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83]김유정문학촌 & 구곡폭포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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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김유정문학촌’과 ‘이효석문학관’을 가보고 싶었다. 전국의 <문학관 순례>는 은퇴 후 나의 버스킷 리스트 우선순위인 것을. 마침 아내와 힐링이 필요한 시점에서 양양 비치호텔에서 일박을 하며 하염없이 동해를 바라보다, 돌아오는 길에 불쑥 두 곳 중 한 곳을 들르자고 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더 끌리는 것은 작가 김유정金裕貞이었다. 남춘천IC를 빠지자마자 오른쪽에 음식점 건물이 보인다. 아참 그렇지, 막역한 친구의 ‘양평해장국’ 간판이 크게 보여, 점심을 공짜로 때우고 바쁜 친구와 약간의 얘기도 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김유정 이름 석 자와 소설 <봄 봄> <동백꽃>(생강나무의 방언이 동백꽃이라 한다)은 대부분 아시리라. 앙큼한 점순이의 재미난 사랑이야기는 언제나 황순원의 <소나기>의 윤초시 손녀딸을 생각나게 하지 않던가.
소설 33편과 수필 12편만을 남기고, 폐병으로 29세에 요절한 불운의 작가 김유정(1908-1937). 그가 남긴 수많은 ‘맛깔스러운 토속어’들은 홍명희의 <임꺽정>과는 또다른 맛이다. 우리 단편문학의 백미들이 아니었던가. 문학촌은 제법 운치있게 잘 꾸며놓았다. 누구라도 한번쯤 직접 가 그의 향취香臭를 맡아볼 일이다. ‘김유정이야기집’에서 ‘뽀뽀’라는 단어를 김유정이 처음 썼다는 것을 알았다. “입이나 맞추고 뽀! 뽀! 뽀!”(1933년 ‘산ㅅ골나그네’에서), “오, 우지 마, 우리 아가야 하고 그를 얼싸않으며 뺨도 문태고 뽀뽀도 하고 할 수 있는, 그런 큰 행복과 아울러 의무를 우리는 흠씬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1929년 ‘애기’에서). 그 이전에 펴낸 국어사전에 전혀 올라있지 않은 표제어라 한다. 뽀뽀라는 말을 김유정이 처음 만들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골짜기 물소리를 ‘소살소살 흐르다’라고 ‘소살소살’ 단어를 처음 만들었다니, 작가들은 역시 '언어의 마술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1937년은 우리 문단에 불행한 일이 겹쳤다. 그가 죽은 후 불과 한 달도 안돼 천재작가 이상이 26세로 그 뒤를 이었다. 이상은 말년(?)에 만난 김유정에게 폐병으로 고통받느니 ‘같이 죽자’고 했으나 유정은 거절했다. 김유정의 유일한 문단친구 안회남이 그의 유작이나 유품을 수습했건만 월북을 한 바람에 김유정의 유일한 흔적은 휘문고보 성적표와 그가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을 뿐이다. 김유정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대동법 김육의 10대손), 두 번의 큰 실연失戀과 병마에 시달리는 등 내내 불행했으나, 그가 남긴 단편 33편은 ‘흙 속의 보배’였다. 김유정문학촌은 그가 고향 실레(떡시루의 사투리)을 무대로 쓴 작품들의 내용에 따라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웃음이 비어져 나올 수 밖에 없게 만든 문학촌 안내지도를 보라. 꾸밀려면 이렇게 ‘살아 있게’ 꾸며야 한다. 친근감이 몇 배 더 하며, 그의 작품을 읽고 싶게 만든다. 실제로 어제 기차로 내려오며 <만무방>이라는 단편을 읽으며 또 여러 번 감탄했다. ‘만무방’은 염치가 없이 막된 사람이란 뜻으로, 형제들의 얘기가 너무 가슴이 아팠다. 읽을 수 있다면 34편을 다 읽고 싶었다.
