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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살이
현 기 영
그 무렵 나는 어느 대학 부속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접장*질 5년에 어느덧 타성*이 몸에 배어들어 속물이 다 되어버린 형편이었다. 총각 시절 3년을 보낸 사립학교나 전근 온 그 공립학교나 교직이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부려먹어도 병탈이 없는 젊은 교사가 보통 힘겨운 졸업반을 전담하거나 아니면 과목 일부를 떠맡게 마련인데 내 입장이 바로 그랬다. 치열한 입시 경쟁의 현장인 학교는 학생 선생 할 것 없이 모든 인원을 매일매일 용광로의 불길 속에 투입, 쇳물처럼 녹여 해체시킨 다음 입시용 제품으로 재생
시키는 공장에 비견할 만했다. 어느 반 교실에 붙은 표어가 ‘강자에겐 적이 없고 약자에겐 피할 곳이 없다’라고 단적으로 표현했듯이 학교는 철저히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정규수업·보충수업 외에도 각종 잡무에 얽혀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시달리 다가 늦은 퇴근길에 오르면, 나는 매양* 뭇매*에 홈씬 난타 당한 것처럼 억울했다. 그래서 자연히 싸구려 소줏집을 자주 찾는 버릇이 붙었는데, 파김치같이 늘어진 몸은 소주만 들어가면 야릇하게도 다시 생기가 돌곤 했다. 몸속에 묵직한 피로의 퇴적이 소주의 불꽃에 휘황하게 타오르는 그 도취감, 그것이 유일한 나의 낙이었다. 교실의 어린 학생들은 개개의 인격으로 파악되지 않고 일사불란한* 규율이 적용되는 병영*식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작업대에 올려진 규격제품같이 늘 무표정한 얼굴들, 아니 그들도 나처럼 원망스럽고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아이들과 개별 접촉할 시간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고 보니, 그저 모개로* 싸잡아 ‘다스리는’ 것만이 능사였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시험을 보이고 반수가량의 성적 불량 학생들을 즉결 처분하듯이 한바탕 북새*통을 놓는 것이 유일한 학습지도 방법이자 생활지도 방법이었다. 내 입에서 험한 욕설과 위협적인 언사*가 예사로 튀어나오고 손에는 쉽게 매가 들리어지곤 했다. 성적불량은 철저히 죄악시되었다. 나 자신 적빈한* 농촌 출신으로서 가난한 아이들일수록 일반적으로 성적이 저조한 데는 참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학군별로 학생들을 배정받은 1, 2학년에는 청계천 천변, 승인동 산동네, 답십리 철로 주변, 좀 멀리는 중랑천 둑동네 같은 빈민촌 아이들이 많아 수업료를 제때 못 내고 수업 중에 서무실로 불려가 닦달당하기 일쑤이고 심지어 가방 들리운 채 집으로 쫓겨 가는 사례도 부쩍 늘어나 있었다. 해마다 한 반에 두어 명 꼴로 중도 탈락자가 생기곤 했다. 그중 한 아이는 창경원에서 우연히 다시 보았다. 아내와 함께 봄놀이 갔던 나는 무심히 원숭이 우리 앞을 지나치다가 그 앞에 잔뜩 모인 구경꾼 틈 사이로 한 소년이 슬몃슬몃* 비집고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소매치기 동작이었고, 그 애는 내 수업을 받은 적 있는 제자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불우한 아이들에게 성적 북량이란 곧 만성적 가난의 세습을 예고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하면 된다’고 무섭게 다그쳐보기도 하고 감상적인 말로 감화도 시켜보았지만, 그것이 허망한 짓인 줄은 훨씬 나중에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난한 아이들일수록 멀리 국민학교 시절부터 계속 마이너스 쪽으로만 누적 되어온 기초학력 미달 현상이 두드러져 공부시켜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셈이었던 것이다. 만성적 가난에 시달리는 집 안의 아이들일수록 만성적 학력 미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에 나는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것은 아무리 버둥거려봐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가난의 악순환을 되풀이할 뿐이라는 것을 뜻했다. 이 아이들에게 ‘기회는 균등한데 성적 불량은 전적으로 네 탓이다, 네 게으른 탓이다, 하면 된다’ 하는 것은, 그 가난한 부모를 보고 ‘기회는 균등한데 가난은 전적으로 네 탓이다, 네 게으른 탓이다, 하면된다’ 하는 소리와 진배없이* 허위와 기만에 가득 찬 강변*일 뿐이었다. ‘하면 된다’는 당시의 집권자가 표방한 으뜸가는 이데올로기였고 이 구호 아래 가공할 정치적·경제적 범죄를 자행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것이 고도성장이었다. 학교도 이 빈익빈 부익부의 논리에 철저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도대체 이십 명도 못 되는 소수를 위해 대다수가 입시경쟁률이나 높여주며 들러리 서는 교육이 무슨 민주교육일까. ‘하면 된다’는 속없는 신화에 속아 어떻게 되겠지 하고 막연한 기대감으로 겨우겨우 자신을 지탱해가는 이들 불우한 대다수 학생들이 학고에서 배우는 것은 오직 쓰디쓴 열등감과 비굴한 인내심일 뿐이다.
아무튼 그 무렵 나는 교직에 대한 회의가 절실했으나 탈출을 시도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이미 결혼한 몸인데다가 고등학교 다니는 아우까지 얹혀 있고 고향의 부모에게 얼마간 송금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매일매일이 하냥* 똑같은 생활이었다. 5년간이 그랬다. 그것은 단 하루의 체험의 천편일률*적인 연속에 불과했다. 어제가 그랬고 오늘이 그랬으니 내일이라고 다르겠는가. 내 일상엔 소주 기운을 빌어 잠시 발작적인 흥분에 취해보는 것 외엔 아무런 모험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언젠가 수업 들어가는 도중, 몇 발짝 앞에서 출석부를 끼고 맥없이 걸어가는 노교사의 바싹 야위고 주름진 뒷목을 훔쳐보고 가슴이 섬뜩해진 적이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이십여 년 후 내 자신의 뒷모습이었다.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할 처지에서 오직 글 쓰는 일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 듯싶었다. 나는 당시 구미*의 부조리문학*이나 내면소설 따위에 지독히 중독되어 그런 유의 소설이나 희곡을 창작하고 싶었는데·그것이 전혀 도착된* 문학관임을 깨달은 것은 훨씬 나중 일이었다. 40분 남짓 걸리는 출퇴근 버스 속에서 용케 자리라도 잡고 앉게 되면 작품 구상 한답시고 눈을 지그시 감아보는 것이었지만, 상념의 가닥은 늘 끊기고 졸음만 쏟아지기 일쑤였다. 판에 박힌 생활이 지겨워 나는 내가 탄 버스가 운전수의 파격적인 충동으로 노선을 벗어나 고가도로로 기어오르는 엉뚱한 공상도 해보고, 그런 식의 소설을 만들어볼까 구상도 해보았다. 내가 탄 버스가 하루에 두 번씩 오고 가는 청계천 주변에는 한 젊은 노동자가 분신자살하여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한 평화시장 사건도 있었고, 판자촌을 태워 천여 명의 이재민을 낸 화재사건도 있었지만, 국적 불명의 황당무계한 미의식에 사로잡혀 끄덕끄덕 졸며 지나쳤으니 그런 사건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글이란 자기가 몸소 겪거나 각별히 애정을 갖는 대상에 관하여 얘기할 때라야 비로소 절실한 감동을 얻어내는 법인데 나는 내 체험, 내 얘기를 하기가 싫었다. 대학을 나올 때까지 나를 철저하게 지배한 가난이 싫었고 직장으로 선택한 교직에도 넌덜머리*가 났다. 싫은 것이 작품의 소재가 될 리가 없다. 가난이야말로 나를 키운 유일한 젖줄인데도 그것을 한사코 부정하고 있었으니, 그런 위선자가 글을 쓰면 그게 무슨 꼴이 되겠는가.
그러나 위선적인 글조차 쉽게 씌어지지 않았다. 대학 때 하던 짓거리니까 열심히 하고 있으면 뭐가 돼도 될 듯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머릿속이 아주 황폐해버렸는지 도무지 마른 나무 물 짜기로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써야지, 써야지 하고 늘 중얼거리면서도 막상 펜대를 들기가 죽어라고 싫고, 그럴수록 자신이 미워 부글부글 심화가 끓어올랐으니, 그런 생병*이 또 있을까.
이렇게 글 한 줄 못 나오는 나의 정신적 불모성이 아내에게도 감염되었는지 결혼한 지 이태가 넘도록 생산을 못하고 있었다.
불모*의 삭막한 나의 일상 속으로 어느 날 뜻밖에 ‘하면 된다’의 준엄한 권화(權化) *인 그이가 걸어 들어왔다. 내가 근무하던 중학교는 대학에 딸린 부속학교라 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그날의 장면을 똑똑히 목격할 수가 있었다.
