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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 대리에서 여강까지
(2014. 7. 1 : 대리-여강)
▲ 창산의 구름이 낮게 내려온 호텔의 아침 풍경
오늘은 7시에 기상하여 9시에 창산(苍山)에 올라야 한다.
다른 분들은 식전에 벌써 한두 시간 고성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아, 나는 아침을 먹고 1시간쯤 돌아다니려고 작정하고 있었지 않은가.
입장료도 주지 않았고, 멀리 가 뜻밖의 풍경도 만났고, 아이들이 등교하는 장면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는 자랑을 들으며, 늘 한 박자 늦는 자신을 나무라며 때늦은 후회를 해본다.
사실 일출과 일몰 전후의 한두 시간이 빛이 가장 아름다운 때임을 왜 모르랴.
하지만 먹고 마시는 여행에 익숙한 우리는 모든 사물들의 음영이 잘 드러나, 풍경과 인물의 옆모습이 가장 뚜렷한 이 환상적인 시간을 놓치고 만다.
특히 여행자라면 당연히 사진 찍기에도 가장 좋은 이 햇귀 밝아오는 아름답고 역동적인 새벽풍경에 대한 욕심을 가져야 한다.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히말라야의 동쪽 마지막 봉우리인 창산은 해발 4,122m로 대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산이자 대리석 주산지로도 유명하다.
대리에 와서 창산을 오르지 않으면 대리에 가봤다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창산은 얼하이(洱海)호와 더불어 대리를 싱징하고 있다.
창산은 그 하늘색과 더불어 사시사철 비취색을 띠어 붙여진 이름이고, 특히 창산의 구름은 ‘망부운’ ‘옥대운’ 같은 이름까지 따로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이 땅에서 번영을 누렸던 대리국 사람들의 자긍심과 미의식을 느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주로 겨울과 봄에 정상에 나타나는 구름을 ‘망부운(望夫雲)’이라 부르는데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구름이란 뜻으로, 매년 망부운이 나타날 때 어부들이 이해호수에 나가 배를 띄우면 광풍이 불고 거센 파도가 일어 남편을 잃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또 ‘옥대운(玉帶雲)’은 창산 허리를 옥대로 두른 것처럼 보이는 구름을 말하는데, “창산이 옥대를 둘렀으니 굶은 개도 쌀밥을 먹을 수 있겠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족은 옥대운을 풍년의 징조로 여긴다고 한다.
대리에서 창산을 오르는 코스는 3곳인데, 오늘 우리는 제일 왼쪽의 감통(感通)삭도를 타고 오른다.
가운데 세마담(洗馬潭)삭도는 요즘 운행하지 않아 제일 오른쪽 중화(中和)삭도로 오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삭도 아래는 등산로도 잘 닦여있어 시간이 넉넉한 여행객들은 두세 시간 등산으로 케이블카 종점까지 올라, 창산의 허리를 감도는 산책로인 옥대운유로(玉帶云遊路)를 따라 양쪽 삭도 사이 12km를 이해를 내려다보며 트래킹을 즐긴다고 한다.
특히 세마담삭도는 무려 4000m까지 올라가 불과 122m 위쪽에 있는 창산 최고봉 마룡봉(馬龍峰)을 바라본다니 참으로 놀랍고도 대단하다.
대리고성이 해발 2000m 정도이니 케이블카로 단숨에 2000m를 오르면 고산증은 얼마나 심할지, 경관은 또 얼마나 장대할지 꼭 한번 체험해보고 싶어진다.
▲ 高差:世界第一, 爬坡:全國之最(고도차이는 세계 제일, 오르막길로는 전국최고). 대단하다.
케이블카에 앉아 발밑을 내려다보니 온통 잣나무가 숲이 아니라 아예 바다를 이루고 있다.
손에 잡힐 듯한 잣나무 열매와 연무에 가려진 이해호를 번갈아 바라보며 10분 이상 올라 산기슭을 넘어서니 저 아래 삭도정거장이 조그맣게 보였다.
