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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한국사 ~ 세종대왕
세종대왕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
‘성군’ 또는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는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이순신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당대에 이미 ‘해동요순’이라 불려 지금까지 비판이 금기시되다시피 했으며, 초인화·신화화된 부분마저 있다. 그러나 신격화의 포장을 한 겹 벗겨버린다 해도 세종이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는 사실에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태종의 전격적인 결단,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 David Hepworth at ko.wikipedia.com>
조선의 제 4대 왕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莊憲)으로, 정식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1418년 6월 3일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은 세자 이제를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태종실록]을 통해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세자를 폐하고, 반면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주상이 장년이 되기 전까지 군사 문제는 직접 결정하고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와 6조, 그리고 상왕이 함께 의논한다는 조건부 양위이긴 했지만 전격적인 결단이었다.
그렇게 조선 제4대 왕에 오른 세종의 나이는 당시 스물 둘. 어린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왕세자로 책봉되는 바람에 준비가 부족했다. 집권 초기 대부분의 사안에“상왕의 뜻이 이러하니” 또는 “상왕께 아뢰어보겠소.”라는 말을 반복해야 될 만큼 어려운 입장이었다. 엄한 아버지의 테스트를 받는 갑갑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세종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무섭게 공부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호학의 군주,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책을 읽어대던 호학의 군주이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법학∙천문∙음악∙의학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본인 스스로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딱 한 가지 책만 30번을 읽었으며, 경서 외에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도 꼭 30번씩 읽었다고 했다. “몹시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밤새 글을 읽어, 나는 그 아이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데도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는 태종의 말이 전할 정도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을 정리하고 비교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사실 세종은 그저 경전의 문구나 외워 잘난 척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 깊은 생각을 하라고 학자들에게 주문하고는 했다.
1422년 태종이 죽고 재위 4년 만에 전권을 행사하게 된 세종은 태종이 만들어놓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태종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을 완성해나가는 방법으로 세종이 택한 방법은 매우 학구적이다.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세종은 우선 유학의 경전과 사서를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만 갖춰진 제도를 세부사항까지 규정해나갔다. 작은 법규를 하나 만들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쭉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그 단점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을 고려했다.
조선의 제도와 학문, 예술의 기틀을 잡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제도 연구의 기본이 되는 사서들이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세종은 [고려사]∙[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서들이 더 정확하고 풍요로워지도록 학자들을 다그쳤다. 중국의 사서도 열심히 연구했다. 대표적인 역사서인 [자치통감] 완질을 구해 읽고 학자들을 동원해 이에 대한 주석서인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했는데, 이 주해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 경전과 사서에서 찾아낸 제도를 적용하려면 우리 땅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세종은 지방관들에게 각 지역의 지도∙인문지리∙풍습∙생태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고, 이를 수합하여 편찬했다. 많은 자료를 간행하려다 보니 인쇄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세종 치세에 인쇄 속도가 10배로 성장했다.
물론 이렇게 많은 내용을 세종 혼자 연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해,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농업∙지리∙측량∙수학∙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조세∙재정∙형법∙군수∙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했다. 이때 정해진 규정들은 나중에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세종은 과학기술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세종 초에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했으며,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를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하고 맹사성을 통해 향악을 뒤받침하여 조선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세종의 위대함은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세종이 위대한 성군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세종은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세종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관대하고 은혜로운 왕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국사를 돌보던 세종은 결국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세종 최대의 업적이면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구체적인 창제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종 단독 작품인지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엄청난 반대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에 작업한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단.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세종의 말과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를 청단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라고 훈민정음 서문에 정인지가 쓴 글을 종합하여 훈민정음 창제의 실제 목적을 짐작해볼 뿐이다.
정신을 따라오지 못한 육체의 한계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초인적인 연구를 해나가다 보니 세종은 일찍부터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30대 초반부터 풍질이 발병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4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하루 종일 앉아서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졌다. 스스로 “체력이 달리니 생각이 이전처럼 주밀(周密)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보인다. 1440년부터는 독서도 거의 못했던 듯하다.
집권 후반기에 세종은 태종이 마련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인 육조 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개편하고 세자에게 서무를 결재토록 해, 왕에게 집중되었던 국사를 분산시켰다. 건강상의 이유이기도 했지만,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로 인해 자신의 유교적 이상을 실현시켜줄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새로 편찬된 책들을 수십 권씩 직접 검토하던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다.
글윤희진 | 역사저술가 <한국사 인물 이야기>, <제왕의 책>,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등의 책을 썼다. 발행2010.06.10
조선(朝鮮) 억만세의 전측(典則) ~ 세종대왕
세조 5권, 2년(1456 병자) 8월 16일(계축) 이사철 등이 매일 혹은 하루씩 걸러서 정사를 보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이사철(李思哲)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모두 용렬하고 어리석음으로써 정부(政府)에 대죄(待罪)하고 있어 조금도 헤아릴 만한 공효(功效)가 없으니, 온포(蘊抱)1115) 한 것을 다하여 성은(聖恩)의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기를 생각합니다. 하물며 지금 하교(下敎)하여 구언(求言)1116) 하시니, 신 등이 어찌 감히 함묵(含默)하겠습니까? 삼가 좁은 소견을 가져 우러러 성총(聖聰)을 번독(煩瀆)하오니, 바라건대 성감(聖鑑)으로 재택(裁擇)하소서. 다스림을 하는 도(道)는 옛 제도와 문물을 준수하는 데에 넘어가지 않을 뿐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과오하지도 않고 유망(遺忘)하지도 않는 것은 옛 제도와 문물을 따르는 때문이다.’ 하였고,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법을 따르고서 잘못되는 것은 있지 않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종(祖宗)의 법은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옛일을 상고하면 법도(法度)가 가장 밝은 것으로 주(周)나라 같은 것이 없으니,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항상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법을 지킨다면 천만년을 지나서 비록 지금까지 그대로 있어도 가합니다. 아조(我朝)에서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서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베풀어서 만세(萬世)에 법을 남기시었는데,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세상에 높으신 견식과 투철하게 뛰어나신 지혜로써 모든 시행하는 바가 움쩍하면 예전 법식(法式)을 따라서 헌장(憲章)과 법도(法度)가 해와 별같이 밝았으니, 실로 우리 조선(朝鮮) 억만세의 전측(典則)입니다. 근래에 간신(奸臣)이 권세를 도둑질함으로 인하여 조정(朝廷)의 정사를 변혁하여 어지럽혔으니, 중외(中外)가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크게 천명(天命)에 응하시어 큰 기업을 이어받아서 폐법(弊法)을 모조리 개혁하고 정치 교화(政治敎化)를 고쳐 새롭게 하시니, 대소 신민(大小臣民)이 기뻐서 눈을 부비어 모두 유신(惟新)의 정치를 우러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멀리는 조종(祖宗)의 옛 제도와 문물을 따르시고 가까이는 세종(世宗)께서 이루신 법을 지키시어 보지(保持)하기를 유구(悠久)하게 하여 금석(金石)같이 굳게 하시면, 실로 우리 성조(聖朝) 억만세의 무강(無彊)한 아름다움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가지 이(利)를 일으키는 것이 한 가지 해(害)를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내는 것이 한 가지 일을 감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당시에 명언(名言)이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잠심(潛心)하소서. 또 예전 인군(人君)이, ‘벌레가 날면 모임이 가득하고, 해가 뜨면 조회(朝會)를 보고, 조회가 물러가면 노침(路寢)에서 정사를 듣고, 한낮이 되면 정사를 참고하고, 저녁이 되면 천형(天刑)을 규찰(糾察)하여 일각(一刻)도 편안할 여가가 없다.’ 하였으니, 참으로 천위(天位)가 지극히 어려워 하루에 만기(萬機)나 되어서 항상 대신을 접견하여 도(都)라 유(兪)라 하여 고루 물어서 다스리는 도를 함께 이루고자 합니다. 우리 조정(朝廷)의 조참(朝參)1117) ·상참(常參)1118) ·조계(朝啓)1119) 가 곧 그 제도입니다.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군(聖君)으로서 건건(乾健)하여 쉬지 않아서 매양 편전(便殿)에 나가시어 상참(常參)을 받으시고, 인하여 정사(政事)를 보시고 치도(治道)를 강론(講論)하시어 미미하게 권태를 잊으셨으며, 대신(大臣)과 대간(臺諫)이 회포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여 가한 것은 들이고 그른 것은 폐지하였으니, 참으로 만세 자손의 아름다운 모범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밝기도 전에 일어나시어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도모하시니 정사를 하심에는 다시 의논할 것이 없으나, 근년(近年)에 조계(朝啓)하는 날이 조금 드무니, 대간과 대신이 어찌 친히 용안(龍顔)을 대하여 회포를 진달하고자 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세종(世宗)의 예전 일을 따라서 혹은 매일 혹은 하루씩 걸러서 정사를 보시어 신 등의 바람에 부응케 하소서.”하였다.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이 말이 참으로 옳다. 명일에 마땅히 정사를 보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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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15]온포(蘊抱) : 가슴 속에 품은 재주. ☞
[註 1116]구언(求言) : 나라에 재변(災變)이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시정(時政)의 잘못과 민폐(民弊)에 대한 바른 말을 구하던 일. ☞
[註 1117]조참(朝參) : 매 아일(衙日)에 행하던 큰 조회. 한 달에 조참(朝參)을 받는 날은 대개 5일 만에 한 번씩으로 정해져 6아일(六衙日) 또는 4아일(四衙日)이 있었음. ☞
[註 1118]상참(常參) : 임금이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대신과 해당 참상관(參上官:6품 이상)을 모아서 매일 열던 평상 조회. ☞
[註 1119]: 조계(朝啓) : 조회(朝會) 때에 각사(各司)에서 정사를 아뢰던 일. ☞
○癸丑/議政府右議政李思哲等上疏曰:
臣等俱以庸愚, 待罪政府, 略無寸効, 罄竭所蘊, 思報聖恩之萬一。 況今下敎求言, 臣(寺)〔等〕豈敢含默? 謹將管見, 仰瀆聖聰, 伏望聖鑑裁擇。 爲治之道, 不越乎遵守舊章而已。 《詩》曰, “不愆不忘, 率由舊章”, 孟子曰, “遵先王之法而過者, 未之有也。” 然則祖宗之法, 不可廢也。 謹稽古昔, 法度最明, 莫若成周, 使後世子孫, 常守文、武之法, 則綿歷千萬, 雖至今猶存可也。 我朝列聖相承, 立經陳紀, 垂憲萬世, 世宗大王以高世之見、絶倫之智, 凡所施爲動遵古典, 憲章法度昭如日星, 實我朝鮮億萬世之典則也。 近因奸臣竊權, 變亂朝政, 中外寒心。 主上殿下誕膺天命, 纉承丕基, 悉革弊法, 更新政化, 大小臣民, 懽欣拭目, 咸仰惟新之治。 伏望殿下遠遵祖宗之舊章, 近守世宗之成憲, 持之悠久, 堅如金石, 則實我聖朝億萬世無疆之休。 古人云, “興一利, 不如除一害, 生一事, 不如減一事”, 時以爲名言。 伏望殿下潛心。 且古之人君, “蟲飛而會盈, 日出而視朝, 朝退而路寢聽政, 日中而考政, 夕而糾虔天刑, 無一刻可暇逸也。” 誠以天位至艱, 一日萬機, 常欲接見大臣, 都兪咨訪, 共成治道也。 我朝朝參、常參、朝啓, 卽其制也。 我世宗大王以天縱之聖, 乾健不息, 每御便殿受常參, 仍行視事, 講論治道, 亹亹忘倦, 大臣、臺諫有懷必陳, 獻可替否, 誠萬世子孫之懿範也。 我殿下昧爽丕顯, 勵精圖治, 其於爲政無復可議, 然近年朝啓之日稍稀, 臺諫大臣豈無親對龍顔, 欲陳懷抱者乎? 伏望殿(上)〔下〕一遵世宗故事, 或每日、或間日視事, 以副臣等之望。
御書曰: “此言誠是。 明日當視事。”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2책 5권 3장 A면
【영인본】 7책 148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세종대왕의 생애
조선왕조 5백년 역사에 있어 아니, 우리 나라의 모든 역사속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들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이가 있다. 한민족의 가슴속에 찬란한 문명과 영화를 꽃피웠던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추앙을 받는 바로 조선의 4대째 왕인 세종대왕(이하 세종이라 함)이다. 그의 생애는 개인의 삶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공인의 삶으로서도 모든 영광을 안고 있었다.
태조 6년인 1397년 4월 초10일, 하늘은 맑고 인왕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며칠전에 내린 비로 그 수량이 많음을 뽐내기라도 하듯 시원스레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더구나 수목은 호랑이가 자주 출몰할 정도로 깊고 푸르렀다. 이러한 풍광이 합쳐진 준수방(俊秀坊)은 궁실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있었다. 바로 이곳 준수방에 위치한 태종의 잠저에서 세종 은 정안군 즉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고고한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하였다.
풍운의 시대는 아버지 태종을 사직의 책임자로 만들었고, 태종은 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혼미한 정국을 자기의 의도대로 만들어 나갔다. 세종의 유년기는 이러한 태종의 품속에서 많은 것을 보면서 배워나갔다.
세종이 12살이 되던 태종 8년 2월 11일에 부왕이 그를 충녕군(忠寧君)에 봉하였다. 또한 같은 달 16일에 당시 우부대언(右副代言)인 심온(沈溫)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嘉禮)를 올렸다. 그녀는 1395년 (태조 4) 9월에 경기도 양주(楊州) 사제에서 태어났으며, 가풍을 이어받아 재색을 겸비하여 정숙하였다. 당시 12살인 세종보다 두 살이 위였다. 가례를 올린 다음 날 그녀는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봉하여졌고 1417년 (태종 17)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여졌으며 1418년에 세종이 즉위하면서는 경빈(敬嬪)으로 책봉되었다. 얼마 안되어 공비(恭妃)로 승진되었고 1432년 (세종 14) 왕비가 되었으니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인 것이다.
충녕은 대단한 호학불권(好學不倦)의 학구파였다. 이미 왕실에 소장된 서적을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읽고 익혔다. 또한 아무리 날이 덥거나 추워도 개의치 않고 하루종일 독서에 열중하곤 하였다. 이것은 훗날 세종으로 하여금 눈병으로 고생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만큼 그는 주위에서 건강을 돌보면서 독서를 하라는 충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독서에 몰두하였 던 것이다.
큰형인 양녕은 왕세자로서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있었지만 그의 돌출된 행위는 태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제왕학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고 오락에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녕의 소행은 마침내 여러 신하와 원경왕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으로 하여금 왕세자를 폐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왕세자를 폐한다는 것은 역사에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제 왕조의 안정과 발전을 모색하여야 하는 창업단계의 왕조를 수성의 단계로 바꾸어야 할 때 필요한 인물로서는 부적격한 것이었다. 태종이 닦아놓은 왕업이지만 아직도 불안요소는 많았다. 그 태종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이제 여기저기 일을 벌여놓은 것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그 기틀을 잡아나갈 군왕이 있어야겠다고 여겼다.
태종의 생각에는 적합한 후계자로는 셋째인 충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학문적인 면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태종은 아직 그를 염두에 두고 있을뿐 세자를 교체하겠다는 의사를 밖으로 들어낼 수는 없었다. 세자와 충녕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불쑥불쑥 그들의 학문의 정도가 어떤가를 묻기도 하였다. 세자와 충녕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생기면서 한해 한해가 지나갔다. 세자인 양녕은 한편으로 반성하고 다시 학문에 정진하기도 하였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반면 충녕은 주위로부터 왕위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진력할 뿐이었다.
1413년인 태종 13년 충녕의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 태종은 그를 대군(大君)에 봉하였다. 어찌보면 세자인 양녕을 후사로 확정한 것인 듯 싶었다. 그러나 충녕이 스물이 되던 1416년 7월에 태종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태종은 여러 신하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 서 세자인 양녕과 충녕을 비교하면서 세자를 꾸짖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둘을 비교하여 말하는 일이 점차 많아졌다. 이제 태종의 의도가 점차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진정한 제왕지재가 누구인가는 누가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장자인 양녕을 세자에서 폐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왕조의 근본 자체를 뿌리부터 흔드는 중대사로 인식하는 사회통 념을 여하히 대처할 것인가였다. 하지만 심사숙고 후에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는 태종인지라 이에 대한 대책은 모두 마련된 뒤였다.
마침내 1418년 6월 초2일에 태종은 조정에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사간원에서만 세자인 양녕을 뉘우치게하여 그 자리를 회복하게 할 것을 청할 뿐이었다. 다음날 결국 태종은 세자를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하고, 경기도 광주(廣州)로 추방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결단을 실행하였다. 태종은 이때 세자를 폐하면서
“세자 제(?)가 간신(奸臣)의 말을 듣고 함부로 여색(女色)에 혹란(惑亂)하여 불의(不義)를 자행(恣行)하였다. 만약 후일에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력을 마음대로 한다면 형세를 예측 하기가 어려우니, 여러 재상(宰相)들은 이를 자세히 살펴서 나라에서 바르게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누구를 세자로 세울 것인가에 대해 양녕의 아들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인망이 있는 어진 이를 골라야할 것인지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최종 결정은 태종의 결심여하에 있었다. 태종의 의중은 이미 충녕에게 있었다. 이때 세종의 나이 약관을 넘은 스물둘의 장성한 나이였다. 또한 누구 못지않은 학문과 경륜, 지식을 갖춘 영재이기도 하였다. 태종은 이러한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그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충녕이 갖춘 인격과 학문이 어느정도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福)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성품이 심히 곧아서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 내 말을 들으면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 (忠寧大君)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동작이 두루 예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대군이 대위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라고 하여 그의 인간됨과 학문, 사신을 대하는 풍도, 예절, 왕도 등을 들어 세자로 정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중외가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특히 명의 사신 황엄(黃儼)은 충녕대군이 매양 똑똑하고 밝은 것을 칭찬하여 말하길,
“영명하기가 뛰어나 부왕(父王)을 닮았다. 동국(東國)의 전위(傳位)는 장차 이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라고 한것은 세종의 인물 됨됨이가 군계일학 격으로 뛰어났음을 지적한 것이다.
같은 해 8월에 태종은 나라의 재변(災變)과 몸의 숙질(宿疾)을 들어 세자 충녕에게 전위(傳位)의 교서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왕은 말하노라. 내가 부덕한 몸으로 태조의 홍업(洪業)을 이어받아 아침 저녁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여 정성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기를 도모한 지 대개 이미 지금 18년이 되었다. 은택(恩澤)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여, 여러 번 재변이 일어났고, 또 몸에 숙질이 있었는데 근일에 이에 심하여 청정(聽政)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세자가 영명(英明) 공검(恭儉) 하고, 효제(孝悌) 관인(寬仁)하여 대위(大位)에 오르기에 합당하므로 영락(永樂) 16년 무술(戊戌) 8월 초 8일에 친히 대보(大寶)를 주어 기무(機務)를 오로지 맡아보게 하고, 오직 군국의 중요한 일만은 내가 친히 청단(聽斷)하겠다. 아아! 너희 중외 대소신료들은 모두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아 한 마음으로 협력하고 도와서 유신(維新)의 경사를 맞이하게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생각하여 마땅히 그리 알라.”
[<태종실록>권36 18년 8월 정해(10)]
라고 하면서 아직 군국의 일이 안정되지 못했고 세자가 이 일을 감당하기엔 부족하다고 여겨 스스로 군국의 일을 도맡아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충녕이 세자로 책봉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왜구로 인한 변방의 불안요소, 세종의 군권(軍權) 장악력이 미흡하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태종의 판단은 당시의 정세를 볼 때 옳은 것이었다. 특히 폐세자 되어 광주에 내려가 있는 양녕을 따르는 세력과 세종의 즉위에 혹 불만을 품은 세력 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주도면밀한 결단이라 하겠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데에는 양녕, 효령 세 형제 간의 우애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처음에 양녕이 미친 체하고 방랑하니 효령대군은 장차 양녕대군이 폐하게 될 것을 짐작하고, 깊이 들어 앉아 삼가고 꿇어앉아 글을 읽었다. 대개 그 스스로 생각하길, 양녕이 폐함을 당하면 다음 차례로 효령 자신이 세자가 될 것이라는 의도에서 였다. 그러던 중 양녕이 이를 짐작하고는 들어와서 발로 차면서, “어리석다. 네가 충녕이 성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였더니, 효령이 크게 깨닫고 곧 뒷문으로 나가 절간으로 뛰어가서는 두손으로 북 하나를 종일 두드리니 북가죽이 부풀어 늘어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던 것이다. 두 형이 세종을 위하는 마음이 실로 이러하였고, 양녕 자신이 부왕인 태종의 뜻이 그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 · 효령대군이 스스로 제위를 포기할 정도 인품은 오히려 그 정치적 상황은 차치하고도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태종의 배려와 세종 자신의 능력으로 즉위에 따른 모든 잡음은 없었다. 세종은 즉위하면서 8월 11일에 다음과 같은 교서를 근정전에서 반포하였다.
