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로 가는 길. ‘서편제’ 작가 이청준의 고향 장흥을 거쳐 녹차와 소리의 고장 보성, 그리고 조정래의 ‘태백산맥’ 무대인 벌교를 지나 버스는 중모리 장단처럼 담담하게 굴러간다. 겨울이건만 웬일인지 포근한 날씨 덕에 땅은 노곤하게 풀려 있고 밭에선 아낙들이 모여앉아 무언가를 캐내고 있다.
푸른색이 선명한 것은 아마도 보리 순일 것이다. 파릇한 보리 순에다가 홍어 내장이며 된장을 넉넉히 풀어 쌉쌀하고도 구수한 보릿국을 끓일 요량일 게다. 평야가 끝났는지 버스가 가파르게 산굽이들을 돌아 내리친다. 곧 여수터미널이다.
수억만 개 비늘이 반짝이고 있는 푸른 바다, 그리고 자잘한 섬들. 찡하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동백잎을 스쳐온 바람에 바닷소리가 솔찬히 얹혀 있다.
여수에서 대폿집 ‘말집’을 가는 길은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이 동행하기로 했다. 선생은 여수가 고향이다. ‘말집’은 그의 어릴 적 친구이자 이곳에서 소문 없이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으로 유명한 임용택씨가 소개했다. 임 선생은 막걸리 회사 사장이다. 막걸리를 대는 여수 안팎 750군데 주점 가운데 그가 주저하지 않고 ‘최고’로 꼽는 집이 바로 ‘말집’이다. “오래되고 소박하지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최후의 대폿집”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오동도 쪽으로 가다가 공화동 샹보르 호텔(구 세종호텔) 앞에서 두 분을 만나 호텔 옆 골목길로 150m 가량 올라가니 언덕 위 양지녘에 ‘말집’이 보인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이채로운 연탄불 화덕 3개가 보인다. 벽쪽에는 까만 연탄이 서로 키를 재듯 나란히 쌓여 있다. ‘함무니’(?) ‘어무니’(?) 넉넉한 인상의 아낙이 우리를 맞이한다. 큼지막한 창문으로 연신 햇볕이 쏟아지는데 어찌나 따뜻해 보이던지 마치 햇볕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때 이 근처엔 ‘신항’이라는 부두가 있었다. 전라도의 동쪽 곡창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수탈해 반출하는 전진기지였다. 그 곡물을 운반하는 마차를 끌었던 말을 주위에서 길렀다 해 대폿집 이름이 ‘말집’이다. 일본으로 보내지는 쌀섬을 실은 마차를 힘겹게 끌었을 말이 떠오른다. 마부들이며, 노무자들이 그때부터 이 집에서 한잔 술로 애환을 달랬다니 ‘말집’은 60년을 훨씬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지가 55년 단골인디요, 그 전서부터 ‘말집’이 있서수라우.” 옆 좌석에서 혼자 막걸리를 드시던 복덕방 할아버지 말씀이다.
‘말집’ 주변은 비극의 여순사건 현장이기도 하다. “근처에 경찰서가 있어서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노인은 증언한다. 고난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지금은 긴 불황의 터널 속에서 일을 못 찾아 헤매는 많은 젊은이들이 ‘말집’ 주변을 서성인다. 원래 주인이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지금은 15년 전부터 예순넷 되신 신강수 아주머니가 ‘말집’을 이어간다.
연탄불 화덕에 석쇠를 올려놓고 그 위에 돼지껍데기를 굽는다. 껍데기는 거저 주는데 굉장히 푸지다. 바삭하게 구운 껍데기를 그냥 먹기도 하고 된장에 찍어 양파랑 깻잎에 말아 먹기도
한다. “그만”을 외쳐도 아주머니는 자기 피붙이 먹이듯 자꾸 자꾸 돼지껍데기를 가위로 잘라준다. 1500원만 있으면 배부르다. 막걸리 한 병에 돼지 껍데기는 거의 무제한이니까. 환경미화원, 택시기사, 공단 근로자, 일용직 노무자, 그리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이 집 손님들이다.
하루종일 일하면서 쌓인 목구멍 먼지를 돼지껍데기와 막걸리로 씻어내는 것이다. ‘말집’의 돼지 껍데기는 단연 ‘전국 최고’라고 꼽고 싶다. 껍데기 하면 마포 굴레방 다리 밑이나 홍대 앞, 왕십리, 삼각지를 치는 분도 있겠지만 담백하고 쫀득한 육질로는 ‘말집’을 못 따라간다. 게다가 공짜다. 한 단골 손님이 술김에 공치사를 한다. “과분께 더 조치라이~. 2~3년 후제(후에) 시의원 나올 것이여. 머시냐, ‘말집’ 하문 다 알것이어. 인심이 무자게 푸저부러."
여기에 소금 뿌려 연탄불에 구워먹는 싱싱한 겨울 전어며 볼낙이 기가 막히다. 알아준다는 ‘거문도 돗병어’도 나온다. 반쯤 얼어 있는 병어를 잘게 썰어 양념장 찍어 먹는 것인데 너무 달다. 또 있다. 반쯤 건조한 장어를 역시 화덕에 아무런 양념 없이 그냥 굽는다. 이것이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것’이라며 바닷가에서 자란 배 선생은 어린아이마냥 즐거워한다. 내가 감탄을 연발하자 아주머니는 “꿀(굴)을 꾸면 맛이 기가 막힌디…”라며 마침 그날 생굴이 없음을 애석해 한다. 나도 애석하다. 오늘 꿀이 없는 것이….
배 선생과 임 선생은 서로에게 막걸리를 부어주며 어릴 적 친구인 여수 출신 화가 손상기(1949~1988)를 이야기한다. 초등학교 때 척추를 다쳐 성장이 멈추는 불구가 된 손 화백은 39세로 요절한 ‘한국의 로트렉’이다. 그의 작품 ‘자라지 않는 나무’가 문득 생각난다. 임 선생은 흔한 휴대폰이며 자가용 없이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괴짜다. 지역 화가들이 전시회를 열면 앞장서 그림도 사주고 뒤풀이가 열리는 대폿집에서는 계산도 도맡는다. 배 선생과 임 선생은 초등학교 단짝 김정수(방송작가), 정종영(전 공간사 사장)씨 등과 돌섬 앞 바다에서 발가벗고 헤엄치던 추억을 떠올린다. 여수의 맑고 푸른 바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IMF 때는 많은 이들이 ‘말집’에서 아주머니가 제공하는 무료 식사로 끼니를 때운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덕에 5남매가 다 잘됐다”고 아주머니는 말한다. ‘말집’은 추운 그늘로부터 따뜻한 햇볕을 찾아 모이듯 고단한 사람들이 모여 쉬는 쉼터다. 노가다 한다는 젊은 손님이 혼자 술만 마신다. 아내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오늘 일감을 못 잡았단다. 원래는 고깃배를 탔다고 하는데 요즘 어장이 거의 고갈상태란다. 그런가 하면 요란스럽게 문 여는 소리가 나며 하루 일을 끝마친 젊은 일용자들이 작업복을 그대로 입은 채 “어무니~”를 부르며 왁자지껄 들이닥치기도 한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말집’엔 빛이 가득하다. 빛이 오글오글 모여 들끓는다. 이 기진맥진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말집’에 모여들어 또다시 맞이한 겨울을 이겨내려 한다. 배 선생이 혼자 중얼거린다. “사람 사는 곳이다."(화가/사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