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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묵상글 (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 교만의 결과들. 등 )
*** 06:59 ,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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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교만의 결과들
2023.09.22 05:52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갑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주님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하지 않으면
교만해지고 교만으로 인해 각가지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의 첫 번째 결과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함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우선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그런데 진리를 깨달아야 할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아야 하며,
-어리석기에 자기가 대단한 줄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줄 착각하고,
반면에 자기가 얼마나 유한한지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어리석음과 한계를 깨달아 겸손해지고 지혜롭게 되면
-우리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란 것을 깨닫게 되고,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무엇이 불행하게 하는지 곧
사랑과 가난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교만과 욕심이 불행케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교만은 이 모든 것을 다 깨닫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어리석게도 잘난 척하고 남을 무시하며
그래서 싸움닭처럼 누구하고든 싸우려고 덤벼들게 하는데
이것이 교만의 두 번째 결과이며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병적인 열정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가히 병적이라고 할만합니다.
싸우지 않고 평화로이 사는 것이 정상이고 행복인데
나보다 잘난 놈 있으면 나와 봐 하는 식으로 싸우려 들고
싸우지 않으면 심심하고 싸우는 데서 자기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병적인 열정에서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온다고 하는데 당연하지요.
교만의 세 번째 결과는 정신의 타락입니다.
그런데 병적인 열정과 정신의 타락이 실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얼마간 교만하다고 할 수 있는데
교만이 어느 정도를 넘으면 누구도 그것을 고쳐줄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정신마저 제정신이 아니게 하거나 썩어빠진 정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열정이나 정신 모두 어딘가에 힘을 쏟게 하고 어딘가로 치닫게 하는 힘인데
진리에 바탕을 둔 건강하고 건전한 가르침과 관계에 힘을 쏟거나 향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병적인 열정이고 썩어빠진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요즘 우리 사회가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악마가 그렇게 몰고 가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아무런 통제 없이 각자에게 맡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자유롭게 무한 경쟁하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이 무한 경쟁의 삶이 요즘 젊은이들을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고 병들게 하며,
경쟁에 적응치 못하거나 패배한 사람을 자폐하게 하거나 칼을 들게 하는 겁니다.
요즘 우리 대통령이 말끝마다 자유를 외치고 실로 자유가 좋은 것이긴 한데
자유는 위험한 칼과도 같고 요즘 칼부림을 자주 보듯 참으로 위험한 겁니다.
정신병자에게 칼이 들려있다고 있다고 한번 생각해보시면 알 수 있겠지요.
옳게 쓸 줄 알면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쪽으로 쓰면 너도나도 모두 행복케 하지만
잘못 쓰면 다시 말해서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경쟁적으로 쓰면
앞서 봤듯이 사회 전체가 정신적으로 병들게 하여 모두 불행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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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40>
http://www.ofmkorea.org/ofmhomily/53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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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드는 여인들 이었습니다”(루카 8,3).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쁜 소식”이요, “하늘나라”의 선포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십니다.”(루가 8,1).
그런데 이러한 일에 홀려 숙식을 같이 하며,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열 두 제자과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드는 여인들 이었습니다”(루카 8,3).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를 선망하고 따라 다닙니다.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정치꾼들을 따라다니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이는 장사꾼들을 따라 다니며, 주먹 잡이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싸움꾼들을 따라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는 구원자를 따라다니었으니,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다양한 직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모두가 구원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을 뿐만 아니라, 믿는 바를 위해 투신하고 헌신한 이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들이 믿는 것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앙드레 루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침으로써, 그분의 부르심에 전 인격으로 따르고 온 마음으로 섬기며 시중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단지 고향이나 집 혹은 부모형제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마저도 버렸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과 소유물 혹은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자신의 뜻마저도 바쳤다는 것이요, ‘온 마음을 다해 따르고 시중들었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만으로 따르는 것을 너머서 자신의 정신과 뜻을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여섯 개의 동사로 표현해줍니다. 곧 우리에게 ‘제자 되는 길’을 여섯 개의 동사를 통해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함께 있다”, “함께 다니다.” “따르다”, “선포하다”, “전하다”, “시중들다.” 라는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첫째>로 ‘주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기도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둘째>로그들은 그저 함께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이들이요, 주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이들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그토록 그분을 ‘주님’으로 추종하며, 실행으로 “따랐고”, <넷째>로 그분을 따라 그분께서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였고”, <다섯째>로 복음을 “전했으며”, <여섯째>로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 봉사하고 “시중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신과 힘을 다해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여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시중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 여섯 가지의 ‘제자 됨’의 특성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들여다봅니다. 특별히, 순교의 달을 보내면서, 먼저 예수님을 전 인격으로 따를 수 있는 은총, 곧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임을 증거하고 순교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은 이것을 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니,
주님께서 당신 은총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간구하자.”(규칙서 머리말 4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루카 8,1)
주님!
