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79
5월3일[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부활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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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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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eX80oTYZKQ
(원동일 프레드릭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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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진정한 주님의 사도로 서기 위해 꽤 긴 신앙 여정, 깨달음의 여정이 필요합니다!>
복음사가들은 필립보 사도에 대해 수제자 베드로 사도나 애제자 요한만큼은 아니지만, 비교적 소상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도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데 비해, 필립보 사도는 등장의 빈도가 잦습니다. 이는 그가 사도단 안에서 꽤 비중 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합니다.
필립보 사도의 신앙 여정을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는데, 예수님의 인품과 말씀에 매료되어 그분의 제자로 결심하고 말을 갈아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제자로서 거듭난 필립보였지만,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꽤 긴 시간 제자로서의 삶을 산 그였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느 날 필립보가 예수님께 부탁을 하나 드리는데,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복음 14장 8절)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가까이서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봐왔으면, 그분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인류의 구원자시며, 그분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느님 안에 그분께서 계신다는 것쯤은 충분히 파악할 때가 되었건만, 엉뚱한 말을 하는 필립보가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 질책 반, 격려 반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내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필립보는 진정한 주님의 사도로 서기 위해 꽤 긴 신앙 여정, 배움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이 필요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큰 위로와 격려도 받았지만, 때로 자극과 추궁도 당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신앙의 눈이 트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립보 사도와 같이 힘들어도 걸어야 할 꽤 길고 지루한 신앙 여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좀 더 매일의 주님 말씀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귀를 기울일 때, 오로지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 우리의 신앙 여정도 급성장을 거듭할 것입니다.
그토록 부족하고 나약했던 필립보였지만, 어느 순간, 그의 부족했던 신앙이 급성장을 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으며, 그분이야말로 참 주님이요, 참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긴가민가하고 있던 나타나엘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고 적극적으로 초대했습니다. 심드렁하고 시니컬하던 나타나엘의 마음 안에 신앙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도록 인도하고 배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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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아마도 의식주의 충족이겠지요.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삶을 얼마나 궁핍하고 비참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의식주가 어느 정도 충족되고 나면, 자연스레 추구하게 되는 것이 놀이 문화요 축제 문화입니다.
바닷가에 살다 보니 실감합니다. 뷰가 좋은 캠핑장은 사시사철 호황입니다. 강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캠핑하길래, 살짝 봤더니, 텐트며 캠핑 도구들이 최첨단이었습니다. 얼마나 춥고 불편할까 걱정했었는데, 세상 따뜻하고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놀이 문화나 축제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 기념비가 될만한 큰 사건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면서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축제가 다른 이방인들의 축제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안티우쿠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유다 마카베오가 되찾은 후, 성전을 정화시키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승리의 날을 경축하고 기렸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도 이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복음 10장 24절)
유다인들의 어투를 참작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손톱만큼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던가 확신하며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강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빈정거리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자극해서 빌미 잡힐 말을 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만 골라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복음 10장 25~27절)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 말씀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더라면 유치원생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유다인들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존재들이군요.
오늘 다시 한번 알아들을 귀를 청합니다. 들은 바를 잘 실천할 힘도 덧붙여 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무이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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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줄>
최민식, 하정우 주연의 ‘범죄와의 전쟁’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폭력적인 깡패들 이야기라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아니지만 주연들의 연기는 매우 좋았습니다. 여기서 최민식의 역할이 매우 인상 깊게 나옵니다. 1982년 최익현(최민식)은 비리 세관원이었는데 퇴출되기 직전에 부산 최대 조직의 젊은 보스 최형배(하정우)와 손을 잡게 됩니다.
최형배는 전형적인 깡패두목입니다. 그러나 최익현은 정치, 경제, 법조계의 많은 인맥을 바탕으로 감옥에 갇혀있던 최형배를 빼내 주기도 하고 조직이 클 수 있게 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합니다.
젊은 보스는 자신의 머리가 되어주는 최익현을 매우 좋아합니다. 물론 인간들끼리의 연줄은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자 서로 살기 위해 배신하게 되는 결과를 맺게 됩니다. 나라가 그렇다 보니 서로 몸을 사리느라고 최익현을 도와주던 사람들도 모두 나 몰라라 합니다.
세상엔 연줄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취직하기 위해서도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도 일거리를 얻기 위해서도 학연, 지연 등이 아직도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는 곳이 우리나라입니다.
