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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도리 그리고 법
나는 법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현재의 법이 어떻게 서있는지도 잘 모른다. 학력이 중학졸업이 다이고, 중학과정까지의 가장 기본적인 법만을 배웠기에, 나에게 전문적 법의문제는 제기하지 않으면 한다.
다만 사회생활에서 깨닫고 불이익에 대한 문제를 논하다 보니 나의 주관에서 도덕과 도리의 선을 보았기에 법의 문제를 제기한다.
내가 보는 법은 수학 공식과도 같다.
음과 양의 배분의 법칙에서 그의 중심을 잡아 주는 것이 법이라 보기 때문에 법이 답이다.
다만 수학의 답처럼 법이 정확하게 중심을 지켜주기는 어렵다. 딱 떨어지는 답도 있겠지만 나눌 수 없는 답도 있기에 어려움이 있다.
다만 나눌 수 없는 법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범위의 폭을 좁혀주어야 사회가 이루어지기에 선과 악 도덕과 도리가 법의 수학공식이다.
하지만, 법이란 삶의 충돌해결에서 최후의 공식의 답일 뿐 실질적 사회생활에는 법 같은 답은 필요 없다.
진정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은 정도다. 즉 도덕성과 도리가 필요한 것이다. 도덕성과 도리를 아는 이라면 법을 깨우친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도덕을 넘으면 이미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받기에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 무슨 법이 필요가 있겠는가.
해서 법을 전혀 알지 못해도 도덕과 도리를 이해한다면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들이 이들일 것이다.
도리는 도덕을 탄생시키고 도덕은 법을 탄생시킨다. 하여 우리 선조들은 아이가 탄생하면 도리도리를 먼저 가르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의 소설로 도덕과 법, 그리고 도리의 선을 가려 보자.
아비와 아들이 있었다.
아비는 도리를 잘 지키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매정한 하늘의 섭리에 내 삶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식물과 동물의 생을 취해 왔던가. 비록 어쩔 수 없는 먹이사슬의 삶이지만, 아비는 생을 위하여 자연의 많은 생을 빼앗은 삶에 가슴이 아파 자신이 어떻게 죽음을 맞아야 그들에게 지은 죄를 털어 버릴 수 있는가를 고민 하였다.
어느 날 동물의 양육강식을 보며 속죄하는 깨달음을 얻은 아비는 아들을 불러 앉혔다.
-아들아! 하늘이 주신 생명을 보존코자 나는 자연의 수많은 생을 빼앗았다.
-하지만 아버님! 우리의 생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닙니까?
-그야 물론 그렇지. 자연의 먹이사슬삶이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내 그들의 생을 빼앗았으니 그 또한 그들에게는 내가 악이 되지 않았느냐!
-그렇군요. 동식물 또한 하늘이 내린 소중한 생이 있을 진데. 그 삶을 빼앗았으니 그들에게는 강자의 생은 악이라 보여 집니다.
-하여 나는, 그들에게 악이 되었으니 나는 그들에게 지은 죄를 털고 가고 싶구나. 그러니 네가 내 소원을 들어주어라.
-아버님!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내가 죽으면 육신을 자연 속에 던져주어 동식물이 내 육신을 취할 수 있도록 하게 하라. 그리하면 내 육신을 동식물이 먹을 수 있으니 그들에게 지은 내 죄를 털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비는 삶을 지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자연에 삶을 해 한 것에 대한 죄를 털어 버리는 것은 내 육신이 동식물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윤회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아비는 평소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살았고 내 능력이상의 욕심을 버린 관계로 이웃과의 적이 없었다.
이에 아비는 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고, 아들은 아비를 존경하며 모든 말씀을 귀담아 들었기에 그렇게 하노라 아비와 약속을 하였다.
아들은 아비가 죽자 아비의 소원대로 아비의 시신을 산속에 바르게 누이고 제를 올려 영혼의 영면을 빌었다.
아비의 제를 올리고 우리의 관습상 맞지 않은 장례식에 우려로 아비의 소원대로 이러한 장례식을 지냈노라 경찰서에 신고를 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노발대발하며 아비의 시신을 땅속에 묻고 오라 명을 내렸다.
여러분들은 아들이 법의 선을 넘었다 보시는지요?
아니면 법의 선을 지켰다 보시는 지요?
?