“……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서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하는 영을 선포하노니, 영락 16년 8월 초10일 새벽 이전의 사건은 모반 대역(謀叛大逆)이나 조부모나 부모를 때리거나 죽이거나 한 것과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독약 이나 귀신에게 저주하게 하여 고의로 꾀를 내어 사람을 죽인 것을 제외하고, 다만 강도 외에는 이미 발각이 된 것이나 안 된 것이거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되, 감히 이 사면(赦免)의 특지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을 그 죄로 다스릴 것이다. 아아, 위(位)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 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세종실록>권1 즉위년 8월 무자(11)]
라고 하여 즉위에 따른 제도의 변경을 없이하였다. 대사면령을 내려 새시대의 시작임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위의 두 형들과 우애있게 지낼 것을 당부하였고, 세종 또한 재위 기간 중에 각별하게 양녕과 효령대군에 대한 우의를 지켰다. 신료들이 그들의 잘못을 간하더라도 극히 사리에 벗어나지 않는 한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두 덮어두고 그들을 감싸주었던 것이다. 태종이 돌아간 후에 세종은 또한 생각하기를, `형 양녕대군이 나이가 이미 많으니 반드시 소년 기습(少年氣習)이 없어졌을 것'이라 여겼다. 이에 서울 집으로 불러 돌아오게 하여 날마다 친히 대접하되, 조금도 혐의하거나 간격이 없게 하였다. 이렇게 세종은 여러 신하들이 비록 옳지 않음을 고집하여도, 왕이 모두 듣지 않고, 두 형을 섬기되, 반드시 인정과 예절을 다하였고, 여러 아우를 대우하기를 또한 은혜와 사랑하기를 다하였던 것이다.
또한 종실(宗室)의 여러 친척에 이르기까지 자주 불러 보면서 술상을 차려 흡족하게 즐겁도록 하였으며, 평소에 친근하지 않아 밖에서 한가롭게 사는 사람에게도 복호(復戶)하게 하거나, 세금을 덜어주게 하고, 처음으로 종학(宗學)을 설치하여 종적(宗籍)에 속한 자를 모두 학문을 배우게 하였으며, 비첩(妃妾)을 대우하는 데 그 명분을 엄하게 하여 모두 화목하게 하니, 집안의 도리가 바로잡혀 이간질하는 말이 없게 하였다.
상왕인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준 뒤 포천(抱川)에 거둥하였을 때 시종하던 신하 곽존중(郭存中)에게 말하길,
“내 나라를 맡길 사람을 얻어 산수 사이에 한가히 노니 걱정없는 이로 이 세상에 짐 하나 뿐이다. 역대의 제왕들의 부자(父子) 사이를 보면 실로 나의 오늘과 같은 이 없었느니라. 하였다.
태종에게는 그 자신이 아끼는 백마(白馬)가 있었다. 한 번은 정종이 피서하기 위해 광나루에 머무를 제 태종과 세종이 그를 위로하여 주연을 즐기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헤어지게 되었다. 이 때 태종은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백마를 보살피는 관원에게 명하여 안장을 갈아 세종에게 주도록 명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배려의 일면이고 자신의 수족을 떼어줄 정도로 그를 위하였던 것이다. 세종 또한 그 바쁜 정무를 처리하는 와중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태종에게 문안인사를 여쭈니 태종이 부담스러워 격일로 오도록 말할 정도였다.
또한 세종 원년인 1419년 6월에는 부왕인 태종과 이종무(李從茂) 주도로 그 동안 고려말 이래로 해안지방과 내륙지방까지 끊임없이 노략질하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이듬해 윤1월에는 대마도를 경상도 계림부에 편입시켰다. 태종의 치세동안 잘 가다듬은 군사와 오랫동안 왜구토벌을 준비한 까닭에 왜구 근절을 위한 대마도 정벌은 성공적이었다. 이는 태종 · 세종 2대에 걸친 태평성세의 길이 이제 탄탄대로에 접어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종 때에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왕도정치, 위민정치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것이었다.
세종은 왕위에 즉위한 뒤에도 결코 학문을 게을리하거나 정사에 미룸이 없었고, 또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왕은 매일 새벽 4고(四鼓) 즉 새벽 2시 무렵에 일어나서, 신명(晨明)에 군신의 조참을 받았던 것이다. 군왕이 솔선하여 이토록 부지런함을 보이니 신하들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일을 처리함에 완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모든 정사를 처결한 연후에는 윤 대(輪對)를 행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물어 조그만 일에도 귀를 기울였다. 또한 수령으로 나가는 자를 불러 보고 면담하여서는, 그들에게 간곡하게 일러 말하길, 형벌 받는 백성을 불쌍하게 생각하며, 백성을 사랑하라는 뜻을 타일렀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세종은 성학(聖學)에 잠심(潛心)하여 고금을 강론한 연후에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서 편안히 앉아 글을 읽었고,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제왕이 된 후까지 끊임없이 글을 읽고, 유신들과 토론하니 읽지 않은 글이 없었으며, 무릇 한번이라도 귀나 눈에 거친 것이면 종신토록 잊지 않게 되었다. 왕은 경서(經書)를 읽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백 번을 넘게 읽고, 제자백가서와 역사서는 반드시 30번을 넘게 읽고, 성리(性理)의 학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고금에 모든 일을 널리 통달하였던 것이다.
1420년 세종이 24살이 되던 해 7월, 그 무덥던 날씨가 한풀 꺾이어 가을바람이 인왕산 자락에서 천천히 내려와 제법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름을 자랑이라도 하듯 올려보아도 끝이 없었다. 궁궐안에도 그 동안 정성스레 돌보아 왔던 수목들이 제각기 자리를 잡아 잘 정돈되어 위엄과 조화, 장중함을 주었다. 그러나 세종과 소헌왕후, 그리고 내궁사람 들의 얼굴은 밝지 못한 채 부산하게 오갔다. 약내음이 진동하였다. 어머니 원경왕후의 병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어려서는 자신을 끔찍이 위하였지만 장성한 뒤로는 오히려 엄격함으로 대해 주어 약간은 섭섭해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큰형인 양녕을 제치고 제위에 오른 탓이리라고 여겼다. 그래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극진히 하였건만 병은 더욱 심해만 갔다. 그러던 모후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세종은 제왕인 몸으로 부르짖고 슬퍼하며 수일동안 음식을 들지 않았다. 더구나 늦장마가 오려는 탓인지 날씨가 덥고 습기가 있어 몸에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평상을 버리고 짚자리에 엎드려 밤낮없이 통곡하였다. 옆에 있던 신하들이 기름종이로써 그 밑에 깔아 습기를 없애려 하였지만 세종은 이를 알고 걷어버리라 하였다. 더구나 큰비가 내려 물이 세종이 자리한 곳으로 스며 들었지만 오히려 옮기지 않다가 신하들이 굳이 옮기기를 청하자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날이 밝자 곧 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이토록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년 뒤인 1422년 5월 초 10일에 아버지인 태상왕 태종이 연화동구(蓮花洞口)의 이궁(離宮)에서 승하하였다. 세종은 태상왕의 병환이 있은 이래로 약과 음식 등을 모두 손수 받들어 드리었고 병세가 위독해지자 밤이 새도록 그 곁에서 모시되 일찍이 옷끈을 풀고 눈을 붙인 적이 없자 신하들이 모두 혹 몸이 상할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고 아들 세종의 걱정어린 눈빛을 뒤로하고는 먼 길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용안에 어린 미소는 누구보다도 세종을 믿는다는 자애로움을 담고 있었다.
이제 세종의 지위는 굳건해져 있었다. 이제 약관을 지난 2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그 현명함과 결단력, 학문적 성취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았다. 제왕의 위엄을 모두 갖추었던 것이다. 그 동안 태상왕인 태종의 배려를 받아왔지만 서서히 왕 자신이 스스로 군권을 장악해 나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비록 말씀이 적었지만 어느 누구도 왕에게 함부 로 대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던 것이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자는 부왕의 영향과 그 스스로 성왕을 닮으려는 탓인지 제왕학에 정진하였다. 부왕인 세종이 그 동안의 격무와 독서로 건강을 해친 탓에 눈병이 나게 되었다. 온천과 약수가 눈에 좋다는 신하들의 말에 지방으로 여러차례 행차하였다. 그 동안 도성에서는 세자로 하여금 대신하여 일을 보게 할 정도로 믿음직하게 성장해 있었다. 세종의 눈병은 그러나 약간의 차도가 있었을 뿐 낫지는 않았다. 하지만 궁으로 돌아와서도 세종은 경전과 사서 등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다. 눈병이 심하여도 잠시 쉬었을 뿐이었다. 이제 세자와 왕자들, 그리고 공주들은 잘 자라고 있어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여진과의 문제도 김종서 등을 보내어 변경을 안정케 하였다. 왜구들도 세종의 치세에 감복해서인지 큰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또한 세종의 위민하는 마음은 지극하였다. 정책을 폄에 있어 급하게 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백성들에게 이롭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입안하고 시험하고 토론하여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고 해 서 정책을 펴나갔다. 세종의 이러한 천품은 신하들에게도 이어졌다. 풍속의 교화와 산업 · 제도 · 관리임용 등의 문제를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진의 활발한 운영과 왕 스스로의 학자적인 자세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태평성대의 길이 환하게 열렸던 것이다.
1443년 이제 장년의 나이에 이른 세종은 갈수록 몸이 편안치 않았다. 특히 이 해에 들어와서는 거동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지병으로 앓아온 눈병은 좋다는 약을 복용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이렇게 악화된 눈병은 이미 왕의 나이 41세 때에도 있어 정무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8살의 나이로 세자가 된 뒤 충실하게 학문에 정진하고 왕도를 닦아온 큰 아들 세자는 벌써 30살이나 되어 있었다. 그의 행동 됨됨이나 예절과 생각함은 세종의 뜻에 거슬림이 없었다. 세종은 이렇게 장성한 세자에게 일단 서무(庶務)를 결재시키려고 하였지만 대신들이 역사에 없던 일이라고 극구 반대하였다. 그래서 일단은 이러한 결정을 거두어 들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세종이 전적으로 정사를 돌보기에는 건강이 허락치 않 았다. 1445년 세종은 세자에게 마침내 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집행토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자는 즉위하기 전에 실제 정치 경험을 쌓아나갔다.
세자인 문종에게 일찌기 섭정을 행하게하여 정치적 경험을 쌓게 한 점이라든가 만년에 모든 정치운영을 세자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게 한 점,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에게 그를 잘 보좌하도록 부탁한 점 등은 세종의 후계왕에 대한 정치적 배려에서 취해진 조처였다. 즉 세자의 건강이 염려되어 이를 보완시키려는 현명한 세종의 판단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종 스스로는 성왕이었지만 결국 부왕인 태종 때에 일어났던 참담한 비극이 다시 문종의 사후 단종년간에 벌어지게 된 것이다.
1446년 3월, 온 천지에 봄기운이 활짝 만개하여 부드러운 온기가 궁실에 가득차 있었다. 세종의 나이 벌써 쉰이 되었다. 이제는 세자에게 정무를 넘기고 어느정도 건강을 되찾아 약간의 운신이 가능하였다.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는 그러한 왕을 곁에서 돌보느라 오히려 자신의 건강을 돌 볼 틈이 없었다. 오직 세종을 위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달 들어서는 몸이 아주 좋지 않아 궁실에 몸져 눕게 되었다. 왕후의 나이도 벌써 쉰둘이나 되었다. 몸조리하기 위해 수양대군의 집으로 일단 몸을 옮겼다. 하지만 이미 왕후의 체력은 병마를 감당할 능력이 되지 못하였다. 세자와 수양대군이 극진히 병간호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세종도 근 사십년간의 고락을 같이 해 온 소헌왕후의 병환을 그렇게도 걱정했건만 왕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3월 24일 봄빛이 완연히 세상을 뒤덮던 날, 세종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해 온 소헌왕후는 세종과 자식들의 앞에서 병색으로 창백한 하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남편과 자식들을 남기고 승하하였다. 잠시의 고요가 찾아왔다. 이윽고 슬픔이 온 방안을 가득 메우고는 곡성이 천지를 뒤덮었다. 온 백성들도 왕후의 죽음을 어머니가 죽은 것처럼 애도한 것이다. 왕 후와 세종 사이에는 위로는 세자에서부터 막내아들인 영응대군(永膺大君)에 이르기까지 8남과 정소공주(貞昭公主)·정의공주(貞懿公主) 등 10남매가 있었다.
세종에게 있어 슬픔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조강지처를 잃은 마음과 앞서간 소헌왕후를 위로하여 저 세상의 복을 빌기 위해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집하여 내게 하였다. <석보상절>은 여러 불경 속에서 석가의 전기를 편집한 내용이다. 더욱이 세종은 떠나간 왕후를 그리워하며 서방정토를 생각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노래로 만들게 하였다. 즉 왕후를 극락정토에 있게 하고, 자신도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세자에게 서무의 결재를 넘긴 뒤에도 왕 자신이 건강이 좋아진 듯 싶으면 세자도 그렇고 신하들도 그렇게 왕에게 많은 일들을 상의하였다. 또한 사신접대의 일들은 빼놓기 힘들었다. 세종은 먼저 떠나간 왕후 심씨, 태종과 원경왕후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도 궁궐 안에 불당을 만들어 극락왕생과 공덕과 복을 빌었다. 이것이 1448년 세종의 나이 쉰둘이 되던 해이 다. 성균관 · 사부학당의 생도들은 불당의 건립에 반대하였으나 왕의 의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내 그 해 12월에 내불당이 완공되었다. 그 자신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유교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우선으로 하였지만 아직도 신앙이 갖는 종교의 영역을 믿음이라는 면에서는 불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위로는 왕실에서부터 사대부가와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그러하였던 것이다.
세종에게는 일견 이제 왕 자신의 건강만 다스리면 모든 것이 좋아질 듯 싶었다. 아래로는 신숙주, 정인지, 양성지 등의 젊은 유신들과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버팀목이 되어 든든했다. 성균관과 사부학당 등의 유생들은 자신들의 믿는 바를 따라 왕에게 거침없이 상소를 올리는 정치적 풍토를 마련하였다. 몸은 병약하지만 믿음직한 세자인 문종이 일을 잘 처리하고 있었고, 문무에 모두 뛰어난 수양과, 문예에 뛰어난 안평이 잘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그 외 많은 자식들도 모두 효성이 지극했다. 남은 것은 자신의 건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동안 세종은 집현전의 운영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의례와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훈민정음과 농업 및 과학기술, 전제의 정비, 세제(稅制)로서의 공법(貢法)의 완성, 의약기술, 음악, 국방 등 많은 정사를 이룩하였다. 왕 자신은 이미 성왕으로 받들만큼 큰 업적을 쌓았다. 무엇이 부족하였던가. 자신은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는데 ……. 형들과도 사이좋게 지냈고 백성을 위해서 몸소 농사에 노심초사 하였다.
여진족에 대해서는 때로는 정벌도 하고 위무도 하면서 안정시켜 변방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학문에 대해서라면 왕 자신이 당대 제일의 유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늘은 왕에게 성왕으로서의 능력은 주었지만 건강으로 왕을 뒷받침할 수 있을 힘은 주지 않았다. 나이 스물둘에 제왕의 자리에 올라 치세하기 어느덧 삼십년이 넘었던 것이다. 더구나 재위 30년 되던 4월에는 원손(元孫)인 문종의 장자 홍위(弘暐) 즉 후에 단종이 될 아이를 왕세손으로 책봉하였으니 후사에도 아무 문제가 없을성 싶었다.
왕의 나이 쉰셋이 되던 해의 섣달에는 더욱 고통이 심하여졌다. 안질과 함께 말을 더듬고 가슴이 뛰면서 운신이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더구나 호흡도 어려울 정도로 숨도 가빠와졌다. 해를 넘겨 신하들과 자식들의 새해 인사를 받다보니 어느 사이엔가 좀 몸이 나아지는 듯 싶었다. 정월 한달 동안 명에서 사신도 오고 또 세자가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아뢰기도 하였다. 몸이 피곤하였지만 잠시동안 원기를 어느정도 회복하니 살 듯 싶었다.
달이 바뀌어 중춘(仲春)이 되었다. 봄내음이 가득 바람에 실려 궁실의 어귀마다 전해졌다. 백설로 하얗게 뒤덮여 있던 산하는 어느덧 녹아 점점이 분홍빛 물을 군데군데 피워놓았다. 연못의 잉어들은 그 동안 운신하지 못했던 화풀이를 하듯 힘차게 물을 휘젓고 다녔다. 겹겹이 입었던 옷들도 이제는 서너가지만 걸쳐도 될 수 있을 정도로 날도 화창하였다.
세종 자신의 건강도 다시 회춘하는 듯 싶을 정도로 원기가 왕성해졌다. 그 동안 종기가 나 고생하던 세자의 건강도 또한 좋아졌다. 세종은 장시간 국가의 대소사를 처리하였다. 그러던 이달 14일 밤에 갑작스레 병이 도져 다시 운신하기가 힘들었다. 17일에는 어가를 불러 먼저 간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 얻은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사저 동쪽 별궁으로 옮겼다. 막 내의 보살핌을 받고 싶었다. 어쩌면 왕 자신의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였다고 느꼈는 지도 모른다. 별궁에서 얼마 안되어 세종은 승하하였다. 세자와 세손, 수양, 안평 등과 막내인 영응대군 내외가 자리하였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계절은 봄을 더욱 만개하게 하였다. 뒤돌아보면 자신만큼 복된 삶을 살은 이도 없을 성 싶다. 부왕인 태종의 보살핌을 아낌없이 받았고 어머니 원경왕후로부터도 그러하였다. 위의 두 형과도 우애있게 지내었다. 자식들은 이제 하나같이 장성하였다. 나라도 모두 태평성세라고 할 정도로 평안하였다. 심씨의 고아한 자태가 뇌리에 어른거린다. 자신의 생애에서 후회될 것은 없었다.
