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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지애] 05
#1. 대기실 (밤)
공주의 옷이 무용수들의 손에 의해 하나씩 벗겨진다.
이어, 반짝이 옷이 입혀지고 부츠가 신겨진다.
머리가 매만져지고 짙은 화장이 칠해진다.
초점 없는 공주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2. 타쓰지네 서재 (밤)
벽난로의 불빛과 책상 위 스탠드의 불빛 뿐 사위는 어둠에 잠겨 있다.
스탠드의 불빛 아래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낡은 두루마리가 놓여있고
그것을 보고 있는 지에꼬의 얼굴이 벽난로의 불빛에 그로테스크하게 일렁인다.
지에꼬 앞에는 날카롭게 생긴 닌자 두명이 서 있다.
벽난로를 등진 닌자들의 얼굴은 더욱 그로테스크하다.
지에꼬 : (일어)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이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되찾을 수 없으니 반드시 찾아와야 해.
닌자 : 알겠습니다.
지에꼬 : 이건 복사본이야. 공주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니까 절대로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하고,
특히 타쓰지 주변을 잘 감시하도록 해.
닌자 : 명심하겠습니다.
지에꼬, 다시 두루마리를 들여다본다.
#3. 호텔 로비
타쓰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가로질러 현관 밖으로 나간다.
가제트형사처럼 똑같이 차려 입고 로비 소파에 신문을 펴들고 앉아 얼굴을 가리고 있던 닌자들,
신문을 접어들고 타쓰지를 따라 밖으로 나간다.
#4. 거리
타쓰지의 차가 신호에 걸려 서 있다.
타쓰지,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린다.
출연진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붙인 나이트클럽 홍보 차가 타쓰지의 차 옆에 선다.
타쓰지, 귀청을 찢을 듯한 확성기 소리에 짜증스런 얼굴로 힐끗 돌아본다.
우스꽝스러운 포스터엔 놀란 얼굴의 공주의 사진이 다른 무희들 틈에 끼어 있고
그 밑에 '유리에 갇힌 공주!' 라는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박혀있다.
타쓰지 : 공주? 흥!
타쓰지, 피식 비웃는데 신호가 바뀌고 홍보 차, 떠난다.
타쓰지, 공주의 얼굴이 낯이 익다. 어디서 봤지?
#5. 대기실 (밤)
인철, 안으로 들어서면 준하, 아가씨들과 농담따먹기를 하며 앉아 있다.
인철, 준하에게 꾸벅 인사한다.
인철 : 안녕하세요.
준하 : 어, 왔냐?
인철, 준하를 외면하며 테이블 위에 보따리를 풀면 아가씨들이 몰려든다.
준하 : (인철에게) 야! 너, 이리와 봐.
인철 : 예.
준하 : 요 앞에 나가서 담배 좀 사와라. (돈을 건넨다)
인철 : 예.
인철, 돈을 받아들고 나간다.
#6. 클럽 (밤)
클럽 안에 손님들이 북적댄다.
인철, 대기실에서 나와 밖으로 나가다가 공주가 들어 있는 유리상자를 본다.
공주, 무용수들 가운데 놓인 유리상자 속에서 두 손을 앞 유리에 짚고 서서
마치 우리에 갇힌 원숭이가 관람객들을 보듯 클럽에 온 손님들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보고 있다가
인철과 눈이 마주치자 빤히 바라본다.
인철, 도저히 공주를 못 보겠는지 외면하며 밖으로 나가 버린다.
공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7. 인철이네 집 (밤)
인철, 라면을 끓여 앞에 놓고 시선은 텔레비젼을 향하고 있지만 라면도 먹지 않고 텔레비젼도 보지 않는다.
인철, 들고 있던 젓가락을 확 팽개치고 그 자리에 쪼그리고 눕는다. 공주의 절규가 귀에 쟁쟁하다.
공주 : (눈물을 뿌리며) 내가 너한테 뭘 그리 잘못했느냐?...
인철 : .....
공주 : 내가 너를 기억하듯이 너 또한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란 것 밖에 더 있느냐? 내가 비록 알지 못할 곳에 떨어져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시종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네가 어찌 나를 이토록 능멸할 수 있단 말이냐?
#8. 무용수 숙소 (밤)
공주, 무용수들 틈에 끼어 자고 있다.
무용수들, 코도 골고 몸도 뒤척이며 곤하게 자는데
공주, 잠을 못 이룬 채 눈물만 뚝뚝 흘린다.
#9. 회의실
대형 스크린에 CF 자료화면들이 지나간다.
타쓰지를 위시한 마케팅실 직원들, 둘러앉아 화면을 보고 있다.
타쓰지, 앞에 놓인 종이 위에 뭔가를 긁적이며 차에서 본 포스터 생각을 하고 있다.
은비 : 기능과 디자인에서 획일성을 탈피하고 고객이 원하는 편리한 기능을 부각시킴으로써
타사 동종의 제품들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새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익숙한 캐릭터의 기존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을 모델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신선한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출시되는 제품은
mp3에 익숙한 이삼십대가 주타깃층인 만큼 MOD 기능을 중점적으로 홍보해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때, 타쓰지의 휴대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은비와 직원들, 일제히 타쓰지를 돌아보는데
타쓰지,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는다.
타쓰지 : 여보세요. (갑자기 일어로 반갑게) 이야, 이게 누구야?..... 어, 괜찮아. 얘기해....재미 있을 턱이 있냐?....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나며 은비에게) 계속해요. (밖으로 나가며 다시 전화를 한다) 그래, 나도 보고 싶다. 놀러와...
지금이라도 당장 가고 싶지......
타쓰지, 밖으로 나가버린다.
은비, 황당하고 직원들, 귓속말로 웅성거린다.
#10. 타쓰지 사무실
타쓰지, 컴퓨터를 켜놓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노크소리가 나지만 타쓰지의 귀에는 안들린다.
은비, 자료들을 한 아름 안고 엉덩이로 문을 밀며 들어온다.
은비 : (잠시 보다가) 실장님.
타쓰지 : (화면만 들여다보며) 나 지금 바쁜데?
은비, 어처구니없다.
은비, 타쓰지를 잠시 보다가 책상에 자료들을 던지듯이 탁 내려놓는다.
자료들이 책상 위에 흩어진다.