물의 뼈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자리가 다 차면 주저 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시/ 홍해리
진정 우주섭리의 윤회를 보면 도덕적으로나 도리로 아비와 아들의 선택은 죄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순리를 떠나서 인간 세상에 도덕과 법, 윤리의 선을 보면 자식은 분명 이승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아비와 자식은 자연의 섭리에 도리의 순리는 깨달았지만, 또 다른 피해가 오는 인간의 도덕성과 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등산객이나 지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이승의 윤리에 죄를 범한 것입니다.
산 짐승들이 시신을 취하고 남은 육신이 지나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 때문에 이런 모습에 반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깨달음은 저승에 윤리도 중요하지만, 이승의 윤리도 중요하기에 이승의 피해에 따라 도리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동식물에게는 생명을 해한 것에 죄를 털고 갈 수는 있지만, 함께 사는 사람들의 배려가 없기에 피해를 주는 것이니 법에 제제를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상세히 설명한 경찰은 땅속에 시신을 묻고 오면 죄를 문책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자식은 아비의 유언을 어기어 불효의 죄를 짓게 되는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관습에 따라야하는 제자리걸음의 장례식이 되어버린 아들은, 이렇게 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하지도 못하여 한숨만 쉬었다.
아비의 유언을 지키자니 법을 어기고, 법을 지키자니 아비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는 불효를 범하니 자식으로서는 청천 벽력같은 진퇴양난이었다.
허나 자식의 생각으로도 법의 제제가 합당하니 안 지킬 수 도 없는 일이기에 할 수 없이 아비의 시신을 산속에 묻고 돌아왔다.
아들은 아비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고 약속을 못 지킨 불효에 상처를 입고 하루하루를 괴로워하며 끝내 병을 얻어 누웠다.
병저 누운 자식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이웃들은 수소문 끝에, 召君山에 거주하며 미래를 밝혀주는 홍매화도인이 있음을 알아내었다.
아들은 이웃의 일러줌에 병상중임에도 한달음에 홍매화도인에게 달려가 자신의 난처한 상황을 자치지종 전하였다. 이에 홍매화도인이 고인의 깨달음에 명확한 해학을 주었다.
-이보시게 자네는 불효를 저지른 것이 아니네. 아비가 깨닫지 못한 죄의 부분을 자식이 대신 깨달았기에 아비의 마음과 자네의 마음이 함께 가는 거라네.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도인님! 인간의 피해를 줄이고자한 도리가 그들의 원한이 된 죄까지 털어버릴 수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 고인의 깨달음이 이승의 윤리의 덫으로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말일세.
-그러면 어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사실 고인을 땅속에 묻는 것도 자연의 이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 아니네. 비록 고인의 육신을 땅속에 묻었지만, 육신은 땅속에서 연명하는 생물의 밑거름이 되지 않는가. 그 생물들을 동물들이 취하니 이것이 윤회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생의 죄 몫은 그리 염려할 것은 없네.
-하지만 도인님! 인간은 묘 자리를 만들고 비석을 세워 식물을 제거하고 있으니 오히려 인간의 죽음마저 자연생태계에 위협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관습이 죄악 아니겠습니까?
-맞네. 관습이 문제일세. 하지만 방법은 있네.
-그렇습니까? 부디 일러 주십시오. 도인님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럼, 고인의 묘 자리 옆에 나무 한그루를 심어놓으시게. 나무가 무성할 즈음이면 고인의 육신도 유골만 남을 걸세. 때에 이르러 고인의 유골을 거두어 곱게 부수고 흙으로 돌아가도록 산속에 뿌려 드리게. 그렇게 되면 이승의 법도 지키고 고인이 깨달은 유언도 지켜드린 것이 아닌가.
-그렇군요. 도인님!
-또한, 고인이 서운할 수 있으니 집안에 위패를 모셔두고 고인의 큰 깨달음을 족보에 기록하여, 자네의 자식에게 가르침을 주시게나. 그렇게 되면 자네집안은 대대로 속죄하는 관습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 그렇군요. 도인님! 그리하겠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들은 홍매화도인의 가르침에 따르니, 비로써 마음 편히 아비의 영정을 모시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렇듯 도는 잘못 깨닫거나 차원의 세계를 넘지 못하면 자신과 가족에게 혹은 인간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의 관습은 조상을 오래도록 산속에 모시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다. 이런 관습은 인간이 조상의 영혼을 수없이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도 인간이 이승을 떠나도 저승에 영혼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정신적 연령이 부족 할 때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만 알았고, 후생에 대한 언행을 비웃기만 하였는데, 본인이 죽은 영혼을 만나 보았기에 전생과 후생의 존재함을 믿고 있는 것이다.