먼저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처음엔 백 명도 못 되는 대학생들이 굳게 잠긴 교문 앞에 모여 그들의 리더를 교문 밖의 경찰 카메라에 노출되지 않도록 에워싼 채 교련 반대, 부정부패 척결의 구호를 외치며 소극적인 시위를 벌이더니 나중에 학생 수가 배로 불어나자 최루탄*이 터지고 투석질*로 이에 맞서면서 시위는 아연*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울타리가 높아 투석질이 여의치 않자 농구 골대 두 개를 밀고 가 울타리에 갖다 붙이고 서너 명씩 올라가 밖을 향해 돌을 던져대기도 했다. 최루탄 쏘는 소리가 콩 볶듯 일어나고 운동장과 교문앞 진입로에 파란 연기가 자욱이 깔렸다. 운동장 동편 울타리 밖에 있는 파출소 유리창들이 박살났다. 그러다가 시위 학생들 중에 사복이 끼여 있었던지 잠시 운동장을 가로질러 쫓고 쫓기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청년과 함성 지르며 뒤쫓는 시위 학생들 사이의 거리는 불과 서너 발짝, 자칫 흥분한 학생들이 일을 저지를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운동장 울타리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이였다. 그러나 울타리까지 쫓겨 간 그 청년은 담 위로 손을 뻗는 순간 날렵하게 몸을 뛰어넘지 않는가. 아마 급박한 위기의식이 그를 높이뛰
기 올림픽 선수로 만들었나보았다.
교무실 창가에 몰려 있던 우리들은 그 청년의 날랜 동작에 혀를 내두르며 다음 수업에 들어갔다. 최루탄 가스가 스며든 교실은 눈물·콧물·재채기로 뒤범 벅되어 수업이 엉망이었다. 수업을 어렵사리 끝내고 다시 이 층 교무실 창가에 모였을 때, 갑자기 무슨 일이 돌발했는지 운동장과 정문 앞 진입로에 널려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학교 안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거동이 분명 했다. 무슨 일일까? 삽시*에 텅 비어버린 운동장과 진입로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쫙 깔렸다. 울타리에 갖다 붙여놓은 농구 골대 두 개가 작업하
다 만 크레인*처럼 그림자를 끌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간마저 정지해버린 듯한이 부동*의 풍경 속으로 수위 두 명이 급히 나타났다. 큰길 쪽 울타리 한가운데 비상문으로 뛰어간 수위들은 잠깐 자물쇠를 따는 눈치더니 이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는 얼결*에 창가에서 한 발짝 주춤 물러섰다. 곧 그 문으로 검정 승용차 한 대가 쏜살같이 뛰어들더니 뒤이어 비슷한 모양의 검정 승용차 십여 대가 꼬리를 물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모두 빈 차였다. 무슨 영문일까? 차들은 햇빛에 눈부신 반사광을 내쏘면서 텅 빈 운동장을 무섭게 질주하여 잠깐 사이에 본관 쪽 스탠드 앞에 일정한 간격으로 착착 멈춰 섰다.
그 전광석화*같이 눈부신 속력에 놀라 멍해진 내 눈에 이번엔 한 떼의 사람들이 운동장을 질러오는 게 보였다. 승용차 주인들이 분명한데 오십 명가량이 둥그렇게 떼 뭉쳐 걸어 들어오는 게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곧 놀라운 사실이 알려졌다. 마침 대통령 일행이 나들이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시위 학생들이 모르고 그쪽을 향해 돌을 던졌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떠들지 모르니 다음 수업 있는 사람은 미리 반에 들어가라고 교감선생이 지시했다. 나는 마침 빈 시간이었지만 더 이상 밖을 내다보기가 두려워 두어 발짝 뒷걸음쳤다. 캠퍼스 안의 온갖 사물이 숨죽인 휑한 진공 속으로 일행은 쐐기 박듯 단호하게 진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여러 겹의 동심원*으로 된 경호망이 권력의 핵을 에워싸고 그 좌측으로 거총*자세를 취한 정복들의 일렬횡대가 진입로를 질러 서편 울타리까지 뻗어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커튼을 닫아걸었다. 다른 동료들도 모두 창가에서 떨어져 나와 불안한 기색으로 서성 거리고 있었다.
그러고서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운동장에 엔진 폭음이 터지기에 내다보니, 어느새 승용차들은 일행을 태우고 들어올 때처럼 날쌔게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계단 쪽 귀퉁이에 몰려선 대학 교직원들이 차가 뜰 때마다 일일이 허리 굽혀 전송했다. 맨 앞에 있는 이가 내 결혼 주례를 맡았던 학장선생이었다. 학장선생과 무슨 말이 오고 갔을까? 아니, 2, 3분도 못된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말이 오고 갔겠는가. 외마디 호통을 터뜨리고 홱 돌아섰을 것 이다. 그것을 입증할 만한 사건이 다음에 곧 일어났으니, 마지막 차가 비상문 밖으로 빠져나감과 거의 동시에 정문 쪽으로 무장경찰이 쇄도해 들어왔던 것이다. 이리하여 경찰이 학원에 진입 못하게 된 금기*는 그날로 깨어지고 말았다.
그러고서 한 달이 못 되어 휴업령*과 위수령*의 쌍칼을 동시에 내리쳐 ‘연중행사로 일어나는 고질적 데모’를 침묵시킨 다음이어서 ‘국가 비상사태’의 음울한 계절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국회도 언론도 목소리가 목구멍 안으로 잦아들었다. 마땅히 보도해야 할 사실을 기사에서 빠뜨린다는 것은 그 과오가 거기에만 그치지 않고 독자를 오도시키는* 오보* 행위나 다름없다고, 신문들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빙긋 웃던 그이의 언론관에 영합하고 있다고 내 직장 동료들은 제법 비분강개하여* 입방아*를 찧었다. 신문에 의하면 세상은 지극히 안정되고 무사했다. 광화문 지하도의 신문팔이 소년은 번번이 빨간 색연필로 머리기사에 테를 둘러 행인의 시선을 끌려고 애썼지만 특종은 없었다. 대신 육아법에 대한 기사가 눈에 띄게 늘고 연재소설 속의 의적 홍길동과 그 졸개들은 요 깔고 누워 방사* 치르는 것만 능사*로 삼고 있었는데, 말하자면 아무 생각 말고 방사나 즐기고 새끼나 열심히 치라는 것이었다. 신문사들이 서로 다투어 저속한 내용의 주간지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늦가을, 때 아닌 방학을 만난 대학 구내는 우리 아이들이나 이따금 얼쩡거릴 뿐 휑뎅그레* 비어 있었다. 하루는 문안차 학장실에 들렀는데, 학장선생은 벌써 겨울 추위를 느끼는지 조그만 석유난로를 피워놓고 옹송그리고* 앉아 있었다. 침울한 그 얼굴엔 노쇠현상이 뚜렷했다. 그이와 내가 주고받은 이야기는 고작 이런 것이었다. “선생님, 이 방이 너무 중학교 쪽과 붙어 있어서 시끄럽지 않으세요? 아이들에게 늘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저 아이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리니까 여기가 학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이 판에 저 아이들마저 없다면 아주 적막강산*이 되고 말 거야.”
휴교령이 해제되어 학교로 돌아온 같은 구내의 대학생들도 작년 시위사건으로 얼먹었는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보였다. 운동장 가녁 테니스코트에는 어느새 고관*들이 교수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공을 치곤했다. 어느 날 강당 청소를 지도하다가 문득 건물 뒤켠 외진 데서 기합을 잔뜩 넣은 군대식 외마디 복창*소리가 들려오기에 창밖을 내다보니 ROTC* 상급학생이 손에 든 책 모서리로 하급자의 명치끝을 찌르고 코밑을 쑤시며 뭐라고 나직 이 윽박지르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하급자는 감전된 듯 흠칠흠칠 놀라며 “옛! 옛!” 하고 복창하는 것이었다. 캠퍼스 안은 이제 이질적인 두 요소가 별 마찰 없이 공존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비상사태란, 말 그대로 언젠가는 정상상태로 환원될 잠정적 조치이겠거니 하고 우리들은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어느 제약회사의 약광고를 문교 장학방침으로 받아들여 하루 7, 8시간 수업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점심시간까지 빼앗아가며 중간체조를 시키고, 어느 세력자의 영 리사업을 ‘자유교양’이라는 허울* 아래 저질의 도서로 강매하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정치의 큰 바람이 학교까지는 불어 닥치지 않을 때였다. 생활은 여전히 틀에 매여 연자방아의 노동처럼 지겹게 돌아가고, 생활에 목줄 매달고 질질 끌려 다니는 일개 접장이 무슨 세상 물정을 알까. 막상 10월유신*이 터지고 나서야 비상사태가 그 사전 준비기간임을 깨달았던 것 이다.
유신 출현 열흘 전에 탄생한 내 첫아기를 두고 직장 동료인 권이 ‘유신생’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거니와, 비상사태 속의 열 달을 채우고 난 첫애는 말하자면 10월유신과 쌍생아인 셈이었다. 아내와 내가 사랑의 단꿈으로 생명을 빚어내고 있을 때, 그이는 차가운 손으로 암흑을 뭉쳐 죽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음모를 사전에 눈치챈 사람이나 나처럼 언론이 유포한 주술에 걸려들어 육아에 관심 두고 새끼 치기에 열중한 사람이나 한 일이 없기는 피장파장이었다.