케이블카가 속도를 줄여 천천히 정거장으로 내려가니 창산 18계곡 중 가장 아름답다는 청벽계대협곡에 걸린 폭포와 그 왼쪽 위 바위벽에 붉은 색으로 커다랗게 새겨놓은 ‘우혈(禹穴)’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禹’라니? 그럼 하(夏)나라를 세운 우왕이란 말인가.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정말 치수(治水)의 공적으로 순(舜) 임금으로부터 나라를 물려받은 전설의 우왕이 살았던 동굴이란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또 하나 재미있는 기사도 떠있었다.
중국의 고대 지리인문서이자 신화집인 『산해경(山海經)』를 번역한 오정교란 분이 대리를 답사하여 창산(점창산)이 『산해경』에 나오는 곤륜산(崑崙山)이고 얼하이호는 곤륜연, 그리고 치우가 헌원과 싸우다가 죽은 풍목을 이 대리에서 확인했다는 글이다.
궂은 날씨 때문에 창산과 이해의 진면목을 느낄 수는 없지만 ‘우혈’ 하나만으로도 신화의 무대를 거닌다는 설렘은 느껴진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처음 만난 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장기판이었다.
관광안내서에 ‘진롱기국(珍瓏棋局)’이라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장기판 저 끝에는 포토존으로 설치해 놓은 듯한 동상이 있어 다가가보니, 안내문은 없지만 세 명의 신선이 앉고 서서 고담준론을 나누는 모습이다.
다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둘은 신선과 고승의 모습이 분명하니, 그럼 서있는 분은 애매하지만 유가(儒家)의 현자쯤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 둘러보니, 창산이 신선들이 살았던 신령스러운 산이니 이 정도 스케일의 장기판쯤 되어야 어울릴 것이라는 중국인의 허풍이 이해된다.
관광객들은 찻잔이나 바둑판 같은 것이 놓여있어야 할 탁자위에 불경스럽게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희희낙락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짝궁과 나도 순서를 기다려서라도 어깨를 붙이고앉아 한 장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멋쩍은 짓거리 또한 여행의 유쾌함이다.
그 후 계곡을 따라 오르며 청벽계폭포까지 보고 대협곡관경대에 올랐지만 결국 비가 내리고 안개까지 몰려들었다.
관경(觀景)은 하늘이 말리니 어쩔 수 없다고 투덜거리며 서둘러 비옷을 꺼내 입고는 이내 내려와, 아쉬움을 안고 옥대운유로를 따라 서너 모롱이를 산책했다.
산책로는 잘 다듬어져 있고, 바위에 낙서(?)라고는 딱 하나, “森林如母 哺育你我”(숲은 어머니와 같아서, 너와 나를 먹여 기른다.)만 붉게 새겨져있다.
그 요란한 문화혁명기를 거치면서도, 창산의 신령스러움 때문인지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인지 알 수 없지만, 수년 전 금강산에서 본 것과 같은 치졸한 선전문구가 하나도 없다는 게 뜻밖이다.
우리 일행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야속하게도 이해호조차 연무에 가려 윤곽만 희미할 뿐 그 분위기를 알 수 없어 돌아섰다.
운남 여행은 반드시 여름철을 피해서 와야겠다. 중간쯤 오니 삭도 건물 지붕이 보이고, 아까는 보이지 않던 지름길이 눈에 띄어 쉽게 내려올 수 있었다.
케이블카도 금방 탈 수 있어서 시간이 넉넉하다.
감통사 입구의 풍성한 과일가게를 천천히 구경하고 버스에 올랐다. 경사가 심한 좁은 길을 내려오며 왼쪽의 ‘대리감통 별서(別墅)’라는 별장지대를 길게 통과했다.
올라갈 때도 보았지만, 전기를 넣어놓았다는 담장 위 철조망이 볼수록 볼썽사납고, 익히 들어온 사회주의 국가의 빈부 격차를 이 외진 운남에서도 목격해야하는 씁쓸함이 크다.
▲ 중국도 많이 달라졌다. 봉지속에는 소독된 그릇이 들어있다.
고성으로 돌아와 어제 저녁에 갔던 백족식당에 다시가 점심을 먹고 대리 투어에 나섰다.