세종의 생애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영광스럽고 찬란했던 시대를 장식하였다. 우리는 지금도 그 시절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 역사상에 되살아나길 간절히 기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영향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능은 소헌왕후 심씨와 나란히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였다. 이곳 영릉에는 여전히 참배객들이 끊임없이 찾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그를 영원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선원세계’에서]
세종대왕 訃告, 행실을 찬(撰)함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22일(정유)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선(李渲) 등을 북경에 보내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임금의 행실을 찬(撰)하여 예부(禮部)에 상신하기를,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의 세째 아드님이었습니다. 어머니 비(妃)는 민씨(閔氏)이니, 홍무(洪武) 30년 4월 10일에 낳으셨습니다. 자람에 미쳐 충녕군(忠寧君)에 봉했는데,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 그전에 병을 앓으면서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므로, 공정왕(恭定王)이 탄식하기를, ‘충녕군(忠寧君)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천성이다.’ 하셨습니다. 영락(永樂) 16년 6월에 세자(世子) 이제(李禔)가 실덕(失德)하여서 폐함을 당하니, 나라 사람들이 왕이 여러 아들 중에서 제일 어질다 하여, 후사(後嗣)로 세우기를 청하니, 공정왕이 그대로 좇아서 조정에 이르고, 곧 이어 늙고 병드시어서, 왕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줄 것을 청하여 아뢰었더니, 17년 6월에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태감(太監) 황엄(黃儼)을 보내시와, 칙서를 가지고 공정왕에게 잔치를 내리셨는데, 칙서에 이르기를, ‘지극한 정성으로 독실하고 후하게 조심하여, 조정을 섬기기를 한가지 덕과 한가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르지 않았는데, 이에 세째 아들이 효성이 있고 우애하여, 힘써 배워 가히 종사(宗祀)를 이어 받들고 나라 사람을 주장하여 처리할만 하다 하고, 또 스스로 나이 늙어서 맡은 일을 이겨낼 수 없어서 왕의 자리를 물려주기를 청하니, 짐(朕)이 생각하건대, 왕의 지식과 의견이 밝게 통달하니, 특별히 청하는 바를 윤허하노라, 대저 세대를 잇는 데는 좋은 아들이 있는 데 있고, 차례를 전하는 것은 좋은 사람을 얻음에 있나니, 이제 왕이 잘 선인의 유업을 이어받아 제후의 나라로써 할 도리를 조심하여 지켜 왔고, 또 능히 어진 사람을 가리고 덕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종사(宗祀)로 하여금 의지할 데가 있게 하여, 나라 사람들의 바라는 바를 부응하니, 깊이 아름답고 즐거워한다. 왕의 한집안의 경사 뿐만 아니라 장차 왕의 온 나라 사람들의 경사가 될 것이다.’ 하였고, 또 왕에게 칙서를 내리기를, ‘그대의 아버지가 독실하고 후하며 노성(老成)하여 하늘의 도리를 공경하여 삼가고 조정을 공손하게 섬겨서, 온 나라 사람들에게 복을 만들어 주었다.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정성이 오래 되어도 바뀌지 않았는데, 요사이 그대가 효성이 있고 우애하며, 힘써 배워서, 가히 종사(宗祀)를 이어 받들고 나라 사람을 주장하여 처리할 수 있다 하여, 왕의 자리를 물려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특별히 청하는 바를 윤허하여 그대로써 조선 국왕을 삼노니, 그대는 차례를 전하기가 쉽지 않음을 생각하고, 벼슬자리가 가볍지 않음도 생각하여,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충성으로써 웃나라를 섬기며, 하늘의 도리를 공경하고 조심하여, 온 나라 사람을 복되게 하면, 하늘에서 즐겁게 보시고 그대로 하여금 길이 부귀를 누리게 하고, 온 나라 사람을 복되게 하면, 하늘에서 즐겁게 보시고 그대로 하여금 길이 부귀를 누리게 하고, 나아가서는 그대의 자자손손에까지도 대대로 그 경사를 누릴 것이며, 온 나라 사람들도 또한 길이 그 경사를 누릴 것이다. 이제 특별히 그대에게 잔치를 내리노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을 지어다.’ 하였고, 19년 8월에는 황제께서 장차 북녘을 정벌하시려고 토산 말[馬]을 드리라 하시므로, 왕이 즉시 말 1만 필을 뽑아 군용(軍用)을 도왔더니, 황제께서 칙서로 아름답다고 포상하셨고, 인하여 은폐(銀幣)를 주셨습니다.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승하(昇遐)하시고 인종 소황제(仁宗昭皇帝)가 등극(登極)하시매, 왕이 사신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어 하례를 드렸더니, 황제께서 내관(內官) 윤봉(尹鳳)을 보내시어 충성스럽고 간곡한 것을 포장(褒奬)하여 채폐(綵幣)를 주셨고,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께서 등극(登極)하신 선덕(宣德) 원년(元年) 정월에는 왕에게 칙서를 내리시기를, ‘짐(朕)이 공손하게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보위(寶位)를 이어받았는데, 왕이 자주 표와 토산물을 받들고 와 보게 하여 갖추 지극한 정성을 나타내므로, 이에 윤봉(尹鳳) 등을 보내 가게 하여 왕과 왕비에게 채폐(綵幣)를 주게 하노라.’ 하였고, 그해 10월에는 오경(五經)·사서(四書)와 《성리대전(性理大全)》·《통감강목(通鑑綱目)》을 하사하셨습니다. 2년 3월에는 황제께서 태감(太監) 창성(昌盛) 등을 보내시어 왕과 왕비(王妃)에게 은폐(銀幣)를 하사하셨고, 3년 5월에는 황제께서 창성 등을 보내시어 은폐(銀幣)와 사기그릇을 하사하셨고, 9월에는 칙서를 내리시기를, ‘왕은 슬기롭고 사리에 밝으며, 재주가 뛰어나서, 조정을 공경하여 섬기니, 족히 왕의 지극한 정성을 볼 수 있으므로, 내 깊이 가상히 여겨 기쁘노라. 이에 내관(內官) 김만(金滿)을 보내 칙서를 가지고 왕에게 유시하노라. 그리고, 왕에게 특별히 사기그릇 15탁(卓)을 하사한다.’ 하였고, 이 해에 왕이 세공(歲貢)으로 바치는 금과 은은 본국의 소산이 아니므로, 친동생 공녕군(恭寧君) 인(裀)을 보내어 표(表)를 갖추어 면제할 것을 청하였더니, 황제께서 인(裀)을 특별한 예절로 우대하시고 상으로 주신 것이 심히 많았으며, 금과 은을 면제할 것을 허락하시되, 다만 토산물로써 정성을 표시하라 하고, 또 칙서를 내리기를, ‘이제부터는 조정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왕의 나라에 가거든, 왕은 다만 예절로써 대접할 것이고, 물건으로써 주지 말지어다. 왕의 부자(父子)가 조정을 공경하여 섬긴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오랠수록 더욱 독실하게 하는 것을 내 깊이 알고 있는 바로, 좌우근습(左右近習)4438) 이 이간질할 수 없는 바이다.’ 하였고, 5년 5월에는 칙서를 내리기를, ‘왕이 대국을 섬기는 마음이 공경하고 정성스러움에 착실하여, 세월이 흘러 지낼수록 게으르지 않고 더욱 융숭하게 하니, 왕의 어진 것을 돌아보매, 깊이 소중하게 여기며, 가상히 여겨 기쁘다. 이제 특별히 중관(中官) 창성(昌盛) 등을 보내어 내가 쓰는 보장도환(寶裝絛環)과 도검(刀劍), 은폐(銀幣) 등 여러 물건을 왕에게 주어 가상함을 포상하여 보인다,’ 하였고, 10월에는 칙서하기를, ‘왕이 지극한 정성으로 조심하면서 공경하여 조정을 섬기니, 내 가상하게 여기며 기쁘다. 이제 사신이 돌아감에 특히 칙서로 포장(褒裝)하여 알리노라.’ 하였고, 7년 3월에는 칙서하기를, ‘왕이 조정을 공경하여 섬기고, 그 직책을 조심스럽게 다하는 것을 내 이에 자세하게 알고 있노라. 이에 특별히 창성(昌盛) 등을 보내어 왕에게 채폐(綵幣)를 주노라.’ 하였고, 8월에는 칙서하기를, ‘왕이 조정을 공경하여 섬기니, 가히 뛰어나게 어진 왕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도 왕을 대접하기를 역시 앞뒤를 한가지 성의로 하노라.’ 하였습니다. 이보다 먼저 파저강(婆猪江) 등처의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 등이 양목답올(楊木答兀)과 한무리가 되어 요동(遼東)·개원(開原) 등처의 군민(軍民)을 노략질할 때마다, 사로잡힌 자들은 간고함을 이기지 못하여, 영락(永樂) 21년 이후로부터 우리 나라에 도망하여 온 자가 5백 60여 명인데, 왕이 모두 북경으로 돌려보내 주니, 야인(野人)이 이로 인하여 분한 마음을 품고 북녘 변방을 침략하였습니다. 도적 4백여 기(騎)가 변방 고을에 갑자기 쳐들어와서 군인과 민간을 살해하고, 소와 말을 겁탈해 갔으며, 또 자주 사람을 시켜 공갈 위협을 하고 변방 고을 정탐하여 엿보았는데, 8년 4월에 우리 나라 변방 장수가 도적의 종적을 탐지하여 무찌르니, 이만주(李滿住) 등이 힘이 궁하여 도망갔고, 그 졸개를 잡아 왔더니, 곧 칙유(勅諭)를 받들었는데, ‘모두 돌려보내라.’ 하시므로, 왕이 공경하여 따라서 즉시로 1백 40여 명과 세간살이 자질구레한 물건까지 모두 다 돌려보냈습니다. 9월에는 황제께서 채폐(綵幣)를 하사하였으며, 11월에는 《오경사서대전(五經四書大全)》과 《성리대전(性理大全)》·《통감강목(通鑑綱目)》을 하사하였고, 10년에 선종 황제(宣宗皇帝)가 승하(昇遐)하시고, 2월에 태상 황제(太上皇帝)가 등극(登極)하시어, 병부 낭중(兵部郞中) 이약(李約) 등을 보내시어 저사금단(紵絲錦段)을 하사하였고, 11월에는 《음주자치통감(音注資治通鑑)》을 하사하였고, 정통(正統) 3년 8월에는 원유관복(遠遊冠服)을 하사하였고, 6년 3월에는 칙서하기를, ‘조선이 왕의 할아버지 때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을 섬겨서, 지금까지 수십 년간에 공경하고 조심하는 정성이 더욱 돈독하므로, 조정에서 예절로 대우하기를 본래부터 일반 등급보다 더하여 준다.’ 하였습니다. 11월에는 황제께서 왕이 묵은 병[宿病]이 있음으로써, 의원의 약방문과 아울러 해당되는 약재료를 보내 주셨고, 7년 5월에는 달달(達達)이 사람을 시켜 글을 가지고 우리 나라 북녘 변방에 왔으므로, 변방 장수가 말해 주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다. 이제 대명 황제(大明皇帝)가 천하를 통일(統一)하였는데, 네가 어찌 무모한 말을 하느냐.’ 하고, 드디어 거절하여 들이지 않고, 왕이 북경에 달려가서 보고하게 하였더니, 황제께서 칙서하시기를, ‘보고한 것을 보아, 힘써 달달(達達)을 거절한 일을 알고, 깊이 가상히 여겨 기쁘다. 왕의 충성스러운 것은 내 본시부터 아는 바라, 이번에 보고한 것을 기다려서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하고, 왕에게 기폐(綺幣) 안팎감을 하사하였고, 9년 2월에는 칙서하기를, ‘짐(朕)이 대통(大統)을 받은 뒤로 왕이 잘 선대의 뜻을 이어 조공(朝貢)하기를 제때에 하고, 모든 타이른 바 변방의 일을 다 잘 받들어 좇아서, 거슬리거나 게으름이 없으니, 왕은 참으로 어질다. 특히 왕에게 관복(冠服)을 주어서 보살펴 대우하는 뜻을 표한다.’ 하였고, 이보다 먼저 대마도(對馬島)·일기도(一岐島) 등의 적왜(賊倭)가 중국(中國) 연해(沿海) 지방을 침략하고, 또 우리 나라 남녘 변방을 침범하였으므로, 변방 장수가 사로잡았고, 도망하여 저희 섬으로 돌아간 자를 왕이 사람을 시켜 그 도주(島主)를 타일렀더니, 도주가 감히 숨기지 못하고 모두 다 잡아 보냈으므로, 왕이, 도적이 중국(中國)을 침략하여 천주(天誅)를 간범(干犯)하였으므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즉시로 실라사야문(失剌沙也門) 등 60명을 붙들어서 북경에 보내드렸는데, 4월에 황제께서 칙서하시기를, ‘왕이 나라의 동쪽 번방(藩邦)을 이어받은 후에 변방 지경을 보장하면서, 잘 그대의 선왕(先王)이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는 마음을 몸받아서 공손하게 정성을 다하기를 오랠수록 더욱 독실하게 하매, 조정에서 은혜롭게 보살펴 대우하기를 더하여 변함 없이 더욱 융숭하게 하니,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이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사이가 벌어질 수 없는 것인데, 이제 다시 변방을 침범한 왜적을 결박하여 보내니, 족히 왕이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좇아서, 나라에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의사를 몸받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변방을 지키는데 마땅한 사람을 믿었음도 볼 수 있는 것으로, 포악한 것을 방어한 공로가 있음을 짐(朕)이 깊이 가상하게 여기노라. 특별히 왕에게 채폐(綵幣) 안팎감을 주어 왕의 충성에 보답한다.’ 하였고, 10년 정월에는 또 적왜(賊倭)를 북경에 붙들어 들이니, 황제께서 칙서하시기를, ‘대대로 동토(東土)를 지키면서 직책을 받드는 데 충성을 다하여, 더욱 부지런히 하고 게으르지 아니하니, 조정에서 착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어진 것을 소중하게 여겨, 예로써 대우하기를 특별하게 더하노니, 이른바 덕이 후한 자는 영광스럽게 총애를 받는다는 것이, 왕을 두고 한 말이다. 전번에도 왜적(倭賊)이 출몰(出沒) 하면서 도적질한 것을, 왕이 도적의 무리를 사로잡아 보내 왔더니, 이제 다시 그 나머지 무리를 잡아서 서울로 보내 주니, 더욱 왕의 충성스럽게 국가를 호위하는 마음이 오랠수록 더욱 돈독한 것을 보게 되며, 깊이 가상히 여겨 기뻐하노라. 특별히 칙서를 내려 아름다움을 포상하는 뜻을 표시하노라.’ 하였고, 13년 정월에는 칙서하기를, ‘왕이 대대로 동쪽 나라에 살면서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잘 섬기며, 직책과 조공을 잘 지키어, 오랠수록 더욱 정성스럽다. 특별히 왕에게 채폐(綵幣) 안팎감을 하사하노라.’ 하였고, 14년 겨울에는 왕이 현재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등극(登極)하셨다 함을 듣고, 즉시로 사람을 보내 표(表)를 받들어 하례를 드렸더니, 황제께서 천하에 조서를 반포하시고, 이에 시강(侍講) 예겸(倪謙) 등에게 명하시와 칙서를 내리시기를, ‘그대가 국왕으로써 동녘 변방을 대대로 지켜, 조정의 제후 나라로서 여러가지로 직공(職貢)을 닦으니, 이 지성스러움을 돌아보매, 퍽이나 칭찬하여 가상하게 여기노라. 이제 짐(朕)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처음에, 마땅히 포고(布告)하는 명령을 알려야 할 것이므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보이고, 예물(禮物)을 하사하노니, 더욱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여 길이 제후국으로서 굳게 하라.’ 하였습니다.
경태(景泰) 원년(元年) 2월 17일 임진(壬辰)에 병환으로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셨는데, 향년(享年) 54세이고, 왕의 자리에 있은 지 33년이며, 다섯 대의 조정을 대대로 섬기시되, 충의(忠義)와 정성(精誠) 이 지성에서 나와, 무릇 드리는 문서(文書)와 토산물까지도 친히 스스로 감독하여 드리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특별하게 여러 황제께서 돌보아 총애하심을 입었고, 주시는 물건의 많았음과 아름답다고 칭찬하심의 잦은 것이 고금에 드문 바이었습니다. 왕이 젊어서부터 은근한 덕이 있사와, 공정왕(恭定王)이 심히 기특히 여겨 사랑하여,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왕을 불러서 처리하게 하여 시험해 보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나라안 사람들이 마음을 붙여 바랐더니, 왕의 자리를 이어받음에 미쳐, 공정왕의 생각에 부탁하는 데 좋은 사람을 얻었다 하여, 왕이 나아가 뵈올 때마다 공정왕이 지극히 기뻐하여 눈물을 흘릴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비록 정무(政務)가 바쁠지라도 한번도 정성(定省)을 폐한 적이 없고, 3년 동안 상례를 치르는 데 슬퍼하기를 예절을 다하였으며, 형제의 사이에도 잘 우애하기를 돈독하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공정왕이 전 세자(世子) 제(禔)를 밖으로 내쳤었는데, 공정왕이 돌아간 후에 왕이 생각하기를, 형이 나이가 이미 많았으니 반드시 소년 기습(少年氣習)이 없어졌을 것이라 하여, 서울 집으로 불러 돌아오게 하여 날마다 친히 대접하되, 조금도 혐의하거나 간격이 없어 하니, 여러 신하들이 비록 옳지 않음을 고집하여도, 왕이 모두 듣지 않고 두 형을 섬기되, 반드시 인정과 예절을 다하였고, 여러 아우를 대우하기를 또한 은혜와 사랑하기를 다하였습니다. 종실(宗室)의 여러 친척에 이르기까지 또한 자주 불러 보면서 술상을 차려 흡족하게 즐겁도록 하였으며, 평소에 친근하지 않아 밖에서 한가롭게 사는 사람에게도 또한 복호(復戶)하게 하거나, 세금을 덜어주게 하고, 처음으로 종학(宗學)을 설치하여 모든 종적(宗籍)에 속한 자를 모두 학문을 배우게 하였으며, 비첩(妃妾)을 대우하는 데 그 명분을 엄하게 하여 모두 화목하게 하니, 집안의 도리가 바로잡혀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아들 18을 두었는데, 적서(嫡庶)의 사이에 의장(儀章)과 은사하는 수효가 모두 등급의 차이가 있었으며, 가르치기를 덕의에 맞는 방법으로 하니, 모두 학문을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여, 교만하고 오만하거나 사치하는 풍습이 없었습니다. 왕은 매일 4고(四鼓)에 일어나서, 환하게 밝으면 군신의 조참을 받은 연후에 정사를 보며, 모든 정사를 처결한 연후에 윤대(輪對)를 행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묻고, 수령의 하직을 고하는 자를 불러 보고 면담하여, 형벌 받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며, 백성을 사랑하라는 뜻을 타이른 연후에, 경연(經筵)에 나아가 성학(聖學)에 잠심하여 고금을 강론한 연후에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서 편안히 앉아 글을 읽으시되, 손에서 책을 떼지 않다가, 밤중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드시니, 글은 읽지 않은 것이 없으며, 무릇 한번이라도 귀나 눈에 거친 것이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는데, 경서(經書)를 읽는 데는 반드시 백 번을 넘게 읽고, 자사(子史)는 반드시 30번을 넘게 읽고, 성리(性理)의 학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고금에 모든 일을 널리 통달하셨습니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선비들을 모아 고문(顧問)을 갖추었으며, 또, 널리 고금의 충신과 효자·열녀의 사적과 도형 기전(圖形紀傳)을 모아 시(詩)와 찬(讚)을 써서 이름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이라 하여 안팎에 반포하니, 궁벽한 촌 동리의 아동 부녀(兒童婦女)에 이르기까지 보고 살피지 않는 이가 없게 하였습니다. 또, 주(周)나라 처음부터 이제까지와 우리 나라의 모든 치란 흥망(治亂興亡)으로서 본받을 만한 것과 경계하여야 할 일을 널리 찾아 기록한 것이 모두 1백 50권인데, 이름하기를 ‘《치평요람(治平要覽)》’ 이라 하였습니다. 음률이나 천문(天文)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밝게 통달하며, 신하를 예도로서 대우하여 왕의 세상이 끝나도록 사대부(士大夫)로서 형벌에 죽은 자 없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반드시 대신과 모의(謀議)한 뒤에 행하는 고로, 잘못된 일이 없었고, 계급을 올려 주는 것이 일정한 규칙이 없어서, 사람이 혹시 요행을 바랄까 염려하여, 자세하게 전주(銓注)하는 법을 제정하였으나, 어질고 재능이 있으며 재주와 덕행이 있는 자는 차례 없이 가려 뽑아 공평하고 진실하게 사람을 썼고, 경계(經界)가 바르지 못하여 세금 거두는 것이 맞지 않을까 염려하여, 땅의 기름지고 척박하며 연사의 흉풍에 따라 그 등급을 나누었는데, 제도가 심히 자상하였습니다. 오례(五禮)가 미비된 것을 염려하여 고금을 참작하여서 정례(定禮)를 제정하니, 풍속이 바로잡혔고, 노인으로 1백 살 이상 된 사람에게는 정월에는 쌀을 주고, 달마다 술과 고기를 주며, 80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작위(爵位)를 차등 있게 주고, 중추(仲秋)마다 남자는 왕이 친히 나아가고, 부녀자는 왕비가 친히 불러서 잔치를 내려 주었습니다. 시골 고을에 있는 사람은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대접하도록 영원한 법으로 정하였고, 또, 평안할 때에 위태로운 것을 잊을 수 없다 하여 장수와 군졸을 뽑아 쓰는 제도를 엄하게 세우고, 고금에 전쟁터에서 군졸을 사용하던 사적을 모아서 무경(武經)에 대질하여 이름하기를, ‘《역대병요(歷代兵要)》’라 하였습니다. 《장감박의(將鑑博義)》는 다만 의견을 논술 토의(論述討議)한 것뿐이므로, 본전(本傳)에 있는 사적(事跡)을 더 넣어서 장수와 사졸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전함(戰艦)을 더 만들어 수전(水戰)을 익히게 하였으며 요해(要害)한 땅을 가려 성과 보(堡)를 많이 설치하여서 뜻밖의 변환을 대비하였고, 본국의 옛날 경계가 북으로는 두만강(豆滿江)을 지났는데, 고려가 망할 무렵에 와서 연변의 땅이 모두 잡종 야인(雜種野人)의 점거(占據)한 바 되었는데, 왕이 처음으로 여러 진(鎭)을 설치하여 옛날의 경계를 회복하였으며, 야인(野人)과 왜노(倭奴)를 접대하는데 알맞게 하여 사방이 경계할 것이 없었습니다.
