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1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이스라엘이 행한 두 가지 악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으로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입니다.
나 또한 날 위해 생명 주신 우리 주님을 내 마음대로 홀대하며 나 중심적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오니 이 종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이 주신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생명의 농사를 지어야 함에도 내가 보기에 좋은 웅덩이를 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나의 노력과 애씀으로 행했을지라도 그것은 터진 웅덩이라서 아무 것도 보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죄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소서.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춰주소서.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 주의 정결한 신부로 세워주소서.
오늘도 새로운 한 날을 주셨사오니 세상에 속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부요한 자 되어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하 16:15-23
제목 :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인간 모사꾼들 곧 멘토들의 조언이 아니다.
15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6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9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2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 나의 묵상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다윗은 그의 신하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감람산을 넘어 광야로 피신을 한다.
그 과정에서 시바와 시므이를 만난다.
시바는 그의 주인 므비보셋의 소유를 가지고 다윗에게 친절을 베푼다.
무엇보다 그의 주인 므비보셋을 다윗에게 모함해서 주인의 모든 재산을 빼앗는다.
시므이는 자기와 친족이었던 사울의 왕좌를 다윗이 빼앗았다고 하면서 그를 저주하고 모욕을 한다.
아비새가 그를 죽이려 하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통하여 나를 심판하고 계시는 것일 수도 있다면서 그를 말린다.
이렇게 곤혹스러운 일들을 겪으면서 그의 신하들과 함께 요단 나루에서 잠시 쉰다.
한편 그런 사이에 압살롬은 그를 따르는 백성들을 데리고 아히도벨과 함께 예루살렘에 이른다.
거의 같은 시간에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도 압살롬에게 와서 압살롬 왕 만세를 외친다.
이에 압살롬이 후새 네가 어찌 네 친구 다윗을 따르지 않고 나를 따라왔느냐고 하자, 후새가 말하기를 나는 이전에는 왕의 아버지를 섬겼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한 왕 곧 압살롬을 섬길 것이라고 한다.
한편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모략을 말하라고 하였다.
이에 말하기를 다윗이 왕궁을 지키라고 남겨 둔 후궁들과 왕이 동침하라고 일러준다.
그렇게 하면 왕이 다윗에게 미움 받을 일을 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고 그로 인하여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이 더욱 힘을 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왕궁의 옥상에 천막을 치고 압살롬은 온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을 하였다.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으로 여겼다.
그것은 다윗이 그러했었고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다윗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에 대한 정체성이 분명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왕 삼은 것 또한 알았다.
(삼하 5:12)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하여 그는 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다.
이를 위해서 언약궤를 다윗성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
그의 곁에는 인간 모사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곁에 있었다.
이에 반하여 압살롬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아니다.
후새가 압살롬에게 한 말 곧 여호와께서 택한 자가 압살롬이라는 말은 단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해주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압살롬은 여호와께 묻지도 듣지도 않았으며 단지 인간 모사꾼들을 의지할 뿐이다.
그는 왕으로서 어떠한 결정도 하지 못하며 도리어 뒤로 물러나 있으면서 모사꾼들을 통해서 통치하는 것이다.
압살롬의 모사로 전면에 나선 사람은 아히도벨과 후새이다.
후새는 다윗의 모사였지만 밀사로 특명을 받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폐하기 위하여 잠시 압살롬에게 와 있을 뿐이다.
한편 아히도벨의 모략은 마치 하나님께 묻고 받은 말씀처럼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압살롬이 명하여 낸 그의 첫 번째 모략은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여 그 왕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이 이를 엄히 금하기 때문이다.
(레 18:8)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
그런데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에 따라 율법의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인간 모사꾼들의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이나 직장 그리고 사회 심지어 교회와 같은 공동체에도 얼마나 많은 멘토들이 존재하는가?
교회를 맡아서 사역하는 목사들의 경우 많은 경우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멘토가 되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잘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서슴지 않고 자처한다.
가히 오늘날은 멘토들의 시대요, 멘토의 홍수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가정 행복을 위한 행복전도사들의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만큼 개인과 가정 그리고 직장 등의 공동체가 분열의 수준을 넘어 파괴의 수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들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도들의 조언자 곧 멘토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가 담임목사에게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할 경우 이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자의 정체성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런 상담을 위하여 목사들이 개별적으로 상담학을 공부한다거나 이를 확장시켜서 신학교에도 목회상담학이라는 코스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목사가 아무리 상담을 잘 하고 그들을 행복한 가정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그것이 목회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정이 행복하고 평안하다 할지라도 이를 통하여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문제는 생명이다.
그 생명은 단순히 우리에게 붙어 있는 목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목숨은 들숨과 날숨으로 연명되어지는 헬라어로 ‘프쉬케’이다.
이 프쉬케는 들숨을 막고 몇 분만 지나면 사라지고 마는 목숨이기에 그것은 온전한 생명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진짜 생명은 영생이며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내 몸의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연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갖는 교제와 사귐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오는 지혜야 말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사귐은 우리의 생각이나 관념적인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삼위 하나님의 실체이신 성령 안에서 말씀으로 가능하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나는 이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한 채 그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들을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할 수 있을까에 골똘했던 적이 있었다.
교회 개척 전에는 부교역자로서 성도들이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면 그들의 마음을 품고 함께 기도하곤 하였다.
상담을 전공한 것도 아니기에 그저 선천적으로 받은 성품이 온순해서 많은 성도들이 쉽게 다가오기도 하였다.
그런 목회의 패턴은 교회를 개척하고 단독 목회를 할 때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어떤 공동체일지라도 문제가 없는 곳이 없으니 말이다.
교회공동체 역시 문제투성이다.
교회의 크고 작음에 상관이 전혀 없다.
교회를 개척하고 규모가 작을 때는 성도들의 아픔이 더 잘 보인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이 상담 요청을 하기 전에 나의 눈에 띄어 내가 먼저 부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 상담목회의 결론은 내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문제 해결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조언도 하고 상담을 하면 잠시는 괜찮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옛날 모습으로 회귀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상담의 내용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거의 대부분 땅의 것, 만물 안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해결한다한들 들의 풀이나 풀의 꽃처럼 쉬이 떨어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쇠락의 법칙과 같이 말이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이런 것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때 나에게 아주 귀한 선물이 도착하였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었다.
만물 안에 있는 각종 문제들이 거듭될 때 그것이 문제가 아님을 알려주는 하늘의 말씀 곧 영생의 복음이 내게 온 것이다.
그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나는 이리저리 온 데 얽힌 실타래가 풀리는 출구를 찾은 느낌이었다.
목회를 하다가 맞는 어느 사건 하나에 매여서 그것에 집중하여 풀고자 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순간이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렇게 이 복음을 생명으로 얻어서 오늘도 그 은혜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명임을 알기에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의 교제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음을 알고 말씀 앞으로 나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그 일을 이루시는데 걸림돌인 압살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을 왕위에서 축출하고 자기가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그는 인간모사꾼들을 동원하여 인간적 술수로 자기의 왕국을 꾸리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인간적으로 가장 연약한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연한 순(筍) 같고 고운 모양이나 풍채도 없으며 어느 한 구석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무시를 당한 채로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가장 연약한 자가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가 나를 나 되게 하심을 믿습니다.
용사나 하늘의 장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나의 주님이심을 믿게 하시오니 그 믿음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베푸신 그 은혜 안에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