때는 나의 육촌동생이 자살을 하여 화장하는 장례식을 보고 상경했을 때였다.
약 7일 후 6시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글을 쓰고 있었는데 아침 7시경 동생의 영혼이 훅하는 느낌으로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당시에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갑자기 어머니가 몹시 그리웠고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하여 필시 시골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 짐작되어 대성통곡을 하였다. 나의 통곡소리에 집사람이 일어나 무슨 일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하여 시골에 일이 생긴것 같으니 어머님에게 전화 드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어머님에게 아무 일이 없었고, 오히려 자식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되물었다. 그 의문에 아! 그 영혼이 동생 이었구나 짐작하였는데, 후에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어머니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동생의 혼백이 다녀갔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이승을 떠나면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다는 결론이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끼리도 영혼(일종의 텔레파시)이 통하리라 믿고 있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영혼은 밤에 활동하며 주로 꿈속에 찾아온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허나 실제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영혼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다. 영혼은 우리가 사회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찾아오기 때문이다.
물론,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이런 경우를 보면 영혼은, 이생에서는 육신과 함께하지만 저승에서의 육신은 허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허물에 지나지 않은 육신을 사람들은 오래도록 모시는 것을 효로 알고 있다.
영혼은 떠나고 없는 허물의 육신에 애정과 정성을 들여 부질없는 묘 자리에 얽매어 사는 꼴이다.
다만, 저승의 환경에 적응을 못해 육신에서 분리되지 못하여 함께 하는 영혼에 예를 올리고 육신이 소멸 할 때까지 땅속에 모시는 것은 그리 큰 잘못이라 보지 않는다.
그러나 덧없음을 깨달은 영혼은 불필요함을 깨달아 육신을 떠나 하늘의 순리에 따르기에 더 이상의 묘 자리는 필요 없다.
설사 자살이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영혼이 함께 묻힌다 해도 영혼을 땅속에 오래도록 가두어 자유롭게 다닐 수 없도록 한다.
또한 고인의 육체를 보존하고자 필요이상의 터전을 차지하기에 생태계와 후손에게 피해를 주니 이차적 죄를 짓는 것이다.
화장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화장을 하고 독에 거두어 유골을 모시고 있다. 물론 인간이 가족이나 부모의 정을 못 잊어 유골을 모시는 정성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진정한 깨달음에 효라면, 산속에 육신을 묻어 마지막 남은 죄를 털고 가는 기간만 유골을 모시면 될 일이다. 관습이나 법을 지키는 기간은 타당 하지만, 육신이 다하거나 이승의 미련에 부질없음을 깨달은 영혼이 떠난 유골에 연연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역행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했는가.
만물의 영장이 세균하나 물리치지 못하고 천재지변에 인간의 육감으로 위험을 알아채지 못하는가. 인간들이 미물이라 하는 동물들은 과학의 도움 없이 육감으로 천재지변을 예측하고 피하지 않는가.
이는 지구라는 모태를 인간이 무시하기에 눈과 귀를 멀게 하는 모태의 버림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승에 삶을 다했으면 유골을 곱게 부수어 자연의 흙이 되게 하는 이치는 당연하지 않는가.
화장을 한 유골도 행여 미련을 버리지 못한 영혼이 있을 수 있으니 육신에서 떠나는 적정한 기간을 모시고, 이승의 미련을 버리고 영혼의 우주를 항해하라는 의미에서 유골을 흙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바다나 강물에 유골을 뿌리는 것은 왜인지 느낌이 좋지 않다.
홍해리시인님의 물의 뼈에서 얻은 하늘의 섭리인 듯해서 말이다.
그리고 산 입구에 사당을 지어 위패로 모셔두고 자손이 영혼을 모시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아니 한만 못하니 조상을 모시는 우리의 지나친 욕심도 버려야 한다. 이승에 잘못된 관습이 저승길의 영혼에게 하늘의 뜻을 어기는 큰 죄를 짓게 하니 말이다.
이렇듯 관습과 법은 욕심에서 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선택인데 우리의 법은 순리와 도리 합리를 잊은 채 실시 하는 경우가 많다.
법이란 피해를 최소화 하고 서로가 연결되어 사회에 치우치는 문제를 순환 시켜야 진정한 법이 성립 될 수 있다.