크고 작은 형벌을 애써 삼가서 불쌍하게 할 것을, 관리에게 경계하여, 비록 일태 일장(一笞一杖)일지라도 모두 조정 율문(朝廷律文)에 따라서 하고, 절대로 함부로 억울하게 하는 것을 금하여, 교령(敎令)에 기재하여 나라 안에 반포하고, 관청의 벽에 걸어 항상 경계하여 살피기를 더하게 하기를, 안옥(犴獄)에 이르기까지 하게 하고, 도면을 그려서 안팎에 보여 그림에 따라 집을 짓게 하되, 추운 곳과 더운 곳을 다르게 하였으며, 구휼하기를 심히 완비하게 하여, 횡액에 걸려 여위고 병든 자가 없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술을 경계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데까지도 글을 지어서 관리에게 타이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왕이 인자하고 명철하여 과단성 있게 결단하였고, 효성 있고 우애하며 부지런하고 검박하였으며, 대국을 섬기는데 지성스럽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도를 다했으며,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고, 상벌을 공정하게 하였습니다. 어진 사람을 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시키고, 일을 반드시 옛 것을 스승삼아 제도를 분명하게 갖추어 놓았으니, 그물[網]을 들면 그물눈[目]이 저절로 열려서, 섬에 사는 왜인과 야인(野人)들도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한 지 30여 년간에, 백성이 전쟁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편안 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기었습니다. 문교(文敎)가 크게 일어나서 울연(蔚然)히 볼 만하였으니, 훙서(薨逝)하신 날에 멀고 가까운 곳 사람들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39책 127권 36장 B면
【영인본】 5책 173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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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438]좌우근습(左右近習) : 좌우에 가까이 모시고 있는 사람들. ☞
세종대왕의 업적
세종은 우리 역사에 있어 유교정치를 구현한 군주였다. 그 자신이 이미 성리학에 있어 달통하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유교정치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로서 위민(爲民) 혹은 애민(愛民)과 순리(順理)에 맞추는 것이었다. 단지 이념상에서가 아닌 실제로 이를 행하기 위해 우선 그 자신이 성실하게 학문을 닦았다. 집현전 등을 두어 유능한 인재를 길러냈다. 또한 지방민의 올바른 안착을 위하여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나가는 수령들에게 백성들을 잘 보살필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이종무와 김종서 등을 시켜서는 왜구와 여진족의 문제를 일소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문화면에 있어서도 수많은 경서와 예서(禮書), 악서(樂書) 등을 펴내고 농업의 발전을 위해 농서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전세제도 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으며 과학정책도 역시 훌륭하게 펴나가 측우기, 해시계 등이 만들어졌다.
세종은 어찌보면 태조·태종 등이 이미 마련한 비옥한 농토에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가장 풍성한 수확을 거둔 훌륭한 농부였다고 하겠다.
여러차례 강조한 바이지만 세종 그 자신은 이미 유교정치의 핵심이 어디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또 이를 여러 분야에서 실시하여 이념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가. 집현전(集賢殿) 운영
유교문화의 완성이라는 점은 집현전의 운영, 육전의 법, 경연, 삼강과 오륜의 행실도, 예악의 정리, 경서 및 사서의 편찬 등을 통하여 나타났다. 이 내용은 이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훌륭한 유학적 소양을 갖춘 신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과 세종 자신이 갖고 있는 왕권을 조화롭게 운영하지 않았다면 많은 잡음과 함께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먼저 세종이 이들을 어떻게 이끌어내고 그들의 학문을 키웠으며, 또 그들과 함께 정치운영을 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학문연구기관이자 인재양성소로서의 집현전의 운영을 검토함으로써 그 토대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집현전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알아보자. 집현전은 고려 인종(仁宗) 14년(1136)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고 이름을 바꾼데서 비롯 된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종대에 설치된 일이 있었고 또 태종 17년 정월에 사간원에서 상소하길, 정치를 하는 데는 나라에서 나라일을 맡길 인재를 길러야 하는데, 수문각(修文閣) · 집현전 · 보문각(寶文閣) 등 이 이름뿐이지 제구실을 못하니 새로 집현전을 만들자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집현전을 설치 운영하여 그 성과를 거둔 것은 세종 때였다. 즉 집현전이라고 하면 세종 2년 3월에 설치 운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토대구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 교양에 철저한 인재의 양성 및 이에 입각한 문물의 정비와 전통문화의 정리가 요구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집현전에는 유학에 능통한 연소한 문사들을 뽑아 이들에게 여러 가지의 특 전을 주어 그들의 학문과 연구활동을 보장하였다.
즉, 사헌부(司憲府)의 규찰을 받지 않아 신분이 보장되었고, 경제적인 배려 또한 각별하였다. 산사(山寺)에서 독서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장기간의 휴가인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혜택을 주었다. 정원은 처음에 10명이던 것이 뒤에는 2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직무 중 중요한 것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소속된 간원은 경연관(經筵官) · 서연관(書筵官) · 시관(試官) · 사관(史官) · 지제교(知製敎)의 직책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경연과 서연이 인정(仁政)을 베풀기 위한 국왕과 세자의 수덕(修德)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현전의 기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분야는 중국의 옛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충실한 연구와 학문을 쌓도록 하기 위해 세종은 이들을 다른 관부에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이것은 일면 굉장한 특혜였다.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서 학문과 연구에 정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철저한 신분보장과 필요한 물품의 지원, 그리고 세종 자신의 학문적 관심은 집현전을 당대 제일의 학문연구기관으로 만드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따라서 집현전은 세종조의 국가 정치 일반 있어서 자문기관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또한 국가 제도 · 정책 연구 기관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집현전을 운영한 결과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 이선로(李善老) · 이개(李塏) · 류의손(柳義孫) · 권채(權採) · 남수문(南秀文) 등이 그들이다. 이러한 인적 자원은 세종 때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룩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 11년에는 대궐 서편에 집현전을 새로 마련하고 또한 장서각을 집현전 북쪽에 다시 올렸다. 집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이 들어와서 저녁 늦게 나갔다. 때를 맞추어 부지런히 연구하였으며, 일상 왕의 옆에서 공부하였다. 집현전의 학자들에게는 삼시 세끼를 직접 궁중의 내관(內官)들이 대접하였고, 학사들은 밤에도 순번을 정하여 집현전을 지키면서 밤을 새워 책을 읽기도 하였다.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는 세종인지라 혹 집현전의 학사 중 무리하여 병이 나는 자라도 있을까 염려하여 내관에게 불을 밝히게 하고 집현전을 수시로 찾았다. 간혹 독서하다 피곤하여 깜빡 잠이 든 학사가 있으면 그들을 깨우지 않고 초피(貂皮)의 웃옷을 벗어 살며시 덮어주곤 하였다. 어찌보면 열심히 공부하는 제자를 스승의 사랑과 보살핌의 손길로 아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린 학사들이 있으면 당대의 유학자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학문을 배우도록 하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집현전의 운영은 세종 과 집현전 학사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하여 집현전에서 편찬된 서적을 몇가지 든다면 다음과 같다.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 <치평요람(治平要覽)> · <훈민정음(訓民正音)> · <역대병요(歷代兵要)> · <효행록(孝行錄)> ·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서적들이 언 해되거나 주석되어 그 학문적 성과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나타내 준다. 특히나 학사들의 학문적 성취와 관심에 대해서는 명나라의 유신들도 감탄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종 때 이렇게 활발한 연구활동과 학문활동 등이 수행된 집현전은 결국 정치적 역풍에 휘말려 세조 2년 육신사건(六臣事件)으로 혁파되게 되었다. 이 후 여러차례 집현전과 같은 기관을 두고자 하는 노력은 있었지만 결코 세종 때 집현전의 기능을 갖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관주도적인 문화(편찬)사업은 그 뒤 홍문관(弘文館) 또는 정조대의 규장각(奎章閣) 등에 의해 계승되기도 하였다.
집현전의 운영을 통하여 마련된 유교적인 학문연구의 성과는 경전의 주해, 제도의 연구 등 여러 분야로 파급되어 나갔다. 여기서 특히 괄목할 만한 것은 예조 ·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 집현전 등에서 연구하고 마련한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국가오례(國家五禮 : 吉禮 · 嘉禮 · 賓禮 · 軍禮 · 凶禮)와 사대부 · 서인들의 유교적 의례로서 정리된 사례(四禮 : 冠禮 · 婚禮 · 喪禮 · 祭禮) 등의 제도가 마련됨으로써 왕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체계가 올바로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조에 이루어진 오례의 내용은 사실상 왕실중심의 의례만을 일단 정례화한 것으로 나타난다. 전체 국가질서의 편성보다는 왕실의 권위와 존엄성을 생각하는 의례, 더욱이 왕위계승을 유가적 논리 안에서 정치적 관행으로 정착시키려는 정치적 의지를 보인다.
왕실중심의 의례의 정례화는 왕권을 유교이념으로 명분을 정립시키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사례로써 소개되는 주자가례는 사대부 중심의 사회공동체 질서론을 반영한 의례로 자리잡게 됨을 의미한다. 조선초기 사회의 정돈과정에서 보여 준 역사사실의 실태라고 하겠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왕실과 왕권의 권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가를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의 문제와 새로운 정권의 혁명적 내용도 수용하는 명분논리, 그리고 왕실의 정치적 위상의 정비가 바로 유교적 예론으로 심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례의 운영구조가 가지는 의미는 왕실 즉 왕권의 위상이 어느정도인가를 가늠해주는 척도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례(四禮)의 체계와 내용은 이미 조선시대에도 그 보급 노력이 있었다. 세종조의 단계에 들어와서는 양반 사대부층의 유교적 윤리 실행의 표준으로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정착되었다. 이것은 당시 유자층으로서 사대부의 반열에 있는 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도덕규범의 의례였으며, 상층사회구조의 운영도 이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백성에 대해서도 유교적인 교화정책(敎化政策)으로서 열녀 · 효자 등에 대한 표창과 이를 기리기 위한 정표(旌表)의 정책이 있었으며, 나아가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집현전(集賢殿)에서 새로 올린<삼강행실>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천하의 떳떳한 도가 다섯 가지 있는데, 삼강이 그 수위(首位)에 있으니, 실로 삼강은 경륜(經綸)의 큰 법이요, 일만 가지 교화의 근본이며 원천(源泉)입니다. 만약 고대(古代)의 일을 상고하여 본다면, 순(舜)임금은, 오전(五典)을 삼가 아름답게 하였으며, 성탕(成湯)은 일찍이 사람의 기강(紀綱)을 닦았고, 주(周)나라에서는 백성에게 오교(五敎)를 소중히 여기어서, 향삼물(鄕三物)로 선비들을 추거(推擧)하여 손님으로 예우(禮遇)하였습니다. 그러니 제왕(帝王)의 정치가 무엇을 먼저 힘쓸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선덕 신해년에 우리 주상 전하께서 측근의 신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삼대(三代)의 정치가 훌륭하였던 것은 다 인륜(人倫)을 밝혔기 때문이다. 후세에서는 교화가 점점 쇠퇴하여져서, 백성들이 군신 · 부자 · 부부의 큰 인륜에 친숙하지 아니하고, 거의 다 타고난 천성(天性)에 어두워서 항상 각박(刻薄)한데에 빠졌다. 간혹 훌륭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있어도, 풍속 · 습관에 옮겨져서 사람의 보고 듣는 자의 마음을 흥기(興起)시키지 못하는 일도 또한 많다. 내가 그 중 특별히 남달리 뛰어난 것을 뽑아서 그림과 찬을 만들어 중앙과 지방에 나누어 주고, 우매한 남녀들까지 다 쉽게 보고 느껴서 분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또한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한 길이 될 것이다.'고 하시고,
드디어 집현전 부제학 신(臣) 설순에게 명하여 편찬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여기에서, 중국(中國)에서부터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 동방(東方) 고금(古今)의 서적(書籍)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모아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우뚝히 높아서 기술할 만한 자를 각각 1백 인을 찾아내어, 앞에는 형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뒤에는 사실 을 기록하였으며, 모두 시(詩)를 붙이었다. 이를 `『삼감행실도(三綱行實圖)』'라고 이름을 하사하시고,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인쇄하여 길이 전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권56 14년 6월 병신(9)])
군신 · 부자 · 부부의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 부위자강(父爲子綱) · 부위부강(夫爲婦綱)의 삼강의 보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종 스스로도 직접 당시의 세태가 인륜을 저버리거나 인륜을 참되게 알지 못하여 군신과 부자, 부부의 도리가 천리에 어긋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삼강(三綱)은 인도의 대경(大經)이니, 군신(君臣) · 부자(父子) · 부부(夫婦)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혹은 `내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준 덕과 진심, 그리고 의젓하게 타고난 천성은 생민(生民)이 똑같이 받은 것이므로, 인륜(人倫)을 도탑게하여 풍속을 이루게 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선무(先務)이다.'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아침에 더하고 저녁에 진취하여, 그 천성의 본연(本然)을 감발(感發)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게 되면, 자식된 자는 효도를 다할 것을 생각하고, 남편된 자와 아내된 자는 모두 자기의 도리를 다하게 되어, 사람들이 의리를 알고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진작할 것이니, 교화(敎化)가 행하여 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더욱 지치(至治)의 세상에 이르게 될 것이다.'
라고 강조하였다.
세종은 이렇게 삼강과 오륜, 인간사회의 질서체계를 오례와 사례의 구조를 통하여 사회의 운영을 교화해 나가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종실의 범위를 종친과 마찬가지인 왕의 현손(玄孫 즉 4대손)까지의 자손으로 하고 이들에 대한 교육의 제도를 정하였다. 즉 처음으로 종학(宗學)의 법을 정하였던 것이다. 사실 종실 자제들에 대한 교육은 그들이 문장을 잘 하도록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학문을 닦아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자질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종친들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무뢰배들과 어울려 갖은 비리를 저지르기 일쑤였으며, 공부하는데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사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종친들을 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의도와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왕실의 세력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왕실 주변의 인물을 정치권에서 배제시키는 제도적 조치는 종실의 인재들의 건전한 사회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종학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세종은 1428년 7월에 대군 이하 종실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을 처음으 로 건립하였고, 이듬해 10월에 학사를 세우고 교수로서 종학교수관(宗學敎授官)을 두었으며 또한 종학식략(宗學式略)을 상정하기도 하였다.
심화 확대된 유교의 정치이념과 사회윤리는 예악(禮樂)의 정리로 더욱 세련화되었다. 유교사상에서 예(禮) · 악(樂)의 정비는 곧 모든 질서의 안정을 뜻한다. 예라는 것은 도덕인의(道德仁義)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예제(禮制)가 행하여지면 이와 더불어 악(樂)이 흥한다는 것이 유가의 기본 인식이었다. 따라서 세종 때에 유교정치를 추구하고 이것이 안정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예악관에서 왕조의 예 · 악의 기준을 확립코자 하였던 것이다.
<아악보(雅樂譜)>의 서문에서 `악(樂)이란 것은 성인(聖人)이 성정(性情)을 길러 신인(神人)을 화(和)하는 소이(所以)이며, 천지를 순(順)하고 음양을 조(調)하는 도(道)'라고 하였다. 특히 의례상정소와 집현전의 연구활동 가운데는 실제 이 예악에 관한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세종의 의도에서 더욱 박차를 가하여 연구가 진전되었다. 즉,
“임금은 나라를 평정한 뒤에는 음악을 제정하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한 뒤에는 예를 마련한다. 그러므로, 나라를 평안케 하는 공적이 커지면 악을 갖추게 되고, 군왕의 다스림이 백성들을 골고루 편하게 하면 예를 갖추게 된다.”
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의 예악을 참작하여 어떻게 조선의 것으로 소화하느냐 하는 것이 연구과제로 떠올랐다. 더욱이 악기를 정리하고 그 음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작업이 기술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음과 악기에 정통한 인재가 요구되는 시대상을 보이고 있었다. 집현전과 많은 유자들을 동원하여 악의 원리를 심화시켜 어느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악리(樂理)에 대한 이해에 그칠 뿐이었다. 즉 그것은 비유하면 `쟁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밭가는 법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인 것이다. 이제 그것은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게 된다. 즉 진정한 `지음(知音)'의 경지에 있는 인물을 찾는 것이었다.
중국의 역사서와 경서, 그리고 악서에 나오는 고제(古制)를 연구하고 또 송나라 채원정(蔡元定)이 정리한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수용하여 그 악리가 정리되었다. 세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악(雅樂)은 본래 우리 나라 악이 아니고 중국의 소리이다. 중국사람들은 일상 들어 익혀서 제사에 음율을 잘 연주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나서부터 향악(鄕樂)을 듣다가 죽은 뒤에는 아악을 들으니 어찌 된 일인가? 더욱이 아악은 중국에서도 역대 왕조마다 제작 정리 한 것이 다 같지 않아서, 황종의 소리[黃鐘之聲 : 아악의 표준음]에도 높고 낮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악의 제도는 중국에서도 아직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다. 황종관(黃鐘管)을 만들자면 그 기후 조건을 쉽사리 바꿀 수가 없다. 중국 동쪽에 있는 우리 나라는 춥고 더운 기후가 중국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나는 대(竹)로 중국 음악의 황종 관을 만들어 쓸 수가 있겠는가? 황종에는 반드시 중국의 대를 쓰는 것이 옳겠다.”
[<세종실록> 권49 12년 9월 기유(11)]
음악의 기준음을 설정하는 것에 무엇이 기초원리인가를 바르게 알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구체화한 사람이 바로 세종과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박연(朴堧)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실제 작업의 세세한 것은 지음(知音)과 악리에 정통한 박연이 맡아서 하였다. 여기서 세종의 배려와 세종 자신의 능력이 한층 돋보이는 역사기록이 세 종실록에 적혀있는 것이다. 신하들에게 일을 맡기고 그 결과를 측정함에 있어 누구보다도 더 상세하게 알고 모자라는 점과 흡족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세종과 박연의 관계는 군신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서로가 같았다. 다음의 대화내용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박연이 새로 만든 편경을 세종 앞에서 시험 연주하면서 생긴 일이다.
“중국의 편경(編磬)은 조율이 정확하지 않은데 박연은 참 잘 만들었다. 경돌을 얻은 일도 다행한 일이려니와 이 돌로 만든 편경의 소리는 맑고 고우며, 그 뿐만 아니라 조율도 퍽 잘 되었다. 그런데, 이칙(夷則 : 12율 가운데 하나. 9번째의 소리)의 경돌이 소리가 좀 높으니 어찌된 일인가?”
라고 그 음의 다름을 지적하고 있다. 음을 모르고 있었다면 도저히 지적할 수 없는 구체적인 부분이었다. 곧바로 박연은 경돌을 다시 세워 정밀하게 조사하고 일일이 소리를 귀기울여 들었다. 그러던 중 박연은 깜짝 놀랐다. 세종의 지적대로 이칙의 경돌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칙의 경돌을 만들 때 그어놓은 먹줄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본래 나야하는 소리가 높게 나게 된 것이었다.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흘렀고, 더욱 세종에 대한 경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 즉시 그 경돌을 갈아 음이 올바로 잡히도록 고쳐 흡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세종과 박연의 노력의 결과로 세종 12년 가을에는 궁중의 제도와 음악을 법도에 맞게 조화시켜 조회 음악에 아악을 쓰도록 하여, 매달 초하루 · 16일에는 아악을 연주하고 다른 네 번의 조회에는 전대로 향악을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종 13년 정월 초하루에는 백관과 더불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노력으로 정리되어 만들어진 아악의 연주를 감상하면서 흡족한 마음으로 예에 따라 새해의 하례를 받았다. 종묘, 사직, 석전(釋奠), 천신제사, 선농(先農) · 선잠(先蠶)의 음악을 바로잡아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악기와 악곡은 궁중예악으로서 오례의(五禮儀)에 맞춰 연주되었다.