3시에는 여강으로 출발해야 하니 2시간밖에 여유가 없어, 숭성사(崇圣寺) 삼탑과 이해호수 중 우리는 이해호를 선택해 2번 버스를 탔다.
버스비가 1.5위안이니 우리 돈으로 250원 정도로 일반 물가는 엄청 싸고 관광지 입장료는 상당히 비싼 편이다.
버스가 고성을 돌아갈 때 멀리 황금빛 삼탑이 보였다.
숭성사는 9명의 대리국 왕이 출가한 왕가사찰로 경내가 넓어 전동차로 관람한다고 하며, 또 삼탑 중 대탑은 높이가 무려 70m나 되는 16층 탑이고, 그 옆 10층 40m의 고탑 하나는 지진으로 피사의 사탑보다 더 기울여진 모습이라고 한다.
대리의 또 하나의 상징인 숭성사삼탑을 못 본 아쉬움을 달래며 2번 버스 종점에 내렸다.
백족이 사는 재촌(才村)이라는 동네였고, 호수가로 나가니 얼하이호 습지생태원이다.
대리자치주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바이족(白族) 중에서 이 마을은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일지 궁금하다.
‘재촌’이란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대리석을 다루는 영세한 석공이나 가난한 어부들이 사는 변두리 동네로 느껴졌고, 실제로 집 앞에 대리의 돌인 대리석(大里石)을 몇 개씩 모아놓은 집들이 자주 눈에 띄기도 한다.
습지생태원을 돌아 물가로 나가니, 가마우지는 뱃전에서 그리고 늙은 어부는 그늘에서 똑같은 자세로 앉아 졸고 있다. 얼굴이 익을 정도로 햇볕이 강한 대낮이라 우리 같은 생뚱맞은 관광객 이외는 접근하는 사람이 없어 사진모델 노릇을 한참 못했을 것이다.
따분한 풍경만 보고 돌아나오니, 어느새 보트를 타고 호수로 나가는 일행이 손가락을 세 개 펴고 요금이 30원이라는 사인을 보낸다.
이 얼하이(洱海)는 길이 42Km, 너비 9Km나 되는 해발 2000m의 고원지대에 있는, 이름 그대로 사람의 귀 모양을 닮은 바다 같은 호수다.
대리국의 번영과 부는 당연히 이 거대한 호수가 내어준 풍부한 물과 수산물이 그 원천이었을 것이다.
이 넉넉한 호수 속의 남조풍정도(南詔風情島)에 들어가, 호수 너머 눈 덮인 창산과 대리 시내를 건너다보며 조용히 하룻밤 에코-힐링하는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는 여유로운 여행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 짝꿍과 박선생께서 버스비 1元 5角을 만들기 위해 저 자세로 오래 서있다. ㅋㅋ.
종점으로 돌아 나와 버스를 기다리며 골목 안을 엿보니 어지럽게 붙어있는 광고판이 재미있다.
영해소원
(宁海小院: Ning Hai Guesthouse) • 별처고사청족(別处故事靑族:글자는 제일 쉬운데 해석은 전혀 안 된다) • 이해객잔(洱海客桟) • 아아화랑(吖吖畵廊-대리석을 이용한 예술작품 갤러리인 듯) 그리고 맞은편 벽에는 ‘해빈양인가재촌신농촌 건설발전규류(海滨洋人街才村新农村建設发展規刘)’라는 긴 제목의 약도가 소박하게 그려져 있다.
뜯어보니 <해변양인가재촌의 신농촌 건설발전 약도>쯤 될 것 같다.
골목 안을 돌아보고 싶지만 더위 속에 기다릴 사람이 마음에 걸려 포기하고 막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 대리고성 점묘 (마지막 사진의 낡은 지붕 위 잡초가 의연한 대리답다.)
버스가 고성 북문에 도착했을 때 서울의 박선생님과 세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어젯밤은 남문에서 중간에 있는 오화루까지만 걸었기 때문에, 다시 북문에서 남문으로 걸어나오며 고성구경을 더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북문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이 가게로 들어가는 사이 나는 북문 성루에 올라가 보았다.