# 김유정문학촌을 둘러본 후 고속도로를 달리며, 강촌역과 구곡폭포 관광지 안내판을 보고 방향을 틀었다. 맨나중 폭포가 있는 골짜기가 아홉 구비인 것같다. 재밌다. 입장료가 1인 2천원인데, 춘천사랑상품권으로 되돌려준다. 내려와서 커피나 음식을 드시라는 뜻인 것같은데, 취지가 참 좋다. 아무튼 구곡폭포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왕복 40분. 또 하나 재밌는 것은 한 구비마다 ‘구곡혼九曲魂’을 담아가라면서 ‘ㄲ’자 한 단어씩을 적어놓았다. 첫 번째 구비는 ‘꿈’Dream이었고 두 번째 구비는 ‘끼’, 아내와 영어로 끼를 뭐라고 써놓았을까, 내기를 했다. talent라 생각했는데, ability이다. 능력과 재능은 조금 뉘앙스가 다른 듯했지만, 세 번째 구비의 메인테마는 ‘꾀’였으며 영어로 wisdom, 이것은 그런 것같다. 네 번째가 ‘깡’인데 courge(용기)를 맞췄다. 5번째 ‘꾼’은 영어로 뭐라 할까? 나는 expert(달인, 전문가)를 생각했는데, professional이었고, 6번째 ‘끈’은 relationship을 둘 다 맞췄다. 7번째 ‘꼴’ shape도 맞췄으나 8번째는 난감했다. ‘깔’을 어떻게 번역할까? colorful를 생각했으나 답은 ‘delicate hue’ 의외였다. hue 단어가 낯설어 즉석에서 찾으니 ‘색조나 경향’이란다. ‘빛깔이나 맵시가 곱고 산뜻함’이라는 우리말 풀이가 더 그럴 듯했다. 마지막이야 당연히 ‘끝’일텐데, end는 어쩐지 밋밋하다. 풀이를 ‘여정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으니 end & begin이라 써놓았으면 좋았겠다. 아무튼, 어느 공무원의 제안이었는지는 몰라도 이런 식의 아이디어는 짱이다. 고속도로의 나들목에 색깔표시를 하여 안내하는 '빅 아이디어'처럼 말이다. 둘이 손 잡고 영어를 맞춰가며 숲길을 걷는 이 재미를, 이 망중한을 어디에서 즐길 수 있으랴. 숲길을 걸으면 좋은 이유 여섯 가지를 통계를 대가며 크게 만들어놓은 안내판이 흥미로워 찰칵도 했다. 유심히 한번 들여다보시라. 걷고 싶을 것이다. 우리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걷자구나.
또 하나 더 재밌는 것은, 구곡폭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아닐까 싶은 ‘문배마을’이 있다하여 허위적허위적 올랐다. 무릎이 좋지 않은 아내는 중도포기하고, 난 궁금하여 끝까지 올라 마을을 찾았는데, 봉화산 정상 바로 밑 조금 넓은 곳에 9가구가 살고 있고, 서너 가구는 도토릭묵과 동동주 등을 파는 곳이다. 2백여년 전에 어떻게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 마을을 이뤘을까? 한국전쟁이 일어난 줄도 몰랐다는 오지중의 오지. 허나 전기와 수도, 통신시설도 갖춰져 있다. 지리산 청학동보다 더 신기했다. 왕복 1시간이면 족한 거리이지만, 제법 험했다. 먼저 내려와 카페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만났는데, 여행을 좋아한다는 카페주인이 여성들이 혹하게 카페 데코레이션을 잘해놓았다. 인도풍의 원피스를 만지작거리는 아내에게 호기롭게 하나 사주었더니 매우 기뻐한다.
아무튼, 평일임에도 양양고속도로 체증과 서울 입성은 힘이 들었다. 하지만, 남춘천IC 친구의 양평해장국집과 김유정문학촌-구곡폭포를 들러 온 망중한忙中閑은 너무 좋았다. 다음엔 <메밀꽃 무렵>의 ‘이효석문학관’을 가기로 약속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기차 속에서 <만무방>에 이어 <메밀꽃 무렵>도 내처 읽었으며, 은희경 작가의 <빈처>라는 단편소설을 읽으며, 새삼 젊은 시절 ‘아내를 독신’으로 만들었던 나를 되돌아보며 반성을 많이 했다. 나의 <문학관 순례>는 계속되리라.
첫댓글 이제 동해가 아니라 일본해라는데?
전 정권에서는 무조건 욕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무조건 좋다고 역성드는 사람도 있잖아~ ㅋ