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애라 權愛羅 (1897~1973)】 "1919년 개성에서 독립선언서 배포, 1922년 극동인민대표회의 참가"
1897년 2월 2일에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교동면(喬桐面)에서 태어났다. 이후 옮겨간 개성에서 자랐고 호수돈여학교에서 초등과와 중등과를 졸업하였다. 1914년 서울 이화학당(梨花學堂) 보육과에 입학해 1917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한 뒤 호수돈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개성 북부교회에서 유치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화영(吳華英)이 독립선언서를 개성 지방으로 전달하였다. 이를 전해 받은 남감리파 전도사 김지환(金智煥), 목사 강조원(姜助遠), 호수돈여학교 서기 신공량(申公良) 등은 독립선언서를 어윤희(魚允姬), 신관빈(申寬彬)에게 전달하여 3월 1일 개성 시가지에 배부하였다. 독립선언서 배포의 영향으로 3월 3일 개성에서는 호수돈여학교 학생들과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 행진을 시작하였고 약 2,000명이 넘는 인원이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제7조와 조선형사령 제42조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 여옥사에서 유관순(柳寬順), 어윤희, 신관빈, 김향화(金香花), 심명철 등과 함께 옥고를 겪었다.
출소한 이후 서울 도렴동 종교교회에 머물면서 연동교회, 중앙청년회관 등지에서 여자교육회 주최의 강사로 시국 강연을 하였고, 1920년 6월 6일 승동교회에서 최덕규·김영신·이남규·최종환 등과 함께 반도청년웅변학회 발기위원이 되었다. 독립군 자금 모집에 관여한 혐의로 1920년 7월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22년 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국 여성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때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과 만나 결혼하였다. 국내로 돌아와 1922년 10월 여자 강연 대회에서 자유 연애, 여성 단발 문제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하며 여성 지위 향상에 노력하였다. 1926년 1월 21일에 개최된 단발가부(斷髮可否) 토론회에서 단발 부인의 입장에서 의견을 개진하였다.
1929년 중국 쑤저우(蘇州) 경해여숙대학(景海女塾大學)에서 수학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이어갔다. 1942년 4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시가둔(施家屯) 영신(永新) 농장에서 아들 김봉년과 함께 관동군 특무대에 체포되어 장춘형무소에서 다시 옥고를 겪었다. 수감 중이던 1945년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남편 김시현의 정치적 동지로서 활동하였고 1967년 안동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