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철 생가전경 마을 중앙 붉은 벽돌 담장이 있는 단아한 기와집이 나철 생가이다. 집 뒤에서 용맥이 들어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담장이 산 능성의 영역에 따라 쌓았음을 보여주듯 길숨하게 만들어져 있다.
홍암 나철 생가 노강산(323m) 정상에서 연결된 용맥 위에 지어진 집이지만 특이하게도 집 앞에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땅 속의 기운이 집안에 머물게 하는 방편으로 만든 연못이다.
수백년의 세월을 버텨온 노거수老巨樹가 서 있는 자리는 명당에 속한다. 수백년동안 천재지변이 미치지 않은 곳이고, 사람의 화도 미치지 않은 곳이다. 또한 노거수는 비가 아닌 땅속의 물을 흡수하며 산다. 하루에도 엄청난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명당 주위에는 이렇게 맑은 물이 지나간다. 물은 생기를 공급하는 기재이다. 풍수고전 <금낭경>에서도 “음양의 기는 내뿜으면 바람이 되고 오르면 구름이 되며, 떨어지면 비가 되고, 땅 속을 돌아다니면 생기가 된다”고 하였다.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가지만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벌였다. 홍암은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일왕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 항쟁을 하였다.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나라 안의 매국노를 처단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판단하고 귀국.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오적의 주살(誅殺)을 시도는 실패하고 10년의 유배형을 받지만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다.
1908년 일본에서 구국 활동할 때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이 찾아와서 단군교를 포교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받고는 귀국한다.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고 1910년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외세가 밀려오자 자신의 입신영달을 위해 열강들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는 사대부를 질책하며 민족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 민족의 선조 단군을 섬기는 고유의 신앙을 민족 종교로 부활시킨 것이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포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만주에서 대종교의 확대 포교를 구상하고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기어 대종교(大倧敎)를 크게 번창시켰다. 또한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북로정서군 총재 서일,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이범석을 비롯한 무장독립운동세력과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김교헌과 같은 민족사학자들과 한글문화운동을 일으킨 주시경, 지석영, 김두봉, 그리고 민족지도자 이시영, 신규식, 안재홍, 이동녕 같은 인물들이 모두 대종교 사상을 바탕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평민은 동학을, 양반지식층은 대종교에 가담했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해서 단군을 정점으로 한 민족의 재발견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한 것이 방황하는 지식인층을 움직인 대사건이었다.
홍암 나철의 사진 생가에 모셔져 있는 홍암 나철의 생전 사진
홍암 나철이 태어난 금곡마을 전경 마을 우측에 새로 짓는 대궐 같은 기와집은 나철선생을 성역화하기 위한 사당이다.
조선의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대종교의 교세가 확장되자, 일제는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탄압한다. 이에 나철은 1916년 8월15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3일 단식동안 조식법調息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교를 단행하여, 광복의 날이 8월15일임을 암시한다. 유언에 따라 대한민국의 영산靈山 백두산에 묻힌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