성경에서도 쫓겨나게 생긴 집사가 그들로부터 덕을 보기 위해 주인의 재산으로 빚진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함으로써 쫓겨난 뒤를 대비하는 예화도 나옵니다. 꼭 재물이 재산이 아니라 세상 말로 연줄이 있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어제 외국에서 한 신자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고민이 있는데 기도를 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말로는 기도드려드리겠다고 하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혹은 안수를 달라고 많은 신자가 청하십니다. 물론 신자들이 사제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신들보다 하느님과의 연줄이 더 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기도를 해 드려서 상황이 좋아지시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드릴 때도 들어주시면 좋은 것이고 안 들어주시면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냥 기도를 드려 드리면 저의 책임은 다한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신자들은 기도를 드려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왜 내가 그리스도와의 연줄을 더 확실하게 맺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줄은 일상 삶 안에서 형성됩니다. 하루에 이런저런 많은 판단을 하고 살지만 정작 예수님의 의견을 묻고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봅니다.
지금 성당 밖에서는 여러 공사가 한창입니다. 여러 의견이 있고 결국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은 본당신부입니다. ‘이런 결정이 잘하는 것일까?’를 매번 물어보면서도 예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물어보지 않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는 이유는 평소에도 자기 뜻대로만 살려고 했지 내 안에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자주 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잊고 살다 보니 어느 순간에 그분께 도움을 구하기가 왠지 쑥스러운 것입니다. 그분께 도움을 구하기가 당당하지 못하다면 그만큼 연줄이 두텁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매우 당당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 돌아가시니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예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당신이 다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버지께서 거부하지 않으실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버지께 사랑을 받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도 예수님께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기적을 청하시면서 얼마나 당당하십니까? 거부하는 의도가 뚜렷한데도 성모님은 하인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기적을 강요하십니다. 당신의 청을 예수님께서 절대 거부하실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십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께 청하는 모든 것을 그분이 하나도 거부하시지 않고 다 주실 것이란 확신을 하고 있을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을 그만큼 완벽하게 받을만하게 살아가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저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 그분의 뜻에 잘 순종하여 그분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사람이었다면 신자들이 저에게 기도를 청할 때 주저 없이, “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기도해 드리면 다 잘 될 거예요.”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평상시에 예수님과 성모님과 더 끈끈한 연줄을 맺어서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이들을 위해 당당하게 청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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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저는 5대째 천주교를 믿는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은 관념이 아니었고,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은 생활이었고,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밥을 푸시면서 성호경을 그으셨습니다. 이름은 세례명을 불렀습니다. 생일에는 본당에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기일에는 가족이 모여서 연도를 바쳤습니다. 길게 줄을 서서 부활, 성탄 판공을 보았습니다. 교무금, 헌금은 꼭 챙겼습니다. 아침, 저녁기도를 바쳤습니다. 삼종기도를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피정, 교육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습니다. 본당 신축헌금을 냈고, 형편이 어려우면 노력봉사를 하였습니다. 9일기도, 54일 기도를 하셨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디 여행을 가면 제일먼저 주변에 있는 성당을 찾아보았습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에도 참례하였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물려받았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존중하고, 존경하였습니다. 저는 신앙을 교리에서 배우기 전에, 교회에서 배우기 전에 먼저 집에서 배웠습니다. 신학교의 가르침은 집에서 하는 신앙생활의 연장이었고, 집에서 하는 신앙생활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확인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 신자의 수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매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었습니다.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배우는 신자의 수보다는 성당에서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늘어나는 신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성전을 신축해야 했고, 본당은 분가해야 했습니다. 1년을 배워야 하는 교리는 6개월로 단축해서 배우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영성의 깊이를 채우는 것보다 친교와 활동을 넓히는 것에 치중했습니다. 주일미사의 참례 수가 80%가 넘었는데 신자가 늘어나면서 주일미사 참례 수가 점점 낮아졌습니다. 20%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고,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힘들어졌습니다. 도시생활과 핵가족으로 가정에서 신앙이 전수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덕을 쌓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보다는 재물, 권력, 명예로 현세해서 성공하는 삶을 먼저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에서 기도하는 삶을 보여주기 보다는 대학만 갈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면 잠시 성당에 가지 않아도 기다려주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성직자와 신자는 늘어났지만 성직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성직자도 늘어났습니다. 냉담자도 늘어났습니다. 뿌리가 깊지 않는 나무가 바람에 쉽게 넘어지듯이, 샘이 깊지 않으면 가뭄에 곧 말라버리듯이 교회에 활력이 떨어지고,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포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있습니까? 환난도, 칼도, 죽음도, 세상의 권신도, 천신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전해 준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초대교회의 신앙 선조들에게 전해 진 복음입니다. 이것이 저의 부모님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오늘은 그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준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였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중심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복음의 빛이 이웃에게 전해 질 것이고,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가 참된 행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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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6-14: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이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며,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거둘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뿐이신 데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이미 뵌 것이다.”(7절) 하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한다.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9-10절) 하신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이심을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시는 말씀이다.