제가 믿기에, 늘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미 저를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로 당신을 따를 것이며,
사랑으로 시중들고 당신이 하신 일을 할 것이며,
당신께 사로잡혀 당신이 원하신 바를 행할 것입니다.
늘 저와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며,
마땅히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은이들을 당신과 함께 사랑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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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을 들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걸맞은 응답을 해야 당연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되면 더 큰 감사를 할 기회가 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는데 제자들과 막달라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악령과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악령과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주님과의 만남이 더 깊어졌고 나중에는 십자가 곁에도 설 수 있었고(루카23,49)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루카24,10).
여인들은 주님을 만나 행복했고 자기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자기네 재산을 바쳤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그들은“은혜를 베푼 것은 모래밭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겼습니다.” 재산은 이웃과 나눌 때 비로소 가치를 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아시니까' 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숨은 공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1티모6,8-9).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 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 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시편4917-18). 따라서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주님의 일에 쓴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가 됩니다. 지금 감사하십시오!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만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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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참을 인(忍)이 셋이면 살인을 면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왜 참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고, 관리가 참으면 그 지위가 올라가고, 형제가 참으면 집안이 부귀해지고, 부부가 참으면 일생을 해로할 수 있고, 친구 간에 참으면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자신이 참으면 재앙이 없을 것이다.” 참을 인(忍)의 반대말은 화낼 노(怒)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화를 내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본당 사제가 화를 내면 공동체가 큰 상처를 받습니다. 형제가 화를 내면 부모의 가슴에 멍이 듭니다. 부부가 화를 내면 자녀들이 불안합니다. 내가 화를 내면 곧 후회하게 됩니다. 참을 인(忍)도, 화낼 노(怒)도 모두 마음의 문제입니다. 평소에는 참을 인으로 지내는데 욱하는 성격에 가끔 화를 내곤 합니다. 돌아보면 별 것 아닌데 화를 내고 후회 할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에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평화신문의 지면이 ‘좌파성향’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일본의 오염수 방출을 반대하였고, 그것이 지면에 보도되었는데 그런 기사는 좌파성향의 기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예수님파라고 말하였습니다. 일본의 주교회의도, 한국의 주교회의도, 아시아 주교회의도, 교황님도 일본의 오염수 방출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좌파와 우파의 이념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좌파에게도, 우파에게도 필요한 소중한 자원입니다. 모든 생명의 시작은 바다입니다. 바다는 생명의 터전입니다. 교회가 오염수 방출을 우려하고 반대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입니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비용이 더 들더라도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지만 자본주의는 우리 삶의 터전인 바다와 땅 그리고 공기와 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익의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임계점에 다다르면 자연은 자본주의가 쌓아놓은 바벨탑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뭄, 폭염, 화재’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풍요해진 세상에 살지만 인류는 터무니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함께 살아야하는 다른 생명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을 파괴하였고, 이는 기상이변과 코로나와 같은 자연 재해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릇된 종교적인 신념으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배척하고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이념과 욕망의 늪에 빠져서 땅을 빼앗고,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지금도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강대국의 욕심 때문에 국지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과 자본을 얻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과 사랑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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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 몸을 이루는 부분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간단히 머리, 몸통, 팔, 다리로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이런 간단한 구분으로 설명하기에 우리는 너무 심오한 존재입니다.