사진에 담을 만한 풍광이 없어 조금 실망하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딱 내 기분을 누가 미리 알고 눈앞에 글로 남겨놓았다.
“登千年歷史古樓, 賞大理風花雪月”이라니, 이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인가.
하지만 대리의 상징어인 ‘풍화설월’을 제대로 느끼려면 대리에 얼마나 머물려야 할까,
그러면 아쉬움이 좀 누그러질까.
나그네는 길 위에 늘 애잔한 아쉬움을 남겨놓아야 한다.
가지 않은 길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듯, 미처 가보지 못한 곳이 남아있어야 눈앞의 풍경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다.
짧은 상념을 거두고 내려와, 출발시간을 의식하며 천천히 쇼핑과 관광을 즐겼다.
그러나 나는 가게 안으로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고, 내 카메라에는 주로 과일장수들, 화관을 만들어 파는 꽃가게, 백족 의복의 행인들, 대리농촌영화역사박물관인 대리전영원(大理電影院)의 전시물들이 담겼다.
거리는 자세히 보면, 깨끗한 상점들과 그 사이사이 숨어서 낡아가는 건물들이 내뿜는 숨소리가 한데 엉켜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고성의 기품을 지키고 있다.
▲ 대리를 다룬 영화들(대리영화박물관)
우리 일행 32명은 정확히 3시에 여강으로 출발했다.
대리 교외로 빠져나오자 이따금 대리석을 모아놓은 길가 집들이 보이고, 창산 기슭의 채석장이 흉물스럽게 나타났다 사라지고, 드문드문 아이들 공작물 같은 희고 조그만 묘지가 흩어져있고, 산들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전모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창산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쯤 뒷좌석의 박선생이 슬그머니 ‘매력대리(魅力大理)’란 얇은 도록 한 권을 어깨 너머로 건네주었다.
대리에 대한 미련이 컸던 터라 꼼꼼히 훑어볼 수밖에 없다.
부제를 ‘찬란한 역사문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민족풍정’이라 달아놓은 22면의 칼라판 관광안내서인데 내용이 상당히 충실한 편이다.
도록에는 남조대리국고도인 대리고성, 창산과 이해의 계절별 시간대별 아름다운 풍광, 왕가사원인 숭성사삼탑, 백족남녀의 사랑의 성지이자 영화 ‘오타금화(五朵金花)’의 무대인 창산 기슭의 아름다운 ‘호접천(胡蝶泉), 영화와 TV 촬영장인 천룡팔부영시성(天龍八部影視城), 이해 속의 남조풍정도(南詔風情島), 매년 6월 25일 백족 최대의 민속절인 화파절 축제가 열리는 삼월가(三月街) 등이 나와 있다.
특히 6월 24일 열리는 이족의 화파절과 더불어 운남 최대의 민속축제라는 것이 흥미롭다.
이 축제 소식은 가끔 해외뉴스로도 접해본 적이 있다.
마지막 면에 있는 대리백족자치주 여유국(旅游局)에서 추천하는 1~3일 대리 여행코스에는 다음과 같은 명소가 나열되어 있다.
이동시간이 짧았더라면 읽지 않았을 정보다.
빈천 계족산(宾川鸡足山), 상운 수목산(祥云水木山), 이원 지열국(洱源 地熱國), 검천 석보산(剑川 石宝山), 양비 석문관(漾濞 石門关), 학경 신화촌(鶴庆 新华村), 운룡 낙등천년백족촌(云龙 诺邓千年白族村)과 운룡천지(云龙天池) 등이고,
현(县) 단위가 붙지 않은 사계사등가(沙溪寺登街), 관음당불교문화유(觀音塘佛敎文化游)도 눈에 띈다.
비교적 대리 가까운 곳으로는 하관 부근의 남조국 발상지인 외산고성(巍山古城)과 외보산(巍宝山) 성지, 희주백족민거(喜洲白族民居)나 이해유선(洱海遊船)에 따라붙는 삼도차(三道茶) 맛도 궁금하고, 상관의 상관화(上关花)도 눈길을 끄는데, 특히 상관의 꽃이 이채롭다.