우선적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강압적 제도화 하고 법을 상정을 하면 그의 후한은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온다. 인간의 도리를 잊은 관습이 얼마나 많은 자연을 해손하고 있는가.
사회에 필요한 제도는 자동차 구조와 같다.
위의 문제는 국가정체성의 제도이기에 정착화 하면 되지만 인간생활에 직접적 타격을 주는 경제적 제도는 법의 선택이 매우 까다롭다.
그러나 우리의 법은 어찌하고 있는가. 빤한 피해에도 변변한 대책하나 세우지 못하여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다.
위에서 말한 장례식제도는 자동차구조의 표면과도 같은 큰 틀이다. 장례식이란 큰 틀에서 색체를 입힌 자동차 겉 표면이라 보면 된다.
그러면 이젠 장례식법의 큰 틀에 내부적 구조인 엔진 부분이나 비포장도로를 달려도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작용의 내부적 구조에 대해 토론해보자.
우리는 같은 민족에 같은 관습을 가지고 서로가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환경에서 성장하고 함께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종교의 선택 때문에 조상모시는 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불교 천주교 개신교 무교 등 장례방법이 각양각색이다. 그렇다고 종교를 트집 잡고자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믿음이랍시고 우리의 미풍양속을 함부로 해 하는 것에 충고를 주기 위함이고, 이에 정신적 피해를 줄이고자 의논하려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장례식을 강압적으로 실시한다면 전혀 새로운 방법에의 거부반응도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나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호응을 하여도 경제적 부담감 때문에 실시의 어려움이 예상되기도 한다.
문제는 육신을 땅속에 묻는 우리의 관습과, 조상의 유골을 거두어 화장을 하고 산에 유골을 뿌리는 장례식을 두 번이나 해야 하기에 빈곤한 가족들에게는 경제적 부담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여 이런 장례식을 설득하여 호응을 얻으려면 조상을 모시는 정책으로 사당을 짓게 하되 영혼을 모시는 분의 수를 정하여 적정한 보조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또한, 집안의 몇 분의 조상을 모시는 곳에 국가보조금을 지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많은 조상이 있는 분들은 크게 문제는 없겠으나 소수인원에 조상을 모시는 분들은 개인보조금에 도움을 받지 못함을 감수 하여야 하고, 대신 이웃이나 지방자치의 제언에 따라 사당을 함께 사용하도록 권유함이 바르다 주장한다.
그러면 오히려 이웃 간에 의형제처럼 사용하니 의도 좋을 수 있고, 생소한 이웃이라면 한자리에 모인 조상님들의 인연으로 화합의 자리도 될 것으로 본다.
사당에 모시는 영혼은 3대나 4대의 조상으로 제한하고 윗분들은 집안 족보로 모시면 될 일이다.
많은 분들이 족보에 대하여도 사대주의에 편협 된 사상이니 하며 많은 종교나 사람들이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살펴보라. 족보는 각 씨족지방의 주인의식의 정체성을 잡아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이다. 이 자리에서 족보제도에 관하여 언급하기는 긴 사연이기에 일축하기로 하고 다음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 토론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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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작은 먼지 한 톨
살다보니 나는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먼지에 불과한
나, 가볍고 작은 먼지 하나로
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량겁無量劫 광활한 세상 또는 우주에
아주 작은 존재로 머무르다가
사바세계娑婆世界 투명한 인드라의 그물에 걸린 먼지 한 톨로
머뭇거리네 머뭇거리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망迷望의 바람
손바닥 위에서 불면 금방 날아갈 아주 작은 것으로
본시 나는 먼지였으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詩 / 손소운孫素雲
예의에 관하여
예의는 관습에 의한 예의를 이렇게 하자라는 무언 속에 긍정이 포함된 행위일 것이다.
그러니 종교관에 얽매이지 않는 이들은 살아생전에 예의를 갖추던 상례를 이승을 떠난 후에도 방법을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하던 절이 고인 앞에서는 절을 두 번하게 되는데 한 번은 이승에 대한 작별에 인사요 두 번째는 저승의 길을 염원하는 기원에 절일 것이다.
예의 방법이야 나보다 연구원이나 전문인들이 상세히 알고 있으니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관습상례에 대한 종교적 거부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하는 명언이 있듯이 관습의 예의는 국민이 지켜야 한다.
그러면 종교에서의 예의도 관습예의와 같이 해야 되는가라고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반듯이 그런 것이 아니다.