내가 유산의 악몽에 시달리는 아내를 자정이 넘도록 어루만져 건강한 생명의 잉태를 도모하다가 곤하게 잠든 어느 날 밤 일이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간밤에 도둑이 든 흔적이 완연했다. 책상 위의 책꽂이로 막아놓고 있던 들창*이 열려 있고 책꽂이는 한쪽으로 밀려나고 부엌으로 난 출입문은 밖으로 잠겨져 있었는데 장판에는 흙 묻은 신발자국들이 어지러웠다. 침입자의 농구화 발자국은 우리가 깔고 누웠던 흰 요 귀퉁이에도 두 군데 선명히 찍혀 있었다. 책상서랍이 열려 있고 벽에 걸렸던 외출복은 모조리 주머니가 까뒤집힌 채 방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도난당한 물건은 결혼시계 둘, 결혼반지 하나, 그리고 얼마 안 되는 현금이었다. 재산을 잃었다는 느낌보다 순결이 짓밟힌 느낌이었다. 도둑이 들어 방 안을 온통 휘저어 더러운 난장판을 만들도록 무심히 잠만 자고 있었다니…… 그러나 잠에서 깼다 한들 과연 도둑을 쫓아낼 용기와 힘이 나에게 있었을까? 도둑은 발각되는 순간 흉기를 든 강도로 돌변한다는데. 설사 그때 잠이 깼더라도 모르는 척 잠자는 시늉 하는 것이 상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깨어 있기는 하나 용기 없는 사람이나 나처럼 아예 잠들어 있는 사람이나 ‘유신’이라는 민권 약탈의 거대한 음모에 대해서 속수무책*이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깨어 있고 용기 있는 이들은 이미 아갈잡이* 당하고 손발이 묶여 있었다.
유신 포고가 있은 지 3일 후에 실시된 고입 체력장에 검사원으로 차출된* 우리는 그때 벌써 계엄*의 살벌한 분위기를 맛보았다. 대부분의 종목이 의자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검사할 수 있을 텐데, 장학사는 기록원을 제외한 전 검사원을 종일 운동장에 말뚝 박듯 세워놓았을 뿐만 아니라 혹 기록이 잘못되어 정정날인*이라도 할라치면 큰일 난 듯이 노발대발 닦아세우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도 지나친 처사가 아님을 입증할 만한 소문이, 들려와 우리를 아연 긴장시켰다. 검사 이틀째 날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으로는 학교 검사장에서 오래달리기 종목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한 학생이 마침 사찰 중인 문교부장관에게 직접 호소했던바 기록 담당교사 세 명이 즉각 파면당했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다른 징계처분이 그렇게 과장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3일간의 검사일정이 무사히 끝나자 장학사는 연속된 피로와 긴장으로 기진맥진한 우리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감독관으로 임명되어 여기로 배치될 때 상부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모든 책임은 네가 져라. 만약 문제가 생기면 네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라.’ 그런데 여러분의 협조로 아무 사고 없이 일이 끝나 여러분이나 나나 이렇게 목이 온전하게 붙었으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10월유신의 충격은 실로 컸으나 항변*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계엄령*의 도시는 죽은 듯 숨죽이고 있었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막강한 힘을 실감했다. 마치 거대한 수컷이 이 도시를 덮쳐누르고 능욕하는 것 같았다. 먼저 화간자(和姦者)*들이 속출했다. 권력에 편승하려는 기회주의자들뿐 아니라,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독한 정액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단 정액을 받아들인 자들은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격으로 그럴듯한 자기 합리화가 생겨 주저 없이 유신 홍보에 앞장설 수 있었다.‘아니다’라고 항변 못한 지식인들은 이때를 당하여 침묵은 긍정에 다름 아니 라는 자명한* 진리에 괴로워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징크스를 깨고 만세토록 누리고 말겠다고 무서운 탐욕으로 무쇠같이 굳어진 그이의 얼굴과, 그와는 대조적으로 거적눈*에 간사한 웃음을 흘리며 ‘81년 수출 1억 불, 일 인당 GNP 천 불이 될 때 민주주의 하자’라고 달래는 총리의 유들유들한 얼굴이 연일 TV와 신문에 클로즈업되고, 명사들의 숱한 지지 강연·대담·논설·성명·표어가 어지럽게 난무했다. 유신은 국민투표가 있기도 전에 벌써 기정사실*화되어가고 있었다. 전국 교육자 2천여 명이 대구에 모여 그이의 명령에 복창하여 유신과업의 선도적 완수를 결의하고, 문교부가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유신헌법을 사회교과서에 싣겠다고 언명한* 뒤로, 학교는 급속도로 유신 홍보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학교 본관건물의 이마에는 ‘유신과업 완수’라고 대서특필한* 머리띠가 질끈 동여매지고 아이들과 선생들의 왼편 가슴팍에도 홍보 게시판이 마련되어 ‘10월유신’ 표어가 붙여졌다. 교실·복도·교무실에도 유신 포스터와 표어의 일색이었다. 직원회의는 회의가 아니라 만인에게 공범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사용된 홍보기관으로 각종 명령지시가 일방통행의 하향식으로 전달되었다. 그 명령 지시를 다시 아이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우리들은 60명 학생의 담임으로서, 한 번 입 벙끗하면 적어도 60번의 죄를 저지르게 되어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그럴수록 우리는 그러는 자신이 두려웠다. 공포는 항시 우리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술 마셔도 대취*는 절대 금물이었다. 싸구려 목로*인 ‘바보집’에서 어울리던 술벗들이 취중*에 말실수 할까봐 하나둘 빠져나가고 나중에는 권과 나만이 덩그렇게 남았다. 어두운 도시 곳곳에 부주의한 사람들을 소리 없이 삼켜버리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떤 교사 두엇이 수업 중에 제자의 고발을 받아 끌려갔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나는 수업시간마다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넥타이를 잔뜩 치켜올려 얼굴이 벌게지도록 목을 속박해놓곤 했다.
열흘쯤 지나서 보이스카웃 담당 윤 선생이 교문 앞 큰길 건널목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교통안전 지도하다가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봉변*을 당한 일이 발생했다. 파란 불이 켜져 아이들이 차도로 내려가 서너 발짝 내딛고 있는데 돌연 그 앞으로 승용차 한 대가 튀어나와 쌩 ―날파람⁕을 일으키며 내달렸다. 그 서슬*에 놀란 아이들이 일시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흠칫 물러가고 윤의 입에서 “개새끼들!” 하고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웬걸 횡단보도를 유린하고 내달리던 그 무법자가 20미터 전방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를 일으키며 180도로 방향을 틀더니 곧장 윤에게로 달려들었다. 문 두 짝이 동시에 벌컥 열리면서 똑같이 밑머리를 바싹 치켜 깎은 흑곤색양복 차림의 청년 둘이 튀어나왔다. “뭐, 개새끼? 어쭈, 선생놈이 못하는 쌍욕이 없어.” 그들은 윤의 멱살을 틀어쥐고 전봇대에 밀어붙이고는 지체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양 볼에 쇠뭉치 같은 주먹을 서너 방 연달아 얻어맞은 윤은 그만 정신이 아득하여 맥없이 전봇대 밑으로 축 늘어져버렸다. 코피가 흘려내려 와이셔츠 앞섶을 벌겋게 적셨다. 승용차는 아스팔트에 내던져진 윤의 두 다리를 깔아뭉갤 듯이 바로 옆에서 무섭게 급커브를 틀어 휭하니 달아나버렸다. 그제야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달려와 부축해주었는데 모두 겁에 질린 얼굴이더란다. 오죽 무서웠으면 제 선생이 맞는데 대들기는커녕 찍 소리 한 번 못했을까.
얼굴이 퉁퉁 부은 윤은 숫제* 넋 나간 표정이었다. 너무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어쩐지 꿈만 같고 어리벙벙할 뿐 도무지 억울한 생각이 안 드는 게 이상하다고 하면서, 그저 운이 없어 교통사고 당한 것쯤으로 치부하고 말겠노라고 했다. 여러 아이들 입에서 일치된 차량번호가 나왔지만, 윤은 그것이 위장번호가 틀림없다고 막무가내로 경찰에 신고하기를 거절했다. 그것은 벼락 때린 하늘에다 눈 흘기는 격으로 무의미하다고 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윤의 두려움과 체념은 쉽사리 우리에게도 전염되었다. 처음에는 제법 흥분한 목소리로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둥, 제자들 앞에서 선생을 그렇게 무참히 짓이길 수 있느냐, 전 교직원이 들고 일어나 진상 규명을 해야 한다느니, 제 선생 맞는 걸 보고도 가만있는 것들을 제자라고 가르쳤으니 정말 헛가르쳤다느니 하면서 울끈불끈 떠들어댔지만, 그 분노는 단 몇 시간도 지속 못 되고 흐지부지 사그러져버렸다. 이 기상천외의 백주* 테러가 있고 난 뒤부터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느껴지던 유신의 공포는 그 사건으로 하여 이제 우리 가슴 복판에 생생한 실감으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차츰 계엄령에 길들여져갔다. 일단 체념하고 나니 주위에 머뭇거리던 공포는 저만큼 물러나 다시 추상화되었다. 술벗들이 다시 바보집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미 홍어 속같이 팍 곯아 있는 우리 같은 접장들로서는 뜨거운 분노의 정서를 계속 지켜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분노는 분노끼리 유유상종해야만* 그것이 온전하게 지탱되는 게 아닌가. 바보집의 술벗들은 분노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불씨마저 아주 꺼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계엄령에 길틀여졌다는 말에는 상부의 지시 명령을 태업(怠業)*해버리는 요령도 생겼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 부득이한* 지시 명령만 전달하되 그것도 무표정하게, 억양 없는 음성으로, 기계적으로, 빨리 말해버리곤 했다. 우리는 계엄령 속에서 실없는* 농담으로 웃기도 하고, 교무실 밖의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마침 신춘문예 응모의 계절이 왔으므로 나는 다시 전에 하던 못난 짓거리나 해볼 궁리를 시작했다. 결혼 3년간의 불모상태를 뚫고 내 첫 애가 태어났으니, 어쩌면 가뭄 타는 내 머릿속에도 물이 돌아 그럴듯한 작품이 나올 듯도 싶었다. 드디어 국민투표일이 다가왔고 나는 그날을 작품 쓰는 날로 잡고 있었다.