‘풍화설월’ 중 하관의 바람은 대리IC를 벗어나자마자 산 위의 수많은 풍력발전기가 증명해주었고, 창산의 만년설과 얼하이호수의 달도 피부에 와 닿지만, 상관의 꽃은 얼마나 아름답고 많은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곤명의 취호와 석림 그리고 대리고성에서도 잊을 만하면 불쑥 마주친 부겐베리아가 떠오를 뿐이다.
대리 지역이 끝날 때쯤 고속도로변의 재미있는 간판 하나가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았다.
대리자치주 검천현 선전 문구를 수식하는 구절이 ‘세계여성숭배성지(世界母性崇拜圣地)’였다.
이곳부터 티베트문화권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대리국 수도였던 대리가 차마고도의 출발지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면, 차마고도(茶馬古道)가 라싸 쪽으로 깊고 높아갈수록 남자들을 길에 뺏긴 여성들이 모권사회를 강화하여 여강과 중전을 거치면 설산 아래 주혼(走婚) 제도까지 잉태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이쯤 되면 운남여행은 대리에서만도 보름 정도는 머물러야 할 것 같다.
아, 특히 검천이 궁금하다.
1년 전 개통된 새 고속도로로 1시간이 단축되어 3시간 만에 리지앙(丽江)에 닿았다.
고속도로가 완성되면 또 더 빨라진다고 한다.
여강은 오늘날 운남여행의 중심지다.
시내에 들어와서 공사구간에 막혀 30분이나 빙빙 돌아 여강관방대주점에 도착했다. 5성급호텔답게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 길 잃을 염려도 없고, 시설도 훌륭했다.
샹그릴라 하루와 호도협 트래킹 이틀을 보낸 후 다시 여강으로 돌아와 이 호텔에서 또 자야하니,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이틀이나 머무는 중요한 곳이다.
객실로 올라가 잠깐 휴식을 취하고 내려와, 큰 기대감을 갖고 여강고성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고 도로공사 중이라 너무 불편하다.
그리 넓지 않은 고성 입구의 광장은 한 마디로 북새통이다.
등에 ‘고성마방(古城馬幇)’이라 쓰인 조끼를 입은 마부들과 말, 양인지 야크인지 모를 덩치 큰 동물, 민속복장으로 치장한 앳된 소녀 사진모델들,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들, 기념품을 파는 행상들, 거기다 중국 각처에서 몰려온 관광객들, 한눈에 표가 나는 젊은 서양관광객들 등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시간여유가 있으면 광장만 잘 살펴도 단편소설 하나쯤 나올 것 같다.
강택민 주석이 쓴 ‘세계문화유산 여강고성’ 기념비와 그 옆에 나란히 선 대형 물레방아가 광장의 상징이었는데, 특히 고성 안에서 길을 잃으면 ‘따슈이처(大水車)’만 외치면 손으로 방향을 가리켜준다고 한다.
이날 밤 실제로 우리는 길을 잃고 두 번이나 ‘따슈이처’를 외쳤다.
▲ 고성의 스카이라인과 고혹적으로 저무는 비취빛 하늘
▲ 수로를 사이에 두고 광란의 술집들과 마주한 이 종이연꽃 난전은 젊은 연인들이 좋아하는 듯.
고성 안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상점들은 모두 점등했지만 하늘은 푸른빛이 많이 남아있다.
고가들의 지붕과 처마들이 빚어내는 비취빛 스카이라인이 보석처럼 아름답다.
차분하면서도 활기찼던 대리고성에 비해 여강고성은 화려하지만 너무 상업화되고 들떠있다.
길이 인파로 넘쳐나 한적한 뒷길로 들어서니 크고 작은 객잔(客棧)들이 많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얼떨결에 고성의 번화가인 사방가(四方街)로 나와 버렸다.
이쪽말로 ‘쓰팡제’라 부르는 이 광장은 고성뿐 아니라 차마고도의 유서 깊은 큰 마을마다 그 한가운데 형성된 생활과 문화의 중심지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가 광장인 아고라를 중심으로 신전과 집들이 들어섰듯이, 이곳에는 마을들의 중심에 언제나 사방으로 끝없이 이어진 넓은 마을광장이 있었다.