실로 아름다운 소리와 광경이었다. 그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때로는 왕실의 위엄을 느끼게 하고, 때로는 부모의 손길같은 부드러움을, 또 때로는 즐거움이 저절로 일어나는 듯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만조백관이 자리한 가운데 수백명의 악인들이 수십 수백의 악기를 앞에 두고 그 장엄화려하면서도 단아하게 연주하였으니 참으로 인간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 어서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세종의 악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열정의 결과 이루어진 산물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이와 더불어 친히 악보를 기록하는 법인 기보법(記譜法)도 창안하였는데 이것이 정간보(井間譜)이다. 여기에 음악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정대업(定大業)> · <보태평(保太平)> · <발상(發祥)> · <봉래의(鳳來儀)> · <만전춘(滿殿春)>등의 대곡을 작곡하여 기보하기도 하였다.
나. 불교와 사회정책
사회운영의 체계로서 이렇게 유교가 지도원리가 됨에 따라 삼국시대 이래로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영원리 상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지 일반민의 생활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신앙으로서까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유교의 가치체계, 특히 성리학적인 학문배경을 가진 사대부들과 학자들의 경우 불자들이 무위도식하며, 심하면 고리대와 더불어 투기까지 일삼는 것이 결코 국가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지적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강해져 불교에 대한 일대 정리를 하게 된다. 세종조에 있어서의 불교사원에 대한 정리가 그것이다.
먼저 불교의 토지와 노비로 대표되는 세속적인 권력기반에 대한 것으로서 세종 1년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를 정리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다. 다음으로 불교사원의 종파를 정리하는 작업으로서 세종 6년에 선교(禪敎)의 양종으로 병합하고 사사(寺社) · 사사전 · 상주승(常住僧)의 정수를 재정리하였다. 세 번째로 불교행사의 제한과 축소의 형태로서 법석송경(法席誦經)과 도성 안에서의 경행(經行), 궐내의 연등행사를 없애고 단지 승사(僧舍)에서만 이를 허락하였다.
강압책을 펴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국가 운영상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 세종 자신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상당한 것이었다. 왕실 중심의 기우(祈雨) · 명복(冥福) · 구병(求病) 등의 불사는 계속되었으며 더욱이 소헌왕후 심씨가 승하한 뒤에는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내에 불당을 세우기도 하였고 불경에 대한 언해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의 이념정책은 숭유억불(崇儒抑佛)에 기초하였지만 세종 자신의 입장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였고 이 후 왕실의 불교에 대한 호의는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를 보면 세종 자신도 누구보다도 뛰어난 유자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자신과 인친에게 닥치는 죽음과 병의 고통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풀 수 없는 부분이었다.
유가에서 말하는 유교정치의 핵심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특히 그 정치적 이념과 실제의 핵심인 `치국평천하'를 이루기 위해 가장 우선시 해야 하는 일은 백성의 삶을 보살피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이 이야기되고 이를 모두 실현하고자 한다. 위민, 혹은 애민(愛民) 그리고 왕도(王道)정치의 핵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얼마만큼 이를 위해 고심하고 실현가능한 일을 고안하며, 실제 생활에 있어서 편리함과 안락함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리고 모두의 삶의 질이 나아지는가의 결과를 얻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치의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조의 정치는 중국의 삼대 즉 하은주(夏殷周)의 정치와 비견될 정도로 이상적 정치시기였다. 왕권은 왕권 나름의 정당성과 권위를 갖고, 신권은 신권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서로의 견해를 조화롭게 운영하여 그 치적이 모두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로 교양된 국왕과 유신들이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할 수 있 는 정치체제 하에서 유교적 민본사상에 근거한 덕치(德治) · 인정(仁政)을 성취한 것을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에 따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식(食)'의 문제이다. 실제로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용지물이다.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 동력이 바로 이 `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세종은 바로 이를 깊이 파악하고 통찰력있게 여러 부분을 통하여 `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앞서 말한 왕도정치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여겨진다. 바로 제반 대민시책의 구상과 실시, 경제구조의 재조정과 산업의 장려, 그리고 훈민정음의 창제와 보급이 그것이다.
세종은 백성이 평안해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논리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경로와 효행, 절의, 구휼, 부역의 감면, 소송의 공정처리, 의약을 통한 구제, 형리(刑理)의 엄격함과 공평무사함 등을 통한 것이 그 내용이 되겠다.
즉, `늙은이를 공경하는 예는 내려온 지 오래되었다. … 이 늙은이들을 권념(眷念)하여 이미 중외로 하여금 향례(饗禮)를 거행하게 하고 또 자손의 부역을 면제하게 하였는데 …'라든가, `인(仁)은 어버이를 받드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정사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을 먼저 해야 되니, 이것은 제왕의 성대한 전례이며 고금의 일정한 규정이다.'라고 한 것은 경로 와 효행에 대한 세종의 뜻한 바였다.
세종은 13년 6월에 형벌과 옥사를 처리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곡하고 세세하게 말하고 있어 그 세심한 살핌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옥사(獄事)란 것은 사람의 생사가 달려 있는 것이니, 진실로 참된 정상을 얻지 못하고 매질로 자복을 받아서, 죄가 있는 자를 다행히 면하게 하고 죄가 없는 자를 허물에 빠지게 하면, 형벌이 적당하지 못하여 원망을 머금고 억울함을 가지게 된다. … 법을 맡은 관리들은 옛 일을 거울 삼아 지금 일을 경계하여 정밀하고 명백하여 마음을 공평히하여 자기의 의견 에 구애되지 말고, 선입된 말에 집착하지 말며, 부화뇌동으로 전철을 본받지 말고, 구차하게 인순(因循)하지 말며, 죄수가 쉽게 자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옥사(獄辭)가 빨리 이루어지기를 요하지 말며, 여러 방면으로 힐문하고 반복하며 되풀이하여 죽은 자로 하여금 구천에서 원한을 품지 않게 하고, 산 자로 하여금 마음 속에 한탄을 품음이 없게 하며 모든 사 람의 심정이 기뻐하여 영어(囹圄)에 죄수가 없게 하고, 화한 기운이 널리 퍼져서 비오고 볕나는 것이 순조롭게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 권52 13년 6월 갑오(2)]
왕이 되어 백성의 어버이로서 보살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옥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 이것은 후대의 제왕에게 있어 귀감이 되었다. 여기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곤란하면 세납과 공물, 요역을 가급적 생략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들에게 곡식을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형옥에 있는 죄수라도 병이 있으면 곧바로 치료 할 것을 명하였고, 가난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을 통해 구제토록 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서 세종조에 이루어진 의약(醫藥)의 연구와 정리, 보급은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이전에도 조선에서 나는 향약에 대한 정리가 있기는 하였지만 미흡하였다. 세종조에 들어오면서 이에 대한 지적과 함께 향약방의 정리를 위한 노력이 있게 되었다. 더욱이 세종 자신도 항시 병마에 시달리는지라 의약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였다. 세종 5년 6월 의약을 맡 고 있는 전의제조(典醫提調) 황자후(黃子厚)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전대부터 전해오던 향약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점을 들어서 비판하고 이미 수록된 여러 가지 약방에서 경험 양약(經驗良藥), 즉 전에 써보았던 좋은 방문(方文)을 정선해서 각 약방의 주(注)에서 향명(鄕名)을 달아서 약독(藥毒)의 유무와 그 약의 늙은이나 또는 어린아이에게 쓰는 법을 밝히어 누구나 알기 쉽게 일러 주어 약을 알맞게 쓸 수 있고 쉽게 병을 고치자고 하였다.
의약서의 정리와 더불어 향약방의 수집과 향약재를 각 지방에서 구하였고 후에는 직접 산과 들에 약재를 심어서 재배 생산하면서 그 재배의 양상과 채취의 분량, 그 약을 치료에 얼마나 성의 있게 썼는지의 일체를 보고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428년(세종 10)에는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433년 에는 그동안의 연구결과 85권 30책의 분량을 가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완성되었고 이는 총 1만 706가지의 약방이 소개되어 향약운동의 결과이었다.
곧 세종은 이를 읽어보고 여기서의 약방의 원리와 어긋나는 것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는 한방에 대한 연구를 명하여 다시 향약을 정리시켰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더욱 중국 약방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도록 명하였다. 세종 25년에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한방 의학의 모든 서적을 정리하여 다시 분류 편찬하는 일을 진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 모아서 이용한 중국 의약서적은 164부(部)로 중국의 한대(漢代) 약방에서 당 · 송 · 원 · 명에 걸친 중요한 것은 모두 망라된 것이었다. 이를 모두 우리 실정에 맞게 91문(門)으로 크게 나누고 그 속에서 다시 세분해서 설명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작업은 단시일내에 이루어지기에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 작업이 바로 <의방유취(醫方類聚)>의 작업이었던 것이고 결국 성종조에 가서야 인쇄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작업과 더불어 세종은 제도적으로도 의약제도의 활성화를 꾀하였다. 즉 유학 경서와 함께 의서(醫書) 공부를 함께 중시하도록 한 점, 전의감 · 혜민국 · 제생원의 원활한 운영을 꾀한 점, 활인원의 운영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온천을 통한 치료법의 개발과, 한증(汗蒸)을 통한 치료법을 연구하여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어찌보면 이것은 세종이 항상 병 마에 시달렸기 때문에 관심을 쏟은 결과였다.
또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데 있어 백성들의 억울함을 없게 하고 또 원한을 풀어주는 작업의 일환으로 도입된 검시법(檢屍法)이 있다. 이것은 바로 법의학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도입된 <무원록(無寃錄)>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검시할 때에는 관계 관원이 직접 현장에 나아가 임검하게 하였다. 세종 20년 겨울에는 이러한 <무원록>에 주(註)를 달게 하였다. 이 작업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세밀한 연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세종 때 법의학에 대해 알게 해주는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은 세종 21년 동짓달에 최치운(崔致雲) · 변효문(卞孝文) · 김황(金滉) 등에 의해 주해와 글자의 음과 말의 뜻을 달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이후 한성부에서 검시의 양식을 간행하여 각 도에 보급함으로서 백성들의 죽음에 억울함이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다. 산업의 장려책
세종조에는 산업의 장려 즉 농업의 여러 가지 진흥책을 마련하였다. 농사법의 개량을 위한 연구와 그 결과 만들어진 농서의 보급, 제언의 확충,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통한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 ·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 · 결부법(結負法)의 종합인 공법 등이 마 련되었다.
이러한 작업들이 모두 세종 개인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왕은 적재적소에 공평무사하고 진취적이며 연구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배치하고 그들을 관리하였을 뿐이었다. 그것이 진정으로 군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권농정책으로 대표되는 농상의 장려는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구휼과 농법의 개량보급, 백성들이 산업에 전념하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선진 농업기술을 수집하여 농서를 편찬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제도적 차원에서는 지방의 수령으로 파견되는 이들에게 백성들을 위해 전적으로 봉사할 것을 누누이 말하고 또 그들에 대한 출척을 명확히 함으로써 백성의 삶에 고통이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그동안에도 `수령칠사(守令七事)'로서 계속 강조된 바이지만 세종은 그 내용과 함께 수령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진작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가령 세종 15년 2월 9일에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가는 박용(朴容)에게
`수령의 직책은 형벌을 삼가고 부역을 고르게 하며, 백 성을 사랑하는데 불과하니, 가서 그대의 직책을 다하라.'
하고 이른 것이라든가, 또한 세종 15년 7월 18일에 지강령현사(知康翎縣事) 양점(梁漸)과 진성현감(珍城縣監) 민정(閔精)에게
`그대는 각기 임지에 가서 형벌에 관한 일을 조심하고 농사에 관한 일을 골고루 장려하여 백 성의 생계를 풍부하게 하라.'고 당부하는 사례에서 수령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특히 강조하였던 것이다.
세종이 수령을 직접 인견하고 수령으로서의 책무를 강조한 것은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다. 국왕을 알현한 수령으로서 더욱 성실하게 그 임무를 수행하려 함은 물론이고 그들 각각은 국왕에 의해 임명되어 국왕을 대신하여 나아가는 것으로서 인식케 함으로써 모두 세종의 품안으로 포열되게 되는 것이다.
세종조에 지방사회의 질서가 안정된 것은 실로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한재와 수재에도 불구하고 농토를 잃고 이리저리 유랑하는 백성들이 거의 없었던 것은 지방현장에서 백성을 직접 책임지는 수령들의 역할이 컸었기 때문이 었다.
세종의 농상(農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매우 정묘했다. 일단 세종이 이해하고 있는 면 을 살펴보자. 세종 26년 윤7월 25일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으니, 농사라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이요, 왕자의 정치에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오직 그것은 백성을 살리는 대명(大命)에 관계되는 까닭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를 복무하게 하는 것이니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여 거느리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서 농사에 종사 하여 그 생생지락(生生之樂)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권105 26년 윤 7월 임인(25)]
이것은 세종의 인식이 바로 국가 → 백성 → 의식주에 차례로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바탕에 있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해준다.
농서(農書)를 보급하려는 노력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고려말 충정왕(忠定王) 원년(1349)에 이암(李햺)이 연경에서 구입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지합주 부사(知陜州 府事) 강시(姜蓍)가 간행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와 함께 <사시찬요(四時纂要)>가 대표적으로 보급되었다. 또한 태종 15년(1415)에는 <농상집요> 양잠편만을 한상덕(韓尙德)이 이두로 번역한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가 간행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으며, 비록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지만 <농상집요>를 이두로 초역한 <농서(農書)>도 편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농업현실은 이러한 일련의 중국 농서를 가지고 적용시킬 수 없었다. 세종이 지적하고 있는 바 대로 풍토와 기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전기의 농업에서는 `상경농법(常耕農法)'이 확립되어 전개되는 상황이었다. 풍토의 차이와 발전적 단계에 놓여있는 조선의 농업은 이제 보다 조선의 농업 현실에 맞는 농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세종은 지속적으로 농사에 대한 관심과 권농책을 제기하였다. 가령 세종 10년 윤4월 11일에 권농방법을 의논하게 하여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안동지방은 땅이 좁고 사람들이 많아서 농사짓지 않고 내버려 두는 땅은 거의 없는데도 사람들이 다 살림을 아껴 절약하므로 흉년이 들어도 굶주리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역농(力農)이 기본적으로 필요함을 상언하였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선원세계'중에서]
세종대왕의 업적
세종은 우리 역사에 있어 유교정치를 구현한 군주였다. 그 자신이 이미 성리학에 있어 달통하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유교정치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로서 위민(爲民) 혹은 애민(愛民)과 순리(順理)에 맞추는 것이었다. 단지 이념상에서가 아닌 실제로 이를 행하기 위해 우선 그 자신이 성실하게 학문을 닦았다. 집현전 등을 두어 유능한 인재를 길러냈다. 또한 지방민의 올바른 안착을 위하여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나가는 수령들에게 백성들을 잘 보살필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이종무와 김종서 등을 시켜서는 왜구와 여진족의 문제를 일소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문화면에 있어서도 수많은 경서와 예서(禮書), 악서(樂書) 등을 펴내고 농업의 발전을 위해 농서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전세제도 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으며 과학정책도 역시 훌륭하게 펴나가 측우기, 해시계 등이 만들어졌다.
세종은 어찌보면 태조·태종 등이 이미 마련한 비옥한 농토에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가장 풍성한 수확을 거둔 훌륭한 농부였다고 하겠다.
여러차례 강조한 바이지만 세종 그 자신은 이미 유교정치의 핵심이 어디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또 이를 여러 분야에서 실시하여 이념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가. 집현전(集賢殿) 운영
유교문화의 완성이라는 점은 집현전의 운영, 육전의 법, 경연, 삼강과 오륜의 행실도, 예악의 정리, 경서 및 사서의 편찬 등을 통하여 나타났다. 이 내용은 이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훌륭한 유학적 소양을 갖춘 신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과 세종 자신이 갖고 있는 왕권을 조화롭게 운영하지 않았다면 많은 잡음과 함께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먼저 세종이 이들을 어떻게 이끌어내고 그들의 학문을 키웠으며, 또 그들과 함께 정치운영을 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학문연구기관이자 인재양성소로서의 집현전의 운영을 검토함으로써 그 토대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집현전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알아보자. 집현전은 고려 인종(仁宗) 14년(1136)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고 이름을 바꾼데서 비롯 된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종대에 설치된 일이 있었고 또 태종 17년 정월에 사간원에서 상소하길, 정치를 하는 데는 나라에서 나라일을 맡길 인재를 길러야 하는데, 수문각(修文閣) · 집현전 · 보문각(寶文閣) 등 이 이름뿐이지 제구실을 못하니 새로 집현전을 만들자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집현전을 설치 운영하여 그 성과를 거둔 것은 세종 때였다. 즉 집현전이라고 하면 세종 2년 3월에 설치 운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토대구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 교양에 철저한 인재의 양성 및 이에 입각한 문물의 정비와 전통문화의 정리가 요구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집현전에는 유학에 능통한 연소한 문사들을 뽑아 이들에게 여러 가지의 특 전을 주어 그들의 학문과 연구활동을 보장하였다.
즉, 사헌부(司憲府)의 규찰을 받지 않아 신분이 보장되었고, 경제적인 배려 또한 각별하였다. 산사(山寺)에서 독서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장기간의 휴가인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혜택을 주었다. 정원은 처음에 10명이던 것이 뒤에는 2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직무 중 중요한 것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소속된 간원은 경연관(經筵官) · 서연관(書筵官) · 시관(試官) · 사관(史官) · 지제교(知製敎)의 직책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경연과 서연이 인정(仁政)을 베풀기 위한 국왕과 세자의 수덕(修德)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현전의 기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분야는 중국의 옛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충실한 연구와 학문을 쌓도록 하기 위해 세종은 이들을 다른 관부에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이것은 일면 굉장한 특혜였다.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서 학문과 연구에 정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철저한 신분보장과 필요한 물품의 지원, 그리고 세종 자신의 학문적 관심은 집현전을 당대 제일의 학문연구기관으로 만드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따라서 집현전은 세종조의 국가 정치 일반 있어서 자문기관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또한 국가 제도 · 정책 연구 기관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집현전을 운영한 결과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 이선로(李善老) · 이개(李塏) · 류의손(柳義孫) · 권채(權採) · 남수문(南秀文) 등이 그들이다. 이러한 인적 자원은 세종 때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룩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 11년에는 대궐 서편에 집현전을 새로 마련하고 또한 장서각을 집현전 북쪽에 다시 올렸다. 집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이 들어와서 저녁 늦게 나갔다. 때를 맞추어 부지런히 연구하였으며, 일상 왕의 옆에서 공부하였다. 집현전의 학자들에게는 삼시 세끼를 직접 궁중의 내관(內官)들이 대접하였고, 학사들은 밤에도 순번을 정하여 집현전을 지키면서 밤을 새워 책을 읽기도 하였다.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는 세종인지라 혹 집현전의 학사 중 무리하여 병이 나는 자라도 있을까 염려하여 내관에게 불을 밝히게 하고 집현전을 수시로 찾았다. 간혹 독서하다 피곤하여 깜빡 잠이 든 학사가 있으면 그들을 깨우지 않고 초피(貂皮)의 웃옷을 벗어 살며시 덮어주곤 하였다. 어찌보면 열심히 공부하는 제자를 스승의 사랑과 보살핌의 손길로 아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린 학사들이 있으면 당대의 유학자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학문을 배우도록 하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집현전의 운영은 세종 과 집현전 학사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하여 집현전에서 편찬된 서적을 몇가지 든다면 다음과 같다.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 <치평요람(治平要覽)> · <훈민정음(訓民正音)> · <역대병요(歷代兵要)> · <효행록(孝行錄)> ·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서적들이 언 해되거나 주석되어 그 학문적 성과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나타내 준다. 특히나 학사들의 학문적 성취와 관심에 대해서는 명나라의 유신들도 감탄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종 때 이렇게 활발한 연구활동과 학문활동 등이 수행된 집현전은 결국 정치적 역풍에 휘말려 세조 2년 육신사건(六臣事件)으로 혁파되게 되었다. 이 후 여러차례 집현전과 같은 기관을 두고자 하는 노력은 있었지만 결코 세종 때 집현전의 기능을 갖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관주도적인 문화(편찬)사업은 그 뒤 홍문관(弘文館) 또는 정조대의 규장각(奎章閣) 등에 의해 계승되기도 하였다.