즉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시며 아드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참모습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믿음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한 번만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길을,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큰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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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8-11)
여기서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이신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모세도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다고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 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 그런 다음 내 손바닥을 거두면,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탈출 33,18-23)
엘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1열왕 19,11-13)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대단히 힘든 상황에 부닥쳐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만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필립보 사도가 ‘아버지’를 뵙고 싶어 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지금 상황은 최후의 만찬이 끝난 뒤에 배반자 유다가 떠나고, 예수님께서 고별의 말씀을 하시는 상황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입니다. 아마도 사도들은 몹시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어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 사도를 꾸짖는 말씀을 하신 것은, 사실은 모든 사도를 꾸짖으신 것이고, 그것은 사도들의 흔들리는 믿음을 더욱 강화해 주기 위한 격려로 해석됩니다. (사도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꾸짖은 것이 아니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는 말씀은,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예수님은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신 분”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외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11절)
예수님의 ‘일’과 ‘삶’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표징’과 같은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4-16)
사도들은 예수님의 ‘일’과 ‘삶’이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이 신앙고백의 출발점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삶이 ‘사랑’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존재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12절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더 큰 일을 하시게 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협력자들입니다.
13절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는 말씀은, 제자들과 신자들이 하는 일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계시 말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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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필립보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함께 일찍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40-46 참조) 필립보가 예수님께 나타나엘을 인도하고(1,45-46 참조) 그분을 뵙기를 바라는 그리스 사람들을 데려온 일은(12,20-23 참조) 선교사의 탁월한 자질을 드러냅니다. 특히 예수님을 만나기를 머뭇거리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만큼, ‘누구든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진리를 깨닫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진 제자입니다.
그런 필립보가 정작 ‘나를 알게 된 이는 아버지를 이미 뵌 것이고, 그분을 알게 된다.’는 말씀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둔 마지막 저녁까지도, 그분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던 토마스와(14,5 참조) 그저 성부를 직접 뵙게만 해 주시면 충분하겠다던 필립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리석고 나약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13,1 참조), 그들이 앞으로 더 큰 일도 하리라 믿으셨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필립보는 스키티아와 프리기아 지방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소 야고보는 다른 사도들보다 먼저 언급될 만큼(제1독서; 갈라 2,9 참조) 사도단의 맏형 구실을 한 이(예루살렘의 초대 주교)로, 시리아와 이집트까지 가서 선교하다가 신전 지붕에서 내던져져 몽둥이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합니다.
한때의 사도들처럼, 알아듣기 힘든 신비와 삶의 우여곡절 속에 믿음과 오해를 되풀이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나를 믿으시는 주님 곁에 머물며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어느덧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더 큰 일’을 이루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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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많이 변했습니다. 자신이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마다 어느 정도는 변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변화되려고 결심한 것 자체만도 큰 변화가 아닙니까?