그런데 투표일 하루 전날이었다. 학급 담당은 1학년인데 수업시간은 3학년이 오히려 더 많은 편이던 나는 그날 6교시에 3학년 교실에 들어가 있었는데 느닷없이 수업종료 종이 십 분이나 앞당겨 울렸다. 아마 사환*아이가 시간을 잘못 알고 종을 쳤겠지 하고 중동무이된* 말을 다시 이으려는데 이번엔 음질 나쁜 실내스피커가 끼걱거리며 울려 나와 내 말문을 막았다. 아이들이 좋아라고 환성을 올렸다. “사정에 의해 6교시 수업은 여기서 끝내주기 바랍니다. 지금 곧 긴급 담임회의…….” 확성기 말은 떠드는 아이들 소리에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른 교실에서도 아이들의 환성이 왁자히 터져 나왔다. 녀석들은 아예 그것으로 그날 수업은 끝이라고 멋대로 단정하여 “와, 신난다! 단축수업이다!” 하고 소리쳐댔다. 보충수업까지 매일 8시간 수업에 오죽 시달렸으면 저럴까? 아이들의 요동질로 책상 줄들이 금세 비뚤어지고 먼지가 뽀얗게 떠올랐다. 제기럴, 호떡집에 불이라도 났나. 갑자기 수업 중에 종 치고 방송 틀고 야단이야! 아이들은 금방까지도 다소곳이 따라 배우던 수업내용을 깡그리 잊어먹어도 좋다는 듯이 정신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 출석부로 교탁을 꽝 내리쳤다.
“좀 조용하지 못해?”
그러나 일단 들떠버린 아이들의 흥분은 얼른 가라앉지 않았다. 악을 쓰다시피 대여섯 번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간신히 아이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수가 있었다.
“내일 숙제는 알지? 오늘 나눠준 프린트 문제 다 풀어오고, 오늘 배운 거 복습해오기? 숙제 안 해 온 놈은 내일 수업시간에 혼날 줄 알아. 알았지?”
그러자 뒤켠에서 한 녀석이 일어나더니 벌쭉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내일 숙제가 아니라 모레 숙제가 아네요? 내일은 국민투표라 노는 날인 데요.”
아이들이 또 한 번 와 하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녀석은, 수업 끝마다 “내일 숙제는…….” 하는 내 입버릇을 가지고 한 번 농쳐본* 것인데 이런 실수가 한두 번이 아니므로 다른 때 같았으면 나도 함께 웃고 말았을 테지만,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잔뜩 상을 찌푸린 채 잠시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아이들마다 왼편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린 ‘10월유신’ 흉장*들이 무당 헝겊처럼 흉물스럽게 보였다. 이놈들아, 내일 학교 쉰다는 게 그렇게도 좋냐? 철딱서니* 없는 것들! 내일이 무슨 날인데, 울어도 시원찮은 날에 무슨 살판났다고 야단이야, 엉? 이런 욕설이 목구멍 하나 가득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꾹 눌러 참고 교실 밖으로 나와버렸다.
교무실에 올라가니 교감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버티고 서서 소리치고 있었다. “긴급 담임회의가 있으니, 지금 곧 교장실로 모여주십시오. 자, 빨리 내려갑시다.” 평소에 말주변이 시원찮은데다가, 한 통속*인 교장과 교무주임에 치여 제 몫을 변변히 찾아 먹지 못하고 매사에 소극적이던 양반이 오늘따라 왜 저리 흥분해 있을까? 무슨 일인가? 혹시 교내에 무슨 불상사라도 생긴 건 아닐까? 도대체 무슨 비밀스런 일이기에 쿄무실에서 의논 못하고 비좁은 교장실로 불러대는 것일까? 다른 동료들도 한결같이 의아스러운 눈길로 서로의 얼굴을 더듬을 뿐 직접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교감의 얼굴은 불가사의 한* 긴장감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자, 어서들 내려갑시다, 어서요!”
우리들은 불안에 쫓겨 교무수첩을 챙기고 황망히 아래층 교장실로 내려갔다. 그러나 우리를 맞이하는 교장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출입문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보자 그는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안락의자에서 튕겨나듯 일어나더니 그럴듯하게 양팔을 활짝 벌리고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어서들 오시오. 수업 중에 불러서 죄송하게 됐소. 워낙 긴급한 일이 돼놔서……”
방 안은 회의실에서 옮겨다 놓은 철제의자들로 빈틈없이 메워져있었다.
“이걸 어쩌나, 대접이 소홀해서 허허허. 내 방에 이렇게 많은 손님 맞기는 처음인데, 허허허. 자, 시간을 다투는 바쁜 일이긴 하지만 우선 앉고 봅시다. 비좁지만 바싹 조여 앉아보시오. 여선생들은 남자들 틈에 끼이면 불편할 테니 요 앞으로 나와 응접세트를 이용하시고…… 자, 자, 어서들 착석하시오,* 허허허. 미스 정! 미스 정!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커피를 들여오도록!”
그러나 교장이 너무 헤프게 헛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어째 낌새가 수상쩍었다. 미처 자리 잡을 겨를도 없이 출석 점검이 시작되었다. 빠른 속도로 호명하는* 교감의 들뜬 음성이 방 안 공기를 불안하게 흔들어놓았다. 그사이에 커피잔이 속속 들어 왔다.
호명이 끝나자 교장은 다갈색의 육중한 책상 위에 양손을 짚고 서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웃음기가 싹 가신 근엄한 표정이었다.
“자, 커피를 들면서 들으시오. 워낙 촌각*을 다투는 사안이라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말씀드리죠. 방금 전에 상부에서 급한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허두*를 떼고는 잠시 뜸을 들일 요량인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모두들 숨죽여 교장의 입을 주시 했다. 이렇게 극적으로 분위기를 유도해낸 그는 ‘10월유신’ 흉장이 붙은 가슴팍을 심호흡으로 부풀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결연한 눈빛이었다. 그는 허공의 일점을 응시한 채 능숙한 달변*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민족의 진운을 결정할 개헌 투표일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새삼스럽게 얘기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들은 지난 한 달간 누차*에 걸친 교육연수를 통하여, 민족의 안정과 번영을 꾀하기 위해서는 일대 유신적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유권자가 다 우리 교육자들과 같지는 않아요. 투표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기권자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민주시민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번 투표만은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일이므로 빠짐없이 참가하여 우리 국민의 민주역량을 국내는 물론 국외에도 널리 과시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달 대구 교육자대회에서 유신과업에 선도적 역할을 할 것을 다짐 했거니와 우리 교육자는 학생들은 물론 그 학부모까지도 선도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국민학교에서는 벌써 전부터 ‘부모님께 편지 쓰기’ ‘학부모회의’ 같은 방법을 통해서 꾸준히 유신 홍보와 기권 방지 캠페인을 벌여왔습니다만, 우리 중등학교는 활동이 다소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교장은 문득 말을 멈추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는데, 그의 좁은 양미간*에 곤혹스런 빛이 스쳐갔다. 그러면 우리도 ‘부모님께 편지 쓰기’ 하자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닐 것이다. 국민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수업 중에 쓴 편지를 교사가 수합하여* 우표를 붙이고 각 가정에 발송하는 방법을 썼다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의 여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아이들이 제가 쓴 편지를 제가 들고 가 부모에게 읽으라고 내미는 것도 우습고…… 곧 교장의 입에서 예의* 너털웃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허허, 죄송하게 됐소. 다름 아니라 가정방문해서 기권 방지 캠페인을 벌이라는 명령이오. 관상대* 예보에 내일 갑자기 한파*가 닥쳐 기온이 영하로 급강하한다는 겝니다. 그러니 당국에서 영하추위 때문에 혹시 투표율이 저조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허허허.”
명령. 나는 머리칼이 곤두서게 오싹 한기를 느꼈다. 교장의 배후, 벽면 상단부에 걸린 대통령의 초상이 근엄한 표정으로 회의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령은 거기서 왔다. 계엄령…… 방 안에 가득 차 흐르던 진한 커피냄새가 갑자기 유독성 기체로 변해버린 듯 숨이 꽉 막혔다. 이럴 수가 있나…… 교사들은 이 이상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하여 고개를 하나둘 떨구기 시작했다.
“자, 이것으로 내 얘기는 끝이니, 다음은 교감선생이 하시오.”
교감이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목소리만 터무니없이 컸지 사뭇 더듬는 말씨였다.