집현전의 운영을 통하여 마련된 유교적인 학문연구의 성과는 경전의 주해, 제도의 연구 등 여러 분야로 파급되어 나갔다. 여기서 특히 괄목할 만한 것은 예조 ·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 집현전 등에서 연구하고 마련한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국가오례(國家五禮 : 吉禮 · 嘉禮 · 賓禮 · 軍禮 · 凶禮)와 사대부 · 서인들의 유교적 의례로서 정리된 사례(四禮 : 冠禮 · 婚禮 · 喪禮 · 祭禮) 등의 제도가 마련됨으로써 왕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체계가 올바로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조에 이루어진 오례의 내용은 사실상 왕실중심의 의례만을 일단 정례화한 것으로 나타난다. 전체 국가질서의 편성보다는 왕실의 권위와 존엄성을 생각하는 의례, 더욱이 왕위계승을 유가적 논리 안에서 정치적 관행으로 정착시키려는 정치적 의지를 보인다.
왕실중심의 의례의 정례화는 왕권을 유교이념으로 명분을 정립시키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사례로써 소개되는 주자가례는 사대부 중심의 사회공동체 질서론을 반영한 의례로 자리잡게 됨을 의미한다. 조선초기 사회의 정돈과정에서 보여 준 역사사실의 실태라고 하겠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왕실과 왕권의 권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가를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의 문제와 새로운 정권의 혁명적 내용도 수용하는 명분논리, 그리고 왕실의 정치적 위상의 정비가 바로 유교적 예론으로 심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례의 운영구조가 가지는 의미는 왕실 즉 왕권의 위상이 어느정도인가를 가늠해주는 척도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례(四禮)의 체계와 내용은 이미 조선시대에도 그 보급 노력이 있었다. 세종조의 단계에 들어와서는 양반 사대부층의 유교적 윤리 실행의 표준으로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정착되었다. 이것은 당시 유자층으로서 사대부의 반열에 있는 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도덕규범의 의례였으며, 상층사회구조의 운영도 이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백성에 대해서도 유교적인 교화정책(敎化政策)으로서 열녀 · 효자 등에 대한 표창과 이를 기리기 위한 정표(旌表)의 정책이 있었으며, 나아가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집현전(集賢殿)에서 새로 올린<삼강행실>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천하의 떳떳한 도가 다섯 가지 있는데, 삼강이 그 수위(首位)에 있으니, 실로 삼강은 경륜(經綸)의 큰 법이요, 일만 가지 교화의 근본이며 원천(源泉)입니다. 만약 고대(古代)의 일을 상고하여 본다면, 순(舜)임금은, 오전(五典)을 삼가 아름답게 하였으며, 성탕(成湯)은 일찍이 사람의 기강(紀綱)을 닦았고, 주(周)나라에서는 백성에게 오교(五敎)를 소중히 여기어서, 향삼물(鄕三物)로 선비들을 추거(推擧)하여 손님으로 예우(禮遇)하였습니다. 그러니 제왕(帝王)의 정치가 무엇을 먼저 힘쓸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선덕 신해년에 우리 주상 전하께서 측근의 신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삼대(三代)의 정치가 훌륭하였던 것은 다 인륜(人倫)을 밝혔기 때문이다. 후세에서는 교화가 점점 쇠퇴하여져서, 백성들이 군신 · 부자 · 부부의 큰 인륜에 친숙하지 아니하고, 거의 다 타고난 천성(天性)에 어두워서 항상 각박(刻薄)한데에 빠졌다. 간혹 훌륭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있어도, 풍속 · 습관에 옮겨져서 사람의 보고 듣는 자의 마음을 흥기(興起)시키지 못하는 일도 또한 많다. 내가 그 중 특별히 남달리 뛰어난 것을 뽑아서 그림과 찬을 만들어 중앙과 지방에 나누어 주고, 우매한 남녀들까지 다 쉽게 보고 느껴서 분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또한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한 길이 될 것이다.'고 하시고,
드디어 집현전 부제학 신(臣) 설순에게 명하여 편찬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여기에서, 중국(中國)에서부터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 동방(東方) 고금(古今)의 서적(書籍)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모아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우뚝히 높아서 기술할 만한 자를 각각 1백 인을 찾아내어, 앞에는 형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뒤에는 사실 을 기록하였으며, 모두 시(詩)를 붙이었다. 이를 `『삼감행실도(三綱行實圖)』'라고 이름을 하사하시고,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인쇄하여 길이 전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권56 14년 6월 병신(9)])
군신 · 부자 · 부부의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 부위자강(父爲子綱) · 부위부강(夫爲婦綱)의 삼강의 보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종 스스로도 직접 당시의 세태가 인륜을 저버리거나 인륜을 참되게 알지 못하여 군신과 부자, 부부의 도리가 천리에 어긋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삼강(三綱)은 인도의 대경(大經)이니, 군신(君臣) · 부자(父子) · 부부(夫婦)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혹은 `내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준 덕과 진심, 그리고 의젓하게 타고난 천성은 생민(生民)이 똑같이 받은 것이므로, 인륜(人倫)을 도탑게하여 풍속을 이루게 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선무(先務)이다.'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아침에 더하고 저녁에 진취하여, 그 천성의 본연(本然)을 감발(感發)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게 되면, 자식된 자는 효도를 다할 것을 생각하고, 남편된 자와 아내된 자는 모두 자기의 도리를 다하게 되어, 사람들이 의리를 알고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진작할 것이니, 교화(敎化)가 행하여 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더욱 지치(至治)의 세상에 이르게 될 것이다.'
라고 강조하였다.
세종은 이렇게 삼강과 오륜, 인간사회의 질서체계를 오례와 사례의 구조를 통하여 사회의 운영을 교화해 나가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종실의 범위를 종친과 마찬가지인 왕의 현손(玄孫 즉 4대손)까지의 자손으로 하고 이들에 대한 교육의 제도를 정하였다. 즉 처음으로 종학(宗學)의 법을 정하였던 것이다. 사실 종실 자제들에 대한 교육은 그들이 문장을 잘 하도록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학문을 닦아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자질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종친들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무뢰배들과 어울려 갖은 비리를 저지르기 일쑤였으며, 공부하는데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사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종친들을 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의도와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왕실의 세력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왕실 주변의 인물을 정치권에서 배제시키는 제도적 조치는 종실의 인재들의 건전한 사회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종학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세종은 1428년 7월에 대군 이하 종실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을 처음으 로 건립하였고, 이듬해 10월에 학사를 세우고 교수로서 종학교수관(宗學敎授官)을 두었으며 또한 종학식략(宗學式略)을 상정하기도 하였다.
심화 확대된 유교의 정치이념과 사회윤리는 예악(禮樂)의 정리로 더욱 세련화되었다. 유교사상에서 예(禮) · 악(樂)의 정비는 곧 모든 질서의 안정을 뜻한다. 예라는 것은 도덕인의(道德仁義)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예제(禮制)가 행하여지면 이와 더불어 악(樂)이 흥한다는 것이 유가의 기본 인식이었다. 따라서 세종 때에 유교정치를 추구하고 이것이 안정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예악관에서 왕조의 예 · 악의 기준을 확립코자 하였던 것이다.
<아악보(雅樂譜)>의 서문에서 `악(樂)이란 것은 성인(聖人)이 성정(性情)을 길러 신인(神人)을 화(和)하는 소이(所以)이며, 천지를 순(順)하고 음양을 조(調)하는 도(道)'라고 하였다. 특히 의례상정소와 집현전의 연구활동 가운데는 실제 이 예악에 관한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세종의 의도에서 더욱 박차를 가하여 연구가 진전되었다. 즉,
“임금은 나라를 평정한 뒤에는 음악을 제정하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한 뒤에는 예를 마련한다. 그러므로, 나라를 평안케 하는 공적이 커지면 악을 갖추게 되고, 군왕의 다스림이 백성들을 골고루 편하게 하면 예를 갖추게 된다.”
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의 예악을 참작하여 어떻게 조선의 것으로 소화하느냐 하는 것이 연구과제로 떠올랐다. 더욱이 악기를 정리하고 그 음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작업이 기술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음과 악기에 정통한 인재가 요구되는 시대상을 보이고 있었다. 집현전과 많은 유자들을 동원하여 악의 원리를 심화시켜 어느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악리(樂理)에 대한 이해에 그칠 뿐이었다. 즉 그것은 비유하면 `쟁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밭가는 법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인 것이다. 이제 그것은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게 된다. 즉 진정한 `지음(知音)'의 경지에 있는 인물을 찾는 것이었다.
중국의 역사서와 경서, 그리고 악서에 나오는 고제(古制)를 연구하고 또 송나라 채원정(蔡元定)이 정리한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수용하여 그 악리가 정리되었다. 세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악(雅樂)은 본래 우리 나라 악이 아니고 중국의 소리이다. 중국사람들은 일상 들어 익혀서 제사에 음율을 잘 연주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나서부터 향악(鄕樂)을 듣다가 죽은 뒤에는 아악을 들으니 어찌 된 일인가? 더욱이 아악은 중국에서도 역대 왕조마다 제작 정리 한 것이 다 같지 않아서, 황종의 소리[黃鐘之聲 : 아악의 표준음]에도 높고 낮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악의 제도는 중국에서도 아직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다. 황종관(黃鐘管)을 만들자면 그 기후 조건을 쉽사리 바꿀 수가 없다. 중국 동쪽에 있는 우리 나라는 춥고 더운 기후가 중국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나는 대(竹)로 중국 음악의 황종 관을 만들어 쓸 수가 있겠는가? 황종에는 반드시 중국의 대를 쓰는 것이 옳겠다.”
[<세종실록> 권49 12년 9월 기유(11)]
음악의 기준음을 설정하는 것에 무엇이 기초원리인가를 바르게 알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구체화한 사람이 바로 세종과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박연(朴堧)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실제 작업의 세세한 것은 지음(知音)과 악리에 정통한 박연이 맡아서 하였다. 여기서 세종의 배려와 세종 자신의 능력이 한층 돋보이는 역사기록이 세 종실록에 적혀있는 것이다. 신하들에게 일을 맡기고 그 결과를 측정함에 있어 누구보다도 더 상세하게 알고 모자라는 점과 흡족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세종과 박연의 관계는 군신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서로가 같았다. 다음의 대화내용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박연이 새로 만든 편경을 세종 앞에서 시험 연주하면서 생긴 일이다.
“중국의 편경(編磬)은 조율이 정확하지 않은데 박연은 참 잘 만들었다. 경돌을 얻은 일도 다행한 일이려니와 이 돌로 만든 편경의 소리는 맑고 고우며, 그 뿐만 아니라 조율도 퍽 잘 되었다. 그런데, 이칙(夷則 : 12율 가운데 하나. 9번째의 소리)의 경돌이 소리가 좀 높으니 어찌된 일인가?”
라고 그 음의 다름을 지적하고 있다. 음을 모르고 있었다면 도저히 지적할 수 없는 구체적인 부분이었다. 곧바로 박연은 경돌을 다시 세워 정밀하게 조사하고 일일이 소리를 귀기울여 들었다. 그러던 중 박연은 깜짝 놀랐다. 세종의 지적대로 이칙의 경돌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칙의 경돌을 만들 때 그어놓은 먹줄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본래 나야하는 소리가 높게 나게 된 것이었다.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흘렀고, 더욱 세종에 대한 경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 즉시 그 경돌을 갈아 음이 올바로 잡히도록 고쳐 흡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세종과 박연의 노력의 결과로 세종 12년 가을에는 궁중의 제도와 음악을 법도에 맞게 조화시켜 조회 음악에 아악을 쓰도록 하여, 매달 초하루 · 16일에는 아악을 연주하고 다른 네 번의 조회에는 전대로 향악을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종 13년 정월 초하루에는 백관과 더불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노력으로 정리되어 만들어진 아악의 연주를 감상하면서 흡족한 마음으로 예에 따라 새해의 하례를 받았다. 종묘, 사직, 석전(釋奠), 천신제사, 선농(先農) · 선잠(先蠶)의 음악을 바로잡아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악기와 악곡은 궁중예악으로서 오례의(五禮儀)에 맞춰 연주되었다.
실로 아름다운 소리와 광경이었다. 그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때로는 왕실의 위엄을 느끼게 하고, 때로는 부모의 손길같은 부드러움을, 또 때로는 즐거움이 저절로 일어나는 듯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만조백관이 자리한 가운데 수백명의 악인들이 수십 수백의 악기를 앞에 두고 그 장엄화려하면서도 단아하게 연주하였으니 참으로 인간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 어서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세종의 악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열정의 결과 이루어진 산물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이와 더불어 친히 악보를 기록하는 법인 기보법(記譜法)도 창안하였는데 이것이 정간보(井間譜)이다. 여기에 음악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정대업(定大業)> · <보태평(保太平)> · <발상(發祥)> · <봉래의(鳳來儀)> · <만전춘(滿殿春)>등의 대곡을 작곡하여 기보하기도 하였다.
나. 불교와 사회정책
사회운영의 체계로서 이렇게 유교가 지도원리가 됨에 따라 삼국시대 이래로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영원리 상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지 일반민의 생활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신앙으로서까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유교의 가치체계, 특히 성리학적인 학문배경을 가진 사대부들과 학자들의 경우 불자들이 무위도식하며, 심하면 고리대와 더불어 투기까지 일삼는 것이 결코 국가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지적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강해져 불교에 대한 일대 정리를 하게 된다. 세종조에 있어서의 불교사원에 대한 정리가 그것이다.
먼저 불교의 토지와 노비로 대표되는 세속적인 권력기반에 대한 것으로서 세종 1년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를 정리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다. 다음으로 불교사원의 종파를 정리하는 작업으로서 세종 6년에 선교(禪敎)의 양종으로 병합하고 사사(寺社) · 사사전 · 상주승(常住僧)의 정수를 재정리하였다. 세 번째로 불교행사의 제한과 축소의 형태로서 법석송경(法席誦經)과 도성 안에서의 경행(經行), 궐내의 연등행사를 없애고 단지 승사(僧舍)에서만 이를 허락하였다.
강압책을 펴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국가 운영상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 세종 자신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상당한 것이었다. 왕실 중심의 기우(祈雨) · 명복(冥福) · 구병(求病) 등의 불사는 계속되었으며 더욱이 소헌왕후 심씨가 승하한 뒤에는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내에 불당을 세우기도 하였고 불경에 대한 언해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의 이념정책은 숭유억불(崇儒抑佛)에 기초하였지만 세종 자신의 입장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였고 이 후 왕실의 불교에 대한 호의는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를 보면 세종 자신도 누구보다도 뛰어난 유자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자신과 인친에게 닥치는 죽음과 병의 고통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풀 수 없는 부분이었다.
유가에서 말하는 유교정치의 핵심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특히 그 정치적 이념과 실제의 핵심인 `치국평천하'를 이루기 위해 가장 우선시 해야 하는 일은 백성의 삶을 보살피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이 이야기되고 이를 모두 실현하고자 한다. 위민, 혹은 애민(愛民) 그리고 왕도(王道)정치의 핵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얼마만큼 이를 위해 고심하고 실현가능한 일을 고안하며, 실제 생활에 있어서 편리함과 안락함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리고 모두의 삶의 질이 나아지는가의 결과를 얻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치의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조의 정치는 중국의 삼대 즉 하은주(夏殷周)의 정치와 비견될 정도로 이상적 정치시기였다. 왕권은 왕권 나름의 정당성과 권위를 갖고, 신권은 신권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서로의 견해를 조화롭게 운영하여 그 치적이 모두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로 교양된 국왕과 유신들이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할 수 있 는 정치체제 하에서 유교적 민본사상에 근거한 덕치(德治) · 인정(仁政)을 성취한 것을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에 따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식(食)'의 문제이다. 실제로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용지물이다.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 동력이 바로 이 `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세종은 바로 이를 깊이 파악하고 통찰력있게 여러 부분을 통하여 `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앞서 말한 왕도정치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여겨진다. 바로 제반 대민시책의 구상과 실시, 경제구조의 재조정과 산업의 장려, 그리고 훈민정음의 창제와 보급이 그것이다.
세종은 백성이 평안해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논리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경로와 효행, 절의, 구휼, 부역의 감면, 소송의 공정처리, 의약을 통한 구제, 형리(刑理)의 엄격함과 공평무사함 등을 통한 것이 그 내용이 되겠다.
즉, `늙은이를 공경하는 예는 내려온 지 오래되었다. … 이 늙은이들을 권념(眷念)하여 이미 중외로 하여금 향례(饗禮)를 거행하게 하고 또 자손의 부역을 면제하게 하였는데 …'라든가, `인(仁)은 어버이를 받드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정사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을 먼저 해야 되니, 이것은 제왕의 성대한 전례이며 고금의 일정한 규정이다.'라고 한 것은 경로 와 효행에 대한 세종의 뜻한 바였다.
세종은 13년 6월에 형벌과 옥사를 처리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곡하고 세세하게 말하고 있어 그 세심한 살핌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옥사(獄事)란 것은 사람의 생사가 달려 있는 것이니, 진실로 참된 정상을 얻지 못하고 매질로 자복을 받아서, 죄가 있는 자를 다행히 면하게 하고 죄가 없는 자를 허물에 빠지게 하면, 형벌이 적당하지 못하여 원망을 머금고 억울함을 가지게 된다. … 법을 맡은 관리들은 옛 일을 거울 삼아 지금 일을 경계하여 정밀하고 명백하여 마음을 공평히하여 자기의 의견 에 구애되지 말고, 선입된 말에 집착하지 말며, 부화뇌동으로 전철을 본받지 말고, 구차하게 인순(因循)하지 말며, 죄수가 쉽게 자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옥사(獄辭)가 빨리 이루어지기를 요하지 말며, 여러 방면으로 힐문하고 반복하며 되풀이하여 죽은 자로 하여금 구천에서 원한을 품지 않게 하고, 산 자로 하여금 마음 속에 한탄을 품음이 없게 하며 모든 사 람의 심정이 기뻐하여 영어(囹圄)에 죄수가 없게 하고, 화한 기운이 널리 퍼져서 비오고 볕나는 것이 순조롭게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 권52 13년 6월 갑오(2)]
왕이 되어 백성의 어버이로서 보살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옥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 이것은 후대의 제왕에게 있어 귀감이 되었다. 여기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곤란하면 세납과 공물, 요역을 가급적 생략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들에게 곡식을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형옥에 있는 죄수라도 병이 있으면 곧바로 치료 할 것을 명하였고, 가난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을 통해 구제토록 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서 세종조에 이루어진 의약(醫藥)의 연구와 정리, 보급은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이전에도 조선에서 나는 향약에 대한 정리가 있기는 하였지만 미흡하였다. 세종조에 들어오면서 이에 대한 지적과 함께 향약방의 정리를 위한 노력이 있게 되었다. 더욱이 세종 자신도 항시 병마에 시달리는지라 의약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였다. 세종 5년 6월 의약을 맡 고 있는 전의제조(典醫提調) 황자후(黃子厚)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전대부터 전해오던 향약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점을 들어서 비판하고 이미 수록된 여러 가지 약방에서 경험 양약(經驗良藥), 즉 전에 써보았던 좋은 방문(方文)을 정선해서 각 약방의 주(注)에서 향명(鄕名)을 달아서 약독(藥毒)의 유무와 그 약의 늙은이나 또는 어린아이에게 쓰는 법을 밝히어 누구나 알기 쉽게 일러 주어 약을 알맞게 쓸 수 있고 쉽게 병을 고치자고 하였다.
의약서의 정리와 더불어 향약방의 수집과 향약재를 각 지방에서 구하였고 후에는 직접 산과 들에 약재를 심어서 재배 생산하면서 그 재배의 양상과 채취의 분량, 그 약을 치료에 얼마나 성의 있게 썼는지의 일체를 보고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428년(세종 10)에는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433년 에는 그동안의 연구결과 85권 30책의 분량을 가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완성되었고 이는 총 1만 706가지의 약방이 소개되어 향약운동의 결과이었다.
곧 세종은 이를 읽어보고 여기서의 약방의 원리와 어긋나는 것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는 한방에 대한 연구를 명하여 다시 향약을 정리시켰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더욱 중국 약방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도록 명하였다. 세종 25년에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한방 의학의 모든 서적을 정리하여 다시 분류 편찬하는 일을 진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 모아서 이용한 중국 의약서적은 164부(部)로 중국의 한대(漢代) 약방에서 당 · 송 · 원 · 명에 걸친 중요한 것은 모두 망라된 것이었다. 이를 모두 우리 실정에 맞게 91문(門)으로 크게 나누고 그 속에서 다시 세분해서 설명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작업은 단시일내에 이루어지기에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 작업이 바로 <의방유취(醫方類聚)>의 작업이었던 것이고 결국 성종조에 가서야 인쇄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작업과 더불어 세종은 제도적으로도 의약제도의 활성화를 꾀하였다. 즉 유학 경서와 함께 의서(醫書) 공부를 함께 중시하도록 한 점, 전의감 · 혜민국 · 제생원의 원활한 운영을 꾀한 점, 활인원의 운영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온천을 통한 치료법의 개발과, 한증(汗蒸)을 통한 치료법을 연구하여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어찌보면 이것은 세종이 항상 병 마에 시달렸기 때문에 관심을 쏟은 결과였다.