신앙인은 변화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많은 것을 버리고 잃은 대신 새로운 것을 많이 얻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말고 진정한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나의 시각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내 가족을, 이웃을, 그리고 산과 들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무엇보다도 이 세상 모든 사물이 귀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마저 귀하게 보일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주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고귀함을 늘 생각하고 이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가족을 비롯한 내 주변 사람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힘을 길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나 자신부터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숨결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되려면 어떤 결심이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실천해 나가야 하는지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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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토마스 사도의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명쾌한 주님의 응답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현대인에 비유되고는 하는 토마스 사도는 의심 많은 제자라기보다 의문이 많은 제자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질문에 온화하게 답을 주십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복음 14장 5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도들의 삶은 거칠었고, 힘들었으며 마지막에는 주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복음의 삶은 죽음의 삶이 아닌 기쁨과 부활의 삶으로,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전설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온전한 증거의 삶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는 모두 복음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람만을 찾는 것이라면 그들은 순교를 통한 영원한 삶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이 주는 헛된 보람을 좇기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참 기쁨을 깨닫는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보람보다는 기쁨을 찾아 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마태오복음 16장 24절-28절 참조) 길이신 주님을 따라 걸으며,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자유로워지고(요한복음 8장 32절 참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복음 3장 16절 참조)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처럼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되새기는 신앙인은 늘 삶에서 기쁨을 찾고 세상이 주는 보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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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푸른 오월에 맞는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당신은 싱싱하고 푸른 나무들과 눈부시도록 현란한 흰색과 붉은 색을 자랑하는 철쭉꽃을 보면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感知)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눈 뜬 사람입니다. 곳곳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 자식을 보면서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깨친 사람이자 예수의 제자입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들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작고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과 동일시 합니다.(마태 10,40; 25,40)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과 동일시하는 작고 가난하고 죄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예수님의 동체자비행(同體慈悲行)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도 행복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필립보와 야고보가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앞에 따로 보여줄 하느님이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하는 필립보와 야고보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려면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1요한 4,16) 눈을 뜨십시오. 당신이 예수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당신이 하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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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마음 한 몸으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짐작하여 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함께 지낸다 해도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내보이지 않는 이상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내보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상대를 알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읽을 수 있는 관계 형성을 잘해야 합니다. 비록, 어두운 밤일지라도 마치 남의 이목이 집중된 장소에서 하듯 눈속임이 없는,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해도 마음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도 고부간, 부부간에, 부자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보면 작은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로움 덕분에 작은아들은 모든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타이르자, 그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며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큰아들이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평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종으로 여긴 적이 없으나 스스로 종처럼 지냈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겉으로만 아버지를 섬겼으니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자기 스스로 무엇을 얻기 위해 계산된 가운데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으니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동생에 대한 사랑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하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13) 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그분의 뜻에 일치하여 청해야 하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나 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 주시고 일시적인 유익이 아니라 영원한 유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이방인은 물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소명이 있으니 우리는 분명 큰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은 고사하고 그분의 일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복음 사업을 주도하시는 성령께 의탁하면서 ‘부족한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당신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누가 가족끼리 좀 더 가까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줄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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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일 일기예보를 확인합니다. 운동으로 자전거를 타는데, 비가 오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즘 일기예보는 거의 정확합니다. 몇 시쯤 비가 온다고 하면, 정말로 그 시간에 비가 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정확한 일기예보를 우리는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고서 안심하고 오전에 나갔는데 비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결국 비를 쫄딱 맞으면서 자전거를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했어도 의외의 상황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하물며 우리 삶은 어떨까요?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상대로 정확하게 되던가요? 너무나 자주 우리 삶은 정확하지 않은 결과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몇 년 전, 네덜란드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안내해주시던 분이 “이 나라의 일기예보는 너무 정확합니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일기예보가 거의 “맑음, 흐림, 비”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워낙 날씨가 불안정해서 맑았다가 흐렸다가 또 비까지 쏟아질 때가 자주 있어서, 경우의 수에 늘 맞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행복의 기운을 느끼는 ‘맑음’의 삶만이 나의 삶이 아닙니다. 우울한 ‘흐림’의 삶도, 또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 찬 ‘비바람’의 삶도 분명히 우리 삶입니다. 이 모든 가능성을 인정해야, 비 올 것을 대비해서 우산을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 삶을 잘 준비해서 어렵고 힘들 때를 거뜬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흐르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뜻에 맞게 흐르는 세상임을 인정하고 그 주님의 뜻을 찾고 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려울 때의 준비를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갈 곳은 하느님 나라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을 본 사람이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 표현은 요한 복음에서 다섯 번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께 맡기셨기에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하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통해서 자기 원하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완전한 예수님께 대한 믿음보다 불완전한 세상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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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요한 14,6-14 (아버지께 가는 길)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길>
길
이으니
살림이다
길
살리니
진리이다
길
진리니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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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 달리 얘기하면 이 세상에 오신 이분은 어떤 분이실까? 구원하려고 오신 분일까 아니면 심판하고 벌하려고 오신 분이실까?
이에 대해 당신은 절대로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다르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보면 다르게 믿는 존재가 나옵니다. 다름이 아닌 더러운 영들입니다.