타쓰지, 은비를 올려다본다.
은비 : 아까 회의하던 자료들인데요, 보시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세요.
타쓰지 : (컴퓨터 화면을 힐끗 보고, 일어로) 죽었잖아.
은비, 기가 막힌 얼굴로 돌아서는데.
타쓰지 : (게임을 하며) 고은비씨!
은비 : (선다)
타쓰지 : 저녁에 시간 좀 내세요.
은비, 뭐야? 하는 얼굴로 돌아보면 타쓰지, 계속 게임만 하고 있다.
#11. 옷공장
인철과 혁, 재봉질을 하고 있다. 침묵 속에 미싱소리만 들린다.
인철, 갑자기 미싱을 멈추고 혁을 홱 돌아본다.
인철 : 아무래도 안되겠다. 데리고 나와야지.
혁 : 뭘?
인철 : 옷 입어.
인철, 옷을 챙겨 입는다. 혁, 의아하다.
#12. 클럽 근처 (밤)
인철의 차가 클럽 입구가 저만치 보이는 곳에 선다.
인철의 차 안. 인철이 운전을 하고 혁이가 옆에 앉아 있다.
혁 : 여긴 왜?
인철 : 사람들이 니 얼굴은 잘 모르니까 손님인 척 하고 들어가 있다가 주방 옆에 창고로 가서 숨어 있어.
혁 : 뭐? 무슨 얘기야, 지금?
인철 : 창고에 배전반이 있는데 가운데 제일 큰 스위치를 정각 아홉시에 내려버리는 거야.
혁 : 그 놈들, 무서운 놈들이래매!!!
인철 : 그러면 내가 그 미친년을 데리고 나올 테니까 너는 그 전에 차에 돌아와서 시동을 걸어놓고 있어.
혁 : 싫어, 나 안 해. (내리려는데)
인철 : (혁의 뒷덜미를 잡는다)
혁 : 놔! 왜 이래?
인철 : 불쌍하잖아!
혁 : ... 잡히면 어떡하구?
인철 : 잡히더라도 절대로 내 이름은 얘기하면 안돼. 단독범이라고 그래야 돼. 아니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혁, 인철이 원망스럽다.
#13. 클럽 안 (밤)
혁, 초조하게 맥주를 마시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인철이 들어온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지만 모르는 척 서로 외면한다.
#14. 대기실 (밤)
공주, 자기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고 무용수 한 명이 화장을 해주고 있다.
무용1 : 회장님, 상무님이 입이 찢어졌어. 너 거기 가둬 놓고 매상이 세배로 올랐대.
무용2 : (옆자리에서 화장을 하며) 우린 뭐야? 아무리 홀랑 벗고 열심히 춰봐야 뭐해?
무용3 : (자조적으로 자기 턱 밑에 손등을 갖다 받치며) 얼굴이 안 받쳐주잖아.
무용2, 무용3을 째려보는데 인철이 안으로 들어온다.
인철 : 안녕.
무용1 : 오빠 왔어? 요새 자주 오네?
인철, 공주를 힐끗 보는데 공주, 인철이 들어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무용2 : 요새 강남컨설팅 회장님도 자주 오시고, 남자들, 이상해.
인철 : 어, 뭐 필요한 거 없냐?
무용2 : 나, 컨셉을 바꿔볼까 봐.
인철 : 뭘로?
무용2 : 캣우먼으로. 나, 꼬리달린 빤쓰하고 채찍 좀 구해줘.
인철 : 야, 너무 튀는 거 아니냐?
무용3 : 얼굴이 안 받쳐주면 소품이라도 튀어야지.
무용2 : 넌 이쁘냐, 이년아?
무용3 : 너보단 낫다 이년아.
무용2 : 아니, 이년이?
무용2, 갑자기 무용3의 머리끄덩이를 잡는다.
인철 : (얼른 뜯어말리며) 야, 야, 야!
이때 문이 벌컥 열리고 춘추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들어온다.
무용2,3, 얼른 상대방의 머리를 놓고 자리에 앉는다.
인철 : (당황한다) 안녕하세요?
춘추 : (사업가답게) 어, 그래. 오랜만이야. 사업 잘 되고?
인철 : 예, 덕분에.
춘추 : (진지하게) 사업자금 필요하면 얘기해라. 이자 싸게 해줄게.
인철 : 예.
춘추, 공주에게 다가간다.
인철, 시계를 슬쩍 보는데 아홉시가 다 되어간다. 초조하다.
춘추 : 우리 공주님, 잘 있었어?
공주 : ...
춘추 : 우리 공주님 땜에 요새 손님들 반응 아주 좋아.
춘추, 공주의 뺨으로 손을 뻗는데 공주, 탁 쳐낸다.
춘추 : (민망하다) 만질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고마워서.
#15. 클럽 (밤)
혁, 식은땀을 흘리며 앉아 있다가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슥 일어나 화장실 가는 척 창고 속으로 샤샥 숨어든다.
#16. 다시 대기실 (밤)
인철, 시계를 본다. 아홉시가 넘었다. 초조해진다.
춘추 : 우리 공주님, 무대 올라갈 시간 다 됐네? (인철에게) 넌 왜 안 가고 그러고 있냐?
인철 : 갈려구요.
춘추 : 그래, 젊을 때 열심히 일해야지.
춘추, 인철의 등을 탁탁 치는데 갑자기 불이 확 나간다. 칠흑 같은 어둠.
무용수들, 꺅 비명을 지르고 밖에서도 요란한 비명소리가 들린다.
춘추 : 어떻게 된 거야?
소리 : 윽!
소리 : 누구냐? 악!
소리 : 적이다!
준하 : 회장님을 보호해라.
춘추 : 누구야! 누가 내 손 잡았어?
이때 누군가 라이터를 켠다.
인철, 춘추의 손을 잡고 있다가 깜짝 놀라 얼른 놓고 라이타불을 후 불어 끈다.
다시 누군가가 라이타불을 켜지만 인철, 그 때마다 바람을 불어 불을 끄면서 공주의 손을 찾아 잡는다.
소리 : 회장님! 어디 계십니까, 회장님!
#17. 창고 (밤)
배전반에 플래시 불빛이 비치고 종성, 차단기의 스위치를 올린다.
창고에 불이 확 들어오면 벽을 짚고 더듬거리던 혁이가 깜짝 놀라 돌아본다.