또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데 있어 백성들의 억울함을 없게 하고 또 원한을 풀어주는 작업의 일환으로 도입된 검시법(檢屍法)이 있다. 이것은 바로 법의학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도입된 <무원록(無寃錄)>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검시할 때에는 관계 관원이 직접 현장에 나아가 임검하게 하였다. 세종 20년 겨울에는 이러한 <무원록>에 주(註)를 달게 하였다. 이 작업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세밀한 연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세종 때 법의학에 대해 알게 해주는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은 세종 21년 동짓달에 최치운(崔致雲) · 변효문(卞孝文) · 김황(金滉) 등에 의해 주해와 글자의 음과 말의 뜻을 달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이후 한성부에서 검시의 양식을 간행하여 각 도에 보급함으로서 백성들의 죽음에 억울함이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다. 산업의 장려책
세종조에는 산업의 장려 즉 농업의 여러 가지 진흥책을 마련하였다. 농사법의 개량을 위한 연구와 그 결과 만들어진 농서의 보급, 제언의 확충,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통한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 ·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 · 결부법(結負法)의 종합인 공법 등이 마 련되었다.
이러한 작업들이 모두 세종 개인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왕은 적재적소에 공평무사하고 진취적이며 연구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배치하고 그들을 관리하였을 뿐이었다. 그것이 진정으로 군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권농정책으로 대표되는 농상의 장려는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구휼과 농법의 개량보급, 백성들이 산업에 전념하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선진 농업기술을 수집하여 농서를 편찬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제도적 차원에서는 지방의 수령으로 파견되는 이들에게 백성들을 위해 전적으로 봉사할 것을 누누이 말하고 또 그들에 대한 출척을 명확히 함으로써 백성의 삶에 고통이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그동안에도 `수령칠사(守令七事)'로서 계속 강조된 바이지만 세종은 그 내용과 함께 수령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진작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가령 세종 15년 2월 9일에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가는 박용(朴容)에게
`수령의 직책은 형벌을 삼가고 부역을 고르게 하며, 백 성을 사랑하는데 불과하니, 가서 그대의 직책을 다하라.'
하고 이른 것이라든가, 또한 세종 15년 7월 18일에 지강령현사(知康翎縣事) 양점(梁漸)과 진성현감(珍城縣監) 민정(閔精)에게
`그대는 각기 임지에 가서 형벌에 관한 일을 조심하고 농사에 관한 일을 골고루 장려하여 백 성의 생계를 풍부하게 하라.'
고 당부하는 사례에서 수령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특히 강조하였던 것이다.
세종이 수령을 직접 인견하고 수령으로서의 책무를 강조한 것은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다. 국왕을 알현한 수령으로서 더욱 성실하게 그 임무를 수행하려 함은 물론이고 그들 각각은 국왕에 의해 임명되어 국왕을 대신하여 나아가는 것으로서 인식케 함으로써 모두 세종의 품안으로 포열되게 되는 것이다.
세종조에 지방사회의 질서가 안정된 것은 실로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한재와 수재에도 불구하고 농토를 잃고 이리저리 유랑하는 백성들이 거의 없었던 것은 지방현장에서 백성을 직접 책임지는 수령들의 역할이 컸었기 때문이 었다.
세종의 농상(農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매우 정묘했다. 일단 세종이 이해하고 있는 면 을 살펴보자. 세종 26년 윤7월 25일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으니, 농사라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이요, 왕자의 정치에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오직 그것은 백성을 살리는 대명(大命)에 관계되는 까닭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를 복무하게 하는 것이니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여 거느리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서 농사에 종사 하여 그 생생지락(生生之樂)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권105 26년 윤 7월 임인(25)]
이것은 세종의 인식이 바로 국가 → 백성 → 의식주에 차례로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바탕에 있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해준다.
농서(農書)를 보급하려는 노력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고려말 충정왕(忠定王) 원년(1349)에 이암(李햺)이 연경에서 구입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지합주 부사(知陜州 府事) 강시(姜蓍)가 간행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와 함께 <사시찬요(四時纂要)>가 대표적으로 보급되었다. 또한 태종 15년(1415)에는 <농상집요> 양잠편만을 한상덕(韓尙德)이 이두로 번역한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가 간행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으며, 비록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지만 <농상집요>를 이두로 초역한 <농서(農書)>도 편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농업현실은 이러한 일련의 중국 농서를 가지고 적용시킬 수 없었다. 세종이 지적하고 있는 바 대로 풍토와 기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전기의 농업에서는 `상경농법(常耕農法)'이 확립되어 전개되는 상황이었다. 풍토의 차이와 발전적 단계에 놓여있는 조선의 농업은 이제 보다 조선의 농업 현실에 맞는 농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세종은 지속적으로 농사에 대한 관심과 권농책을 제기하였다. 가령 세종 10년 윤4월 11일에 권농방법을 의논하게 하여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안동지방은 땅이 좁고 사람들이 많아서 농사짓지 않고 내버려 두는 땅은 거의 없는데도 사람들이 다 살림을 아껴 절약하므로 흉년이 들어도 굶주리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역농(力農)이 기본적으로 필요함을 상언하였다.
또 여산군(礪山君) 송거신(宋居信)도 말하길, `전라도에서는 황무지가 많으나 강원도에서 농민들이 옮아가서 살게 된 뒤로 사람들이 늘고 숲과 초목에 덮인 질척한 늪이 다 논밭으로 개간 경작되었습니다.'라고 하여 땅은 넓으나 사람이 드문 지역에는 농민을 옮겨 경작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논과 함께 세종은 재위 10년 째에는 북관과 관서의 농민들을 위해 삼남의 선진농법을 보급할 것을 생각하였다. 즉 세종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경상도 감사에게 내리고 있다.
“함길도와 평안도의 두 지방은 토질이 기름지지만, 백성들이 농사짓는 법을 잘 알지 못하고 그전 습관대로 농사를 지으므로 그 땅에서 생산할 수 있는 생산량을 다 거두지 못하고 있다. 쓸만한 좋은 방법을 채택하여 북관과 관서의 농민들에게 일러주려고 한다. 그러니, 경상도 지방에서 논밭을 갈고, 씨를 심고, 김을 매고,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방법과 오곡에 알맞는 토성과 잡곡을 번갈아 가며 심는 법을 경험 많은 농부들에게 물어서 추리고 정리하여 책을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와 함께 국비로 재래의 농서를 1천 벌씩 찍어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세종 11년 5월에 마침내 정초(鄭招)는 삼남(三南)의 노농(老農)들에게 농사경험담을 적어 올리게 한 것들을 모아 정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우리 현실에 맞는 농서를 편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다.
이것은 세종이 각 지방의 기후 풍토가 다 달라서 곡식을 심고 가꾸는데 각기 그 고장에 알맞는 방법이 따로 있으므로 옛날 책에 있는 방법과 다 같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 데에서 비롯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농사직설>에 따라 각 지방의 수령들에게 영농지도사업을 함에 있어 이를 바탕으로 실시할 것을 당부하고 농사에 진력을 다할 것을 말하였다.
농서의 보급과 더불어 세종 때 농업정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제언의 수축과 함께 수차의 개발과 보급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차의 보급에 관한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세종 11년 11월 5일에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갔다온 박서생(朴瑞生)의 수차에 관한 보고에 의해서였다. 한재가 특히 심하였던 당시에 있어서 수차를 만들어 보급한다면 어느정 도 이를 획기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듯했다. 이에 김신(金愼)으로 하여금 수차 만드는 법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으며 이를 만들어 지방에 권장하여 수차를 쓰도록 하였다. 세종 12년 9월 말에 호조에 명한 세종의 의지는 강력했다.
“우리 나라 백성들은 다만 제언의 이(利)만 알고, 수차로 관개하는 것의 편리하고 이로운 것은 알지 못한다. 한 번 한재를 당하여 농사를 실패하면 농민들의 형편이 참으로 불쌍하다.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이제 나누어 준 수차에 의거해서 수차를 만들어 백성들이 논밭에 물을 대는 데 쓰도록 하라.”
그러나 수차경차관(水車敬差官), 수차감조관(水車監造官)을 파견하면서까지 그 보급에 대해 노력했지만 실제의 효과는 미미하였다. 자연적 재해를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한 이 일련의 노력은 현장에서 수차를 쓰는 농민들과 이를 만들어 보급하고 지도하는 수령이 그 참뜻에 부응하지 못한다든지, 작동요령을 모른다든지, 일을 힘들어하여 거부한다든가, 혹은 자연조건을 무시하고 적용하려 하는 등의 여러 요인으로 결국 수차보급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농민들을 위한 세종의 참뜻과 의지는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 과학적 영농을 지원하기 위한 세종의 노력은 과학기술의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도 시도되고 있었다. 기후와 강우,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1437년에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의 제도를 본떠 정식 천문 관측장치로 경회루 연못 북쪽에 지름 6자 정도 크기의 간의(簡儀)가 만들어졌다. 또 경회루 남쪽에는 세종 때 위대한 장인인 장영실(蔣英實)이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고 이를 더욱 교묘하게 하여 옥루(玉漏)가 고안되었다. 이것은 자동 물시계에다가 천문현상과 신선(神仙) 등이 나타나 저절로 움직이도록 만든 것으로 정교한 자동시계였던 것이다.
여기에 농경에 꼭 필요한 역법의 바른 정리를 위해, 또한 기상관측을 위하여 대간의(大簡儀) · 소간의(小簡儀) · 혼의(渾儀) · 혼상(渾象)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 금루(禁漏) · 선기옥형(璿璣玉衡) 등이 정교하게 만들어졌 다.
강수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기 위한 장치로서 측우기(測雨器)는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측우기는 전국 주요 지점에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한강과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水標)가 만들어져 중대한 관측기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측량 및 천문 관측기구와 더불어 천문역산학의 연구성과로서 1442년에 <칠정산(七政算)> 내편과 <칠정산> 외편이 완성되었다. <칠정산> 내편은 원의 곽수경 등이 완성한 수시력을 서울에 맞게 수정한 것이며, 외편은 원나라에 들어와 있던 아랍 천문학체계를 소화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이순지(李純之) · 김담(金淡) 등의 천문학자가 중심이 되어 이룩한 성과물이었던 것이다.
세종조의 경제제도로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 중의 하나가 공법(貢法)의 제정이다. 이 공법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전지(田地)를 올바로 측량하고 기록해야만 한다. 그 동안의 측량은 측량자가 가서 전답의 필지를 일일이 답사하여 기록하는 것으로서 답험손실법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답험자의 자의성이 개입될 소지가 많았다. 중간부정을 막고 국고의 충 실을 기하기 위한 조세원의 정확한 파악, 경작자인 농민들에게는 그 부담을 줄이고 혜택을 주기 위한 것으로서 `공법'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공법이란 본래 여러 해 동안의 토지생산량의 평균치를 기준으로 삼아 10분의 1에 해당하는 일정한 액수를 과세하는 일종의 정액세법으로서 중국의 하후씨(夏后氏) 때 행하였다는 전설적인 제도이다. 세종은 즉위초부터 이러한 공법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처음 토로한 것은 세종 9년의 중시(重試)의 책제(策題)에서이다. 즉,
“예로부터 제왕의 다스림에는 반드시 일대의 제도를 먼저 수립하는 법이다. … 손실답험은 구차히 애증에 좇아 고하가 그 손에 달려 있으므로 백성이 해를 입는다. 이 폐단을 구하려면 응당 공법이나 조법(助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조법은 반드시 정전(井田)을 한 뒤에라야 행할 수 있으므로 역대 중국에서도 오히려 불가능했다. 하물며 우리 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언덕과 진펄이 뒤섞여 있어 그것을 쓸 수 없음이 명백하다.
공법은 하서(夏書)에 실려 있고 주나라 역시 조법을 썼다고 하나 향수(鄕遂)에서는 공법을 썼다. 다만 그것은 여러 해 작황을 비교하여 평상치를 정하는 까닭에 좋지 않다고 이르는 것이다. 공법을 쓰면서도 이른바 좋지 않다는 점을 없애는 길은 어떠한 것인가.”
여기서 공법의 좋지 않은 점은 농업생산성이 불안정한 당시로서 풍년에는 관계없지만 흉년에는 정액에 맞추기 때문에 수탈이 자행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의 실시를 자기 혼자만의 의지로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현실에 적합한 것인지를 먼저 따져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현실로 볼 때 세종은 이를 매우 획기적인 방안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실제 그 담세층인 농민들로부터 각 도 감사 · 수령 · 품관들에게 그 가부를 물어 계문토록 한 것이다. 전국적으로 공법의 시행을 찬성하는 자는 9만 8,657인이며 반대하는 자는 7만 4,149인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좀 더 자세히 분석하면 토지생산력이 높은 지역인 경상도·전라도의 경우 6만 5,864 대 664로 찬성편이 절대 우세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토지생산력이 낮은 함길도·평안도의 경우는 1,410 대 3만 5,912로 반대편이 우세하였다. 여기에 관료들은 대체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결과에 자신을 얻은 세종은 마침내 세종 18년 윤 6월에 공법의 전담 주무관청으로서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이를 수행하게 하였다.
오랜 기간을 두고 검토하고 논의하며 그 타당성을 실험한 결과로 결국 세종 26년 공법의 내용이 확정되게 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농서의 보급을 통한 선진농업기술의 적용 등을 통하여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동시에 꾀하였다. 위에서 지적한 농업생산력의 불안정을 해결하고자 동시에 노력한 종합적인 구상에서였다.
그 결과 드디어 결부제에 의거하는 전분육등(田分六等)과 연분구등(年分九等)의 공법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과 고심 끝에 마련되기는 하였지만 문제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제도의 구상과 실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세종이 참으로 성군임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하나의 법안을 입안하고 실시하는데 있어 이렇게까지 못하는데 당시 왕권의 전제성으로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은 감탄할 만하다.
라. 훈민정음 창제
세종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백성의 생활에 대한 걱정이었다. 백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는 그 동안 많은 정책으로 삶의 질은 높은 성장을 보였다. 세종은 결코 이에 머무르지 않았다. 지금 백성들의 먹고 사는 것이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여 머무르지 아니하였다.
특히 그 동안 백성들의 생활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개선하고자 했던 세종에게 있어 관심사는 백성의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직접 접하는 수단을 발명하는 것이었다. 뜻을 펴려고 하여도 글자를 몰라 이해를 못하고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 나라는 말과 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중국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그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익혀서 나날이 쓰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정인지(鄭麟趾)의 후서(後序)를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 나라는 예악과 문물이 중국과 대등한데 다만 방언과 풍속의 말이 중국과 같지 않다. 이 때문에 글을 배우는 자는 뜻을 깨닫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리는 곡절을 통하기 어려움을 괴롭게 여겼다. 옛날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 이두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부와 민간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모두 한자를 빌어 쓰는 것이어서, 혹 은 난삽하고 혹은 막히어, 비루하고 고거(考據)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 있어서는 그 만분의 일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두 군데 모두 그 동안 교화정책을 행함에 있어 상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편민(便民)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나라말에 따른 문자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세종은 따로 밝히고 있듯이 옥사에서의 억울함을 해결하고자 함을 먼저 들고 있었다. 백성들에게 이편(利便)함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것이었다. 또한 진정으로 `민본(民本)'이란 무엇인가를 치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피치자 즉 일반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려 하였으나 일군의 집현전 학자들과 대신들은 많은 상소를 올려 반대를 하였다. 특히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가 올린 반대 상소문에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강의 요지는 사대의 노선에 이러한 문자창제는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우리의 현 문화 의식 수준은 중 국과 같은 정도인데 구태여 문자창제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최만리가 밝힌 반대 이유는
1. 중국과의 외교적 · 문화적 사대관계상의 문제점,
2.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 자체가 이적(夷狄)의 일이라는 것,
3. 지금까지의 우문정책(右文政策)에 미쳐질 손실,
4. 형정(刑政)의 요체는 결코 언문(諺文)의 마련에 있지 않다는 것,
5. 창제의 과정이 충분한 논의 없이 너무 서둘러지고 있다는 것, 6. 동궁(東宮)이 이 일에만 전념하여 그 성취에 손(損)이 생기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 상소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배된다'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만든 본의가 백성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느냐. 만일 이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했다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 아 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군상(君上)이 하는 일은 나쁘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四聲) · 칠음(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또 소(疏)에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라 하였으니, 내가 만년에 날(日)을 보내기가 어려워서 서적으로써 벗을 삼 았을 뿐이니,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해서 하는 일이겠느냐. 또 이것은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따위가 아닌데, 너희들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그리고 또 내가 연로하였으므로 국가의 서무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도 참여하여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일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 면 환관들에게 일을 맡겨야 한단 말이냐. 너희들은 시종하는 신하로서 나의 뜻을 환히 알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옳으냐."
[<세종실록> 권103 26년 2월 경자(20)]
훈민정음 제작의 뜻이 오직 편민에 있음을 강조하고 상소문에서 지적한 것에 대해 일일이 다시 되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훈민정음은 이미 세종 25년 12월에 완성되었었다. 위의 내용들은 훈민정음의 반포와 시행을 둘러싸고 일어난 것이었다. 세종 25년 12월의 말미 기록에 보면 `이 달에 상이 언문 28자를 친제(親製)하셨다. 그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였고 초 · 중 · 종 삼성(三聲)으로 나누었으며 이들을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한문 및 우리 나라 말을 다 적을 수 있으니 글자는 비록 간요하지만 전환이 무궁하다.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른다'고 적고 있다.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세종 28년 9월 말에 이르러서야 수정 보완이 끝났음을 실록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의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이니 훈민정음의 창제야말로 위대한 문자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창제된 훈민정음의 활용에 있어서 세종은 26년에 일단 언문청(諺文廳) 또는 정음청(正音廳)이라는 기구를 두고 언해작업을 시도하였다. 그 첫 번째로 <운회(韻會)>라는 음운서를 택하였지만 어려움이 있자 다른 운서를 택하여 곧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즉 여기서 우리 나라 한자음의 표준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이를 바탕으로 한자음 표기의 노력으로 계속해서 언해사업이 이루어졌는데 불경이 주로 이용되었다. <석보상절(釋譜詳節)> ·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 <월인석보(月印釋譜)> 등의 작품이 그 예이다. 또한 세종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노래 역시 훈민정음으로 적어 여타 군신들에게 550부를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세종이 불경의 언해를 먼저 시작한 데에는 그의 다른 의도가 숨어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앞서 훈민정음 반대 상소와 여론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반대층이 대개 유자층인 까닭에 유교경전이 아닌 운서나 불경을 택함으로써 유자들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하여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적 창조력을 보여주었으며 마침내 이로 인해 국어의 전면적 표기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창제 의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오늘날 세종대왕의 이 빛나는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글날'이 정해져 그 뜻을 새기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마. 왕위의 위엄
궁궐은 일차적으로 국가의 최고 권력자이자 주권자인 국왕과 왕실의 주거 공간이다. 하지만 그 제도를 사치스럽게 하면 백성들을 수고스럽게 하고 재력을 낭비하며 원성이 있게 된다. 반대로 누추하게 하면 왕실의 존엄을 보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검소하게 하되 누추하지는 않게 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왕의 존엄함을 드러내 고 정령(政令)을 내리는 곳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태조대와 부왕인 태종, 그리고 자신의 대에 이르면서 이엉으로 얽어 처음 정사를 시작하던 데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위의 내용에 맞는 궁궐의 구조가 갖춰지게 되었다.
태조 4년에는 경복궁(景福宮), 태종 5년에는 창덕궁(昌德宮)이 완공되었다. 이 양궁이 만들어 지면서 경복궁은 태조가 창건한 법궁(法宮)으로서 권위를 가졌고, 창덕궁은 왕이 기거하는 실질적인 왕궁으로서 이궁(離宮)의 역할을 하였다. 세종 즉위년에는 인정전(仁政殿)이 창덕궁 안에 만들어졌다. 세종은 또 상왕이 된 태종을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려 창경궁(昌慶宮)의 모태가 되게 하였다. 세종 8년에는 집현전 수찬(修撰)에게 명하여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짓게 하였는데, 홍례문(弘禮門) · 광화문(光化門) · 일화 문(日華門) · 월화문(月華門) · 건춘문(建春門) · 영추문(迎秋門) · 영제교(永濟橋) 등의 이름이 정해지게 되었다.
