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항쟁(三別抄抗爭)
때는 서기 1270년 고려가 몽고군(蒙古軍)의 침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피난처인 강화도를 벗어나 개경(開京)으로 환도하여 정식으로 몽고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그 해 6월 초하루를 기하여 배중손(裵仲孫)을 비롯한 삼별초(三別抄)의 무리들은 끝내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배중손(裵仲孫)은 강화도에 있는 무리들을 향하여,
“무릇 나라를 구하려는 자는 모두 모여라.”
고 외치니 장정들은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습니다.
배중손은 우선 왕족(王族)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옹립하여 왕을 삼고 몽고에 대한 항쟁을 계속했습니다. 이들은 강화도가 전략상 대몽항전(對蒙抗戰)의 근거지로서는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병사와 재화(財貨)를 싣고 진도(珍島)로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진도(珍島)에 이르자 고려 조정에서는 김방경(金方慶)과 몽고군 장수 흔도(忻都)를 보내 이들을 무찌르도록 하였습니다.
배중손의 무리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공격을 받아 1년 동안 항전을 하다가 결국 진도에서 그의 장렬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배중손이 죽자, 삼별초의 잔여 세력들은 다시 제주도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다시 김방경(金方慶)ㆍ홍다구(洪茶丘)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 1만2천여 명을 파병하여 김통정(金通精)이 이끄는 삼별초를 섬멸초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제주도 모래벌판을 피로 물들이며 몽고의 압제(壓制)를 몰아내고, 고려의 기상을 세우기 위해 싸웠지만, 끝내는 견뎌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김통정(金通精)을 비롯한 나머지 세력 70명은 한라산 기슭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3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쟁은 그 막을 내렸습니다.
삼별초의 항쟁을 얘기함에 있어서 우리는 배중손(裵仲孫)이나 김통정(金通精)이 일개 야경꾼에 지나지 않았던 하급무사(下級武士)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운명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왕후장상(王侯將相)들이 민족의 혼을 죽이며,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사회에서 남보다 더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그들이 더욱 꿋꿋한 마음으로 산화(散華)했다는 사실은 조국 전선에는 계급의 상하도 없고, 부귀빈천(富貴貧賤)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는 충무공(忠武公)의 정신도 실상 그 맥락을 살펴보면, 멀리는 신라 장보고(張保皐)의 해양정신(海洋精神)으로부터 시작하여 삼별초의 진도(珍島)ㆍ탐라(耽羅)의 항쟁으로 뻗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승전(勝戰)이든 패전(敗戰)이든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소수의 영웅들의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의 이 조국이 이만큼이나마 베개를 높이 베고 잘 수 있는 것은 역사에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하급무사(下級武士)들의 충정(忠情) 때문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