종성 : 너, 뭐야?
혁 : ... 저... 단독범인데요...
#18. 다시 대기실 (밤)
불이 환하게 들어온다.
춘추와 부하들, 무용수들, 뒤엉켜 있는데 공주와 인철이 보이지 않는다.
춘추 : (경악한다) 얘, 어디 갔어? 엉? 어디 갔어?
#19. 거리 (밤) 인철의 차 앞 (밤)
인철, 공주를 데리고 차로 오지만 혁이도 없고 문도 잠겨 있다. 낭패다.
인철 : 이 자식, 어디 간 거야?
인철, 다시 다급하게 공주의 손을 잡고 뛰려는데
공주, 갑자기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인철 : (다급하게) 뭐해? 빨리 와!
공주 : 새삼스럽게 왜 이러느냐?
인철 : 지금 그런 얘기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와!
공주 : ... 어디에 있건 나에겐 마찬가지다.
인철 : 그래서 안 가겠다고?
공주 : (잠시 갈등하다가) 아니다. 가겠다.
발자국 소리. 인철, 얼른 공주 손을 잡고 달려가는데
공주, 하이힐을 신은데다가 인철이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끌려가다 넘어진다.
무릎이 까져 피가 흐르고 발목이 접질려 제대로 서질 못한다.
인철 : (신경질) 하필 이럴 때 넘어지는 거야? 일어나! 야! 일어나!
공주 : 아...
인철, 공주를 부축하고 뛰어보려다가 안되겠는지 공주를 업고 뛴다.
은비의 차 안. 은비, 운전을 하고 있고 옆에 타쓰지가 타고 있다.
은비 : (운전을 하며 간판을 살핀다) 무슨 나이트라 그랬죠? 근데 여긴 동네가 좀 그러네요? 서울에 좋은 데도 많은데...
이때, 타쓰지의 눈에 공주를 업고 달려가는 인철의 모습이 보인다. 포스터 속의 그 여자다.
타쓰지, 두 사람이 안 보일 때까지 고개를 돌려 보다가 피식 웃는다.
타쓰지 : 그냥 돌아갑시다.
은비 : 다 왔는데요. 이 근천가 본데?
타쓰지 : (차갑게) 돌아갑시다.
은비, 기분 나쁜 얼굴로 타쓰지를 힐끗 돌아보고 입술을 꽉 깨물더니 차를 홱 돌린다.
저만치서 은비의 뒤를 따르던 차 한 대가 같이 돌아 따라간다.
#20. 양재천 길 (밤)
인적이 없는 양재천 길을 따라 공주를 업고 돌아오고 있는 인철.
인철 : 혁이 이 자식은 어떻게 된 거야? 잡혔나? 내가 이거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우리 아버지가 남의 일에 절대로 나서지 말라 그랬는데. 너, 원래 거기 있던 애도 아니라며? 그럼 그렇다고 얘길 하든가?
애가 왜 그렇게 미련하냐? 근데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냐? 부모님 이름이라든가, 주소라든가, 전화번호라든가,
친구, 학교, 동호회, 직업, 뭐 그런 거.
인철, 혼자 떠들다가 느낌이 이상하여 어깨 너머로 돌아본다. 쌕쌕 고르게 숨쉬는 소리가 들린다.
인철 : 야! ... 자냐? ... 뭐야?
인철, 공주를 추슬러 올리며 다시 걷는다.
#21. 인철이네 집 (밤)
인철, 침대에 공주를 내려놓고 부츠를 벗겨들고 나가려다가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안 됐다.
인철, 연고를 찾아 들고 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다리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고
땀으로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뒤로 넘겨준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공주, 인철이 연고를 바를 때부터 잠에서 깨지만 그대로 자는 척한다.
인철, 스탠드 불빛에 비친 공주의 얼굴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다가 밖으로 나간다.
공주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른다.
#22. 욕실 (밤)
인철, 공주의 목걸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전당 : 많이 쳐주는 거야. 정상적인 물건도 아닌 거 같은데. 이거 어디서 났어? .. 썼다. 천!....천 이백!
인철, 목걸이를 다시 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고 공주방 쪽을 돌아보다가 씩 웃고 세수를 하기 시작한다.
#23. 지하 창고 (밤)
술 박스가 쌓여 있는 어두컴컴한 지하 창고.
혁,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다.
혁 : 정말이예요, 믿어주세요. 저는 정말 심심해서 그냥 한 번 해 본 거예요.
준하 :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애? 뻑!
혁 : 악!
준하 : 너, 영등포 땅꼬마가 보냈지?
혁 : 아니에요, 전 땅꼬마가 누군지도 몰라요.
준하 : 아니, 이 자식이! 뻑! 뻑! 뻑!
혁 : 윽! 윽! 악!
준하 : 바른 대로 말해! 누가 보냈어?
혁 : ...사실은...
준하 : 땅꼬마지? 거짓말 하면 죽어!
혁 : ... (울먹이며) 네... (통곡을 한다)
춘추 : 요새 장사 안 된다고 우리 공주를 부러워하더니 그 자식이 기어코... (벌떡 일어난다. 무섭게) 정부장!
준하 : 예, 회장님!
춘추 : 애들 준비시켜라.
준하 : 예! 회장님.
춘추 : 땅꼬마, 너, 오늘 죽었어!
춘추와 부하들, 우르르 나간다.
혼자 남은 혁,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밖으로 나간다.
#24. 호텔 - 타쓰지 방 (밤)
타쓰지, 술을 마시며 인철의 명함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포스터의 여인과 인철이 업고 있던 여인이 미인도의 여인과 겹쳐진다.
타쓰지, 설마 하는 얼굴로 픽 웃고 술을 마신다.
#25. 인철이네 집
인철, 잠이 덜 깬 얼굴로 티셔츠와 팬티 바람으로 배를 벅벅 긁으며 방에서 나와 전기밥솥 뚜껑을 열어 본다.
말라비틀어진 밥이 한 숟갈 정도 남아 있다.
인철 : (짜증난다) 아...
인철, 밥솥 뚜껑을 탁 닫고 아무 생각 없이 욕실 문을 벌컥 연다. 공주의 비명.
인철, 허걱! 소리와 함께 당황하여 얼른 문을 닫는다.