세종 11년에는 사정전(思政殿)과 경회루(慶會樓)를 중수하였으며 13년에는 광화문의 수축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궁궐이 조성되다가 세종은 경복궁과 수도 한양을 전면적으로 점검하고 보수하는 공사를 벌이게 하였다. 황희 · 맹사성 등에게 이를 명하였던 것이다.
이렇게하여 순차적으로 궁궐이 조성되어 감에 따라 검소하면서도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한양과 궁궐의 모습이 갖춰졌던 것이다. 이는 세종의 왕권의 확립과 더불어 궁궐의 기능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국가의 체계가 잡히고 그 정치영역이 세분화되고 구조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궁궐은 왕과 왕실의 생활공간이자 국정 운영의 최종 단계가 이루어지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구비한 것이다. 음양과 오행, 그리고 건축기술 등과 유교식 이름이 명명되면서 그 신성성과 위엄은 더욱 확대된 것이다. 세종의 궁궐축조 노력이 결실 을 맺게 된 것이다.
외형적으로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궁궐의 축조를 통해 갖춘 세종은 이제 조선건국의 정당성과 역사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그 동안 집현전과 여러 경로를 통해 등용한 인재들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다. 그것은 전대의 역사에 대한 정리와 편찬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전대 왕조인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 노력은 이미 태조조의 정도전에 의해 시도 된 바 있다. 그것은 조선개국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결과 나온 것이 정도전과 정총이 편찬한 <고려국사(高麗國史)>였다.
태종조에도 역시 정도전 등이 쓴 <고려국사>를 다시 정리하여 과거의 사실을 통해 교훈을 얻으려는 노력을 쏟았는데, 태종 원년에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고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세종조에 넘어가게 되었다.
전조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시대와 관련을 맺고 있는 고려왕조의 역사정리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편찬자들이 전 시대와 관련을 갖고 있어서 기록에 대해 가감을 하거나 삭제를 하는 경우, 혹은 곡필을 하거나 취사선택에 공정성을 결여하는 경우, 오히려 자신들과 관련된 가계를 미화하는 등 잘못된 역사를 쓸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왕실 자체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세종은 결코 이러한 입장에 빠지지 않았다. 세종은 즉위년 12월 25일에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국사>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에 공민왕(恭愍王) 이하의 사적은 정도전이 들은 바로써 더 쓰고 깎고 하여, 사신이 본 초고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미쁘게 전할 수 있으랴. 오히려 없는 것만 못하다.”
세종이 생각한 역사란 이미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통해 보아온 것에 기초하고 있었다. 즉 역사의 기록이란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진솔하게 기록하는 방법인 춘추필법(春秋筆法)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귀감을 삼으려는 것이었다.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 <국어보정(國語補正)> ·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편찬은 이러한 의도 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역사서를 읽고 이해하며, 그리고 다시 편수한다는 것은 그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전시대의 문물과 제도 등에 대해 다시 살필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정치에 막대한 도움이 된다는 점에 있다.
즉 역사를 정리하면서 현재의 문물과 제도 전반에 대한 정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 속에서 법전의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직(李稷) · 황희(黃喜) 등이 쓴 <신속육전(新續六典)>, 정초 등에게 명해 개수하게 한 <속대전(續大典)> · 황희 등이 찬진한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등의 법전이 그 내용이다.
사실대로 고려사를 기록하게 하는 한편으로 세종은 사관 및 신하들과 경연을 통하여, 혹은 신하들과 논의를 해 가면서 고려사의 기술체제와 서술방법, 사관(史觀) 등을 정리해 나갔다. 작업은 김종서와 정인지를 중심으로 하여 춘추관(春秋館)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단 1442년 8월 12일에 신개(申槪) 등이 마침내 <고려사>를 찬진하여 일단락을 맺었으나 소략한 것 이 많아 다시 개찬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많은 논의를 거친 후 <고려사>의 편찬체제는 기전체의 형식을 수용하여 기 · 전 · 표 · 지의 방식을 따르게 되었다.
세종은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고려사>의 완성을 끝내 살아 생전에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문종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 60여 년의 시간이 소비 전후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등 총 139권으로 이루어진 <고려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세종은 만들어진 역대실록과 사서 등의 보관과 전승을 꾀하였다. 언제든 사고로 분실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1445년 11월 19일, 춘추관과 충주 · 전주 · 성주(星州)에 사고(史庫)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역사편찬 작업을 통해 세종은 그가 의도하였든 하지 않았던 간에 그 결과로서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고 정통성을 확인하며, 의리 정신을 기를 수 있었다. 또한 민족의 자주성이 확인되는 바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및 역사서를 통해 확인된 조선의 정통성은 이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바가 되었다. 여기에서 세종은 고려와 조선의 계승 관계가 천명(天命)에 의한 것으로, 영웅적인 태조와 태종의 힘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음을 밝히는 한편 선조들의 무공을 통해 정신적으로는 여진과 왜구에 대한 우월성과 자신감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용비어천가>의 편찬계획이었던 것이다.
세종 24년 3월 2일 세종은 예문 제학 안지(安止)와 직집현전 남수문(南秀文)에게 다음과 같이 <용비어천가>의 편찬 의도를 내비쳤다.
“태조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뛰어난 무덕(武德)이 하나둘이 아닌데, 지금 실록을 보니 어찌 이렇게 그 사실이 간략하게 되었는가?”
또 이와 더불어,
“경들이 태조의 사실을 알고 있는 나이 많은 늙은이들을 찾아다니며, 사실대로 물어서 들은 것을 기록하여 갖추도록 하라.”
이렇게하여 목조(穆祖)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의 사적과 태조의 무예와 신공(神功)을 노래하고 태종의 임금될 자격과 천명을 기록한 <용비어천가>를 세종 27년 4월 5일에 완성하여 세종에게 바쳐졌다. 권제와 정인지, 안지 등이 총 125장, 10권으로 만든 것이다. 대서사시로서 노래로 부르고 악곡이 만들어져 연주되고, 또한 춤으로 표현될 수 있 는 것이었다. 이들이 올린 <용비어천가>의 상전문을 보면 그 내용과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해진다.
“어진 덕을 세상에 널리 베푸시고 큰 복조를 성하게 열으시매, 공(功)을 찬술(撰述)하고 사실을 기록하여 가장(歌章)에 폄이 마땅하오니 이에 거친 글을 편찬하와 예감(睿鑑)에 상당하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뿌리깊은 나무는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더욱 긴[長]것이옵니다. …오직 우리 본조(本朝)에서는 사공(司空)께서 신라 시대에 비로소 나타나서 여러 대를 서로 이으셨고 목왕(穆王)께서 처음 변방에 일어나사 큰 명(命)이 이미 조짐되었으며, 익조(翼祖)와 도조(度祖)가 연이어 경사(慶事)를 쌓으시고, 환조(桓祖)에 미쳐 상서가 발하였나이다. 은혜와 신의(信義)가 본래 진실하오매 사람들의 붙좇는 자가 한두 대(代)만이 아니오며, 상서로운 징조가 여러 번 나타났으매 하늘의 돌보심이 거의 몇 백년이옵니다. 태조 강헌 대왕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써 천년의 운수(運數)에 응하사, 신성(神聖)한 창[戈]을 휘둘러서 무위(武威)를 떨쳐 오랑캐를 빠르게 소탕하시고, 보록(寶폌)을 받아 너그럽고 어짐을 펴서 모든 백성을 화목하고 편하게 하셨으며, 태종 공정 대왕께서도 영명(英明)하심이 예[古]에 지나시고 용지(勇智)하심은 무리에 뛰어나사, 기미(幾微)를 밝게 보시고 나라를 세우시니, 공이 억만년에 높으시고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사직(社稷)을 편히 하시니,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옵니다. 위대하신 여러 대(代)의 큰 공은 전성(前聖)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가지런히 하였으매, 이를 형용해 노래하여 내세(來世)와 지금에 밝게 보이옵니다.…이에 목조(穆祖)의 처음 터전을 마련하실 때로부터 태종의 잠저(潛邸)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릇 모든 사적(事跡)의 기이하고 거룩함을 빠짐없이 찾아 모으고, 또 왕업(王業)의 어려움을 널리 베풀고 자세히 갖추었으며, 옛 일을 증거로 하고 노래는 국어를 쓰며, 인해 시(詩)를 지어 그 말을 풀이하였습니다. 천지를 그림하고 일월을 본뜨오니 비록 그 형용을 다하지 못하였사오나, 금석(金石)에 새기고 관현(管絃)에 입히면 빛나는 공을 조금 드날림이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 살피어 들이시고 드디어 펴 행하사,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큰 업(業)이 쉽지 아니함을 알게 하시고, 시골에서 쓰고 나라에서 써서 영세(永世)에 이르도록 잊기 어렵게 하소서. 편찬한 시가(詩歌)는 총125장(章)이온데, 삼가 쓰고 제본하여 전(箋)을 아뢰옵니다.”
[<세종실록> 권108 27년 4월 무신(5)]
그리고 29년 2월에는 이에 대한 주해(註解)가 완성되었다. 5월에 세종은 이렇게 하여 마련된 <용비어천가>를 강녕전(康寧殿)에서 연주하게 하였다. 더불어 6월 4일에는 여민락(與民樂) · 치화평(致和平) · 취풍향(醉?享) · 보태평(保太平) · 정대업(定大業) 등의 아악과 속악의 악보를 이에 붙였다. 참으로 보기힘든 광경이며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이었다.
세종은 이 해 10월 16일 완성된 <용비어천가> 550벌을 신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왕실의 존엄성과 신성성, 그리고 당위성 등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세종의 또 다른 작업이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바. 사대교린책(事大交隣策)과 국토의 완성
제(齊) 선왕(宣王)이 이웃 국가와의 교린(交隣)이 도(道)인가를 맹자에게 물었다. 이 때 맹자가 대답하길,
“오직 인자(仁者)만이 능히 대(大)로써 소(小)를 섬기니 이런 까닭에 탕(湯)이 갈(葛)을 섬기시고 문왕(文王)이 곤이(昆夷)를 섬겼습니다. 오직 지자(智者)만이 능히 소(小)로써 대(大)를 섬기니 때문에 태왕(太王)이 훈죽(텚?)을 섬기시고 구천(句踐)이 오(吳)를 섬겼습니다. 대로써 소를 섬기는 자는 하늘의 뜻을 즐거워(樂)하는 자요, 소로써 대를 섬기는 자는 하늘의 뜻을(天)을 두려워(畏)하는 자이니 하늘의 뜻을 즐겨하는 자는 천하를 보전(保全)하고,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여 사대와 교린이 갖는 그 현실적 이익과 함께 명분을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은 국가간의 관계를 설정할 때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평안히 보유(保有)하는 방도를 일깨워 주기도 한 통념으로 인식되어온 맹자의 내용이다.
조선의 대외정책은 큰 범주에 놓고 볼 때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바로 사대교린(事大交隣)정책으로 대표되기 때문이다. 특히 명(明)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준비하는 외교정책인 것이다. 명에 대한 사대는 힘의 열세가 부정될 수 없는 것인 한, 자기 보전을 위해서 그들이 요구하는 외교 관계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견지에서이기도 하였다. 명과의 무력 충돌을 하여 입게 되는 손해는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승산없는 싸움으로 국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명과 외교관계를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은 유무형상으로 이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문물과 제도의 수입, 국방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외교 정책과 기본 인식은 이와같은 노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것이 또한 외교 명분론이기도 한 것이다.
세종에게 있어서 명과의 관계 설정은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명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히 하면서 그 문물과 제도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조선의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그 이익을 현실화하기도 하였다.
태종과 세종조에 이루어진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군사력의 정비는 또다른 무력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그동안 우리의 변방을 괴롭히던 북로남왜(北虜南倭)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그것이다. 세종이 왜구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한 일과 두 만강 방면의 여진족을 쳐 육진을 개척한 것, 또한 압록강 유역에 사군을 개척한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세종 원년 5월에 왜구는 3천 척이나 되는 선박을 동원하여 비인(庇仁) · 해주(海州) 등지를 약탈하는 일이 일어났다. 3천척이면 적어도 그 인원이 적어도 2∼3만명 이상이 된다는 추산이다.
당시 군국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은 세종과 상의하에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를 삼아 중군을 거느리게 하여 6월에 출발토록 하였다. 병선 227척, 군사 1만 7285명의 군사력을 동원한 것이었고 군량은 65일 분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대마도 앞바다에 도달하자 대마도의 왜구들은 이들 대군을 아군으로 오인하고 오히려 맞이할 준비를 할 정도였다. 완벽한 기습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등은 7월에 수군을 이끌고 거제로 돌아왔다. 8월에는 태종과 세종이 돌아온 이종무와 장수들을 위하여 낙천정에서 영접하고 위로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참으로 통쾌한 일격이었다. 그 동안 끊임없이 해안과 내륙지방까지 노략질하던 왜구는 이로인해 그 힘이 약화되었고, 대마도는 조선의 명령을 들어야 했다. 그 후 세종은 대마도와 일본에 유화책을 쓰면서 그들에게 대장경 등의 불경이나 생활용품, 기타 서적 등을 내리기도하여 왜구를 진정시키면서 일단 남쪽의 근심은 덜 수 있었다.
북쪽의 여진족을 중심으로 하는 야인들의 잦은 침입과 약탈 역시 골칫거리였다. 물론 야인들 가운데서도 어떤 부족들은 서울까지 와서 자기들의 토산물을 바치고 필요한 물건을 얻어갔다.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허직(虛職)을 주어 회유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는 듯 하였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야인들은 평안도 · 함경도 등지로 들어와 농산물을 약탈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기 일쑤였다. 세종은 이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대응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여진족을 소탕하려면 압록강을 건너야만 한다. 하지만 명의 입장은 이에 대해 국경침입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와 조선의 국경 사이에서 약탈을 행하는 여진의 존재는 양국간의 관계에 있어서 미묘한 존재였다.
1433년(세종 15) 세종은 곧 의정부 · 육조와 삼군 도진무에게 여진 토벌방책을 논의하게 하고 군대를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3월 7일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의 토벌계획 보고가 있은 뒤 오랑캐들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5월 7일에 이르러 최윤덕은 평안도 · 황해도의 군사 1만 5천명을 이끌고 파저강(婆猪江)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오랑캐 이만주(李萬住)의 무리를 소탕하였다. 5월 26일의 일이었다.
세종은 이에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근정전(勤政殿)에서 잔치를 베풀고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일은 명과의 외교문제를 일으켰고 야인들은 이를 믿고 다시 조선을 침입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은 명나라에 있었다. 그들이 야인들에 대한 호의를 거두어 들이기만 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좌승지에 오른 최치운(崔致雲)은 문제 해결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 이를 명나라에 알려 양해를 구할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최치운은 황제의 외교적 양해를 얻고 칙서를 받아 돌아옴으로써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최치운의 이러한 공적에 대해 세종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그에게 전 5백결과 노비 30명을 내렸지만 최치운은 자신은 충성심에 따라 일을 행하였고 국록을 먹고 있는 자로서 당연한 일임을 들어 몇차례씩이나 사양하였다. 세종도 또한 그가 진심으로 그러함을 알 고 거두어 들였다.
태종 16년에 갑산(甲山) 소동두(小董豆)의 서편을 끊어서 여연군(閭延郡)을 설치한 것에 기초하여 세종15년에는 자성군(慈城郡)을 두었고 18년에는 무창현(茂昌縣)을 두었으며 25년에는 우예군(虞芮郡)을 설치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사군(四郡)이 개척되었다.
한편으로 함경도 쪽으로 들어오는 야인에 대한 대비책도 필요하였다. 특히 경원을 중심으로하는 지역은 조선의 왕실이 일어난 곳으로 보존하여야 할 중요한 곳이었다. 이에 따라 야인의 침입을 막고 수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진(鎭)을 설치하고 사람들을 이주시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일게 되었다. 세종 16년부터 김종서와 여러 대신들은 많은 논의 끝에 세종과 김종서의 주장대로 육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김종서는 함경도 도절제사가 되어 이를 책임맡았다. 경원(慶源) · 종성(鐘城) · 회령(會寧) · 경흥(慶興) · 온성(穩城) · 부령(富寧)의 육진이 세종 31년에 설치됨으로써 앞서의 사군과 육진의 지역을 경계로 삼는 오늘날 우리 나라 영역의 골격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세종과 김종서가 서로를 잘 이해하고 믿은 결과였다. 처음에 세종이 김종서에게 명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하려 할 때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었다. 반대하는 자는
“종서가 한도가 있는 사람의 힘으로써 이룩하지 못할 일을 시작하였으니, 그 죄는 죽여야 옳다.”
고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이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즉,
“비록 내가 있으나 만일 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족히 할 수 없을 것이요, 비록 종서가 있으나 내가 없었더라면 족히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결정에 대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이었다.
세종은 북방의 야인과 남쪽의 왜인들에 대해 강력한 대응책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였음은 물론이고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에도 간혹 여진족과 왜구 등의 침입이 있었으나 그들도 조선의 강력한 대응을 두려워하여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조선과 무역을 하여 생계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숨통을 터 주기도 함으로써 강온 양면 계책은 모두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세종의 대외관계면에서의 정책은 확연히 성공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즉, 명에 대한 사대의 외교는 성(誠)으로써, 그리고 왜인과 야인에 대한 교린의 외교는 신(信)으로써 한다는 조선왕조의 외교정책이 마침내 빛을 발한 것이었다.
세종의 기쁨과 슬픔은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 스스로의 편안함을 도모하여 방탕한 세월을 보내지도 않았다. 어려서부터 익혀온 경서와 사서, 그리고 부왕인 태종의 치세에서 보고 느낀 것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정신에 바탕을 둔 왕도를 익히고 펴나갔다.
나라가 위태하면 즐거운 임금이 없고 나라가 평안하면 근심하는 백성이 없다. 나라가 혼란하면 위태하고 나라가 다스려지면 편안하다. 이를 위해서는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 순리에 따라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 세종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의 웃음과 기쁨의 환호성이 온천하에 가득찼던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이제 대왕은 역사 속에서 그 웃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 가슴에도 그의 언어와 동작 하나하나가 새겨지고 있다.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이는 영원할 것이다.
대왕을 세종이라 칭하게 된 연유를 보면 더욱 그의 업적에 숙연해 지기만 한다. 즉 문종 즉위년 3월 13일에 허후(許텓) · 정인지(鄭麟趾) 등이 의논하여 대왕의 시호를 고치기를 다음과 같이 아뢴 일이 있었다.
“역대(歷代)에 세종(世宗)이라고 일컬었던 군주(君主)는 중흥(中興)하였기 때문이거나 혹은 창업(創業)하였기 때문이었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이와 같지 않은데도 세종이라고 일컫게 되면 덕행(德行)을 기록하는 뜻에 결점(缺點)이 있어서 역대 칭호(稱號)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청컨대 문종(文宗)이라고 고쳐서 실제의 덕행을 기록하게 하소서.”
하니, 문종이 말하기를,
“비록 칭호는 세종(世宗)이라고 하지마는, 선왕(先王)의 덕행은 누가 이를 알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북방(北方)에서 공훈(功勳)이 있었으니, 세종(世宗)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면서 중흥과 창업에 모두 의미가 있다하여 세종이라 정하게 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의정부에서 세종의 업적과 인품을 기록하여 예조에 상신하는 글의 말미를 인용하면서 세종대왕을 기리고자 한다.
“ …… 왕이 인자하고 명철하여 과단성 있게 결단하였고, 효성 있고 우애하며 부지런하고 검박하였으며, 대국을 섬기는데 지성스럽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도를 다했으며,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고, 상벌을 공정하게 하였습니다. 어진 사람을 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시키고, 일은 반드시 옛 것을 스승삼아 제도를 분명하게 갖추어 놓았으니, 그물[網] 을 들면 그물눈[目]이 저절로 열려서, 섬에 사는 왜인과 야인(野人)들도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한 지 30여 년간에, 백성이 전쟁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편안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기었습니다. 문교(文敎)가 크게 일어나서 울연(蔚然)히 볼 만하였으니, 훙서(薨逝)하신 날 에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선원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