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03 가해 부활5주일
사도 7:55-60 / 1베드 2:2-10 / 요한 14:1-14
역사적 기시감과 미시감
혹시 ‘데자뷔(Déjà vu)’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우리 말 번역으로는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하는데, ‘이미 본 느낌’이란 뜻입니다. 이것의 반대개념은 ‘자메뷔(Déjà vu)’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미시감(未視感)’, 즉 ‘아직 보지 않는 느낌’이란 뜻입니다. 가령, 처음 온 장소인데 “여기 와본 적 있는 것 같은데…”라고 느끼거나, 처음 하는 대화인데 “이 상황 예전에 있었던 것 같은데…”라고 느꼈다면 이것을 데자뷔라고 합니다. 반면에, 익숙한 길인데도 “여기가 어디지?” 하고 낯설게 느껴질 때 이것을 자메뷔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가 증언한 스테반의 순교장면을 읽고 묵상할 때 데자뷔, 즉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신자들도 그가 순교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 느낌이란 바로 스테반의 죽음을 통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른 것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바로 이 기시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 처음 겪는 상황인 데도 이전에 경험한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인 데자뷔의 내용은 뭔가요? 저는 이것을 세가지 측면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늘을 바라보면서 증언하는 스테반의 모습입니다. 스테반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에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는 이 광경을 보고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6)라고 외칩니다. 이 모습은 예수께서 생전에 나타니엘과 대화하셨을 때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스테반은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이 말씀을 실제로 보고 감격하며 외친 것입니다.
둘째, 자신을 죽이는 자들에 대한 스테반의 태도와 말입니다. 사람들은 스테반의 말을 듣자마자, 증오의 감정이 발작하듯이 일어나서 그를 끌고 나가 미친듯이 돌로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스테반은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 (사도 7:60)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말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와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셋째, 스테반이 마지막으로 한 기도입니다. 사람들이 돌로 칠 때에 스테반은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사도 7:59)라고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는 십자가 상에서 하신 예수님이 큰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라고 기도하신 것과 오버랩 됩니다.
교회 역사상 첫 순교자인 스테반의 모습은 이처럼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신자들은 성령의 임재로 교회가 생긴 후, 처음으로 겪는 이 일이 마치 예전에도 겪었던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 후, 교회는 연이어 벌어지는 박해와 순교를 겪으면서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초기 교회는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신앙을 다졌습니다:
가장 먼저 그들에게 ‘순교(martyr)’란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고, 예수님처럼 용서하며, 예수님처럼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스테반은 이것을 가장 잘 증언한 첫 순교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순교를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궁극적 증언’으로 정의합니다. 이런 이유로 모든 성인들 중에서 순교자를 가장 최고의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가 반복되는 세상의 윤리를 끊고, 비폭력과 용서 그리고 사랑이라는 기독교 윤리를 구현했습니다.
끝으로 그들은 유대교와 차별되는 기독교의 고유한 신관(神觀)을 수립하였습니다. 이 기독교의 하느님관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하는 유대교와 같은 유일신 신앙의 종교인들에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성모독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반대로 황제를 신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로마의 세속권력이 볼 때,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며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국가의 정체성을 흔드는 불순한 반동분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기독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권력, 세상의 윤리, 세상의 이념들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데자 뷔와 자메 뷔, 즉 기시감과 미시감을 동시에 느끼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이스라엘 군이 레바논에 있는 기독교 마을에 쳐들어 가서 거기 있는 십자고상을 파괴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뉴스화면을 보면서 2000년 전,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죽이고, 그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스테반을 죽인 유대교의 광기를 다시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또한 오늘날 세계 최강국의 지도자가 자신을 예수님으로 그린 합성사진을 보면서, 2000년전 자신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칭했던 로마황제의 오만한 모습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그동안 낯익은 모습들이 어느 순간 낯선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를 몹시 당혹스럽고 혼란스럽게 하는 미시감을 주고 있습니다.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나그네처럼 떠돌고,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나치치하에서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인종청소를 당했던 유대인들의 비극에 동정하던 세계인들이 보기에 주변나라를 침략해서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이웃종교의 신성한 곳을 파괴하는 그들의 행동은 지금껏 알고 있던 홀로코스트의 유대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처럼 철저한 유일신 원리주의와 오만한 세속권력 속에서 스테반의 후예들인 우리 기독교인들은 ‘순교(martyr)’라는 말 속에 담긴 ‘증인(witness)’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서양언어에서 순교라는 말 속에는 증언하고 증인을 선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그 증언이 설령 나에게 불이익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생명을 위협받는다 해도 길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하느님이 내 안에 주신 양심의 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스테반은 그 길과 진리를 목숨을 걸고 증언했고,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엔 그의 죽음은 세속권력에 패배한 것처럼 보였으나, 하느님의 시선, 하느님의 시간으로 볼 때, 그의 죽음으로 교회는 더욱 더 강해졌습니다. 터툴리안 성인(Tertullian, 160-230)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Semen est sanguis Christianorum)” 그 말은 교회는 그리스도를 철저히 증언하는 순교를 통해서 도망치거나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지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진리가 더 널리 퍼져 나갔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선교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익숙했던 과거가 낯선 모습으로 변하고, 낯선 현 상황이 익숙한 과거를 연상시키는 이 역사적인 미시감과 기시감이 교차하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생명의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따라 갈 때, 그 길의 종착점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요한 14:1-2)
이제 다음주일이 지나면 교회는 승천대축일과 성령강림대축일을 기념합니다. 교회는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하늘로 오르시는 영광과 그 분이 지상에 있는 우리를 위해 성령을 보내시어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심을 경축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것을 믿고 희망하기에 세상의 그 어떤 파고에도 헤쳐 나갈 지혜와 힘을 얻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말고 하느님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