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타기전에 어느 빌라 담장집 장미꽃
장미에 관한 시 모음
장미 / 신재한
내가 키우는 것은 붉은 울음
꽃 속에도 비명이 살고 있다
가시 있는 것들은 위험하다고
누가 말했더라
오, 꽃의 순수여 꽃의 모순이여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저쪽*
나도 가시에 찔려
꽃 속에 들고 싶다
장미를 보는 내 눈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 릴케의 말 중에서
장미차를 마시며 / 정끝별
시쓰는 후배가 인도에서 사왔다며 건넨 장미차
보랏빛 마른 장미들이 오글오글 도사리고 있다
잔뜩 오므린 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건 연두 꽃판이다
아홉 번을 다녀갔어도 후배의 연애는 봉오리째
차마 열리지 못했는데, 그게 늘 쓴맛이었는데
찻물에 마른 장미를 아홉 송이를 띄운다
여름 직전 처음 꽃봉오리가 품었던 목마름은
따뜻한 물에도 좀체 녹아들지 못하고
보라 꽃잎에서 우러나온 첫 물은 연두빛이다
피워보지 못한 저 무궁무진한 숨결
첫 물은 그 향기만을 마신다
어쩌다 아홉에 한 송이쯤은 활짝
오랜 물에서 꽃 피기도 하는데
인도밖에 갈 곳이 없었던 후배의 안간힘도
그렇게 무연히 피어났으면 싶었는데
붉게 피려던 순간 봉오리째 봉인해버린
보랏빛마저 다 우려내고도 결코 열리지 않는
물먹은 꽃봉우리들
입에 넣고 적막히 씹어본다
보랏빛 멍을 향기로 남기는 제 몸 맛처럼
안으로 말린 모든 꽃은 쓰리라
채 피우지 못한 꽃일수록 그리 떫으리라
6월, 넝쿨장미 / 김영자
푸르른 가시 속 봄밤 내 저물던 시간들,
허리 길게 출렁이며 그대 온 몸으로 깊은 샘을
끌어올리자 바람은 부드럽고 햇빛은 정갈하여
꽃은 그리움을 덩굴 채 내어놓네
오랫동안 수런대며 태어나지 않던 꽃들
세상의 아득한 곳에 서 있었던 적도 있었으리라.
깊은 수면 속으로 헤엄치기도 하며
힘찬 지느러미가 달린 그대
맑은 눈빛을 따라 가면 수많은 꽃잎들
넝쿨을 타고 하늘로 올라올라
세상은 온통 붉은 지느러미 출렁이며 흩어지네
푸르른 바다 속, 셀 수 없는 꽃들이 만발했네
장미와 가시 / 김승희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장미공장 / 송종찬
사람에게
한 송이 장미는
풍경이지만
벌에게는
밥벌이를 위해 구슬땀을 흘려야 하는
공장이라네
해가 뜨면
벌들은 작업복을 갈아입고 출근하고
해가 지면
꿀통을 지고 귀가한다네
뙤약볕 아래서
온몸에 꽃가루를 묻히며
겨울을 준비하는 노동
날카로운 톱니가 달린
장미의 생산라인을 생각할 떼
한 방울의 꿀은 신성하다네
비가 내리거나
꽃을 꺾어
공장을 폐쇄할 떼
월급을 기다리는
일벌들의 가족들이여
벌둘의 일터는
향기가 머무는 부지에서부터
시작되고
한 송이 장미는
기름냄새 가득한
공장
넝쿨장미 / 마경덕
봄볕이 등 기대고 간 담벼락, 만삭의 오월 산모들, 설핏 젖꽃판 비치더니 발그레 젖가슴 벌어진다. 휘늘어진 치맛자락 땅에 젖는다. 한나절 벽을 잡고 몸을 뒤튼, 벌겋게 달아오른 앙다문 신음소리, 미끈 불끈 양수가 터진다. 지나가던 바람이 아이를 받아낸다. 산파의 손을 찌르는 가시 탯줄, 좁은 골목에 줄줄이 아이들이 태어난다. 설익은 풋배꼽들, 투명한 햇살에 배꼽이 익는다. 배내똥 묻은 기저귀 담벼락에 널린다.
까치발을 한 젊은 여자, 장바구니에 장미 한 송이를 담아간다. 입양 가는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다산(多産)으로 요란한 골목. 눈부신 출산이다.
장미와 찔레 / 반칠환
경복궁 맞은편 육군 병원엔 울타리로 넝쿨장미를 심어놓았습니다. 조경사의 실수일까요. 장난일까요. 붉고 탐스런 넝쿨장미가 만발한 오월, 그 틈에 수줍게 내민 작고 흰 입술들을 보고서야 그 중 한 포기가 찔레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얼크러설크러졌으면 슬쩍 붉은 듯 흰 듯 잡종 장미를 내밀 법도 하건만 틀림없이 제가 피워야 할 빛깔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은 진 지 오래되었지만, 찔레넝쿨 가시가 아프게 살을 파고듭니다. 여럿 중에 너 홀로 빛깔이 달라도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장미 한 다발 / 이수명
꽃집 주인이 포장을 했을 때 장미는 폭소를 터뜨렸다. 집에 돌아와 화병에 꽂았더니 폭소는 더 커졌다. 나는 계속해서 물을 주었다. 장미의 이름을 부르며
장미는 몸을 뒤틀며 웃어댔다. 장미가시가 번쩍거리며 내게 날아와 박혔다. 나는 가시들을 훔쳤다. 나는 가시들로 빛났다. 화병에 꽂힌 수십 수백 장의 꽃잎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나는 기다렸다. 나는 흉내냈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웃다가, 장미가 끼고 있는 침묵의 틀니를 보았다. 장미는 폭소를 터뜨렸다.
술과 장미의 나날 / 유하
이제 장미는 문을 닫았다, 나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서 한숨짓는다, 축제의 폭죽은 싸늘한 먼지로 사라지고 펄럭이던 혀와 술잔은 어둠의 얼룩으로 메말라 있다. 흩날리는 머리칼, 웃는 얼굴들, 마음의 은밀한 기타통을 울려대던 햇살의 관능적인 손가락, 사랑은 늘 눈빛의 과녁 옆으로 미세하게 비껴나는 나비의 움직임 같은 것이었다, 바랜 꽃잎처럼 떠나버린 여인들의 자리, 그 여불렀다, 맡겨둔 나의 넋마저 영영 싣고 가버린 빛의 노래들 난 희망을 입술에 꿀처럼 처발랐었다 벌떼의 날갯짓, 그 온갖 말들의 황홀한 소란이 끝내 침묵이란 무덤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그러나 이제 장미는 문을 닫았고, 늦은 욕망만이 내 몸에 대롱을 꽂는다 몇 사람은 깨진 술잔처럼 흩어졌고, 일부는 어둠 저편으로 빨려 나갔다, 오솔길 끝에서 노래 없이 난 말한다 그 열애의 지저귐, 노래의 살결을 귀 멀도록 빛나게 한 건 정적의 힘이었음을, 하여 나 지금 장미의 닫힌 문 앞에서 담담하게 입술을 닦는다 오, 희망이여, 나의 벌레여, 오늘 나는 환멸에게 인사하련다 향기의 해골에 기대어 장미는 문을 잠그고, 내 푸른 영혼도 노래를 따라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