“원, 관상대 것들을 욕할 수도 없고…… 관상대에서 추워진다는 예보만 없어도 그냥 넘어가는 건데…… 하여간, 지금 시간이 3시 15분, 7교시 이후의 수업은 생략하고 곧 종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가정방문은, 에…… 일몰 전에는 끝마쳐야 하니까 앞으로 두 시간밖에 여유가 없습니다…… 두 시간 내에 집집마다 돌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니까, 반으로 줄여서, 에,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운 집으로 삼십 군데만 선정하여 방문해주십시오. 에, 학생 비상연락망, 지난 여름방학에 비상연락망을 통해 불시*에 학생들을 동원한 적도 있고 하니, 이번 일에 매우 유효적절히 사용되어질 것 같습니다. 비상연락망에 따라 릴레이식으로…… 에, 가정방문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게 되었습니다. 좀 뭣하지만, 에, 삼십 명의 학부모로부터 도장을 받아 오게 되었어요. 삼십 명의 숫자는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에, 늦어도 6시까지…… 학교에 도착하여 그 도장 받은 용지를 제출해주셔야만 하겠습니다.”
정말 해도 너무하는구나, 가정방문에다 도장까지 받아오라니! 아주 우리를 홀딱 벗겨 거리로 내모는군! 도대체 이럴 수가·…… 다른 동료들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뒤에서 누군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장을 받아오라니, 원! 우리를 의심해도 유분수지 안 그래도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미쳤군, 그것도 불평이라고 하나? 어련히 알아서 하겠다고? 나는 화를 참느라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뭐, 의심해서라기보다…… 일의 성질상……” 하고 교감선생이 난감한 듯 더듬거리자, 교장선생이 얼른 뒷말을 낚아챘다.
“완벽을 기하느라고 그리 지시한 모양이니 양해합시다. 우리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
“뭐 다른 질문이 없으면…….” 하고 교감선생이 어서 회의를 끝내고 싶다는 듯이 초조하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안 돼. 이대로 넘어갈 순 없어. 앞줄에 앉은 권이 긴장된 눈빛으로 나를 힐끗 돌아다봤다. 권의 양 어깨는 시위 당긴 활대처럼 팽팽히 안으로 굽어져 있었다. 그래, 네가 한마디 해! 이대로 넘어갈 순 없잖아! 이걸 수락하면 우린 정말 끝장이야. 우리에게 한 가닥 남은 자존심이 영영 뭉개지고 마는 거야. 전국의 모든 공직자·교사·학생에게 ‘10월유신’ 흉장을 달게 한 지난 한 달 동안 교장을 비롯한 나이든 교사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끝내 그 흉장을 달지 않고 버텨왔잖아. 귓구멍에 못이 박히라고 시종 반복적으로 ‘유신과업과 민족중흥’을 외쳐대는 교육연수장에서도 우리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면서, 몰래 책을 숨겨 가 읽기도 하면서 버텨왔어. 연수교육 받은 내용을 전달강습 형태로 학생들에게 홍보하되, 후일 상부 검열에 대비해서 그 증거가 주번아이들 손으로 학급일지에 기록되어 있도록 하라는 지시에도, 우리는 차마 그 불결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어서 주번 아이의 서툰 글씨를 흉내 내어 학급일지에 몇 자 끄적거려 넣는 것으로 슬쩍 넘어가곤 했잖아. 그런데 이번엔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구나.
“자,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끝내고……”
교감선생이 진땀이 흐르는 이마를 문지르며 요령부득*이 끝내려고 하자 교장선생이 또 일어났다:
“때가 때이니만치 적당히 넘어갈 생각들일랑 아예 버리시오. 삼십 명의 도장을 받는 것은 천하없어도* 지켜야 합니다. 위에서 일일이 체크할 게 분명해요. 얼마 안 되지만 지금 곧 출장비를 지급할 테니 택시비에 사용하여 최대한 기동력을 살려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일 투표에는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해요. 교육공무원도 공무원이오. 이런 때일수록 각별히 처신에 조심해야 해요. 투표에 기권한 자는 반드시 체크될 거요.”
‘체크’가 얼핏 ‘체포’로 들렸다.
이때 바보집 단골 중에 제일 막내인 김이 어설픈 동작으로 일어났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가정방문 나갔다가 혹시 학부모 중에 야당 당원이 있어서 고발당하면 어쩌지요? 작년 대통령 선거 때도 어느 국민학교 선생이 가정방문해서 여당 운동한다고 야당 당원이 고발한 기사가 났던 데요?”
김이 이렇게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어리숙한 말투로 능청을 떨자 몇 사람이 쿡쿡 숨죽여 웃었다. 이번엔 교무주임 이 대뜸 눈을 부라리며 나섰다.
“이봐, 김 선생! 이 바쁜 시간에 거 무슨 실없는 농담인가? 학부모에게 꼭 찬성투표 던지라고 말하는 게 아니잖아. 기권하지 말자는 것이지.”
원숭이나 잔나비나 그게 그거지 다를 게 뭐람. 유신에 대한 찬반논의를 일체 엄금한다 하여 반대의견은 계엄령으로 철저히 묶어놓고는 오직 찬성소리만 주야로 고성방가*해온 판에 말이 좋아 기권 방지 캠페인이지, 그것이 곧 찬성투표 권유를 뜻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교무주임이 신경질적으로 뒷말을 이었다.
“뭐, 야당이 고발한다고? 김 선생, 이 사람아. 국회가 해산된 마당에 야당이고 나발이고 어디 있어? 설령 야당이 있어도, 유신과업에 관한 한 여야가 따로 없는 거여. 그게 국민총화지.”
그다음에 일어선 것은 권이었다. 나직하나 가시 돋친 말씨였다.
“교장선생님, 가정방문 말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가정방문은 다 알다시피, 교사가 학생 집 돌며 촌지*를 거둬들이는 수금행위나 다름없다고 모욕적으로 금지당한 지 2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정말 구더기가 무서우니 장 담그지 말라는 격으로 본말이 전도된* 조치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가정방문이 부활된다면 몰라도, 2년간이나 지켜온 이 금기가 일시적인 교육 외적 목적을 위해 깨뜨려져도 되는 건지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교장이 벼락같이 소리 질렀다. :
“아니, 일시적인 교육 외적 목적이라니! 민족중흥의 대과업인 유신을 일시적 인 것이라고?”
분명히 내 귀에도 ‘일시적인 교육 외적 목적’이라고 들렸으니, 권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권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제가 ‘일시적’이라고 한 것은 오랫동안 금지되어온 가정방문이 오늘 하루 예외로 실시되길래 일시적인 가정방문이라는 뜻에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권의 발언에 힘 입어 이번엔 내가 일어났다. 내친김*에 문제의 정곡*을 찔러버리려고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가 격정에 실려 사뭇 떨려 나왔다.
“왜 교장선생님이 화내세요? 정작 억울한 것은 가정방문 가야 할 우리들인데, 짧은 시간에 도장을 구걸하러 허겁지겁 뛰어다니는 꼴을 보면 우리 아이들, 우리 학부모들이 얼마나 비웃겠어요? 우리를 앞잡이라고 손가락질할 거예요. 대관절* 교사에게 이보다 더 큰 모욕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이후로 무슨 낯으로 아이들 앞에 섭니까? 가정방문에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대세가 거절할 수 없이 강압적인데 어떻게 감히 반대합니까? 너무 괴로워서 이렇게 한 번 우는소리를 내보는 거예요. 괴로운 사람이 ‘아야’ 소리도 못 냅니까? 왜 저 사
람들은 애매한 우리 교원들까지 공범자로 만드는 겁니까? 정말 이럴 수가 없어요. 이건 교육 본래의 목적을 위한 가정방문이 아니에요.”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교무수첩 뒤페이지를 펼쳤다.
“지금 여러분께서 들고 계신 교무수첩 98페이지에 교육법 제5조가 나와 있습니다. 읽겠습니다.
제5조 1.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기하여* 운영 실시되어야 하며 어떠한 정치적·파당적 기타 개인적 편견의 선전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장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펼쳐진 교무수첩 위에 돌같이 굳은 눈물방울이 하나 뚝 떨어졌다. 좌중은 숨을 죽이고 방 안 공기는 일촉즉발*의 위기로 팽팽히 긴장되었다. 당장 벼락같이 내리꽂힐 교장의 성난 호통을 견뎌내려고 나는 숙인 뒷목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나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나서 막상 귀에 들려온 것은 성난 호통이 아니라 기진한 듯 탁 쉰 목소리였다.
“왜 ―그런 말 하는가? 하나마나 한 말을…… 그 말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하고 그만 회의를 끝냅시다.”
동료들은 교장실을 나온 즉시 출장비를 타러 서무실로 몰려갔다. 뒤에 처진 나는 일순* 망설이다가 홱 몸을 돌려 담임반 교실을 향해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발짝 못 가서 돌연 가슴이 철렁하고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눈앞에는 아이들이 복도까지 넘쳐 나와 마루를 구르며 철없이 뛰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할 말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아이들 앞에 섰다간 무슨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지 모롤 일이었다. 잠시 생각할 여유를 가져보려고 바로 옆에 있는 숙직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방 문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제 나는 내가 내뱉은 말에 스스로 자승자박*이 되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불안감이 더욱 고조되어 가슴이 오그라 붙는 듯했다. 어떻게 할까? 그래도 말값은 해야지. 여러 사람 앞에서 제법 비장한 체 큰소릴 쳐놓고 비굴하게 가정방문을 갈 수는 없잖아. 그러나 그런 금기의 말을 터뜨린 것만도 시빗거리*가 될 텐데 가정방문까지 안 갔다간 완전히 궁지에 빠질는지도 몰라. 문득 아내의 젖가슴에 매달린 아기의 붉고 동그란 얼굴이 떠올랐다. 이때 서무실을 나온 교사들이 지나가는지 복도에 슬리퍼 끄는 소리가 어지럽게 일어났다간 사라졌다.