아고라가 있었기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나와 민주주의의 싹을 틔우고 인간중심적인 원숙한 그리스문화를 발전시켰듯이, 사방가가 있었기에 수많은 소수민족과 그들의 언어가 스스럼없이 섞이며 차마고도를 타고 번져나가 생산물의 교류와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우리의 여행은 결국 차마고도를 따라가며 이들이 꽃피워놓은 문물의 오랜 속살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고, 아직도 때묻지 않은 이들 삶의 배경인 맑고 웅장한 자연을 느껴보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 사방가의 불빛
사방가 역시 사람이 너무 많아 얼른 고성의 야경을 보기 위해 사자산 만고루(萬古樓)가 있는 왼쪽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길은 좁아졌지만 양쪽 상점들은 더 환하고 역시 사람들은 길을 가득 매우며 오르내리고 있다.
막다른 골목 끝에 이르자 만고루는 시간이 늦어 잠겨있고, 눈앞에는 전망 좋은 예쁘장한 술집이 창문에 ‘視古城全景’이란 야한 보랏빛 안내문을 깜빡이며 윙크를 하고 있다.
저녁식사 때 마신 반주 기운이 아직 좀 남아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짝꿍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또 안내문의 ‘200/打’라는 술값이 아리송하지만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과연 고성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이었다.
고성 끝에 일직선의 불빛이 성곽처럼 수평으로 가지런하다.
아마 여강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의 가로등일 것 같다.
▲ 한자•동파문자•영어 간판이 나란한 간판은 여강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버스에서 들은 얘기가 문득 떠오른다.
대리고성과 달리 여강고성이 성이 없는 개방형 고성이 연 연유는, 옛날 고성을 지을 때 ‘木’씨 성을 가진 수령이 성을 쌓으면 ‘困’(괴로울 곤)자가 되므로 일부러 성곽을 쌓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도자 한 사람이 역사와 문화에 미친 영향은 이처럼 절대적일 수 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그냥 나오기 뭣해 아가씨가 들고온 메뉴판을 훑었지만 술 종류가 자신이 없어 시계를 들여다보며 너무 시간이 늦다고 중얼거리며 내려와 버렸다.
옆 골목에서 나오는 일행이 뒷집에는 2원만 주면 올라가 야경을 볼 수 있다고 정보를 주었다.
뒷집은 고운객잔(古雲客棧)이란 현판보다 더 환하게 ‘覌景2元’이 붙어있다.
이미 봤지만 조금 더 높은 곳이라 2층으로 올라가보니 역시 경치는 비슷했지만
빈 테이블이 넉넉해 앉아 쉬었다.
술집이 아닌 여관이라 이번에는 술과 음료수는 아래층 카운터에만 있어 내려가기 귀찮아
그냥 좀 쉬다 나와버렸다.
중심에서 떨어진 전망대 쪽으로 올수록 물건값이 싸다는 정보를 얻었기에 은제품 악세서리를 기념품으로 2점 사고, 사방가로 내려오니 벌써 10시가 되었다.
산 아래 제일 왼쪽 길로 수로를 따라 나오니 온통 술집거리였다.
작은 무대에서 쇼를 하고 손님이 나와서 노래도 부르고 담배연기와 화려한 조명이 있는,
20년 전쯤 두당 몇 만원을 받는 우리나라 카바레문화를 보는 듯 했다.
밤이 깊어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밀려다니고 있고, 다리도 슬슬 아파와 빨리 돌아가 쉬고 싶어진다.
광장의 대수차 앞으로 나오니 일행 몇 사람이 모여 있고, 일부는 발마사지를 받으러갔다고 하여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피곤하니까 길이 더 멀게 느껴진다.
고성 안의 객잔에 숙소를 두었다면 더 느긋하게 야경을 즐기고, 고성 안의 주민들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어떻게 아침을 여는지도 들여다보고, 길거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중국인을 따라 해보기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늘, 늦게 투숙해서 일찍 떠나야하는 호텔은 너무 고급스러울 필요가 없다는 게 지론이다.