인철 : (욕실 쪽에 대고) 미안!
욕실 문에 뭔가가 날아와 부닥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인철, 괜히 실실 웃는다.
딩동. 인철, 긴장하여 현관과 욕실 쪽을 번갈아 보다가 현관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렌즈 구멍으로 내다본다.
엄, 렌즈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안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인철, 깜짝 놀라 눈을 뗀다.
인철 : (문을 살짝 열고) 웬일이세요?
엄 : (인철을 머리로 밀고 고개를 들이밀어 안을 살핀다) 그 아가씨 다시 왔다며?
인철 : 예?
엄 : 업구 왔다며?
인철 : 예?
엄 : (계속 살피며 점점 들어온다) 옷이 첨단으로 바뀌었다던데?
인철 : 누가 그래요?
엄 : 아파트에 모르는 사람 없어. 아침 안 먹었지? 같이 건너와.
인철 : (밀어내며) 아, 됐어요. 해 먹으면 되죠, 뭐.
엄 : 내가 그 아가씨 관상 좀 제대로 볼라 그래. 근데 아직 안 일어났어?
이때 욕실 문이 요란하게 열린다.
공주 : (꽥) 네 입으로 문이 고장 났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인철, 돌아보면 수건을 둘둘 말고 머리를 풀어 헤친 공주가 서 있다.
공주, 그제야 인철의 뒤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엄을 발견한다.
공주 : (엄을 날카롭게 보며) 저 자는 또 누구냐?
엄 : 저요?
인철, 난감하다.
#26. 엄박사네 집
공주, 인철, 엄박사, 순자, 숙희,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고 있다.
공주, 여전히 반짝이 옷을 입고 있다.
인철과 공주, 열심히 밥을 먹는데 엄박사네 식구들은 밥보다 공주에게 더 관심이 있고
특히 엄박사는 공주의 범상치 않은 관상에 속으로 놀라고 있다.
공주 : (문득 자신을 보고 있는 엄박사네 식구들을 의식하고) 왜들 안 드십니까?
엄 : 자, 먹자.
인철 : 니가 웬일이냐? 존대말을 다 쓰고?
공주 : 얻어먹는 주제에 하대를 할 순 없지 않느냐?
인철 : (기가 막히다)
엄박사네 식구들도 밥을 먹기 시작한다.
공주, 다시 먹으면 엄박사네 식구들, 또 구경한다.
순자 : 쯧쯧쯧쯧 이렇게 이쁜 아가씨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숙희 : 못생긴 애들만 미치란 법 있어?
순자 : (눈을 흘기고 인철에게) 집을 찾아줘야 되는 거 아냐?
인철 : 알아야 찾아주죠.
공주 : (인철에게) 그럴 필요 없다.
일동, 놀라 본다.
공주 : 나는 내가 누군지, 내가 살던 곳이 어딘지 분명히 알고 있다.
인철 : 들으셨죠? 이렇다니까요.
공주 : (인철을 노려본다)
엄 : 조용히 해봐. (조심스럽게) 그럼, 아가씨가 누구고 아가씨가 살던 데가 어딘데?
인철 : 의자왕 딸이구요, 집은 사비성이래요.
숙희 : 거봐, 내가 그랬잖아. 사극 찍다 미친 거 같다고.
공주, 더 이상 말도 하기 싫고 밥도 먹기 싫다.
엄 : 조용히 하라니까! (공주에게) 이런 무식한 애들 신경쓰지 말고 나하고 얘기합시다.
공주 : (인철, 순자, 숙희를 돌아보고) ...됐습니다. 더 이상 미친년 취급 당하기 싫습니다.
순자 : (조심스럽게) 그래도 한 번 얘기해 보지? 얘기하다 보면 어쩌다 미쳤는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엄 : 그래, 한 번 얘기해 봐요.
공주 : (엄에게) 그렇다면 그 전에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엄 : 뭔데?
공주 : 이 나라의 국호가 뭡니까?
일동 : ?
엄 : 대한민국인데?
공주 : (생각하며) 대한민국? 그럼, 국왕은 누굽니까?
엄 : 노주현, 아니 노무현.
공주 : 노무현? 대한민국? ... 그렇다면 지금 어떤 연호를 쓰고 있습니까?
일동 : ?
순자 : 연호가 뭐야?
인철 : 몰라요.
엄 : 지금은 연호 같은 거 안 쓰는데?
일동 : (엄을 돌아본다)
공주 : ... 그럼,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엄 : (잠시 생각하다가) 아가씨가 살던 데서는 어떤 연호를 썼는데?
공주 : 제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는 현경이라는 연호를 썼습니다.
엄 : 현경? (심각해진다)
일동, 공주와 엄을 번갈아 본다.
엄 : 그럼, 아가씨 생년월일은 혹시 기억해?
공주 : 신축년 정월 초나흘 생입니다.
엄 : 신축? 에이, 을축이겠지.
공주 : 아닙니다. 신축년입니다.
엄 : 신축년은 마흔 셋인데?
일동 : (공주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공주 : 제가 태어나던 해 아버님께서 보위에 오르셨습니다. 정관 14년, 신축년이 분명합니다.
엄 : .. (막 생각하며) 정관 14년이면 ... 육백사십일년이란 얘긴데, 그럼...아가씨 나이가 천 삼백 예순 세살?
공주 : (충격을 받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 그게 무슨 얘깁니까? ... 그럼, 지금이 천년도 더 지난 미래란 말입니까?
엄 : 자, 먹자.
엄박사,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다는 듯 밥을 먹기 시작하고
인철과 순자, 숙희도 안됐다는 얼굴로 보다가 밥을 먹는다.
공주, 밥을 먹는 네 사람을 둘러보다가 밥을 먹는 인철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때, 인철의 휴대전화벨이 울린다.
일동, 깜짝 놀란다.
인철 : 여보세요...어, 혁이냐?
#27. 거리 달리는 인철의 차 안.
인철, 음악을 틀어놓고 운전을 하며 생각에 잠겨 있고
공주는 절망적인 얼굴로 생각을 하고 있다.
인철 : (속으로) 이거 괜히 데려온 거 아냐? 내가 미쳤지. 내가 왜 그랬을까? 아, 내가 뭐에 씌운 거지? 용코로 걸린 거 같은데...
인철, 곁눈질로 슥 돌아본다.