이제 나는 동료 무리에서 완전히 외톨이로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전신에 오한*이 일어 부들부들 떨렸다. 격정이 물러간 몸뚱이는 황량한 폐허로 변해버린 듯했다. ‘공범자’ ‘앞잠이’. ……방금 뱉어낸 이 자극적인 말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무섭게 자신을 공격했다. 교장은 그 말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했지만, 이미 발설한 말은 취소될 수 없는 것이다. 대등한 입장에서 행해지는 독설*일지라도 상대방에게 타격을 못 주면 자신이 도리어 피해를 입는 법인데, 나의 경우는 애당초 승산 없는 자해행위일 뿐이었다. 나 자신 외에 도대체 누가 상처를 입겠는가. 완강한 권력구조의 하위 보스 격인 교장이 그 정도 가지고 양심에 가책을 받을 리 없다. 다만 비위만 상하게 했을 뿐이지.
얼마 전에 교장이 한턱낸다고 오십 명이 넘는 교직원을 이틀에 나누어 자택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학교 살림살이와 관계된 여러 자질구레한 이권*에 간여하고 있는 교장인지라 한 번쯤은 무마 조로 회식을 베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특히 젊은 축들 중에 불참자가 생길까봐 신경을 썼는데, 아마도 매일 직원조회에서 성능 좋은 정부 홍보용 스피커 역할을 해내는 자기를 뒷전에서 손가락질하는 젊은 축들을 불러 한잔 먹이고 웃어버리자는 속셈도 있었던 듯했다. 바쁜 일로 첫날 회식에 참석 못 한 사람은 다음날 손님이 되어달라고, 교장이 몸소 직원회 석상에서 일어나 당부했다. 누가 보아도 빠져서는 안 될 모임이었다. 나는 첫날 손님 중에 끼여 있었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빠져서는 안 될 회식에 불참함으로써 평소 교장에 대한 나의 어물쩡한 태도에 결론이 난 셈이었다. 나는 당신이 싫소. 이튿날 교장이 못내 섭섭하다는 투로 다가왔을 때, 나는 집이 멀어 참석 못 했노라고 전혀 변명이 될 수 없는 변명으로 응수했다. 그만하면 내 속마음을 눈치 챘을 텐데, 교장은 오히려 더 집요한 눈빛으로, 그러면 오늘 초대손님 중에 끼여 참석해달라고 요구하여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서 내가 교장을 싫어한다는 것이 피차가 인정하는 명백한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관계가 불편해진 터에 섣부른 소리로 오금을 박아버렸으니* 저 양반이 속으로 얼마나 분개할까? 동료교사들마저 내 말에 동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일은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이 기계적으로 처리해버려야 속 편한데 내가 그들에게 심적 부담만 안겨준 것이 아닐까? 나눈 앞으로 내 말에 책임져야 할지 모른다. 교장은 그 말은 아예 없던 것으로 하자고 했지만, 세상은 바야흐로 계엄령이 발효 중, 사석에서 혹은 취중에 이런 금기의 말을 내뱉었다가 포고령*에 걸려든 사례가 어디 한둘인가. 불신과 음해*가 활개치는* 세상에 학교라고 무사할 리가 없다. 수업 중에 한 발언 때문에 고발당한 교사들도 있다는 소문인데…… 아무래도 시늉일망정 가정방문을 가는 체해야겠다. 만약 가정방문까지 안 가면 동료교사들마저 등 돌릴 공산이 크다. 내가 ‘공범자’ ‘앞잡이’라는 금기의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비난할지 모른다. “그래, 너 잘났다. 우리 교무실에서 너 혼자만 결백하고 우린 모두 더러운 공범자다.”
나는 교무실에 들러 비상연락망을 챙기고 교실로 향하다가 맞은편에서 급히 걸어오는 권과 마주쳤다. “어디 있었어? 널 찾아댕기는 중인데…….” 하다가 내 손에 비상연락망이 들려 있는 걸 보고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우리가 그런 말 해놓고 가정방문까지 안 가면 분명히 탈 잡혀. 참말이지 분통 터질 일이지만 할 수 있냐. 참아야지. 자, 출장비 받어. 내가 대신 타 왔어.”
나는 권이 내미는 출장비 봉투를 묵묵히 받아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정말 더러워서 선생질 못 해먹겠어. 술로라도 울분을 꺼야지. 이따 끝나고 바보집 에서 만나.”
하고는 권은 총총히 자기 반 교실로 사라졌다.
학급에 들어서자 온통 뒤섞여 북새질 놓던 아이들이 “와― 종례다” 하고 소리치며 방게* 떼 제 구멍 찾듯 후닥닥 자리를 찾아 앉았다. 뿌연 먼지가 돌수박같이 동글동글한 민머리들 위로 떠올라 있었다.
나는 말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난감하여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렇게 진장 좋아할 거 없어. 종례가 끝나면 곧 느네들 집을 가정방문하게 되어 있단 말이야.”
내 말에 아이들이 금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왜요?”
하고 문가에 앉은 한 아이가 못마땅하다는 듯 콧등을 찌푸리며 물었다. 녀석은 늘 하던 버릇대로 종례가 끝나는 즉시 일착으로 밖에 튀어 나갈 양으로 가방 끈을 그러쥔* 채 엉거주춤 앉아 있었는데, 그 꼴을 보자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는 왜야? 넌 가정방문 간다니까 꽤나 싫은 모양이야. 너, 요 전 날 대학 구내에 들어가서 은행나무 열매 따다가 큰 가지를 분질러먹고 수위아저씨한테 붙잡혀온 일이 있지? 오눌 가정방문 가서 부모님한테 죄다 일러바쳐야지. 너 오늘 큰일 났다.”
아이들이 와― 하고 웃었다. 우리 아이들이 대학 구내에 들어가 장난질치는 통에 대학 수위들이 적잖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쉼터인 청량대 동산에 올라가 휘젓고 다니면서 나무에 기어오르지를 않나 심지어 떼거리로 강의실 복도까지 진출하여 기웃거리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니 대학 수위들이 수도꼭지가 없어져도 우리 아이들 소행이라고 우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이는 퉁* 먹고 약간 머쓱한 표정이더니 이내 되받고 나왔다.
“우리 집엔 가정방문 와봤자예요. 모두 일 나가고 할머니밖에 안 계신데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잇달아 손을 쳐들며 “저두 그래요” “저두요” 하고 소리쳐댔다. 삼 분의 일가량이 손을 들고 있었다. 뜻밖에 동조자들이 많이 생기자 아이는 거 보라는 듯이 어깨가 으쓱 올라가고 다른 아이들도 장난기가 가득한 눈으로 싱글벙글 내 반응을 살피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해서 조바심이 났다. 어서 가정방문의 목적을 밝히고 비상연락망을 점검해야 할 텐데…… 그러나 마음만 조급할 뿐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손든 아이들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우연히 쉬는 시간에 화단 앞을 지나다가 유리창 너머로 교실 안을 기웃거리는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이가 바로 저 아이의 엄마였다. 요구르트 배달원 제복에 옆에는 작은 바퀴가 달린 밀차*가 놓여 있었다. 밀린 수업료를 내러 온 김에 아이만 잠깐 만나고 가려던 참인데 뜻밖에 담임선생과 마주쳤으니 오죽 쑥스러웠을까? 그이는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낯을 붉혔다. 난감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잖아도 선생님을 만나뵙고 가려고 했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지만 그런 옷차림으로 교무실에 들어설 용기는 애당초 그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교무실이란, 화사한 입성*에 화장 냄새를 물씬 풍기는 어머니들만 주눅 들지 않고 들어설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애보다 더 어려운 영세민 아이들이 내 반에는 열댓 명가량 되었다. 그들은 대개 편모* 혹은 편부* 슬하에 있었다. 그중에는 새벽에 신문 배달하며 고학하는* 애들이 네 명이나 되는데, 내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아량이라곤, 가끔 생기는 지각에 눈감아주는 것과 참고서 한두 권씩 얻어준 것뿐이었다. 어쨌거나 가난한 아이들일수록 부모가 모두 일 나가고 집을 비우게 마련인데 설사 누가 집에 있더라도 교육적 의도라곤 전혀 없고 가난에 찌든 살림살이만 들키고 마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가정방문을 달가워할 리가 있겠는가. 모처럼 찾아온 담임선생이란 자가 방 안에는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서 도장만 냉큼 받아갖고 휭하니 날파람* 일으키며 달아나버린다면 가난뱅이 어머니들은 얼마나 상심할까? 한 가닥 남은 자존심인 가난마저 도둑맞은 심정일 것이다. 재개발구역에 산다는 약점 때문에 투표 때마다 울며 겨자 먹기보 여당 표밭이 돼주어야 하는 그들로서 아이 담임까지 쳐들어간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학대행위가 아닌가.