머리는 머리의 역할을, 팔은 팔, 다리는 다리의 역할을 합니다. 각자의 역할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들을 도왔던 여인들이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사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을 도왔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잠시 뒤돌아보면 저를 도와주신 분들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도와주고 계신 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특히 갑곶순교성지를 도와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복음은 특히 경제적으로 여인들이 제자들을 도왔다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과 함께 걷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에 열중하였습니다. 이는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중요성은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양식을 구하고 잠자리를 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의복도 중요하고 생활에 쓰이는 모든 재화도 중요합니다.
이 부분은 제자들이 아닌 다른 의미의 제자들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 여인들 또한 모두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다르기에 그 역할도 다릅니다. 눈은 눈으로서, 귀는 귀로서, 다리는 다리로서, 머리는 머리로서.
제자들이 있었기에 복음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이지만 보충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보충하고 싶습니다.
제자들과 그들을 도운 모든 하느님의 사람이 있었기에 복음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또 감사드립니다.
요리 공주 민키
때는 2023년 3월의 어느 날
저희 동기 신부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했습니다.
강화도에서 나가는 길이 막혀서 저는 약속 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공용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동기 신부들이 모인 식당으로 향하며 장난 문자를 보냈습니다.
‘난 지금 공주 도착’
동기 신부들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공주라고? 왜? 오늘 온다고 했잖아? 그럼 여긴 못 오는 건가?’
사실 제가 보낸 공주는 ‘공용주차장’이었습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섰는데 저를 민 공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요술 공주 밍키’의 노래를 개사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요리 공주 민키, 민키, 민키, 너와 나의 민키, 민키, 민키….
그렇게 제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생겼습니다.
요리 공주 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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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녀들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을 때, 부모는 자녀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가 전화나 SNS, 문자로라도 연락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으면 잘살고 있는지, 혹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조심스럽게 연락해 보았음에도 연락되지 않는다면 걱정은 더 커지고 맙니다. 하지만 자녀와 부모가 서로 연락을 자주 한다면 어떨까요? 부모의 걱정은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연락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즉, 기도는 하느님께 연락해서 잘 지낼 수 있게 합니다. 성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가까이하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야고 4,8)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든 다 알고 계신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연락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자주 연락하면서 훨씬 더 가까워지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더 충만히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당신의 그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입니다. 하지만 당신 혼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복음에도 등장하듯 많은 여자들도 함께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 여자가 있었다는 것은 당시 시대에는 커다란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오직 남자에게만 종속되어 있었고, 율법을 지킬 의무도 없었으며 그 어떤 권리도 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함께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또 죄인이든 의인이든 상관없다는 것을, 즉 모든 이는 주님을 따라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하게 따르고 있습니까? 부족함이 없으신 분께서는 우리와 함께하기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지금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주님과의 연락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독서의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세상의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면서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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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패배자는 머뭇거리고 망설이느라 에너지를 허비하지만, 이기는 사람은 우왕좌왕하지 않고 자신있게 뛰어든다(카를 크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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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교 여정중인
교회 공동체 삶의 기본 원리들
-중심, 비전, 치유, 섬김-
오늘 루카복음은 3절까지로 짧고 참 특이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도우며 그 일행을 따라 다닙니다. 당시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바로 곁에서 추종하는 일은 팔레스티나에서 매우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크게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만 그런게 아니라 오늘날도 이런 남자들과 여자들이 혼성된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주위의 시선들을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통해 공동체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을 “선교 여정중인 교회 공동체 삶의 기본 원리들”로 했고, 그 원리들은 “비전, 중심, 치유, 섬김”으로 나눠봤습니다. 연상되어 떠오른 것이 9년전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었습니다. 순례 여정중 저절로 남성과 여성들의 혼성 공동체가 이뤄졌고 숙소에서도 함께 했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비전과 목표가 뚜렷했기에 국적, 인종, 언어, 성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순수했고 일치된 모습이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산티아고 순례”라는 목표로 순수한 마음이 하나로 통하니 저절로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의 공동체요, 서로 마음이 통하니 시종일관 따뜻하고 부드럽고 평화로운, 서로 돕는 우호적인 분위기였습니다.