종교와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말이 있다. 공동체 속의 예의와 개인적인 예의는 달리한다는 의견이다.
다만, 살아계신 분의 예의를 지킬 때는 관습예의를 지키면서 고인이 되면 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예의를 달리한다는 가식을 추켜세우니 실로 아이러니한 사상이다.
이것은 종교에서 교리를 잘못 인식하는 탓이다.
다 같은 종교인이라면 그것에 이해는 하나 생을 마감한 고인의 종교가 틀릴 수 있고 함께 하는 이도 종교가 다를 수 있기에 자기의 종교예의만을 고집하는 것은 모순이 있다.
사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고 삶을 살아온 토속적 관례를 우선적으로 지켜야 함이 원칙이다.
허나 이 원칙을 강조하다보면 국경을 초월한 종교 활동에 단합성이 없고 각국의 다른 예의로 어수선한 문제가 발생하기에 바르지 않다. 즉 종교는 성현탄생지역의 관례예의도 원칙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외국인들이 대거참석을 하는 종교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을 살핀다면 종교단체의 예의는 그 예절대로 지키고 종교를 떠나 개인자격으로 참가한다면 토속적 예의를 지키는 것이 상례이다.
생에 대하던 예의를 생후라 하여 잡신을 모시는 것이라 트집을 잡는 것은 믿음자체에 모순이 있다. 그대의 조상이 잡신이었나 생각을 가져보라.
예의는 겉포장에 불과하다.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한다고 해서 올바른 신을 모시는 것이고 몸을 낮추어 절을 한다고 해서 잡신을 모시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것이나 몸을 낮추어 절을 하는 것이나 고인 혹은 신에 대한 예의의 하나 된 모습이다.
다만 원칙의 예의를 갖추는 것은 일반인일 지라도 종교나 단체의 예의를 배우고 지켜줌도 상례라 볼 수 있다.
이런 언급을 하는 데는 행여 일반사당에 모시는 방법에 종교예의와 일반인의 예의로 혼란이 예상되지 않을까 염려에 언급하는 바이다.
하여 일반사당에서는 종교인이라도 우리의 관습에 예의를 지키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요즘은 천주교에서도 고인 앞에 절을 올리는 것을 탓하지 않는다.
다만 위패에 "신위"라는 언급에 반대하는 입장이 있는듯하다.
이는 천주교의 주장에 필자도 동감한다.
인간이 신이 되면 지구라는 생태계에 혼란이 온다.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어떤 성현이든 우주만물을 통제하는 것은 인간의 허물로 세워놓은 신이 아니다. 신은 우주 만물을 통제하는 하나님이다. 하여 우리가 신이라 믿는 여러 성현은 인간의 스승일 뿐이다.
본인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각 종교의 색깔을 보면 인간이 신이 되어 인간사회에 혼란을 준 이유를 깨달을 것이 아닌가.
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성현이 신이 될 수 없다는 부정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본인도 앞으로는 위패에 "신위"라고 모시는 상징을 삭제할 것을 약속한다.
하여 여러분도 위패에 "신위"라는 언급에 깊은 깨달음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어디에 살고 어디에 중심이 있는가를 먼저 깨닫고 종교의 믿음을 가지면 한다. 내 것이 소중하지 않으면 다른 것에 소중함도 모른다.
소중함을 먼저 깨닫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종교생활일 것이다.
인연 은
스치면서 시작되는 것.
악연도 배려에 따라 필연이 되고
필연도 행함에 따라 악연이 되는 것
만남은 중심에 필연이 아닌지
인연에 중함은 배려 일진데
배려하나 이루기 버거운 것은
욕심에 치우치기 때문이리라
解 脫은
큰 꿈에 갈망하던 모진 시련도
행복과 욕심도 자연에 놓고
감사하며 조심스레 놓고 가는 것
육신은 자연 속에 던져놓고서
정신은 후손의 꿈을 위해서
미련마저 비우고 떠나가는 것
달마가 짚신한 짝 이름두자 놓고 갔듯이
짚신한 짝 이름 두자 남겨 놓으면
미래위해 후손이 설계하는 것
해탈은 자연을 위해
내 모든 인연을 위해
지난 추억 빙그레 미소 짓는 것
글과 시/ 강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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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물과 뼈는 무슨관계일까? 지난번에 홍해리시인님의 방에 올렸었습니다만, 제 부족한 표현을 한번더 생각해 보고자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