그러나 곤혹스럽기는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기 좀 넉넉한 어머니들 중에는 도장을 구걸하러 간 나에게 덤으로 촌지봉투까지 내미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도 털끝만 한 자존심은 남았다고 그때마다 한사코 촌지봉투를 뿌리치느라 진땀을 뺄 테니 그런 가관*이 또 있을까? 빌어먹을! 가정방문 가기로 한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난감한 내 심중*을 환히 들여다보면서 은근히 충동질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자포자기* 기분이 되었다.
“하긴 그래, 부모님도 안 계신데 가정방문 갈 수야 없지. 그럼 부모님 두 분 다 일 나가고 집에 안 계신 사람 다시 한 번 손들어봐요.”
반수가 훨씬 넘는 아이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손을 들었다. 이번엔 거짓으로 손든 애들도 꽤 있는 듯했다. 공부가 시원찮은 녀석들로, 영 자신이 없는지 내 시선을 피해 딴전* 부리고 있었다. 나는 짐짓 놀란 척 눈을 크게 떠 보였다.
“뭐 이렇게 많아? 이놈들 순 엉터리야. 담임선생이 모처럼 가정방문 간다는데 오지 말라니, 허허. 맨날 공부 안 하고 장난만 친다고 내가 이를까봐서 그렇지?”
이때 손든 아이들 중에 끼여 있던 한 놈이 조짝* 일어났다.
“에이, 거짓말 마세요, 우리 공부 땜에 가정방문 나오시는 게 아니잖아요. 내일 투표 때문이지, 뭐. 우리 집엔 어제 내 동생 담임선생님이 다녀갔는걸요.”
이번에도 아까처럼 여기저기서 “저두 그래요” “도장도 받아 갔어요” “저두요” 하는 소리가 잇달아 터졌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신바람 난다는 듯이 책상까지 두들기며 깔깔댔다. 창으로 비껴 든 늦가을의 노란 햇살 속에 먼지구름이 다시 뿌옇게 일어났다. 깜찍한 놈들, 가정방문 목적을 벌써 알고 있었구나. 하긴 이런 일에 국민학교가 빠질 리가 있나. 어제 국민학교에서 휩쓸고 간 지역에 오늘은 중학교 교사들을 투입하여 확인 사살하라는 명령이군. 아무튼 차마 입에 담기 싫은 가정방문의 목적이 아이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이상, 이제 얘기를 마무리 지어야 할 차례였다. 그래, 티 없이 맑은 웃음으로 이 추잡한 가정 방문을 조롱해버 리는 아이들의 지혜를 배우자.
“그러니까 그런 일로 두 번씩 이나 가정방문 받기는 싫다 이거지?”
아이들이 “예!” 하고 합창했다.
“하긴 그럴 거야. 부모님이 알아서 할 일에 아이 담임선생이 둘씩이나 들이닥쳐서 밤 내놔라, 대추 내놔라 하면 오죽 불쾌하시겠니? 하여간 내가 가정방문 가긴 가는데 시간도 없고 해서 여러 집 못 다닐 거야. 그런 줄 알고……사실 부모님 만나봤자 입에서 나올 말이야 뻔하지. 저기 뒤편 게시판에 붙은 표어나 잘 외워갖고 갈까 해. ‘투표방법 바로 알고 투표일에 바로 찍자.”
내가 아이 목소리를 흉내 내어 천연덕스럽게 표어를 외자 아이들이 또 한 번 폭소를 터뜨렸다. 상부에서는 대여섯 종류의 유신 포어를 보내 교실에 게시하라는 엄명이었지만, 나는 차마 내 반 교실을 유신으로 도배할 수 없어서 나머지는 버리고 그 표어 하나만 달랑 붙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투표방법이야 쉽지. 찬성이면 찬성, 반대면 반대, 반대라도 눈치 볼 것 없이 당당히 찍는 거야. 내가 못 가도 부모님께 그렇게 말씀드려요. 그럼, 우선 학교에서 가까운 집부터 술슬 돌아보겠는데…….”
나는 비상연락망 1조에 속하는 아이들로 10명을 호명하고는 짐짓 목소리를 무겁게 낮추었다.
“지금 호명한 학생들은 가지 말고 남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말하겠는데 내일이 개헌투표일이니까 투표 홍보도 오늘로 끝이다. 그러니 이제 집에 돌아가면 그 때 묻은 유신 흉장은 떼어버리도록! 이상.”
아이들은 반장의 구령에 맞춰 인사하기가 바쁘게 소리를 지르며 교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남아 있는 열 명의 아이들은 재수 없이 걸려들었다는 듯이 시큰둥한 표정이었는데, 가정방문 가면 아무래도 부모님이 번거로워하실 테니 각자 도장 갖고 삼십 분 후 신설동 동보극장 앞으로 모이라고 하자 금세 낯색이 밝아졌다. 가정방문 가지 않고 도장을 받아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교무실에 올라가니 다른 교사들은 벌써 출발했는지 교감 혼자 남아 서성거리고 있었다. 교감은 어설픈 미소를 띠고 미적미적 다가오는 눈치더니 내가 양면 괘지*에다 학생 명렬표를 붙이고 줄을 그어 날인란을 만드는 걸 보고 안심한 듯 물러갔다.
“그럼 수고하고 오시오.”
교감이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나는 몰래 열 손가락에다 인주를 묻히고 날인란에다 피아노 건반 누르듯 지장을 찍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레. 가정방문을 조작하는 손가락들이 짜릿한 쾌감으로 바르르 떨었다.
삼십 분 후 신설동 로터리에 나가 거기에 모여 있는 아이들로부터 도장 열 개를 받아 찍으니 보고서에는 어느새 스무 집을 방문한 것으로 되었다. 서른 집을 채우라는 지시였지만 엉터리 가정방문은 그걸로 끝내고 한 집 일망정 제대로 가정방문해볼 작정이었다.
도장을 받는 즉시 미리 점찍어둔 한 아이만 남기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이의 어머니는 마침 일에서 돌아와 계시다는 것이었다. 한길을 가로질러 결린 대형현수막들이 눈을 부릅뜨고 대갈일성* 호령하고 있었다. ‘한국적 민주주의 뿌리박자’ ‘국민투표 참가하여 새 역사 창조하자’
나는 아이와 함께 길을 건너 얘기에 열중한 채 얼마쯤 걸어가다가 무심히 왼편으로 꺾어 돌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앞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청계천 둑방의 판자촌이 거기에 있었다. 물론 매일 버스 타고 그 골목 앞을 지나다녔으니까 그 안에 판자촌이 감춰져 있으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번번이 차 속력에 실려 후딱 지나쳤을 뿐 골목 안 풍경을 대하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기동차* 레일이 완만하게 휘어져 돌아가는 연도에 루핑*과 판자때기를 얼기설기 붙여놓은 닭장 같은 집들이 서로 맞붙고 포개진 채 두 줄로 늘어섰는데 닭 내장같이 불그죽죽한 급수용 플라스틱 호스들이 길바닥에 삘삘 기어 다니고 레일 가 철조망에 잔뜩 붙어 있는 헌 빨래들이 을씨년스러웠다. 거기에도 유신 홍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벌써부터 빈민굴 특유의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냄새였다. 그 판잣집들은 둑방 따라 전농동 근처까지 이어지는데 거기 어딘가에 내가 한때 하숙하던 판잣집이 있을 터였다. 입주 가정교사란 부잣집 머슴질이나 한가지*여서 비위 틀리면 뛰쳐나와 그 집에 머물면서 시간제를 나가곤 했는데 공장에 다니는 고향 아이들 예닐곱과 함께 기거했으니 하숙이 아니라 합숙인 셈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 나는 그 지겹던 부잣집 고용살이는 물론 그 가축우리 같던 하숙집 경험도 기억에 떠올리기를 싫어했다. 오죽 고용살이가 지겨웠으면 박봉의 접장질에 수월찮게 부수입이 되는 과외를 외면했을까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싫은 것은 어릴 적부터 줄곧 겪어온 극단적인 빈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판잣집 생활을 내 기억에서 쫓아내다시피 했는데, 어쩌다 방심해서 고향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그 집 생각이 떠오르면 그 때에 절은 가난이 풍기는 악취가 먼저 연상되어 금방 욕지기*가 치밀곤 했다.