공주 : (속으로)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 내가 어쩌다 이렇게 먼 미래까지 오게 됐을까? ...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 이제 영원히 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단 말인가? ... 그럼, 아리의 얼굴을 한 이 자는?
공주, 인철을 돌아보다가 자기를 보고 있던 인철과 눈이 마주친다.
두 사람, 얼른 고개를 돌려 앞을 본다.
#28. 옷공장
혁, 온 몸에 실밥을 붙이고 입에도 실을 물고 미친듯이 재봉질을 하고 있다가
문이 벌컥 열리고 인철이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 마네킹을 들고 칠 것처럼 달려든다.
혁의 얼굴이 처참하다.
혁 : 너 이 자식! 너! 너!
인철 : (혁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야, 들어와.
인철의 뒤로 반짝이 원피스에 반짝이 자켓을 걸치고 댄서용 하얀 부츠를 신은 공주가 들어오다가
혁과 마네킹을 보고 깜짝 놀란다.
혁,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의 등장에 숨이 턱 막힌다.
혁, 얼른 치켜들었던 마네킹을 조신하게 가슴에 끌어안고 머리에 붙은 실밥을 떼어내며 넋을 잃고 공주를 바라본다.
인철 : (소파 위를 치워주며) 여기 앉아 있어.
혁 : (조용히 인철에게 귓속말로) 이 분이 그 분이셔?
인철 : (혁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아, 뭐해? 여기 앉으라니까.
혁 : 안녕하세요? 저는 이 혁이라고 합니다.
혁, 손을 옷에다 막 문질러 닦고는 앞으로 내민다.
공주 : (적대감을 드러내며) 이씨라고? 당나라 황실과 어떤 관계냐?
혁 : 예?
인철 : 야, 야, 야! 헛소리 하지 말고 앉아!
인철, 공주를 끌어 앉히고 혁이를 다른 쪽으로 끌고 간다.
인철 : (공주에게 들리지 않게) 야, 미안하다. 집에 혼자 두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말이야.
당분간 데리고 다녀야 될 거 같은데?
혁 : (공주를 훔쳐보며) 괜찮아, 괜찮아. 예쁜데, 뭐. 근데 위험하진 않냐?
인철 : 가끔 난폭해지긴 하는데 평소에는 괜찮아.
혁, 불안한 얼굴로 공주를 돌아본다.
인철 : (공주에게) 야! 너, 혹시 바느질 할 줄 아냐?
시간경과
공주, 옷에 반짝이를 달고 있고
인철과 혁이는 재봉질을 드르륵드르륵 하며 공주를 곁눈질로 본다.
혁 : (작게) 진짜 이쁘다. 목숨 걸만하다, 야.
인철 : 이쁘긴 뭐가 이뻐?
혁 : 미치지만 않았으면 탤런트 시켰어도 될 뻔 했는데.
인철 : 차!
혁 : 근데 여기서 바느질이나 시킬 거면 쟬 왜 데려온 거냐? 여기 있는 게 더 불쌍해 보인다, 야.
인철과 혁, 잠시 생각한다. 잘 이해가 안 된다.
혁, 일어나 공주 앞을 지나 뭔가를 집으러 가다가 슥 들여다본다.
혁 : (조금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며) 그렇게 줄 맞춰서 쭈욱 달면 되요. 오우, 꼼꼼하게 잘하시네요. 어디서 배웠어요?
공주 : (씩 웃으며 무심코) 다 유모한테 배운 솜씨다.
혁, 유모라는 말에 인철을 돌아보는데
공주, 문득 유모가 죽던 순간이 떠올라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공주가 들고 있던 옷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혁이와 인철, 당황하여 서로 돌아본다.
#29. 강남 컨설팅
돈냄새 풀풀 풍기는 유치찬란한 사무실.
춘추, 의자를 뒤로 돌려 앉아 있고 부하들은 책상 앞에 일렬로 서 있다. 모두들 성한 데가 없다.
춘추, 의자를 빙그르 돌려 부하들을 본다. 제일 엉망이다.
춘추 : (날카롭게) 우리가 너무 준비없이 벌집을 건드렸다. 땅꼬마 그 놈이 그동안 그렇게 세력을 키웠을 줄이야.
준하 :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춘추 : 분명히 냄새가 나는데... 어디로 빼돌렸을까?
준하 : (조심스럽게) 저... 그날 강인철이란 놈이 같이 있다가 사라졌잖습니까? 혹시 그 놈이 빼돌린 건 아닐까요?
춘추 : (예리하게 생각하다가) ... 아니야, 아니야. 그 놈은 그럴 위인이 못돼.
지까짓 놈이 정신 나간 년 데려다가 뭐에 써먹겠어? 기껏해야 빤짝이나 달라 그러겠지.
준하 : ...
춘추 : 정부장.
준하 : 예.
춘추 : 오늘부터 땅꼬마네 애들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
준하 : 예, 회장님.
춘추 : (책상을 꽝 내리치고 이를 부드득 간다) 땅꼬마!
#30. 호텔 휘트니스 센타 수영장
타쓰지, 마치 수영선수처럼 턴을 하고 레인을 따라 돌아온다.
레인 끝에서 물 밖으로 솟구쳐올라 풀 사이드로 올라오는 타쓰지에게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커다란 수건을 건네준다.
타쓰지 : (일어로) 고마워.
타쓰지, 수건을 받아들고 몸을 닦는데.
집사 : 얘기하신 거 알아봤습니다.
타쓰지 : (긴장하여 동작을 멈추고 집사의 얘기를 기다린다)
집사 : ... 일년 전에 돌아가셨답니다.
타쓰지, 수건을 옆으로 팍 치우고 말없이 나간다.
집사, 안됐다는 얼굴로 타쓰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에 날카롭게 수영장 안을 둘러보고 타쓰지를 따라 밖으로 나간다.
잠시후, 물 속에서 닌자의 얼굴이 눈까지만 빼꼼 나온다.
#31. 은비네 집 (저녁)
봉수, 소파 구석자리에 앉아 TV를 보며 몰래 몰래 시계를 보고 있고
은비와 채여사는 소파 가운데 자리에 앉아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머드팩을 하고 있다.
은비와 채여사, 편한 옷차림에 머리에는 비닐 캡을 쓰고 있지만
봉수는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캐쥬얼하게 차려 입고 있다.
