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과 한국 교회에 보내는 교황 메시지
지혜 1,13-2,24; 2코린 8,7-15; 마르 5,21-43 / 연중 제13주일; 2024.6.30.
1. 엄동설한에 피어난 꽃, 한국교회
한국교회에서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6.29)과 가까운 주일에 교황 주일을 지내는 고유한 전통을 간직해 왔습니다. 그것은 엄동설한에 피어난 꽃처럼, 18세기 말에 참으로 오묘한 섭리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한국교회가 생겨난 이래로, 백 년 박해를 견디어 내고 서구의 선진 교회들보다 더 역동적인 성장 과정을 보여 준 한국교회에 대하여, 역대 교황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경외심으로 각별한 관심을 표명함과 동시에 교계 제도를 설정함은 물론 순교자들을 복자와 성인으로 공경할 수 있도록 이례적인 배려를 베풀어 한국교회의 성장을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2. 정성껏 가꾸어 한국교회를 거목으로 키운 교황청: 교계제도와 성인 공경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한국교회 신자들은 교회의 형편과 박해의 상황을 알리면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고, 드디어 183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 대목구(교황 대리 감목구 敎皇代理監牧區의 준말. 신생 교회에 대하여 교황이 대리인을 보내어 정식 교회로 출범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를 설정하고 한국교회의 사목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순교자 79위가 시복되었고, 이후 1962년에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기까지 11개의 대목구와 지목구(知牧區. 지목구는 교회법상 교구에 준하는 개별 교회로서, 어느 교구에도 예속되지 아니하고 경계가 명확한 관할구역을 배당받는 교황 파견선교구이며, 정식 교구의 전단계.)가 증설되었는데 이는 아시아의 다른 교회들에 비해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신자가 급증하는 한국교회에 대해 역대 교황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배려해 준 결과였습니다. 또한 1968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24위에 대한 시복식이 두 번째로 거행되었고, 1984년에 103위의 순교자들을 시성하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였고, 1989년에 세계 성체대회를 주관하러 두 번째로 방한하였으며,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124위 순교자를 시복하러 방한하였습니다.
3.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메시지
이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메시지를 여러 자리에서 발표하였습니다.
한민족에게: 우선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와대에서 방한 첫 메시지를 평화에 대해 전해주었습니다. 오랜 박해와 식민 지배 그리고 분단의 고통 등으로 평화를 잃어버린 채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사 32,17)라는 지혜를 일깨워준 것입니다. 즉, 한민족의 평화를 앗아간 가해자들은 조선 조정이요 일본 군국주의 세력인가 하면 미국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들인데, 역설적이게도 피해자인 한민족이 먼저 정의로운 삶을 증거함으로써 빼앗긴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는 하느님의 섭리를 역설하였습니다.
주교들에게: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천주교회 주교단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교회 쇄신을 당부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 사제들에게 권고합니다. 세속화와 능률화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바쳤던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의 지킴이가 되고, 그 순교자들이 증거했던 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복음 진리에 대한 희망의 지킴이가 되십시오.”
신자들에게 보낸 사회적 메시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시 사실상 신자들과의 첫 만남은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거행된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였습니다. 이 미사에서 교황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삶과 그 품위를 천상의 상급으로 심판해 주신 승천의 신비로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표양이요 목표임을 언급하면서 일종의 영적 전투에 임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를 상기시켰습니다.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정신적 쇄신을 가져오는 풍성한 힘이 되기를 빕니다. 그들이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 생명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모상을 경시하고, 모든 남성과 여성과 어린이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기를 빕니다.”
신자들에게 보내는 영적 메시지 : 그리고 드디어 교황은 124위 순교자 시복미사를 봉헌했으며, 사회악에 대한 거룩한 분노와 형제애에 대한 자비로운 연민의 마음을 보여준 이 순교자들의 모범을 그 후손들인 지금의 한국 가톨릭신자들이 본받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강론했습니다.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 막대한 부요함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줍니다.”
