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이중적 신분
토론장에 들어가보면 예수님의 길 예비자 세례요한을 걸래짝 취급하는
무리들도 있고 세례요한을 고대광실에 올려놓고 머리를 조아리는 무리들도
있어 극과 극으로 흐르고 있다.
이는 세례요한의 이중적 신분을 알지 못한 채, 성경에 코를 박고 보는
까닭에서다. 산세도 멀리서 보면 자세히 보이는 법.
우선 성경을 보는 우리의 안목과 시야를 넓혀야 한다.
예컨데 에덴동산에서 아담(초림주)의 아내가 범죄했을 때는 그녀가
복음백성을 상징했고 아담의 아내가 “하와” 라는 “모든 산자의 어미” 라는
명칭을 받았을 때는 재림주를 상징하는 일인 이역의 사명을 받은자 이듯이
세례요한 또한 일인 이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좌로도 치우치지 말고 우로도 치우침 없이 좌우 다 같이 아우러
전체를 한 논리로 찾아내면 쉽게 풀리는 문제임에도 우리의 마음 그릇이
쬐그만 간장종지가 되어 도토리 키재기만 하고 있으니
보기에 여간 답답하지 않다.
세례요한은 유대당의 마지막 주자임을 꼭 붙들고 잊지 말자.
유대당은 어떤 곳인가? 간략히 요약해서 한마디로 한다면 초림예수님과
재림예수님을 보내주신다는 이중의 예언서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세례요한이 유대당의 마지막 주자로서 초림예수님의 역도 하고
재림예수님의 역도 맡은 일인 이역을
감당해야 하는 이중적 신분의
생애를 살아야 했던 까닭에서다.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물세례를 주고 있었다.
이는 길 예비자로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서는
“나는 물세례를 주고 있으나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주는 분” 이라고 높여 소개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주신 일이 있었던가? 없었다.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주시기는커녕 요한처럼 물세례를 주셨는데, 그것도 직접
행하신 일이 아니고 제자들을 통해 물세례를 주도록 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물세례는 성령세례에 대한 비유법의 세례일 뿐, 본질의 세례가 아니다.
물세례는 하나님 모르는 죄사함의 세례의 의미가 전혀~ 없는
허구의 상징적 세례이다.
이 같이 알맹이 없는 허구허상의 상징적 세례가 물세례인데
세례요한도 물세례를 주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반드시 하나를 깨달아야 한다.
길 예비자 세례요한도 물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물세례를 주었다는
것은 유대당에서 이미 초림주를 보내주시겠다는 그 예언의 성취인 것이다.
그 이유인즉 초림주의 행적과 말씀은 무엇이든지 비유로 주셨기 때문이다.
즉 요한이 준 물세례는 유대당에서 초림주를 상징해준 모형으로서 물세례이고
초림주의 제자들이 준 물세례는 실상에서 물세례인 것이다.
이 같은 물세례는 요한이가 준 모형의 물세례이든 제자들이 준 실상의
물세례이든 모두 성령세례에 대한 비유법이다.
물세례란 물로 목욕재계를 한다 해도 눈꼽만큼도 죄가 씻어지는 게 아니다.
다만 말씀의 성령세례만이 우리가 하나님 모르는 죄를 씻음 받고
죄사함을 받는 본질적 실체적 세례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물세례는
성령세례에 대한 비유라고 하는 것이다.
초림주는 진정한 구원이 아직 아니다. 물세례를 주고, 사람들의 온갖 병을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일까지 하셨으나 그것은
재림 때 사람들에게 온전히 비유로 기록된 성경을 낱낱이 풀어서 깨닫게
해줌으로써 하나님 모르는 죄를 씻어
죄사함을 주시고 동시에 영생을
주시겠다는 상징적 이적기사였을 뿐이었다.
그 중에서 물세례 또한 곧 성령세례에 대한 비유와 상징적 세례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 이라고
한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례요한이가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본질적으로 베푸실
죄 씻음과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한 일이 된다.