채여사 : 당신 무슨 약속 있어?
봉수 : 약속은 무슨 약속?
채여사 : 그럼 좀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
봉수 : 이거 편해.
채여사 : 근데 여보, 강남 사는 사람들이 정말 돈이 많긴 많은가 봐. 저번에 억순이 아줌마가 쎄일하는데 가보자 그래서,
은비 : 억순이 아줌마가 누구야?
채여사 : 내가 얘기 안했니? 우리 멤버들끼리 골프치러 가서 그 아줌마가 일등했거든?
근데 남편이 우리 마누라 장하다구 상금으로 일억을 줬대잖니, 남편이.
봉수 : ...
채여사 : 그 담부터 그 아줌마 별명이 억순이잖아.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은비 : 세일하는데 갔는데,
채 : 어, 그래, 그래. 모피 세일하는데 갔는데, 브랜드가 뭐드라? 되게 유명한거라 그러던데...
뭐드라? ... 뭐드라? 해? ... 쎄?...르? ...뭐지?
은비 : (성질 급하다) 아, 그래서?
채 : 아니, 그래서 우리 골프 멤버들끼리 같이 갔는데, 글쎄 반액 쎄일하는 모피가 오천만원짜리 있더라구.
근데 그걸 싸다구 두 벌 세 벌씩 사는 거 있지?
은비 : 엄마, 그건 아무것도 아냐. 진짜 부자들은 한 벌 두 벌이 아니라 행거 단위로 산대.
채 : 뭐?
은비 :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그렇게.
채 : 어머, 그런 사람들은 어딜 가야 만날 수 있는 거니?
은비 : 우리 실장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야.
채 : 그 일본 사람?
은비 : 일본사람이라는데 한국말도 너무 잘한단 말이야?
채 : 재일교포 아니니?
은비 : 교포는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일본에서도 손꼽는 부자래.
채 : 어머머머머머, 어떻게 좀 잘 해봐라. 집으로 한 번 초대해. 민간외교, 이런 것도 있잖니?
은비 : 근데 짜식이 틈을 안준단 말이야. 아, 재수 없어.
채 : 니가 틈을 만들어야지. 원래 여자가 틈을 만드는 거야.
봉수 : (느닷없이 과장되게 버럭) 자알 한다. 딸래미한테 좋은 거 가르친다. 에잇!
봉수, 마치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밖으로 홱 나가버린다.
채 : 여보! 어디 가? 여보! ... 내가 무슨 화날 얘기했니? 니네 아빠 요새 왜 저러니?
전화벨 울린다.
채 : (신경질적으로) 여보세요... 누구요? ... (자세를 바로 하며 우아하게) 어머, 어머머머, 잠시만 기다리세요.
(수화기를 은비에게 건네며) 그 사람이야, 그 사람, 그 사람!
은비 : (예쁜 목소리로)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32. 바 (밤)
요란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바.
타쓰지, 스탠드에 앉아 혼자 양주를 마시고 있다.
쉬지 않고 잔을 비우는 타쓰지.
입구에 들어선 은비, 두리번거리다가 타쓰지를 발견하고 다가와 옆에 앉는다.
은비 :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타쓰지 : (풀린 눈으로 은비를 슥 돌아보더니 바텐에게) 여기 잔 하나.
바텐, 잔을 은비 앞에 놓으면 타쓰지, 은비에게 술을 따르려는데.
은비 : (단호하게 거부한다) 아, 저 차 갖고 왔어요.
타쓰지 : (피식 웃더니) 방 하나 잡아줄께. 마셔.
은비 : (기분 나쁘다) 네?
타쓰지 : (은비의 잔에 술을 따르며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은비씨! 나, 재수 없지? (술병을 탁 내려놓는다)
은비 : (당혹스럽다)
타쓰지 : 재수 없어서 미치겠지? (술을 마시고 다시 따른다)
은비 : ...
타쓰지 : 근데 궁금하지? (씩 웃으며 은비를 돌아본다)
은비 : ... (맞받아 본다)
타쓰지 : (계속 미소를 띤 채) 궁금해서 미치겠지?
은비 : ... (자기 속을 들킨 거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코웃음을 날린다) 허!
타쓰지 : 내가 왜 한국에 오게 됐는지, 우리 집이 얼마나 부잔지, 내가 어떻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지...
은비 : ...
타쓰지 : 후지와라가 어떤 집안인지 알아?
은비 : ...
타쓰지 : 피도 눈물도 없는 집안이야.
은비 : ...
타쓰지의 눈에 눈물이 핑 돈다.
타쓰지 : 난 그 집안의 사생아고.
타쓰지, 피식 피식 웃으며 술을 쫙 들이킨다.
은비, 당혹스럽다.
#33. 호텔 복도 (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비가 타쓰지를 부축하여 내리면 집사가 방에서 나온다.
은비 : 안녕하세요?
집사 : 아니, 무슨 일이십니까?
#34. 타쓰지 방 (밤)
은비와 집사, 타쓰지를 침대에 눕힌다.
집사 : (은비에게) 고맙습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은비 : 아니에요. 그럼, 가 볼게요.
타쓰지, 엎어져 있다가 은비의 손을 탁 잡는다.
은비, 놀라 본다.
타쓰지 : (엎어진 채) 가지 마. 아무 짓도 안할게. 그냥 여기 있어. 부탁이야.
은비 : (집사의 눈치를 보며) 아니, 저....
집사 :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집사, 바람같이 사라진다.
은비, 손목을 잡힌 채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은비, 타쓰지가 왠지 측은하여 말없이 내려다보는데 타쓰지, 갑자기 웩웩거리며 욕실로 뛰쳐들어간다.
은비, 놀라 본다.
시간경과
은비, 초조하게 타쓰지를 기다리며 방안을 둘러보다가 미인도를 발견한다.
은비, 미인도 앞으로 가 들여다보는데 욕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욕실문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문이 조금 열려 있다.
은비 : 실장님! 괜찮으세요?
은비, 안을 들여다보는데 타쓰지, 옷을 입은 채 샤워를 틀어놓고 벽을 짚고 서서 울고 있다.
은비, 괜히 미안해진다.
#35. 타쓰지 거실 (밤)
은비, 거실 가운데 서 있고,
집사, 잠든 타쓰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방의 불을 끄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나온다.