더러운 영들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시자 이렇게 외치지요.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런데 사람한테는 그렇게 되지 않지만 하느님께는 믿는 대로 됩니다. 사람한테는 믿는 대로 안 되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는 믿는 대로 되기에 주님께서는 내내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런데 이는 이런 말도 되는 거지요. 주님을 구원자로 믿음이 너를 살렸다! 주님을 심판자로 믿음이 너를 심판했다!
그러므로 빛으로 오셨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빛으로 나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믿으면 우리가 어둠 속에 머물지 않고 빛 가운데로 나올 텐데 빛으로 나를 단죄하러 오셨다고 믿으면 단죄하는 빛을 피하여 어둠 속에 머무르겠지요.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죄의 어둠을 감추고 숨으려는 사람에게는 빛이 단죄겠지만 죄의 어둠을 드러내고 벗어나려는 사람에게는 빛이 용서입니다.
옷이 더러움을 탔습니다. 정말로 아끼는 옷이 그리되면 어떻게든 원상 복구하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별로 아끼지 않으면 그냥 처박아두거나 버려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그렇습니다. 나와 나의 인생을 정말로 사랑하면 죄를 씻으려고 할 것이며, 깨끗이 씻어지도록 자기 죄를 하느님 사랑 앞에 내놓을 것입니다. 다윗이 히쏩의 채로 내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라고 한 것처럼.
그러나 자기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죄는 덮어버리고 하느님이 아니라 어둠과 동거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책감으로 하느님 앞에서 숨은 것처럼.
원래는 죄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썼는데도 거듭 죄를 지어 자기를 포기하게 되면 그때 죄를 덮으려고 어둠을 사랑하거나 사랑까지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어둠을 편하게 생각하고 어둠과 동거하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죄지은 나를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하느님 사랑의 내가 되지 않으면 나는 나를 얼마든지 포기하고 어둠과 동거할 것이며 빛도 하느님의 용서가 아니라 단죄로 오해케 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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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순례 여정>
-영원한 도반인 주님과 형제들과 함께-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열정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교황님의 영적 건강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제41차 해외 사목 방문후 귀국 시 비행기 내에서 인터뷰 한 대목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다음엔 마르세이유, 다음엔 몽골에 여행할 것입니다. 다음엔 다른 곳이 있을 것입니다. ‘내 일정이 계속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my schedule keeps me moving)’”
우리의 하루하루 날마다 순례 여정 중 규칙적인 일과에 따른 삶이 얼마나 한결같은 삶에, 영적 건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하루의 일과표에 충실할 때 길을 잃지 않을 것이며 저절로 확보되는 영육의 건강입니다. 교황님이 참 강조하는 면은 역동적 삶입니다. 계속 움직여야 함을 참 많이 강조합니다.
5월의 기도지향은 교회의 활동과 단체들에 대한 선교 사명의 강조입니다. 교황님은 그들이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에 대해 성령의 충동에 따라 응답하여 교회와 조화 중에 머물면서 언제나 움직임중에 있어야 한다. 조화는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활동들과 단체들은 날마다 그의 사명을, 복음화한 사명을 발견해야 하고 그들 자신의 은사를 세상이 필요로 하는 섬김의 자리에 놓아야 한다.”로 결론을 맺습니다.
강조되는 말마디는 ‘날마다’ ‘세상’ ‘섬김’입니다. 순례 여정 중인 교회공동체는 결코 세상과 유리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세상 한복판에 있는 우리 순례 여정 중인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계절의 여왕, 5월 성모성월답게 어제도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고,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찾았고 고백성사도 봤습니다. 새삼 세상에 필요에 응답하면서 존재 자체로 선교와 섬김의 사명을 다하는 요셉 수도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저의 수도여정중 결정적인 전환점은 산티아고 순례 여정 후일 것입니다. 삶은 여정임을 통절히 깨달았고 그 깨달음은 지금도 계속 새롭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중 삶의 여정을 인생사계(人生四季)로 비유한 묵상입니다. 우리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즉 일년 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제 써놓은 인생사계란 글도 생각납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다
인생사계(人生四季)도 그렇다
봄엔 봄처럼
여름엔 여름처럼
가을엔 가을처럼
겨울엔 겨울처럼 산다
인생사계(人生四季)도 그렇다
비교할 것 없다
부러워할 것 없다
오늘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과거와 미래는 하느님께 맡기고 인생사계 어느 때든 새롭게, 좋게, 아름답게 살 일입니다. 오늘 하루 새롭게, 좋게, 아름답게, 잘 살면 어제는 저절로 치유되고 내일은 내일대로 잘됩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해도 충분합니다.
