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비화] 도난 당했던 윤두서의 미인도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10. 12.
미인도(조선 여인의 단아하면서고 고혹적인 기품이 전해지는 윤두서의 작품이다. 1990년 전시관에서 도난당한 후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되돌아왔다. 신윤복의 미인도와 쌍벽을 이루는 명품이다.)
미인도(美人圖․117×49cm). 화면을 가득 채운 요염스런 여인이 살포시 비껴 틀어 서 있는 모습으로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한지에 그린(윤두서의 손자인 윤용의 작품이란 설도 있음) 수묵 담채화이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 은행 알 같은 두 눈, 앵두처럼 빨갛고 작은 입술, 동그스레한 가련한 얼굴, 배추 포기처럼 부풀은 치마, 모두가 고혹적이면서도 결코 천박스럽지 않다. 두 손은 들어 치렁치렁한 머리를 떠받치듯 매만지는 맵시가 마치 가슴에 불타오르는 열정을 살며시 내비치는 듯 하다. 또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간결한 선과 정확하고도 사실적인 조형에서 조선 여인의 단아한 기품이 그대로 전해진다.
당대의 문인이었던 기생
윤두서는 호가 공재(恭齋)로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이다. 정약용의 외증조, 윤선도의 증손으로 태어나 정선[謙齋]․심사정[玄齋]과 함께 삼재(三齋)의 한 명으로 불린다. 당쟁이 심화되자 벼슬길은 포기한 채 학문과 서화를 즐기며 일생을 보내다 해남 연동(蓮洞)에서 숨을 거두었다.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고, 특히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묘사로 ’자화상(윤영선 소장)‘같은 뛰어난 명화를 남겼다. 자화상은 전통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상반신을 생동감 넘치게 그려 파격적인 충격을 던져 주는데, 수염의 섬세함이 매우 돋보이는 걸작이다. 1994년 봄, 이 그림은 미국 아써앰서클러갤러리(Arthur M.Sackler Gallery)에서 열린 『18세기 한국미술-우아함과 소박의 미』에 출품되어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 나타나는 미인, 즉 기생은 대부분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교태(嬌態)스럽지가 않다. 조선 시대 기생들은 용모도 뛰어나지만 사대부와 문장가를 상대하면서 음률과 시문에도 밝았다. 특히 한시나 시조도 잘 지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류 시인으로 대접받는다. 조선의 3대 시기(詩妓)는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성천(成川)의 김부용(金芙蓉), 그리고 부안(扶安)의 이매창(李梅窓)이다. 모두 시 잘 짓고 가무에 능한 당대의 문인이었으며 또 음악가며 춤꾼이었다.
‘조선의 기녀’를 연구한 이탈리아 출신의 빈센차 두르소(함부르크 대학 한국학강사)는 한국 기생에 대한 독특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조선 시대의 기녀는 몸을 파는 창기(娼妓)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기녀는 유교 사회의 필요에 따른 사회제도의 일환으로, 그 역할에 따라서 다양한 계층이 있었습니다.’
즉, 창기는 변방에 있는 군졸을 접대하는 여자이고, 여기(女妓)는 사졸을 위해 바느질을 해 주고, 관청에 등록된 관기(官妓)는 관리의 수청을 들던 여자들이다. 또 음악과 문장에 능해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여악(女樂)도 있었다.
미인이 많이 나는 고장을 일컬어 일명 색향(色鄕)이라 부른다. 모두 물 맑고 산수가 수려한 곳으로 진주(晉州)와 평양(平壤) 그리고 강계(江界)를 꼽는다. 왜 미인에는 지방색이 있는가? 미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때문이다. 물이 맑아 피부가 고와야 하고, 산이 깊어 겸손함과 고운 마음씨를 가져야 한다. 얼굴이 예뻐도 이 두 조건이 모자라면 미인이 될 수 없다. 아름다운 마음씨에 눈같이 흰 피부와 꽃같이 아름다운 자태, 삼흑․삼홍․삼백(三黑紅白)이 어울려야 한다. 머리카락․ 눈썹․ 눈동자는 검어야 하고, 입술․빰․손바닦은 붉어야 하고, 이빨․눈흰자․손톱은 희어야 한다.