집사 : 죄송합니다. 원래 저렇게 술을 많이 드시는 분이 아닌데.
은비 : 오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집사 : 고은비양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은비 : (집사의 말 속에 가시가 있음을 느낀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은비, 돌아서 나가면 집사, 은비의 등 뒤에서 문을 닫아버린다.
#36. 강남컨설팅
춘추와 부하들, 더 엉망이 되어 있다.
준하 : 아무래도 헛다리를 짚은 것 같습니다. 땅꼬마는 아닙니다.
춘추 : 그럼, 누굴까?
준하 : 전 아무리 생각해도 강인철 그 놈이 수상합니다.
춘추 : 음....
춘추, 생각에 잠긴다.
#37. 옷공장 앞
공장 앞에 춘추의 부하들이 서 있다.
혁, 원단 꾸러미를 메고 공장으로 오다가 춘추의 부하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얼른 골목으로 숨어 쏜살같이 사라진다.
#38. 인철이네 집
인철, 진공청소기로 시범을 보이고 있고
공주는 전등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고 있다.
인철 : 봐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면 쫙쫙 빨려 들어가는 거야. 먼지가 쫙쫙! 봤지? 봤지?
인철, 돌아보는데 공주가 전등스위치만 갖고 놀고 있자 갑자기 신경질이 난다.
인철 : (청소기를 끄고 꽥) 야!
공주 : (흠칫 놀라 돌아본다)
인철 : 이거 보라는데 뭐 하는 거야?
공주 : 한 번 꼭 해보고 싶었다.
인철 : 어흐, 정말! 이리와 봐! 자! (공주의 손에 청소기를 쥐어준다) 스위치 올리고,
윙 돌아가는 소리에 공주, 깜짝 놀라 청소기를 놓치고 뒤로 물러난다.
인철 : 아, 증말!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해? 연약한 척 하지마! 쌈도 잘하는 애가 뭐가 무섭다 그래? 다시 해봐!
인철, 공주의 손에 다시 청소기를 쥐어주고 골프 레슨 하듯 공주의 뒤에서 감싸 안아 공주의 손을 잡고 같이 밀어준다.
인철 : 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밀란 말이야. 응? 쫙쫙! 쫘악쫙!
공주의 목에 인철의 입김이 느껴진다.
공주, 마치 아리와 같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무심코 반복하던 인철도 괜히 얼굴이 벌개지며 동작이 부드러워진다.
두 사람, 잠시 그 포즈로 청소기를 밀다가 인철, 괜히 거칠게 몸을 떼며 스위치를 끈다.
인철 : 알았지? 그리고, 이리와 봐.
인철, 절뚝거리는 공주를 데리고 주방으로 가 밥솥 뚜껑을 연다.
인철 : 이게 밥솥이야. 전기밥솥. 알았어? 여기다 쌀 씻어서 넣고, 물 붓고, 이렇게 누르면 밥이 되는 거야. 알았지?
공주 : (인철의 설명은 듣지 않고 인철만 보고 있다)
인철 : 너, 밥은 해 봤냐?
공주 : ... 안 해봤다.
인철 : (한심하다는 듯 보다가) 어흐, 이걸 어따 써? 세탁기는 쓸 줄 아냐?
공주 : ... 세탁기라니?
인철 : (한숨) 너 할 줄 아는 게 바느질 밖에 없냐? 너, 무슨 화전민 출신이냐?
공주 : ... (빤히 보다가) 난 네가 나를 영영 버린 줄 알았다.
인철 : ...
공주 : 고맙다. 날 다시 데려와줘서.
인철 : 고마워할 거 없어. 나 지금 후회하고 있으니까.
이때 전화벨.
인철 : 여보세요. ... (깜짝 놀란다) 뭐?
인철, 전화를 끊고 후닥닥 창 밖을 내다본다.
아파트 안으로 춘추네 차가 들어와 서고 준하, 종성, 쭈구리가 내려 아파트를 올려다본다.
인철, 깜짝 놀라 고개를 안으로 들이밀고 두리번거리다가 대충 옷을 챙겨든다.
공주 : 무슨 일이냐?
인철 : 야! 너, 빨리 신발 신어. 아니야. 신발 신을 시간 없어. 빨리 나와!
인철, 공주의 부츠를 들고 영문을 몰라 서 있는 공주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간다.
#39. 아파트 복도
인철, 엘리베이터 쪽을 돌아보며 부츠를 든 손으로 문을 잠그려는데 마음이 급해 잘 안된다.
인철, 문 잠그는 걸 포기하고 계단으로 달려가는데 누군가 달려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인철, 다시 공주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지만 엘리베이터는 저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중이다.
인철, 이리 보고 저리 보다가 엄박사네 문을 두드린다.
인철 : 박사님! 박사님!
엘리베이터에서 땡 소리가 난다.
사색이 되는 인철. 순간 문이 열린다.
인철, 공주의 손을 잡고 다짜고짜 안으로 뛰어들고
엄박사네 집 문이 닫히자마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준하와 종성이 인철의 집 쪽을 돌아본다.
#40. 엄박사네 집
엄박사, 영문을 몰라 하며 서 있고
점을 보러 온 아줌마들이 두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본다.
인철 : (식은땀을 닦으며) 안녕하세요.
엄 : 무슨 일이야?
인철 : 별일 아니에요. 그냥 하던 일 하세요.
인철, 밖을 내다보는데
엄, 인철의 머리를 확 치우고 자기가 내다본다.
#41. 복도
준하와 종성, 살벌한 얼굴로 엄박사네 집 앞을 지나 인철의 집 앞에 서면
쭈구리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온다.
준하,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초인종을 누른다.
몇 번을 눌러도 반응이 없자 문고리를 돌려 보는데 문이 스르르 열린다.
준하,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쭈구리에게 턱 짓을 한다.
준하 : 네가 먼저 들어가 봐.
쭈 : (사색) 제가요?
#42. 엄박사네 집
번갈아 가며 문구멍을 들여다보고 있는 인철과 엄.
아줌1 : 박사님, 저희 시간 없어요.
엄 : 아, 예. 잠시만요. (인철에게) 누구야? 뭐하는 놈들이야?
공주 : 뭐가 무서워서 그러느냐? 내가 혼내주고 돌려보내겠다. (나가려는데)
인철 : 잠깐!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죽어.