즉 세례요한은 유대당의 마지막 주자로서 초림주의 일과 재림주의
일을 다 같이 알려주는 일을 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인 이역의 사명자 노릇을 한게 아니고 무엇인가?
세례요한은 유대당의 마지막 주자이므로 초림주의 비유법의 일과 재림주의
본질적 일, 모두를 보여주게 되는, 일인 이역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해 물세례를 주도록 허락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궁극적 본질적 본연의 모습(재림주의 사명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에
직접 주시지도 않고 초림 때는 불가피하게 제자들이 준것으로서
초림주의 면피용일 뿐이다 하겠다. 그러나 다음을 보자
세례요한은 유대당의 마지막 주자이고 초림예수님은 다음의 역사를
이끌어가야 할 경계점에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과
초림예수님은
인수인계한다는 요식행위에서도
예수님은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음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세례요한에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마3: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또한 <눅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이렇게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최상위로 높여 고백할 때는 예수님의
초림 때를 말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초점을 맞춘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면 세례요한은 자신의 일을 접고 예수님께 합류한 자도 아닐 뿐더러
여전히 따로 요단강을 점령하고 물세례를 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거라든가
그 후에 예수님의 천국복음전파의 일이 아닌, 그 당시 헤롯왕의 사적 비리를
간섭하다가 그만 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과 동역자가 되지 아니하고 개인플레이를 하다가 옥살이를 한다는
것은 초림주에게 초점을 맞춘 찬동의 발언은 전혀 없이 오직 재림주에 대한
예찬만 했을 뿐이다.
여기까지가 다시 오실 재림주에 대한 세례요한의 예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세례요한은 초림주에 대한 행보가 시작되고 있다.
그가 헤롯왕의 옥에 갇힌 후
<누가복음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이것은 지금까지 세례요한이 길 예비자로서 예수님께 보여준 충실한 믿음이
의심과 불신으로 급반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예수가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은 자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지존자임을 고백했었다
또 예수님은 의식의 물세례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죄사함을 주는 성령세례를
주실분으로 공포했었다.
그런 자가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의심하고 불신한다는 것은 하늘의
역사인 것이다. 즉 세례요한은 다시 오실 재림주에 대한 길 예비자로서는
완벽한 사명자였으나, 그 당시
초림주에 대한 길 예비자로서는 빵점짜리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어인가?
초림예수님과 재림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모형을 잘 읽어보기 바란다.
모두 열거할순 없고 대략만 살펴본다면
처음성전(초림주)은 구원이 없다. 지성소(재림주)가 구원이 있다.
에서(초림주)는 장자권을 잃어버렸고 야곱(재림주)이 장자권의 상속자가
되고 있다. 이스마엘(초림주)는 상속권이 없고 이삭(재림주)에게 상속권이
있다. 아담(초리주)는 흙으로 돌아가야 할 때 그의 아내 하와(재림주)가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된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이 같은 유대당의 마지막 주자로서 초림주와 재림주,
이렇게 일인 이역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연고로 재림주에겐 충실한
길 예비자로서 손색이 없었으나 초림주에겐
오히려 일을 그르쳐서
곤두박질 치고 있는 것이다.
초림주는 비유로 오셨으며 종의 몸값 은 삼십으로 팔리셔서 죽어주셨다.
종의 몸값 은 삼십으로 오셔서 팔리셨고 죽어주셨으므로 그 팔린 곳이
곧 악한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그 후반부에 곧 세상의 대표주자 해롯궁의 옥살이를
했던 것이며 옥살이로 끝남이 아니고 곧 참수형까지 당했는데,
세례요한의 공생애 후반부가 곧 초림주를 닮아 그러했던 것이다.
이같이 세례요한은 유대당 전체를 한몸으로 맡아서 일인 이역임을 알자
괜히 수박 겉핧기로 몰아가서 흑백논리로 도토리 키재기는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