 교장샘이 당신의 교육철학을 온전히 터놓은 칼럼 모음집 『부모, 쉼표』라는 역저를 보내주셔 사람을 감동시키더니, 또 연전엔 모교인 성균관대 중문과 교수로 퇴직한 분이 『우리말 속뜻 논어』와 『우리말 속뜻 금강경』을 보내주셨다. 이것 참. 바쁘다. 그 어려운 책들을 언제 어떻게 다 읽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즐거운 비명’은 이럴 때 쓰는 관용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