샤워를 할 수 있고, 소음으로 인한 수면방해만 없으면 충분하다.
그 돈을 음식에 투자하거나 교통비나 관람료에 보태는 것이 실속 있는 일일 것이다.
피곤함과 아쉬움으로 길을 건너다 문득 쳐다본 여강의 밤하늘에, 나시족 미인의 눈썹 같은 손톱달이 애잔하게 걸려있다.
예쁘면서도 쓸쓸한, 아름다우면서도 고즈넉한, 한순간 혼자 여행할 때의 객창감을 설핏 느낀다. (♣)
▲고성의 아이들1, 2, 3. 저런 순서로 커가지 않을까.
첫댓글 나의 제2의 고향을 소개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천년역사가 서린 고루에올라 따리의 풍화설월을 감상 잘 했습니다.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시죠?
반갑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再见
두 분 고맙습니다. 올리는 일이 쉽지 않네요.
랑즈푸성님, 이제 구독성이 좀 나아졌습니까? ㅎㅎㅎ.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왕선생님, 제2의 고향이 어느 쪽이신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은 느낌이 듭니다.
운남성으로 모레 출발하는 팀의 한 사람입니다.
여행기 잘 읽고 있습니다.
글 쓰시는 것이 직업이 아니신가 싶습니다.
표현이 아주 간결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다음 편 기대합니다.
EWSN님, 조심해서 잘 다녀오십시오.
여름 운남여행은 사실 말리고 싶습니다. 먼 산이 모두 구름속으로 소풍가는 계절이라...
하지만 복 많이 지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안복을 누리실지도 모르죠.
다음편은 아마도 갔다오셔야 보실 듯 싶습니다. ㅎㅎㅎ, 고맙습니다.
이선생님! 아주 반갑습니다
정말 깊이있는 후기를 보여주신데 대하여 존경을 표하며
벌써 망각속으로 빠져들어가려는 그때의 사실을 생생하게 되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새로운 터전이 될 남해에 건축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 선생님의 운남성 여행에 관한 높은 지적수준이 가미되어 있는 4편, 5편 ~~~~ 계속 기대해 보렵니다
(장기판위에 건방진 모습으로 오른발 걸치고 폼잡은 사람을 사진을 잘찍어서인지 쬐끔 멋진것 같네요 ㅎㅎㅎ)
아~몽석 님께서 닉네임을 한자로 바꾸셨군요. ^^ 전 내일 다시 운남으로 고고합니다. 막바지 여름철 건강관리 잘하셔서 무탈하시기 바랍니다. ^^
정말 너무 멋지십니다. 저 위에 보트타고 30원이라고 손짓하는 사람이 접니다.ㅎㅎ 좋은 사진 하나 건졌네요. 감사합니다.
실은 40원이란걸 깎아서 30원에 탔는데 한시간여를 노 젓느라 힘드신 사공님을 보고 남편이 40원을 주라고 하는데 내릴때까지
망설이다 여인네의 좁은 소견으로 그냥 내린것이 계속 후회되었답니다. 그 깎은 십원으로 사모님이 서 계신 상점에서 저도 콜라 하나
사먹고 차비 내려고 잔돈 마련했지요. ㅎㅎ
인생은나그네님, 아니 박선생님, 속초에서 남해까지 고단하지만 보람있는 일을 하시니 부럽습니다. 언젠가 남해탐석길에 찾아뵐 날이 올 것 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아, 애니님이시군요. 첫날 윌마트에서 신세 지고도 따로 인사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남았는데 사진으로 대신하는군요. ㅎㅎㅎ.
정대장께선 또 훌쩍 떠나시는군요. 부럽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ㅋ..... 마지막 사진은 내가 촬영한 것이네요..............
로얄티로 자주 글 올려 주세요.^_^
늘푸른중국님, 주제를 맞추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고맙고도 죄송합니다.
중여동 안에서 몇 장 가져왔는데, 전편에 걸쳐 일행이었던 송월산 님의 덕을 가장 많이 봅니다. 모두에게 고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