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華滿發*
눈물이 나도록
살아라
요즈음 몸이 점점 약해져서 그런지 자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좋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 1856~1950))의 묘비명(墓碑銘)처럼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하고 인생의 막을 내릴지 걱정이 되어서이지요.
이생에서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따라서 잘 죽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결과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불법(佛法)의 궁극적 관점에서는 우리 중생의 실상(實相)이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이므로 태어나고 죽는다는 말조차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경(究竟)의 이치를 지식으로만 알고 있을 뿐,
실제 육체의 죽음에 임하여 그러한 이치를 현실적으로 시현할 수 있는 깨달음과 수행력을 갖춘 사람은 지극히 드문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주변으로부터 많은 관심과 도움을 받고 삽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태어나는 때보다 더 중요한 시기는 임종할 때이지요. 왜냐하면 목숨을 마칠 때가 범부(凡夫)가 되느냐 성인(聖人)이
되느냐, 사람이 되느냐 축생이 되느냐, 악도(惡道)에 떨어지느냐 선도(善道)에 나아가느냐가 결정되는 기로(岐路)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임종을 준비하거나, 혹은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들이 임종 후의 대처 방법들을 사전에 정확히 인식하고 준비한다면 죽는 자가 원하는 대로 극락왕생의 원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임종자의 분노나 고통 등을 완화시킴으로써 좀 더 나은 세계로 환생(還生)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카페 [덕화만발] <회원자유게시판 방>에
김만수 아기 동장님이 <눈물이 나도록 살아라.>라는 감동의 글을 실어 주시어 그 글을 널리 알리고 아울러 우리의 죽음은 어떻게 맞아야
할지를 생각해 봅니다. 36세의 나이로 대장암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난 영국인 ‘샬롯 키틀리’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블로그에 작성한 글입니다.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살고 싶은 나날이 저리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죽음을 앞두니 그렇더라고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닦으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나날이 행복이었더군요.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 다 받아봤어요.
기본적 의학 요법은 물론, 기름에 절인 치즈도 먹어보고 쓰디쓴 즙도 마셔봤습니다. 침도 맞았지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귀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례식 문제를 미리 처리해놓고 나니 매일 아침 일어나 내 아이들
껴안아주고 뽀뽀해줄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정말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얼마 후 나는 그이의 곁에서 잠을 깨는 기쁨을 잃게 될 것이고, 그이는
무심코 커피 잔 두 개를 꺼냈다가 커피는 한 잔만 타도된다는 사실에 슬퍼하겠지요. 딸 아이 머리도 땋아줘야
하는데...
아들 녀석이 잃어버린 레고의 어느 조각이 어디에 굴러 들어가
있는지는 저만 아는데 앞으론 누가 찾아 줄까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22개월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보너스로 얻은 덕에 아들 초등학교
입학 첫 날 학교에 데려다 주는 기쁨을 품고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녀석의 첫 번째 흔들거리던 이빨이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주러 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보너스 1년 덕에 3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복부 비만이요? 늘어나는 허리둘레요? 그거 한 번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희어지는 머리카락이요? 그거 한 번 뽑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는 한 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꽉 붙드세요.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내가 가지고 싶은 걸 생각하기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걸 생각해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랄프 왈도 에머슨’의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다.”라는 말처럼 살아있음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파동 쳐오지 않는가요?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죽음을 다른 사람을 위해 주는 선물로 만들
수 있을까요? 흔히 가족이나 친척,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생명이 파괴되기도 하고, 손상을 입기도 하며, 또는 영구적으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직접 말로써 혹은 글을 써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우리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고, 우리의 부족했던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며,
동시에 그들의 부족함에 대하여 그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그들이 후회함 없이 삶을 살아가되, 우리 생명의 우아함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진실 된 소망을 표현할 때, 우리의 죽음은 진정한 선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음의 뒤안길엔 어떤 세계(世界)가 있을까요? 이제 인생을
마무리하고 사후(死後)의 미지세계를 의식밖에 투영(投影)시키면 드디어 생사의 모든 고뇌를 종결짓게 될 것입니다. 생각하면 어느 한때인들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위(無爲)의 삼매(三昧)에서 즐기는 자유로운 때가 있었던가요? 이제 내가 없고 고뇌가 없는 무아(無我)의 대 자연에
돌아가노라면, 아마 이 보다 더한 안락(安樂)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한생 내가 받고 있는 생사의 모든 고통은 나의 업보(業報)가 불러온
결산이었고, 이 업보는 내가 만든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젊어서 한 때 ‘지옥에 퐁당 떨어져죽을 운명’이었습니다.
다행히 일원대도(一圓大道) 정법을 만나 마음을 두호(斗護)하고 도반(道伴)들과 더불어 살았기 때문에 이만큼 잘 살 수 있었음을 참으로
지복(至福)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어난 자는 죽습니다.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지요. 그러나 세상에 태어난 자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요?
이제 만약 제가 저 영국의 ‘샬롯 키틀리’ 처럼 시한부 목숨을
선고받는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까요? 저 역시 정말 '눈물이 나도록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제 죽음에 대한 공포나 인생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언제 떠나가도 해탈의 맛은 느낄 수 있다는 건방진 생각도 해 봅니다.
그렇지만 우선 주변을 정리하고 세상의 모든 도반 동지, 그리고
우리 덕화만발 가족 모두에게 그간 ‘고마웠다’는 인사는 하고 떠나야지요.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허락 된다면 입정삼매(入定三昧)에 들었다가
거연히 열반 낙(涅槃樂)을 누리러 떠나가고 싶네요!
단기
4348년, 불기 2559년, 서기 2015년, 원기 100년 3월 13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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