땡중과 장물아비
1990년 1월의 조간신문에, ‘국내 최고의 미인도 일본으로 반출 기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바로 이 미인도를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던 일당들이 붙잡혀 쇠고랑을 찬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
전남 해남에 있는 윤두서 일가의 기념관에서 미인도를 훔쳐낸 자는 서산 출신의 땡중인 임모(任某)라는 자였다. 문화재가 돈이 된다고 하자, 그는 큰 물건을 찾아서 기념관 안으로 잠입했다. 보통의 기념관은 복제품이 전시되지만 그곳만은 진품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기념관 안에는 명문가의 유품과 눈이 번쩍 뜨이는 문화재가 즐비했다. 그는 족자에서 미인도 부분만 예리하게 오려 가지고는 도망쳤다. 이 미인도는 신윤복의 미인도(간송 미술관 소장)와 쌍벽을 이루는 그림이다. 다음 날, 기념관의 문을 연 후손은 놀라움에 소리를 지르며 신고를 했다. 곧 경찰과 검찰이 투입되고, 혹시나 해외로 빼돌릴 것이 염려되어 문화재 당국은 항만과 공항까지 검문 검색을 강화했다.
그림을 둘둘 말아 서울로 올라온 임모는 즉시 한국고미술협회 회장으로 있던 공창화랑 대표 공창호(孔昌鎬)를 찾아갔다. 공창호는 번듯이 도둑질한 장물인 줄도 알면서도 1천 3백만 원이란 거금을 주고 그림을 샀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림이라 장물인 줄 모를 이가 없는데, 일확천금만을 노리고 구입한 것이다.
신문에서는 연일 국보급 문화재의 도난과 해외 반출을 염려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자 공창호로서도 이 그림을 국내에 팔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골동상과 짜고 이 그림을 일본으로 밀반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일본 내에서 한국의 고미술품은 가장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보증수표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반출하면 거금을 손에 잡기는 여반장이다. 공창호와 그 일당은 무사히 미인도를 일본으로 반출하여 하야시라는 일본인에게 넘겼다. 그후 임모가 경찰에 붙잡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자, 공창호에게도 수배령을 내렸다.
경찰의 수사망이 사방에서 좁혀 오자 공창호는 긴급히 일본의 하야시에게 연락을 취했다. 일이 잘못되어 구속 직전에 있으니, 그림을 되돌려 달라는 것이다. 국제적 망신을 두려워한 하야시는 눈물을 머금고 그림을 한국으로 되돌려 보냈다. 경찰에 붙잡힌 공창호는 경찰에서 가증스런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동생이 일본에서 그림을 표구하기 위해 가져갔는데, 지금 부산에 보관 중이다.”
고미술협회장까지 지낸 사람이 도난당한 국보급 문화재를 밀반출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미인도는 다시 소장자에게 돌아갔지만 그 이후에 이 그림의 진품을 감상하기는 어려워졌다. 또 다시 있을 지 모르는 도난에 대비하기 위해 영인본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많은 사람들이 진품을 감상하고 즐길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
1970년대 초반,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문화재를 사랑하자며 내 건 표어가 재미있다.
‘문화재를 도굴한 자 삼천만이 고발하자’
‘문화유산 도굴 막고 해외 유출 방지하자’
‘찬란한 민족문화 도굴 막아 빛내 보자’
얼마나 도굴이 성행하고, 해외 밀반출이 심각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슬로건이다. 유물이 문화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사료라는 것을 도굴꾼은 철저히 무시하고, 돈이 되는 고미술품만 취급한다. 또 발굴된 곳을 은폐하거나 유물의 출처를 숨겨서 족보가 없는 유물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이다.
지금도 돈이 된다면 일신의 영화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결과 많은 문화재가 도난 당해 일본으로 밀반출될 기회만 엿보고 있다. 김포나 부산 세관을 통해 문화재를 밀반출하다 적발되는 건수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적다. 건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들킬 만큼 범인들이 어리석지 않아서다. 만약 우리 민족에게 혼란한 시대가 찾아 온다면 지금까지 이 땅에 남아 있던 몇 안되는 문화재조차 어디로 사라질 지 모를 만큼 우리의 문화재 보호 의식은 희박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