지난 주 가톨릭 신문과 가톨릭 평화 신문의 1면 톱기사는 똑같이 코로나 이후 이완된 교회 공동체의 심각성에 대한 일치된 우려였습니다. 한마디로 순례 여정중의 교회 공동체를 떠난 길 잃은 영혼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주일미사 참례율이 11.8%라 하니 심각성을 이해할만 합니다. 더불어 순례 여정 교회 공동체에 다시 합류함으로 속히 방황에서 벗어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더불어 순례 여정중인 우리에게 금과옥조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바로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라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한 요한복음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최고봉이요 요약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우리 더불어 순례 여정 교회 공동체의 자랑은 이런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기에 결코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것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에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환 여정인 것입니다. 다음 베네딕도 규칙도 이에 화답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새삼 천국입장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얼마전 공동소풍을 통해서도 새롭게 확인한 진리입니다. “함께”했기에 환선굴 소풍도 가능했지 “혼자”라면 재미도 의미도 없고 엄두도 못낼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에 혼자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며 바로 천국입장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두분뿐 아니라 나머지 열분의 사도들마다 색깔이 다 다릅니다. 한명도 힘든데 이 다양한 열둘의 제자들과 함께 한 예수님의 리더십에 경탄하게 됩니다. 열두 제자들중 유다는 배신으로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했고, 장수를 누린 사도 요한을 제외한 열은 한결같이 사도로 파견되어 복음 선포 사명을 실천하던 중 순교했습니다.
분명 스승 예수님과 함께 했던 추억이, 또 언제나 함께 하는 파스카 예수님 은총이 사도들에게 지칠줄 모르는 선교 열정의 원천이 되었음을 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귀한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에 주시는 복음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음은 열둘의 제자들 공동체나 우리 요셉 수도 공동체나 똑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의 갈망은 인간 모두의 근원적 갈망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 살고 있는 우리 수도형제들을 향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집은 수도원에서 몇십년을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는데 아버지와 하나되어 사시는 주님을 모르느냐고 묻습니다. 더불어 순례 여정과 함께 가는 주님과 형제들과 우정의 여정입니다. 공동체의 평화로움과 자유로움이 바로 주님과 형제들간의 깊은 우정의 정도를 반영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이신 파스카 예수님과 우정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그리움, 외로움, 기다림의 갈망도 점차 사라져갈 것입니다. 이미 주님과 일치의 충만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도 우리를 격려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자 복음의 핵심인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굳건히 정주의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 들여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는 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형제들과 함께, 복음을 믿는 우리 순례 여정 중인 교회 공동체는 그대로 구원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순례 여정중 우리 모두 지상천국의 구원의 공동체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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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아버지께 가는 길>
오늘 복음(요한14,6-14)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왜 믿고, 왜 성당엘 다니고, 왜 성체를 받아 모시려고 하는가? 하느님을 믿고, 성당엘 나와서 성체를 받아 모신 이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늘 이 두 질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질문이 늘 내 마음 속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14,6)
믿음의 여정은 아버지께 가는 여정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리고 그것들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주어지는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러한 것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 바로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이 예수님께로 향해 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모든 행위를 그대로 따라가야 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4,12)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다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인 완전한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청합시다! 이를 얻기 위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늘 향해 있게 해달고 청합시다! 이를 얻기 위한 끊임없는 회개의 세례가 내 안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끄시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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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5rXxT3G46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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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 14)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길이 열리면
진리가 열리고
생명이 열리고
함께하시는
주님이
보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가 아닌
생명의
주재자이신
우리의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당신과 함께
나누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기도를
다 이루어 주시는
분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기도로
주님을 알게되고
기도로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소중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따뜻이
들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에게서
가장 먼 우리를
몸소 주님께서
우리를 보러
우리에게
오십니다.
비우고
또 비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수 없이
비워내시는
주님이십니다.
비워야
길이 보이고
진리가 보이고
생명이 보입니다.
구원의 시작은
언제나 절박한
기도입니다.
기도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며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공동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자체가
가장 큰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언제나 뒤 늦게
깨닫습니다.
우리의 못나고
어리석은 마음을
기도로 봉헌하는
아침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기도의
오늘입니다.
비우고
내려놓는
주님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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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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