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의 에피소드(Episode)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 이야기는 4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이야기 같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 맥락(脈絡)이 이어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가에 관한 이야기는 이웃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25절).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트집 잡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했느냐고 되물으셨고(26절),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답합니다(27절). 이 대답은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율법의 핵심을 잘 파악한 정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시며, 이를 그대로 행하며 살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율법을 온전히 다 행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어렵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지만, 율법에 의한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상태가 되어 쓰러져 있는데, 그 길을 지나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냥 피하여 지나갔는데, 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하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었을 뿐 아니라, 그 모든 비용을 지불하여 계속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 당시에 종교지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다는 율법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죽지 않은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거나 돌봐주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방치한 채로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 의해 이방인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은 기꺼이 강도 만나 이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극적인 대비(對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간단히 도와준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고(33절), 최선을 다해 치료하면서 회복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자기의 일 때문에 주막을 떠나면서도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회복될 때까지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만약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약속까지 합니다(34절, 25절). 그 당시 하루 숙박비용은 대략 1/20 데나리온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2데나리온은 숙박비로만 따지면 40일간 머물 수 있는 비용입니다. 충분하게 비용을 지불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다시 질문합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 율법교사는 “누가 내 이웃인가”에 초점을 맞춘 반면,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답하였고,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이웃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좋은 이웃이 되는 삶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Martha)라는 여자의 초대를 받아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38절).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 마르다는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해 매우 분주했지만,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Maria, Mary)는 예수님 앞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39절). 그러자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는 자기 일을 돕지 않고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를 향한 불만을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40절). 마리아에게 자기 일을 도와주라고 말씀해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마르다에게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41절, 42절). 마르다의 편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도 야속하고, 분주하게 일하는 자기를 돕지 않고 편하게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마리아가 얄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초점은 마르다는 무엇 때문에 분주한가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시기 위해 가시는 길이었기에, 한 사람에게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관해 말씀하시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실 땐 뭔가를 근사하게 대접받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관해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초대하였으니 예수님께 잘 대접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지만, 정작 자기가 초대한 예수님께서 무엇을 더 원하시고 있는 것에는 신경 쓰지 못한 것입니다. 그저 자기가 생각하는 관점에서 예수님을 더 잘 대접하길 원한 것이었습니다. 이솝우화(Aesop's Fables)에 나오는 “여우와 두루미”(The Fox and the Stork)라는 우화가 떠오릅니다. 자기 방식으로 상대방을 대접하는 것으로 인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단편적인 이야기로 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셨는가?”라는 것이 더 중요한 초점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음식도 음식이지만,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복음에 관해 더 가르치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거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다해 이웃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서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가장 원하실까요? 그리고 내 주변의 이웃들이 내게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살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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