함께 모였다고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가 바라보는 비전과 중심이 선명하고 새로울 때 비로소 참된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공동체나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 역시 그 비전과 중심은 한결같이 똑같습니다. 바로 다음 복음의 첫절에서 중심과 비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복음을 선포하셨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은 “예수님”이요 비전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예수님 중심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그 공동체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런 중심과 비전이 뚜렷했기에 복음 선포의 선교 공동체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음을 봅니다. 이미 선교는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순례 여정중의 남성과 여성의 혼성 선교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모두가 바라보는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의 뚜렷한 존재와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비전이 공동체 삶의 핵심적 요소가 됨을 봅니다. 이는 우리 수도공동체는 물론 미사봉헌하는 교회공동체를 통해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우리는 일치의 중심인 파스카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현실화합니다.
말그대로 미사전례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됩니다. 새삼 우리 역시 순례 여정중인 선교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열두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뒤따른 치유의 은총입니다. 이런면에서 미사전례보다 우리의 치유에 도움에 되는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힐링의 가톨릭 교회요 힐링의 가톨릭 교회 전례라는 것입니다. 정말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하느님 나라의 체험과 더불어 영육의 치유, 힐링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중심”과 하느님 나라의 “비전”의 실현과 더불어 “치유”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치유에 이은 “섬김”입니다. 치유를 완벽하게 보완하는 섬김의 활동입니다. 메타노니아 회개에 이은 코이노니아 친교, 그리고 마지막 정점을 이루는 것이 디아코니아 섬김입니다. 예수님과 열두제자의 선교활동이 원활할 수 있음은 치유받은 부인들의 한결같은 충실한 섬김 때문임을 다음 복음 마지막 대목이 입증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에 대한 주석을 소개합니다. 때로 수도원 주방 봉사하는 자매들을 연상하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시중들었다는 것은 주로 음식을 대접했다는 뜻이다. 부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따라다닌 것은 당대 관습을 고려할 때 파격적이다. 사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남녀가 공공연히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셨다.’
일체의 스캔들 없이 참으로 남녀 모든 제자들 공동체의 일치의 중심이었던, 예나 이제나 일치의 중심을 이루시는 파스카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이런 일치의 중심이신 주님의 은총이 공동체 성장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티모데오 1서는 건강한 교회공동체 형성에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져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시기와 분쟁,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갑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체험이지만 주님의 진리를 벗어나 이단에 빠질 때 겪는 어려움이요 역시 초대교회 바오로 사도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둘째, 자족할줄 아는 신심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바오로 일행의 세상사에 초연한 참 자유로운 이탈의 모습들입니다. 예수님 중심과 하느님 나라의 비전에 충실할 때 저절로 무욕의 초연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음이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거의 해당되지 않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교회공동체 형제자매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충격적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이며, 돈을 따라 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며 많은 아픔을 겪습니다. 예나 이제나 돈 욕심을 자제함이 참으로 영적 건강에 절대적임을 봅니다.
넷째 충고가 최종적이요 결정적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 칭하며 바른 삶을 권하는 내용이 좋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바로 비오로 사도가 티모테오는 물론 교회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유익한 가르침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고, 그 대신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하게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티모6,11-12ㄱ).
역시 우리 신자들의 신원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용사(勇士)들”임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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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당신
내 곁에
계시어
당신
나에게
기쁨과 희망
되어주시듯
나
당신 곁에
있어
나
당신께
기쁨과 희망
되어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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