수도자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복미사를 마친 후 꽃동네에 있는 사랑의 연수원으로 가서 남녀 수도자들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께 사랑 받고 있다는 굳건한 확신이 여러분 성소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 사랑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수도자입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보여 주는 만질 수 있는 표징이며,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기도 생활과 하느님 말씀 묵상과 성사 거행과 공동체 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관상을 더 지향하든 활동 생활을 더 지향하든, 수도자 여러분의 과업은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생활은 마음의 양성을 위한 섭리적인 토양입니다. 아무런 갈등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바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자비와 인내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성장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진리와 공동선에 대하여: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시아 주교들에게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대화를 강조하였고, 아시아 청년들에게는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가운데 하느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하나인 교회를 일으켜 세우라고 당부하였습니다. 한국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진리와 공동선을 향하는 길에 함께 가는 여정에 대하여 상기시키며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는 모든 한국인이 같은 형제자매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한국인으로서, 이제 의심과 대립과 경쟁의 사고방식을 확고히 거부하고, 그 대신에 복음의 가르침과 한민족의 고귀한 전통 가치에 입각한 문화를 형성해 나가기를 요청한 것도 특기할 만 합니다.
4.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메시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신자들에게 보낸 메시지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보낸 총론적 메시지 위에 보탠 각론입니다. 어찌하여, 이 교황이 다른 나라 교회를 방문할 때와는 분명하게 구분될 정도로, 한국교회를 방문해서는 구체적이고 간절한 교회 쇄신의 메시지를 여러 계층에게 골고루 전했는지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메시지를 이해해야 비로소 밝혀집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다른 나라 교회에 비해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유난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각별한 섭리를 받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무려 25년 동안 교황직에 있으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늘 기도목록에 ‘한반도’를 올려놓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세계교회역사상 처음으로 자생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선각자들의 땅, 백 년 박해를 보란 듯이 이겨낸 순교자들의 땅, 그러면서도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갈라진 땅, 이 한반도에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섭리가 빛을 발하여 신앙의 진리가 평화의 진리로 피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잊어버린 인류가 한반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목격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첫 번째 방문은 한국교회가 청했지만 두 번째 방한은 요한 바오로 2세가 자청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 2,14)라는 성경 말씀을 친히 주제로 정해주어 서울에서 세계 성체대회를 개최하도록 함으로써,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의 주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바야흐로 한반도에서 시작될 인류 평화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황의 역할 또한 매우 이례적인 경우입니다.
5.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기억과 희망을 바치면 한반도 평화는 덤으로 주어지리라
이로써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이 두 교황은 순교자들을 시복 시성하고 교구들을 설정해 주며 성체대회를 유치하도록 권하고 직접 방한하여 주관하는 등 한국교회의 제도를 설정하는 동시에 순교정신을 현양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한국 교회와 신자들이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대신에, 은근히 그러나 내심 크게 기대하는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한국 교회와 신자들이 나서 달라는 것입니다.
아시아 복음화에 있어서는,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 종교들과의 대화, 문화들 간의 대화, 이렇게 삼중의 대화가 필요한데, 한국 교회는 아시아 지역교회들 사이에서 이 삼중 대화를 선도할 역량을 보유한 교회로서 아시아 복음화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고 아시아 주교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토록 한국교회에게 공을 들였던 숨은 이유가 아시아 복음화였는데, 원대한 이 목표를 위해 나서기 위한 채비로 교회를 쇄신하라는 뜻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가 그토록 절절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 되면 우리 민족의 그토록 바라는 한반도 평화는 예수님 말씀대로, 덤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깔고 있는 복음적 가르침이었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아시아 복음화, 이 두 가지 지향이 역대 교황들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로 피어난 복음의 꽃인 한국교회가 기억의 지킴이요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 교회를 쇄신함으로써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