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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시작되었던 나무의 일년의 수고가 열매라는 것으로 마지막 압축되어 우리손에 주어지듯,
주님의 33년반의 생애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님은 다락방설교로 요약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를 뭐라고 부르는가 하면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 The Last 강화, 흔히 성서학자들은 그렇게 표현합니다. ‘예수의 다락방 강화’. 그런데 다락방 강화가 13장부터 17장 전체일까요?
요한복음 13장은 두 예식 - 세족예식과 성만찬 예식
요한복음 14장은 다락방 강화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의 비유
요한복음 16장은 성령의 약속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말이 아닌 삶의 모본으로 보여주시며 알려주신 2예식이 나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세족예식과 성만찬 예식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요약한다면 세족예식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타인을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만찬 예식을 통하여 이제 주님께서 오셨던 가장 중요한 복음 중의 복음, 새언약의 비밀을 예식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구약의 모든 예식의 종합이며, 요약입니다.
공간복음에서 끊임없이 말씀하신 피의 새언약을 강조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더불어서 6장에서 언급해 놓았습니다. 왜일까요?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5-57)
요한복음은 새언약의 의미가 성만찬예식을 넘어 우리가 매일 예수를 먹는 경험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시는 것같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경험은 매일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피며 묵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안에서 우리는 매일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살아야합니다. 그 말씀의 분명한 의미를 6장63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은 14장에서 성만찬예식을 통하여 주님의 피의 언약에 더 나아가 그 구원의 감격과 은혜와 감동이 형제사랑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씀해 주십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계명은 새 계명같지만 구약 레위기에서도 언급되어 졌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는 명령을 주시면서 새계명이라 하셨을까요?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네 자신을 사랑함 같이”였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할수 없습니다. 제 몸인 아내 마저도 제 몸처럼 사랑하기 어려운데,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크고 놀라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것은 애시당초 이기적인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불가능한 명령을 주시고, 잘못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게 해 주십니다. 사랑의 영, 성령이 우리안에 계실 때 하늘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안에 사실 때 주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안에 사실 때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 곧 사랑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4-15)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의 궁극적인 의미와 제자의 표식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증거입니다.
성만찬 예식후에 예수님은 정말이지 중요하고 중요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1-3 다시 오실 재림의 약속
요한복음 14:4-15 구원의 유일한 길, 진리, 생명을 소개
요한복음 14:16-26 성령의 약속과 영원한 내주
요한복음 14:27-31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구약은 옛 약속, 이미 성취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죄로 죽을 인간을 위해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 주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새 길을 열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 주님의 오심, 고난, 십자가, 부활, 승천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신약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전 제자들에게 부활, 승천하신 후에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고, 잃었던 모든 것들을 다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재림의 약속이야 말로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고난, 아픔, 눈물은 다 주님의 속히 오심을 간구하는 애타하는 부르짖임입니다.
그런데, 재림의 약속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가 좀 이상합니다.
4절,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 길을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5절에서 도마가 불쑥 묻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은 안다고 하셨는데 도마는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고 그 길도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도마가 모른다는 사실을 몰라서 “너희가 안다”고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은 단순한 현실 사실(Fact)의 기술이 아니라 ‘기대’의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3년 반 동안 직접 가르쳐 오셨기 때문에 ‘너희는 이제 응당 알고 있어야 한다’는 스승의 간절한 기대가 4절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현실적인 영적 상태를 대변하여 도마가 질문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가르침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도마의 질문 때문에 그 유명한 선언이 주어집니다.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헬라어 원문에는 정관사가 모두 붙어 있습니다. 즉,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다(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라는 뜻입니다. 정관사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이미 알고 있는 특정한 대상을 가리킬 때 씁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가르쳐 오셨던 바로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세 단어를 ‘길 → 진리 → 생명’의 순서로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길: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첫 출발은 ‘길(道)’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찾아 나선 사람을 ‘구도자’라고 부르지요.)
진리: 길을 걷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가치가 바로 ‘진리’입니다. (구도자는 진리를 구하는 자가 됩니다.)
생명: 진리를 마침내 온전히 만났을 때 얻게 되는 궁극적인 결과와 열매가 바로 ‘생명’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길(도)’을 찾고, 불교나 유교처럼 ‘진리’를 논하지만, 어떤 종교도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는(득도, 해탈) 사상이나 교훈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통해 생명을 얻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교리와 가르침은 결국 예수라는 인격으로 귀결되어야만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예수께서 도마의 질문에 답하시며 7절에서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이미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빌립이 불쑥 나섭니다. 빌립은 어떤 사람입니까? 계산이 아주 빠른 사람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겠다고 재빨리 돈 계산부터 했던 사람입니다(요 6:7).
이 현실적인 빌립이 8절에서 요청합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좀전에 도마에게 “너희가 길을 안다”고 하셨을 때 도마가 “모릅니다” 한 것처럼, 7절에서 “너희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시니 빌립이 덜컥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응당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기대하셨는데, 빌립의 반응은 그 기대와 너무나 어긋났습니다.
예수님은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의 이 요구는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성경을 깊이 상고하기보다 “꿈에서라도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시면 확실히 믿을 텐데”,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여주면 믿겠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모세가 출애굽기 33장 18절에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고 분명히 선을 그으셨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0절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라고 기록된 장면도, 하나님의 본체를 본 것이 아니라 그 발 아래 사파이어(청옥) 같은 찬란한 광채, 즉 신의 현현(Theophany)의 영광을 묘사한 것에 불과합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선언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온전히 나타내 보이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만 보고도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볼 수 없는 당신 자신을 3년 반 동안 역사적 실존으로 함께 사셨던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통해 온전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온전한 정답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8~9절을 보며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는 사도들과 달리 역사적 실존의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과 성령의 증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둔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무지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어리석은 질문을 통하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 찬란한 본질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말씀속에서 주님을 만나며,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소화시키고, 그 능력, 그 에너지로 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이 은혜와 신앙의 본질을 깊이 묵상하시며, 밥을 먹고 힘을 얻듯,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며 영적 힘을 얻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https://youtu.be/XCq1eNE7HY4?si=JulUdXyCUwqkSXd9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