공주 : 음... (참는다)
엄 :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그게 다 무슨 얘기야?
아줌1 : 박사님!
엄 : 아, 참.
엄, 아쉽지만 할 수 없이 아줌마들 앞에 앉아 책을 다시 펼친다.
엄 : 아주머니 사주에는 백호대살이 들어 있다 그랬죠?
아줌1 : 네.
엄 : 백호대살이라는 건 말 그대로 호랑이를 보고 크게 놀란다는 얘깁니다.
아줌1 : 요즘 세상에 호랑이가 어딨어요?
엄 : 지금이야 호랑이가 없지만 요즘 식으로 풀이하자면 교통사고라든가, 아니면 뭔가 크게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생긴다
뭐 그런 뜻이지요.
공주 : (듣고 있다가 인철에게) 호랑이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호환이 심해 철따라 오라버니들과 호랑이 사냥을 다녔건만,
엄과 아줌마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돌아보면
인철, 당황하여 얼른 공주의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웃는다.
#43. 복도
쭈구리 안에서 나온다.
쭈 : 아무도 없는데요?
준하 : 좋아. 눈치채지 않게 들어가서 조용히 기다린다.
준하일행,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잠시 후 엄박사네 집 문이 열리고 인철과 공주가 조심스럽게 나와 엘리베이터로 간다.
#44. 마케팅 사무실
타쓰지, 은비, 이대리, 직원들, 둘러앉아 회의를 하고 있다.
타쓰지, 언제나처럼 지루한 얼굴로 노트에 뭔가를 긁적이고 있고
은비는 그런 타쓰지가 언제 자기에게 눈길을 줄까 기다리며
나름대로 가장 샤프해보이는 표정과 자세로 앉아 타쓰지를 티나지 않게 훔쳐보느라 이대리의 말이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대리 : 컨셉 좀 통일하면 안될까요? 이벤트 할 때마다 대행사가 다르니까 나름대로는 해온다고 하는데
그 때마다 컨셉이 달라서 소비자가 헷갈리는 경향이 있거든요. 우리도 패션자문 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과장 : 그거 좋은 생각이네.
남1 : 괜찮겠는데요.
이대리 : 고은비씨!
은비 : (타쓰지를 보고 있다가 깜짝) 네?
이대리 : 주변에 아는 사람 없어?
은비 : ... (무슨 얘기지?) 글쎄요...
이대리 : (예쁘게) 실장님! 실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타쓰지 : 네?
이대리 : 우리도 패션자문을 고용하면 어떻겠냐구요?
은비 : (아! 그 얘기였어?)
타쓰지 : 그럽시다.
은비 : 아, 저 아는 사람 있어요.
이대리 : 그래?
은비 : 저하고 잘 아는 사람은 아닌데요, 같은 아파트 사는 사람이거든요.
젊고, 감각이 있는 거 같더라구요. 꽤 유능해 보이던데...
이대리 : 그래? 자기 숍이나 자기 브랜드 있는 사람이야?
은비 : 그거까진 잘 모르겠구요. 어쨌든 우리 제품이 젊고 새롭고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제품이니까
패션 쪽에서도 기성 디자이너보다 신선한 감각의 젊은 디자이너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이대리 : 실장님! 실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타쓰지 : 네? 아, 뭐, 그럽시다.
이대리 : 남자야, 여자야?
은비 : (타쓰지 들으라는 듯 강조해서) 강인철이라구요, 남자예요.
타쓰지 : (그제야 은비를 돌아본다)
은비 : (맞받아 본다)
이대리 : 그래, 그럼, 이따가 행사장으로 오라 그러지, 뭐.
은비 : 연락은 해보겠는데요, 시간은 될지 모르겠어요. 바쁘신 분 같더라구요.
타쓰지, 다시 종이에 뭔가를 긁적이며 웃음을 참는다.
#45. 편의점
인철과 공주, 나란히 서서 김밥을 먹고 있다.
사람들, 공주의 옷차림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보며 지나간다.
인철 :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감쪽같이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 이제 집에도 못가고 어떡하냐?
공주 : 그럼, 그냥 그 집에 있지 그랬느냐?
인철 : 남의 영업 방해할 일 있냐? (갑자기 버럭) 하여튼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되는 일이.
내가 왜 멀쩡한 집 놔두고 여기 나와서 이런 걸 사먹고 있어야 되냐구!
인철, 우걱우걱 김밥을 입에 처넣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인철, 흠칫 놀라 전화를 본다. 은비다.
인철 : (꿀꺽 삼키고 목소리 깔고) 여보세요,... 은비씨? 꺼억! ...아, 아닙니다. 제가 연락드릴라 그랬는데 그동안 너무 바빠서...
예? 의논할 일이 있다구요?
공주, 발랄하게 전화를 받는 인철을 슬픈 눈으로 본다.
#46. 호텔 로비 (밤)
인철, 회전문을 씩씩하게 밀고 들어와 돌아보는데 공주, 문 밖에 그냥 서 있다.
인철, 다시 회전문을 밀고 나가 회전문이 무서워 들어오지 않으려는 공주를 한 칸에 태우고 들어온다.
공주, 호텔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넋이 나간 얼굴로 천장과 사람들과 주변을 둘러본다.
인철, 공주의 팔목을 잡아끌며 로비의 소파에 앉힌다.
인철 : 너, 내가 나올 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야 돼.
공주 : (두려운 얼굴로 인철의 옷깃을 꽉 잡는다)
인철 : 이제 안 버리니까 걱정하지 마. 사람 좀 만나고 올 거야.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안온다고 딴 데 가고 그러지 말고
여기 꼭 앉아 있어야 돼.
공주 : (간절한 눈빛으로 인철을 올려다보며 눈물이 핑 돈다)
인철 : 너, 괜히 소란 피고 그러면 안돼!
공주 : ...
인철 : 알았지? 아무데도 가지마!
옆의 소파에 앉은 닌자들, 이상한 차림의 두 남녀를 무관심하게 돌아본다.
인철, 주변을 괜히 둘러보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간다.
공주, 가는 인철에게서 눈을 뗴지 못하고 안타깝게 바라보는데
이때 이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타쓰지, 사라진 인철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공주를 무심코 보며 지나쳐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로 옮겨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