나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던 악취 나는 내 과거와 만나고 있는 셈이었다. 불현듯 발길을 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가 무슨 페스탈로치*라고 이런 데까지 와야 하나. 그러나 내 딴에는 제법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고 나선 가정방문이 아닌가. 만약 여기에서 돌아서버린다면 오늘의 나의 분노와 고민은 한갓 공허한 지적 허영과 일시적 감상에 그치고 말 것이다. 아이는 한 발짝 앞서 풀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 이젠 나도 나이를 먹었으니, 위선의 가면을 벗고 좀 정직해야 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가난을 경멸한다는 것은 이 아이를 경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나를 지금까지 키워온 가난한 나의 모태(母胎)*에 대한 경멸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아이를 따라 어느 판잣집 앞에 멈췄다. 길바닥에 비스듬히 잇대어 있는 흙 묻은 나무계단을 몇 발짝 올라간 곳에 한 평 반짜리 전세 다락방이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뜻밖의 방문에 놀라 물 묻은 손을 몸뻬*에 문지르며 안절부절이었다. 앉을 자리를 내주려고 도라지나물이 수북한 양은다라이*를 급히 옆으로 밀치는 바람에 그 안에 담긴 물이 철렁 하고 넘쳐흘렀다. 아마 시장에 내다 괄려고 도라지를 물에 불려 손으로 찢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이는 내가 투표 때문에 온 줄만 알고 인사 삼아 하는 첫말이, 그렇잖아도 아까 취로사업장에서 연설을 들었노라고, 내일 아침 일찌거니 노점 나가기 전에 투표장부터 들를 테니 염려 말라고 하여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이는 몹시 두통이 심한 듯 핼쓱한 이마에 베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아이가 양은다라이 곁으로 다가가 어머니 대신 도라지나물을 찢었다. 누덕누덕 검정 헝겊으로 땜질한 다다미* 두 장, 나무상자때기 위에 얹혀 있는 이불채, 벽의 나일론 횃대*줄에 걸린 헌옷가지들…… 투표철 취로사업*은 노임*이 후하다고 하기에 노점 일도 쉬고 따라 갔다가 지병인 편두통*만 덧나고 말아 일찍 돌아오고 말았단다. “우리 사는 꼴이 이래예. 명줄*이 붙었으니 살지…….” 경동시장 앞길에서 단속원에게 다라이를 걷어채이며 채소를 판다고 했다. 큰길 동편 판자츤에 살다가 정초*에 있었던 대화재 때 얼마 안 되는 세간 마저 날리고 이쪽으로 건너온 이야기·…… 도시 미관을 해친다고 눈에 가시 같던 판자촌이 줄불 만나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었으니, 아마 그 사람들 속으로 여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거비용 안 들어 좋고 철거민의 소란을 당하지 않아도 좋고…… 이 판자촌도 내일 투표가 끝나면 언제 철거하라는 통고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때 저 아이는 어떻게 될까? 아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도라지를 쭉쭉 길게 찢어 채반*에 얹고 있었다. 몸피에 비해 품이 너무 커 어깨 밑으로 후줄근하게 늘어진 교복…… 한창 자랄 나이라 중3 때까지 입으라고 저렇게 큰 옷을 사 입혔을 테지만, 과연 성적도 중간 밖으로 처진 저 가난한 아이가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무사히 학교를 마칠 수 있을까? 언젠가 나와 면담하던 중, 새벽에 신문 돌리다가 배고픈 김에 어느 집 대문 안에 매달린 봉지우유를 홈쳐 먹은 적이 있다고 고백하던 착한 아이…… 내가 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도움말은 과연 무엇일까? “나도 이런 곳에 잠깐 몸담은 적이 있다만, 너야말로 열심히 노력해서 이곳을 빠져나와야 하지 않겠니?”라고 충고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될 일인가? 기회는 균등한데 성적불량은 전적으로 이 아이의 잘못일까? 기회는 균등한데 가난은 전적으로 이 어머니의 잘못일까?
그 다락방에서 벌 받는 아이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반시간 남짓 머물다가 나온 나는 자연스럽게 그동안의 애매한 내 태도에 결정을 내렸다. 그날의 체험은 주제넘게 표현해서 일종의 지적 시련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날 나는 집중적으로 격심한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내 문학적 소신에 변화가 생긴 것이 사실이다. 개헌 투표일이 노는 날이라고 여관방을 잡고 앉아 신춘문예용 단편을 끼적거릴 생각이나 하고 있던 자신이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내 글이란 게 기껏 구미의 부조리문학을 흉내 낸 잠꼬대 같은 내용이 아닌가. 대성통곡*을 터뜨려도 시원찮을 그 기막힌 날에 말이다. 가난의 재발견. 먼저, 내가 젖줄 대고 자란 척박한 섬땅, 침탈과 대학살과 가난으로 찌든 고향의 모태로 정신적 귀향을 감행해야 하리라. 바로 이 유신에 역설적인 교훈이 있었다. “세계인의 망상을 버리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하자”에 맞서, 적의 무기로 적을 치듯이 세계인의 망상을 버리고 국적 있는 문학을 해야 옳았다.
그날 저녁 나는 벌겋게 인주 묻은 종이때기를 학교에 제출하고 더러운 출장비를 처분하기 위해 권과 후배 둘과 어울려 바보집에 들렀다. 제일 나이 어린 후배 김이 느닷없이, 오늘은 기분도 그렇잖고 하니 안주로 ‘성계고기’를 씹자고 했다. 이 친구가 절간에서 새우젓 찾기로 난데없이 싸구려 술집에서 비싼 바다 성게를 찾나 했더니, 그의 설명 인즉, 성계고기란 ‘이성계 고기’로 옛 풍습에, 이성계의 쿠데타에 한 맺힌 백성들이 원혼의 상징인 최영 장군의 사당에 해마다 몰래 모여 칼 꽂은 통돼지를 앞에 놓고 굿판을 벌이고 그 고기를 씹어 울분을 달랬는데, 그 고기를 ‘성계고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침울해 있던 우리는 그 기발한 제의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번엔 권이 한술 더 떠서 이왕이면 돼지 말고 황소를 먹자고 했다. 저들의 마스코트 동물이 황소가 아니냐, 주인을 없수이 여기는 교활한 황소를 잡아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모를 시켜서 근처 정육점에서 쇠고기를 한 근 사다가 구워서 안주했는데 고기 씹는 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계속 낄낄거리며 술을 들이켜고 쇠고기를 씹었다.
쇠고집에다 낯가죽 두껍기가 쇠가죽 같은 양반들아, 그 두꺼운 낯가죽을 손가락으로 눌러보시오. 살집 뚫고 손부리에 흰 뼈다귀가 안 만져지나. 눈언저리도 만져보라구. 퀭한 해골눈 동공*이 푹 꺼져 있지 않나. 광대뼈도 만져보고 물렁코도 만져보고 야들야들한 귓바퀴*도 만져보라. 당신의 살은 당신의 뼈다귀에 잠시 괴어 있는 물과 같은 것, 당신을 지탱해야 하는 건 바로 그 뼈다귀, 바로 죽음이란 말이오. 그러니 쇠고집에 낯가죽 두껍기가 쇠가죽 같은 양반들아, 제발 천 년 살 것같이 허장성셀*랑 부리지 맙시다.
그 이튿날은 과연 기상대의 예고대로 영하의 추운 날씨로 돌변해 있었다. 정치의 긴 겨울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나는 교육공무원이 투표에 불참하면 추궁당한다는 엄포에 늘려 비실비실 투표장을 찾아갔다. 얼어붙은 땅, 투표장에 나온 사람들은 두툼한 외투나 잠바를 꺼내 입고도 갑자기 들이닥친 한파에 질린 듯 목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투표 종사원들의 감시하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포장을 들치고 들어간 나는 그 안에서 두 번 놀랐다. 처음엔 투표용지가 찬성에는 O표, 반대에는 ×표가 붙어 있어, 마치 ‘찬성은 옳고 반대는 안 된다’
하고 협박하는 것 같아 놀랐는데, 그래도 굳이 ×표에 기표하려고 붓뚜껑을 잡으니까 이번엔 누가 잡아채기라도 한 듯이 갑자기 손동작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정말 간담이 서늘했다.* 븟뚜껑 달린 끈이 찬성 란을 건너 반대란에 가 닿기에는 너무나 짧았던 것이다. 결국 투표용지를 오그려 붓뚜껑을 눌렀다.
유신의 겨울은 깊어지고 곧 방학이 왔다. 유신이념을 담기 위한 전면적인 교과서 개편작업이 이 방학 중에 이루어졌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새 교과서로 새 학기가 열리던 어느 날, 교무실 책상마다 문교부 장관의 서한이 배달되고 교감의 책상에는 리본에 장관 이름이 씌어진 진달래 화분이 놓였다. 유인물로 된 그 서한에는, 10월유신이 중차대한 민족적 과업이라 부득이 교육계의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양지하고* 앞으로는 반드시 교육의 중립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그 편지를 휴지통에 쑤셔 넣고 교감선생의 책상에 놓인 철 그른 진달래꽃을 쏘아보았다. 온실에서 조작된 그 꽃은 간교한 거짓으로 피어 있었을 뿐 봄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 화분도 우리의 눈총을 맞아 하루도 못 넘기고 교무실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나는 그해, 나의 오랜 벗 권과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개학 초 어느 날 오후 늦게, 퇴근할 생각도 않고 의자에 퍼질러 앉아 망연히 창 밖의 잿빛 풍경을 바라보며 오지 않은 봄빛을 찾던 권은, 마침 옆을 지나가던 교장의, 왜 그렇게 맥없이 앉아 있느냐는 질문에 “새 시대에 적응이 안 되어서 그래요” 하고 여전히 깐깐한 성깔을 보여주었는데, 얼마 후 교무실에서 귀에 이어폰 꽂고 AFKN방송을 청취하기 시작하더니 끝내 로스앤젤레스에서 음식점 한다는 형 한테로 이민 가버렸다.
바보집 술벗들은 권에게, 봄을 기다리지 뿍고 떠나버리는 ‘도피성’ 이민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전송도 나가지 않았다.
『슬픈 해후』 (창비 1985); 『아스팔트』 (창비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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